인기
"이는 모함입니다, 위원장 동지."
일찍이 뒤마 장군과 처음 만났던 카페에서, 이번에는 부동자세를 취한 나폴레옹과 마주했다.
아직 젊고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가.
내가 낌새를 눈치챘다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게 군인으로서는 몰라도 정치가로서는 한참 모자란다는 게 훤히 보이는 듯했다.
"제가 어찌 동지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파리로 막 상경하여 오도 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을 적에 동지께서 저를 눈여겨보시고 곁에 두셨던 그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허, 침착하시게. 내가 지금 동지를 추궁하려는 것 같은가?"
"하오나···!"
"그러게 침착하래도."
진짜로 추궁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여기 오기 전에 푸셰한테 요즈음 나폴레옹이 만나고 다닌 사람들을 내용에 상관없이 리스트만 쫙 뽑아달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뭐, 아주 화려하시더구만.
에베르 같은 상퀼로트 진영부터 시작해서 콩도르세 후작 같은 혁명적 부르주아지에 그냥 돈 많은 유대인들까지.
대놓고 꼬투리 잡힐 반동파 인사들을 제하면 밑바닥 상퀼로트에서 고위급 귀족까지 아주 다채롭더라고.
하기야 핵 추진 로켓 달고 화성까지 다녀왔으니 헛바람이 들만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이번엔 너무 경솔한 처신이었다.
옆에서 떠받들어주니까 이게 독인지 약인지 구분도 안 하고 막 주워 먹었으니 탈이 나지.
[글쎄, 저게 과연 떠받들어준 걸까?]
뭐, 본인이 우쭐해서 나름대로 제게 힘을 실어줄 사람들을 열심히 찾아다닌 것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탓할 생각은 없다.
상대는 그 천하의 나폴레옹이니까.
그동안이야 아무런 실적도 실력도 보여주지 못한 미운 오리 새끼일 뿐이었으나, 이젠 슬슬 내 아랫사람이 아니라 대등한 동지이자 거래 상대로서 대할 순간이 왔다.
결국 그것뿐이다.
"벌써 1년 넘게 휴가 한번 안 썼더군."
그만큼 출세욕이 강했고, 또 어떻게든 내 곁에 머물러 있어야 출세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던 거겠지만.
스슥.
"내 명의로 3달간의 포상 휴가를 내리겠네. 모처럼 고향이라도 다녀오게나."
"···동지."
"그리고 혹시 정치에 뜻이 있다면 내게 말하지 그랬나. 나도 어차피 천년만년 수상 노릇 하지는 않을 텐데."
투정을 부리듯 가볍게 나폴레옹에게 휴가서를 건넸다.
얘가 정치감각이 있으면 한동안 얌전히 있으라고 한걸 알아들을거고, 헛바람이 들었으면 지금처럼 아무나 만나고 다니겠지.
전자라면 상관없지만 후자라면 조만간 자멸할거다.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지 편지해도 좋네. 아니면 날 찾아와도 좋고. 우리도 슬슬 그 정도 인연은 쌓지 않았는가?"
"물론입니다, 동지.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꾸벅.
나폴레옹이 고개를 조아렸다.
가볍게 목을 까딱이는 일상적인 인사가 아닌, 이마를 땅에 처박을 듯이 허리를 굽히는 절에 가까운 예법이었다.
아마 제 나름대로 그동안 거둬주고 키워준 데에 대한 감사를 표한 거겠지.
앞으로 저 천하의 나폴레옹이 군례가 아니라 고개를 조아릴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렇게 생각하면 확실히 나도 출세하긴 했구먼.
어무이, 나 나폴레옹한테 절받았어!
[그래서, 정말로 놓아줄 작정인가? 차라리 이참에 좌천시키건 해야-.]
그럴 거면 전략 나폴레옹을 투하하지 말았어야지.
이미 전 유럽이 나폴레옹의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괜히 감정 상해봤자 우리만 손해다.
차라리 이렇게 지난 세월 언제나 곁에 두고 함께 다니던 오른팔에 장기휴가를 내줌으로써 나폴레옹이 독립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도 변함없이 은인이자 정치 스승으로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게 맞지.
그리고 죽이거나 없애기에 전략 나폴레옹은 너무 아쉬운 카드다.
함부로 남용했다가는 진짜로 황제 나폴레옹으로 승급해버리겠지만, 반대로 무슨 일이 터졌을 때 가장 든든하고 믿을 수 있는 무적핵이기도 하니까.
[···자넨 가끔 보면 너무 무신경하단 말이야. 심지어 이번 건 우리 모두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어허, 차라리 사내대장부답고 대담하다고 불러주시라.
내가 발탁하고 키워준 놈이 좀 출세했다고 바로 딴생각하는데 이렇게 시원하게 독립시켜주는 놈 있으면 어디 나와보라고 해!
눈꼴 시고 배 아파서 온갖 꼬장이란 꼬장은 다 부리다가 퇴물 되는 놈들 내가 한두 놈 본 줄 알아!
철컥.
"위원장 동지,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예. 라파예트 원수께서 직접."
···그런데 생쥐스트 이 친구가 또 한창 나폴레옹과 감동의 이별을 하고 있는데 재를 뿌리네.
설마 일부러 그런 건가?
[그야 당연히 일부러지.]
하기야, 저 질투로 타오르는 동공만 봐도 일부러라는 게 훤히 보인다.
생쥐스트를 포함해서 오늘 나폴레옹과 이 마담 카미유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걸 알고 있는 사람이 한 손에 꼽기도 하고.
"흠, 라파예트 원수께서 날 찾으신다면야 어쩔 수 없지."
일부러 다짜고짜 라파예트 이야기를 꺼낸 것도 뒷말이 나오지 않게 선수를 친 거라고 봐야겠지.
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생쥐스트는 득의양양해서 우쭐거리고, 나폴레옹은 표정 관리가 안 되어서 미간에 주름이 빡 잡히는데-난리도 아니구만.
[이러다 저 둘이 결투 신청하는 거 아닌가?]
누가 아니래.
솔직히 생쥐스트는 쓰러져도 별문제 아닌데 진짜로 그랬다가 나폴레옹이라도 쓰러지면 대형 사고다.
슬슬 둘 중 한 명은 내보내야지.
"나폴레옹 동지는 어떻게 하겠는가. 혹시 불편하다면-."
"아뇨, 위원장 동지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함께 경청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놈이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만드네.
말하면서도 내가 아니라 생쥐스트를 노려보고 있는 게 어지간히 빈정이 상한 모양이었다.
"절대로 방해가 되지는 않겠습니다. 모쪼록, 허락해주십시오."
"흠, 그렇다면야."
뿌득.
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니까 이번에는 거꾸로 나폴레옹이 우쭐거리고 생쥐스트가 이를 갈았다.
아니 언제까지 이럴거야 대체.
쾅.
"이봐, 자-뭐야. 선객이 있었군. 어쩐지 오래 걸린다 했네."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오시는 우리의 라파예트 원수.
덕분에 묘한 긴장 상태가 해소된 건 좋기는 한데, 저 양반도 참 자기 잘난 맛에 사는구나.
지도 나름 원수 먹었다고 아직도 공석이건 사석이건 구분 없이 내게 하대하고 천하의 나폴레옹조차 하대하는 게 참 보면서도 믿기질 않는다.
[저렇게 신경 줄이 단단하니까 자존심 좀 긁혔다고 곧장 의회와 기 싸움을 할 생각을 한 거 아니겠나.]
···그렇네?
아니 이게 이렇게 이해가 되네 거참.
"뭐,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이야기하십시오. 따지고 보면 나폴레옹 동지가 선객이고, 본인도 도중에 끼어들지는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불편해서 그렇네."
"···흠, 혹시 다 같이 들으면 안될 만큼 비밀스러운 이야기인 겁니까?"
"자네에겐 동지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아니야."
[맙소사.]
오, 주여.
"그래, 차라리 자네가 잠시 밖으로 나오게. 우리가 자리를 피해주는 편이 훨씬 쉽겠군."
···어질어질하다.
아니 차라리 나폴레옹이 내 옆에서 수발이나 들고 있던 시절이면 모를까, 이미 전 유럽이 이름을 아는 유명 인사가 되었는데도 면전에서 이런다고???
나 정도면 라파예트가 진짜로 엄청난 호의를 베풀어주고 있었던 거구나.
설마 저 양반 섭정이나 국왕 앞에서도 말놓고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거 아니겠지?
[에이 설마···라고 믿고 싶군.]
지금 너도 말하면서 확신은 없으면서 뭔.
"그럼 제가 여기서 들은 이야기 그대로 떠벌리고 다니면 되겠습니까?"
"뭐라고?"
"막시밀리앙 동지와 단둘이서 사담을 주고받는데 원수께서 다짜고짜 찾아와 절 무례하게 내쫓았다고 말입니다."
한데, 이제는 저 나폴레옹도 라파예트에게 꿀리진 않는다.
절 내쫓으려는 라파예트를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이 흘겨보더니.
"아시다시피 남의 뒷담화는 파리에서 제일가는 유희 거리지요. 이번 일로 과연 어떤 낭설들이 돌게 될지 혹시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허, 우리 친구 옆에서 알랑방귀나 뀔 줄 알던 코르시카 촌놈이 이젠 이 라파예트와 맞먹으려 드는군."
"글쎄요, 그 반대 아닐까요?"
라파예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허리춤의 기병도에 손을-에헤이 이 사람이.
"그만."
진짜 피볼일 있나.
마초이즘도 정도껏이지 도대체가 이 프랑스 친구들은 말로 문제를 해결하는 법이 없어요.
"적당히들 하십시오. 진짜로 제가 모조리 내쫓는 꼴 보고 싶어서 이러십니까? 여긴 엄연히 마담 카미유의 사업장이라는 거 잊지 마십시오. 그 이상하면 군사재판이 아니라 혁명재판소에 회부할겁니다."
"···쯧."
그제야 라파예트와 나폴레옹이 각기 한 걸음씩 물러났다.
"풋."
아니 그런데 이 나보 놈은 라운드 투할 일 있나.
또다시 라파예트의 눈이 뒤집히려고 하길래 선수를 쳤다.
"이제 그만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수상관저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절 직접 찾아오실 정도면 뭔가 중요한 일이었던 거 아닙니까?"
"중요한 일?"
라파예트가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까딱였다.
"아아, 중요한 일이었지. 일전에 네덜란드에서 우리에게 화해를 청하지 않았던가?"
"그래서요?"
"덕분에 암스테르담발 연락선을 빌려쓰게 되면서 마침내 조지와 연락이 닿았네."
그래서 그 조지가 누구요.
현 영국 국왕 조지 3세부터 시작해서 영미권에 조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둘인 줄 아나.
라파예트가 설명해줄 때까지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더니 오히려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팍을 두드리며 덧붙이기를.
"조지 워싱턴. 미합중국의 대통령 말이네. 그 밖에 내가 알고 지낼만한 조지가 또 있는가?"
헉.
[자네가 생각하는 그 합중국을 생각하면 큰코다칠 텐데.]
그거야 알지.
그냥 새삼스럽게 아직 조지 워싱턴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이다.
예카테리나 대제도 살아있고, 조지 워싱턴도 대통령 재직 중이고.
진짜 내가 옛날옛적에 떨어지긴 했구나.
"그런데 이 친구가 요즈음 영 난감한 상황에 부닥쳤다고 하지 뭔가."
"구체적으로는요?"
"무역도 엉망이 되고, 바르바리 놈들도 극성맞고, 국내도 난리고. 뭐 아주 이것저것 난리라더군. 해서 내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없냐고 하길래 이렇게 자네를 찾아와봤네."
어···.
[···지금 이 난리를 피우면서까지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러게.
뭐 나름 대국 관계니까 당연히 수상인 내게 가져와야 하는 안건은 맞는데, 이거면 그냥 외무위원회 통해서 공식적인 절차 밟으면 되는 거였잖아.
구태여 나폴레옹과 감동적인 이별하던 와중에 쳐들어왔어야 했나?
당장 생쥐스트고 나폴레옹이고 얼굴이 썩어들어가고 있는 게 다들 할 말 많지만, 꾹 참고 있는 모양새다.
"우린 지금 물건이 모자라서 난리고, 그 친구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나니 당장 내다 팔 곳이 없어서 난리라잖은가. 무엇보다 아메리카 합중국은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잠재력도 대단한 나라일세. 이건 장차 10배, 아니 그 이상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거래야. 모르겠나?"
아니 그러니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깐요 이 양반아.
하여튼 틀린 말은 아니다.
조지 워싱턴이 현직 대통령일 정도면 지금 미국은 막 건국된 응애라는 거고, 그럼 저쪽에서 가장 위태롭고 절박할 때 빚을 지워둘 수 있겠지.
이 시대의 미국이 국력은 보잘것없어도 워낙에 풍족하고 풍요로운 지역이니 현 프랑스의 고질적인 소비재, 사치재 고갈 해결에 큰 힘이 되어줄 거고.
다 좋긴 한데 말이야.
"그래서 누가 대서양을 건너 워싱턴 대통령을 찾아가서 협상을 할 겁니까? 설마 원수께서 지금 당장 자리를 비우시겠다는 건 아니시겠지요?"
"뭐,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파리를 너무 오래 비워두면 더 큰 근심거리가 생길 것 같아서."
라파예트가 나폴레옹을 오른 검지로 가리켰다.
[이 양반도 참 적을 많이 만들 인간상이군.]
누가 아니래.
한데 그 라파예트가 이번만큼은 자신 없다는 듯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기를.
"그, 자네 혹시 탈레랑 주교라고 들어봤나?"
···아니 그 뻐꾸기가 왜 여기서 튀어나와?
***
미합중국.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달그락.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줄여서 탈레랑이 홀로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천하의 라파예트가 내게 청탁이라는 걸 해오다니."
그것도 이렇게 공손하고, 절박한 어조의 수필 편지마저 보내면서 말이다.
그만큼 나폴레옹이라는 애송이가 위협적이었던 거겠지만, 솔직히 아직도 현실감이 없었다.
라파예트 본인에게 있어서 이 미합중국이 뜻깊고 의미 있는 나라라는 것과는 별개로 신성로마제국을 격파하며 한창 국운을 떨치고 있는 조국이 관심을 보일 만큼 중요한 나라로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탈레랑 개인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아무렴 혁명 초기에 가톨릭교회에 파문당하여 쫓기듯이 미국으로 떠난 탈레랑이 이제 와 귀국하려 한다고 해봐야 누가 아무런 실적도 없는 그를 요직에 발탁해주겠는가?
그나마 라부아지에 정도가 함께 도량형 통일을 위하여 입을 맞추었던 인연을 높이 사서 등용해줄 수도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라부아지에는 세리였던 전적 탓에 누군가의 뒷배가 되어줄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고, 탈레랑 본인도 학자로서 이름을 날릴만한 인재는 아니었다.
결국 이번 협상에서 제 실력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탈레랑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계속하거나, 귀국해서도 한참을 요직에 오르지 못하고 한직을 전전하는 신세가 될 위험이 컸다.
'그렇게는 안 되지.'
절대로 안되고말고.
아무렴 이러려고 주교 자리까지 반납할 각오로 혁명정부를 예찬했던가?
이대로 천하의 탈레랑이 무너질 수는 없었다.
끼익.
"이제 그만 가시렵니까?"
각오를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오늘 그를 초대했던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찼다.
워낙에 성품이 고약해서 적이 많은 친구라던데···글쎄.
탈레랑이 라파예트의 추천서를 들고 나타나 미국 각료들을 들쑤시고 다니는 와중 그에게 실례되거나 심기에 거슬리는 소리를 한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뇨. 그저 취기가 돌길래 잠시 걸을까, 해서 일어났을 뿐입니다. 적어도 동이 틀 때까지는 어울려 드릴 테니 장관께서는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혹시 음식이 맞지 않으셨나 했지요."
"핫핫핫!!!"
탈레랑은 답하는 대신 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물론 어지간한 요리들로는 미식가 탈레랑을 만족하게 할 수 없기도 하지만, 애초에 크롬웰의 저주를 짊어진 족속에 뭘 기대한단 말인가?
새삼 조국 프랑스로 반드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되새기며 탈레랑은 급히 화두를 돌렸다.
"장관님께서는 이번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재무장관이니 당연히 관세와 무역협정이지요. 유럽에서 제일가는 인구 대국인 프랑스와의 거래가 활성화된다면 작금의 경제위기쯤이야 무슨 대수겠습니까."
"이런, 그렇다면 큰일이군요. 이렇게 장관님께 큰 선물 보따리를 드렸다간 저도 파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영 미국 땅에 발이 묶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곧 해밀턴이 그토록 원하던 모든 것을 얻게 되리라는 암시였다.
그러니 괜히 영국의 그늘 아래로 돌아갈 생각 말고 동맹으로서의 의리를 지켜달라 부추긴 것이다.
아무렴 미국과 프랑스 양국은 엄연히 지난 1778년 통상동맹조약에 근거하여 신대륙 권역 내에서 전쟁발발시 서로를 보호할 의무를 가진 군사동맹 관계였으니까.
"파리라."
하지만 해밀턴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되레 탈레랑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대사님께서는 현 파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너무 정치적인 질문인 것 같군요."
"아, 실례했습니다. 그럼 로베스피에르 수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더 정치적인 질문이잖아!!!
"어려운 질문입니다."
차마 언성을 높이지는 못하고, 탈레랑은 최대한 머릿속의 어휘를 가다듬으며 혹시 오늘의 사담이 새어나가더라도 아무 문제 없을 대답을 골랐다.
"누구보다 서민적이면서도 귀족적인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순적이군요."
"다수의 지지를 등에 업고 그 자리에 올랐으나 다수결에 휘둘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계시니까요."
솔직히 탈레랑으로서는 이럴 거면 그냥 남들처럼 제한선거권을 지지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즉, 계몽된 이로서 계몽되지 못한 다수를 올바른 길로 계도하고 있다는?"
그 어중간한 설명이 외려 해밀턴에겐 마음에 와닿았는지 눈동자를 빛내기 시작했다.
물론 탈레랑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는 너무나도 정치적인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