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지애나
필라델피아.
"아, 안심하십시오. 파리는 절대로 이 사.소.한 위기에 혈맹 미국을 휘말려 들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탈레랑이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떠올리며 덧붙였다.
남북미를 합하여 신대륙의 과반수를 점유한 대국 스페인과의 외교적 위기를 사소한 충돌이라 강조함으로써 지난 전쟁 이래로 정점을 찍은 국운과 국력을 두루 과시하려고 한 것이다.
"통상동맹조약은 어디까지나 영국을 겨냥한 것이지 우리 프랑스의 옛 동맹 스페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지요. 충분히 이해하고 말고요. 설령 필라델피아가 이번 사안에서 중립을 지킨다고 한들 파리는 이를 트집 잡을 생각 따윈 없습니다."
아무렴 처음부터 그렇게 협의했었으니까.
이제 와서 급히 몇 글자를 덧붙이지 않는 이상 프랑스가 미국에 아쉬운 소리를 할 이유도, 반대로 미국이 프랑스를 도우려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그렇다면 하다못해 유사시에 프랑스군을 위하여 미시시피강의 통행권을 제공해드리겠습니다."
국무장관 토머스 제퍼슨의 다급한 모습만 보아도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에게 주도권이 있는지야 명백했다.
평소 그가 미국 내 대표적인 친 혁명파임을 생각하면 이 또한 맥락상 있을 수 없는 제의는 아니었지만.
"마침 루이지애나는 우리나라와 바로 이웃한 지역이잖습니까. 만일 귀국에서 루이지애나 탈환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후방 기지가 될 것입니다. 또, 미시시피강은 아시다시피 루이지애나를 가로지르고 있으며-."
"아, 괜찮습니다."
그게 탈레랑이 제퍼슨을 배려해줘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애당초 얼마 전 통상동맹조약 완화를 주도했던 게 바로 이 토머스 제퍼슨과 민주공화당이었으니까.
친 혁명파고 나발이고, 파리에 알기 쉬운 공훈을 자랑해야만 했던 탈레랑을 얼마 전 곤란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을 용서해줄 만큼 탈레랑은 좋은 사람이 못되었다.
'애당초 이 친구들은 그놈의 노예는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물론 프랑스 또한 얼마 전까지 노예제를 애용해왔으니 남 말할 처지는 못되긴 하는데.
그 노예제 때문에 한창 승승장구하면서 기세를 올리고 있는 프랑스와의 군사동맹까지 꺼릴 정도라니 탈레랑으로서는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뭐 지들 딴에는 남부 주들의 생업 때문이라는데, 그래서 그들 프랑스가 영국 몫까지 사주겠다고 약속해줬잖은가.
애초에 노예농장이고 나발이고 프랑스가 물건을 사주지 않으면 다 불태우거나 국내에서 책임지고 소비해야 할 놈들이 그놈의 노예제 때문에 프랑스와의 동맹조차 마다할 지경이라니.
아무리 봐도 우선순위가 뒤집힌 거 아닌가?
비록 탈레랑이 미국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거 아니었으나, 남부 주의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노예노동이 필요한 게 아니라 노예제를 옹호하기 위하여 경제를 핑계 삼은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머릿속에서 가시지를 않았다.
"귀국의 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말고요. 그래서 얼마 전 통상동맹의 이행조건을 크게 완화하지 않았습니까? 머지않아 우리 막강한 혁명군이 마드리드에 당당히 개선하여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스페인 왕국군을 무찌르고 스페인 공화국 건국을 선포할 테니 그리 심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그건-."
이번에야말로 제퍼슨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야 앞서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상대로 보여준 모습을 생각해보면 마드리드 함락이야 시간문제일 뿐 저들에겐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실력이 있었으니까.
물론 요즈음 젊은 영웅 나폴레옹이 승전을 기념하여 장기휴가에 나섰다는 소문이 자자하긴 하지만, 어차피 전쟁이 시작되면 파리에서도 가장 먼저 나폴레옹부터 복귀시킬 게 뻔하잖은가.
대서양 건너 신대륙까지 대군을 파병할 시간에 그냥 스페인 본토를 휩쓸어버리겠다는 너무나 타당한 탈레랑의 필승전략 앞에서 제퍼슨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낙담하여 고개를 떨구는 것뿐이었다.
"다만-."
그러자 탈레랑이 슬며시 운을 뗐다.
적당히 뜸을 들였다고 확신한 것이다.
"루이지애나 수복 이후의 식민 경영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건설적인 논의를 진행해볼 수도 있겠군요."
"식민 경영이라면-."
"가령 교역이라던가, 자원개발 같은 소소한 문제들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루이지애나는 절대왕정 시절부터 황열병 문제로 식민 경영에 골치를 자주 앓았던지라. 믿을 수 있는 동맹이 후원자가 되어준다면 파리도 조금이나마 근심을 덜 수 있겠지요."
그제야 제퍼슨의 미간이 조금이나마 펴졌다.
비록 이번 루이지애나 영유권 분쟁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겠지만 하다못해 간접적으로 투자하거나 이주민들이 오가는 식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있을 테니 비로소 남부주들에게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좋아, 걸려들었군.'
그리고 그것이 탈레랑의 노림수였다.
비록 그가 파리를 등진지 5년째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때 국내 사정을 생각해보면 벌써 파리에게 대서양 건너의 큼지막한 식민지를 경영할 여력이 있을 리가 만무한바.
어차피 루이지애나를 반환받은 뒤엔 식민 경영과 개발을 위해 미국에 어쩔 수 없이 아쉬운 소리를 하게 될 걸 풍토병을 핑계 삼아 마치 대단한 양보나 배려라도 해주는 양 포장한 것이다.
아무렴 대서양 건너의 신생국가 미국이 현 프랑스가 겉만 그럴싸한 속 빈 강정이라는 걸 무슨 수로 알겠는가?
저들이 보는 프랑스는 유럽의 육군 대국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을 연달아 격파하고 혁명의 심장이자 기수로서 한창 기세를 올리는 강대국일 텐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탈레랑 대사님."
"별말씀을요. 같은 혁명동지 아닙니까."
뻔한 너스레였다.
하지만 근거 없는 동지 타령은 아니었다.
탈레랑처럼 냉소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저 벨기카 공화국의 앙리처럼 미국독립전쟁을 미국혁명으로 부르며 미국에서 프랑스로 혁명의 계보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보는 부류들도 있었으니까.
당장 미국에서도 제퍼슨이 그 대표격인 친 혁명파 인사였고.
"유럽은 그동안 극소수의 자유를 위하여 보편적 다수가 불합리한 노예노동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압제자들의 궤변을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용인해왔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만 비로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노예를 어찌 자유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장차 파리는 이 압제자들의 궤변을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근절시킬 것입니다. 그리하여 누구도 부조리하게 희생당하지 않고, 타인의 희생에만 기대지 않고 오롯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혁명동지로서 필라델피아 또한 파리의 역사적 혁명 과업에 함께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이 장광설을 마지막으로 탈레랑은 홀가분하게 자리를 떠났다.
탈레랑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와중에도 제퍼슨은 끝내 긍정적인 답변을 돌려주지 않았다.
다만 상투적인 인사치레를 늘어놓으며 적당히 둘러댔을 뿐.
그 사실이 외려 저 제퍼슨이라는 사내가 탈레랑의 연설을 정확하게 이해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런 지혜롭고 의기 있는 친구까지 노예 지지자라니."
말세로군.
관저를 떠나며 탈레랑이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혹여 이 탓에 전권대사가 국무장관을 흉보았다는 식으로 낭설이 번질지도 모르겠으나, 그런다고 탈레랑이 겁을 집어먹을 이유는 없었다.
그야 직원 중 아무나 듣고 소문내라고 한 말이었으니까.
아무렴 미국인들이라고 바보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공교롭게도 통상동맹조약을 완화하자마자 곧장 이웃 루이지애나에서 영유권 분쟁이 터졌는데 너무 성급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있는가.
영국이 상대라면 몰라도 스페인이 상대라면 프랑스가 유럽에서 일방적으로 왕국군을 쓸어버리는 동안 미국군은 공짜로 루이지애나를 빈집 털이할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그놈의 노예제만 신경 쓰다가 손쉽게 영토를 확장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으니 저 노예주들 사이에서도 한동안 이를 외교 참사라고 맹비난하며 야단법석이 터질 게 뻔했다.
탈레랑의 혼잣말은 거기에 기름이나 한 숟가락 더할 뿐이고.
'그나저나 그 로베스피에르라는 친구가 눈치 하나는 좋구만.'
그가 파리에 머물던 시절 인재 창고를 생각해보면 저 의욕만 앞서는 정치동아리 놈들이 탈레랑의 암시를 눈치채줄 거라는 자신은 없었는데.
일부러 구석에 숨어있던 목화 관세 문제를 첫 줄로 끌어올리고, 이것도 몰라보면 좀 더 직접적으로 남부의 노예 논쟁을 부각해볼 작정이었는데 목화 하나만으로 모든 사정을 꿰뚫어 보고 여기까지 탈레랑에게 힘을 실어주니 오히려 기쁘기보단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무렴 본국에서 루이지애나 반환 카드까지 꺼내 들어줬으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성과로 보은해줘야지 않겠는가.
'그런데 솔직히 영국 놈들이 여기 끼어들기 시작하면 나도 자신 없단 말이지···.'
물론 어지간해선 영국이 숙적 스페인을 도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이 바로 그 어지간하지 않은 상황이잖은가?
아직은 벨기카부터 시작해서 이래저래 주고받은 게 있다 보니 직접적으로 충돌할 일은 드물었지만, 마드리드에서 배짱을 부리고 진짜로 무력 충돌까지 벌어지게 된다면 천하의 영국이 얌전히 있을 리가 없는바.
제퍼슨에게 기세 좋게 허세를 부린 것과는 달리 제한 시간이 촉박한 탈레랑도 썩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제기랄, 이러다가 마드리드 공사만 주목받게 생겼군."
차라리 진짜로 미국인 민병대들 부추겨서 루이지애나 총독부의 항복을 받아올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탈레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렴 스페인도 명색이 내로라하는 식민열강인데 일개 민병대 따위에게 밀릴 리가 있는가.
지금으로선 탈레랑이 제 선에서 끝내려 한 일을 영리하게 부풀린 파리의 교활함을 탓하면서도 다시 로베스피에르의 회답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스페인 마드리드.
"어···."
스페인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4세가 한참을 뒷머리를 긁적거리다 되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프랑스에 루이지애나를 반환해야 합니다."
"왜 반환해야 한다는 건데?"
"폐하. 이야기가 안 끝납니다."
그리고 지금 이악물고 버틴다고 지킬 수 있을 것 같냐.
총리 마누엘 데 고도이가 이를 악물었다.
하기야 이러니까 한창 일해야할 시간에 사냥에만 열중하고 있던 것이겠지만.
애초에 왕권신수설을 신봉한다는 놈이 그 신성한 왕권으로 정치를 할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제아무리 통치를 엉망진창으로 해도 누구도 날 내쫓을 수 없다! 라면서 사냥만 주야장천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렇다고 사냥을 겸하여 군대를 조련한 것도 아니고, 장교들과 친목을 다지며 친위세력을 육성한 것도 아니고 진짜로 온갖 정치적인 사안은 총리와 각료들에게 떠넘기고 저는 주구장창 숲에 처박혀서 사냥만 하고 있었다.
그럼 이게 원시 수렵인이지 무슨 얼어 죽을 식민열강의 국왕이라는 말인가.
이럴바에야 차라리 영국처럼 헌법과 제대로 된 의회를 만들던가, 그건 곧 죽어도 싫다며 절대군주를 고집하니 대신들로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늙어갈 수 밖에 없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영토할양이라는 중대한 사안이 아니었으면 그냥 언제나처럼 사냥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던가 알아서 날인하고 끝냈지 일부러 사냥터까지 찾아올 생각도 하지 않았으리라.
이 국왕이라는 놈은 위대한 개혁군주였던 아버지 카를로스 3세의 발톱 때에도 미치지 못하는 암군이요, 폭군보다 더한 무위지치를 실현한 파업군주였으니까.
이 국왕으로서도 남편으로서도 무능한 놈 덕택에 외로움을 감당하지 못한 왕비를 제 절륜함으로 만족시켜 스물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총리에 오른 고도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폐하, 지금 유럽대륙의 패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야···전쟁에서 이긴 프랑스 아닌가?"
"그렇사옵니다. 아조의 동맹 프랑스이옵니다."
"어, 동맹? 그렇지만 저놈들은 폭도-."
"신성로마제국을 무릎 꿇린 이들이 어찌 폭도란 말입니까."
슬슬 저쪽에서 동맹이 아니라고 부정해도 아무튼 아직은 부르봉 왕조니까 동맹이라고 우겨야 하는 판인데.
"바야흐로 온 유럽이 젊은 영웅 나폴레옹을 부르짖고 있사옵니다."
그래, 마치 이 스페인의 젊은 영웅 마누엘 데 고도이처럼.
고도이는 자아도취 하여 언성을 드높였다.
"한데 그까짓 식민영토가 무슨 대수겠습니까? 나폴레옹의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프랑스와 힘을 합친다면 능히 아조는 장차 전 유럽을 발치에 무릎 꿇릴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탈리아를, 마우레타니아를 재회복하고 예루살렘의 수호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어···."
글쎄,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아닌 것 같은데.
카를로스 4세는 고도이를 말려야 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으나, 이내 포기해버렸다.
괜히 언쟁하기 귀찮았으니까.
그동안 고도이가 왕비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걸 내심 알면서도, 저 두 사람이 왕명을 사칭하여 스페인 국왕의 신성한 절대왕권을 마구잡이로 남용하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귀찮다는 이유로 그냥 방관해버렸듯이.
이번에도 똑같이 카를로스 4세는 하루빨리 그가 좋아하는 사냥터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유로 그의 아내를 도둑질한 고도이의 야심을 긍정해주기로 했다.
"그것참 대단하구만."
"그렇지요?! 역시 폐하십니다! 가톨릭 신앙의 수호자! 신대륙의 정복자! 그리고 장차 성지 예루살렘의 보호자가 되실 분!"
고도이가 과장되게 허리를 조아렸다.
"카를로스 4세 폐하께 그리스도와 성모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스페인 만세! 국왕 폐하 만세!"
"···흠."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 지금 또 사기 치고 있는 것 같은데.
카를로스 4세는 잠시 말릴까 생각했다가 또다시 그만뒀다.
그래서 지금 스페인 홀로 프랑스에 맞서는건 모로봐도 자살행위였을 뿐더러, 이 압도적 열세를 극복할 묘안을 생각하는 것도 귀찮았으니까.
"그럼 짐이 어떻게 해주면 되는 건가?"
"프랑스와의 수교를 허락해주시면 충분합니다."
"간단하구만."
쿵.
언제나처럼 국왕은 총리가 내민 서류에 얌전히 결재도장을 찍었다.
어차피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굴욕외교나 실정에 대한 비난이야 고도이가 배불리 얻어 먹게 될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우유부단하고 게으른거지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 된 건가?"
"넵, 물론입니다. 폐하! 모든 게 조물주께서 설계하신 대로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게."
난 다시 사냥하러 가야 하니까.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적거리는 국왕 카를로스 4세의 모습에 고도이는 해냈다는 쾌감보다도 황당함이 앞섰다.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나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국왕의 모습에 새삼스레 조국의 앞날이 근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적어도 고도이가 생각하기에 이번 거래는 너무나도 합리적인 협의였다.
일단 전통적인 숙적 영국이 이번 사안에서 스페인을 도울 이유도 없을뿐더러, 설령 돕는다고 해도 스페인이 감당하기엔 터무니없는 대가를 요구해올 게 뻔했다.
하물며 저들에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동시에 무찌른 무적의 혁명군이 있다.
차라리 그들과 함께 프랑스를 쳤으면 모를까, 현 스페인군 10만명으로 프랑스 30만 대군에 도전해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무엇보다 오늘날 스페인엔 미국 독립과 프랑스 혁명 이래로 계몽주의라는 광증에 빠져있는 광활한 식민영토들이 있는바.
유럽에서의 전면전으로 인한 과도한 소모는 승패와 무관하게 신대륙에서의 연쇄 반란을 초래할 위험이 너무도 컸다.
이 10만명의 육군도 온전히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쓸 수 있는 것만 계산한게 아니라 유사시 식민지 반란에 대응하기 위한 진압군까지 포함한 숫자였으니까.
그럴 바에야 프랑스와 수교하여 비공식적인 식민지 반란 사주를 공식적인 외교채널에서의 노예제 폐지압력으로 대체하고, 최소 불가침조약에 가능하다면 동맹 재건까지 추진한다-가 고도이가 생각하는 국가 대전략이었다.
'그래, 어차피 프랑스에 내줘야할 건 내주는 대신에 뭐라도 얻어내고서 개혁에 집중하는 게 맞아. 이렇게 뭐라도 물려주면 식민지 놈들도 한동안 조용해지겠지. 그리고 프랑스에도 로베스피에르가 있잖아. 나도 똑같이 젊고 심지어 더 잘생긴 총리인데 못할 이유가 뭐 있어?'
아무렴 고도이도 계몽주의자고, 파리의 혁명정부도 계몽주의자인데 당장은 혼란스러워도 나중가선 그럭저럭 뜻이 맞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어느덧 27세를 맞이한 젊은 총리는 분수에 넘치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다.
작가의 말
사실 제퍼슨은 작중 시점인 1794년엔 이미 국무장관에서 물러난 뒤입니다만.
이는 당시 프랑스 혁명정부에서 파견한 미국 공사 에드몽 주네가 워싱턴의 중립정책을 비판하며 혁명의 적 늙다리 워싱턴을 교수형 시켜야한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미국 정부 쯔음 뒤집어 엎을 수 있다는 등 여러모로 제퍼슨을 곤란하게 만든 탓인지라.
작중에선 계속 제퍼슨이 국무장관으로서 재임 중인 것으로 가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