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54)

리바이어던

스페인 바야돌리드.

"스페인의 평화대공을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대서양 너머까지 명성이 자자하시더군요."

"하하핫!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저 런던까지 제 명성이 전해졌다니 너무 과장된 평가는 아니었을까, 두렵네요."

"아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소문대로 얼빠진 애송이구만 뭘.

윌리엄 피트는 의례적인 인사치레 한 번에 마누엘 데 고도이라는 인물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물론 이 협상장은 엄연히 스페인령이오, 이번 자리를 마련한 나태왕 카를로스 4세의 체면을 봐서라도 아예 모른 척 홀대할 수야 없었지만···.

"그런데 글쎄 왕비 마마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마누엘, 저 말고 다른 여인을 안고 품에 안은 건 아니겠지요?」 제가 몇 번째 남자일지 기억조차 못 하실 분이 내 기가 막혀서 진짜!"

"여인의 질투는 부조리한 법이라지요."

"그렇지요? 역시 그렇게 말씀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날 몇 번을 입을 맞추고, 끌어안아 드렸는지 원!"

"흠, 과연 지중해의 사랑은 듣던 대로 정열적이군요."

그게 이 고도이라는 한심한 소인배를 위하여 제 아까운 심력을 낭비해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딴에는 20대라는 젊은 나이에 총리직에 올랐던 젊은 권신으로서 동질의식이나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는가 본데, 제 나라 왕비가 저와 바람피운 이야기가 무슨 그렇게 자랑이라고 이렇게 몇 날 며칠씩 떠들어대는지 원.

'아, 이래서 루이지애나를 그리 쉽게 헌납한 거였나.'

새삼 윌리엄 피트는 왜 그의 조국이 이렇게 난처한 상황에 부닥쳤는지 깨달았다.

그래, 이놈년 때문이었구나.

친불파에 의한 정략적 쿠데타가 벌어진 거다, 거액의 뇌물이 오간 게 틀림없다, 사실 루이지애나가 우리가 상상조차 못 할 정도로 악조건만 가득한 인세의 지옥이다 등등 런던에서 온갖 가능성을 논의했던 게 바보같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결국, 이럼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주목해야 할 상대는 딱 한 사람이군.'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오늘날 전 유럽에서 작은 루소, 붉은 리슐리외, 유약한 술라 등 온갖 별명으로 불리고 있으나, 런던 정가에서 부르는 별명은 그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래로 딱 한 가지뿐이다.

리바이어던(Leviathan).

그 이름 그대로 성경에서 등장하는 괴물이라는 멸칭이기도 했고,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홉스의 저서에서 소개된 민중의 합의를 통해 완성된 절대권력을 향한 경외이기도 했다.

물론 홉스 그 자신은 로베스피에르를 절대군주라고 부르지도,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지도자라고도 말하지도 않겠으나.

적어도 영국인들의 관점에서 보기에 로베스피에르의 급진당 내각은 마침내 현실에 구현된 홉스의 리바이어던 그 자체였다.

홉스의 기대와는 달리 유럽의 절대군주들은 이날 이때까지 절대권력이란 백성들에게서 양도받은 것이 아닌 전지전능하신 조물주로부터 위임된 것이라며 홉스를 완강히 거부해왔기에.

나면서부터 신에게 위임받은 것이 아닌, 하부로부터 자발적으로 위임받은 권력을 끌어모아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자 힘으로서 막힘없이 휘두르고 있는 로베스피에르야말로 진정 리바이어던이라는 칭호에 걸맞다 본 것이다.

빰빰빰-!

그리고, 지금 마침내 저 너머에서 그 무시무시한 리바이어던의 행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분명 대단한 화려함은 없었다.

그렇다고 위신을 깎아내릴 만큼 소박하거나 볼품없지도 않았다.

다만-우직했다.

마치 거대한 돌덩어리가 이쪽을 향해 굴러오는 듯 묵직하고, 단단한 행렬이었다.

왕정 시절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금색을 배제하고 삼색기의 무거운 남색과 붉은색으로 덧칠한 병사들이 위풍당당하게 팔을 휘두르고 노래하며 한 걸음씩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마치 제아무리 팔을 뻗고 손을 휘저어도 막아낼 수 없는 파도와 햇빛처럼.

"···과연."

리바이어던께서 행차하셨군.

마차가 멈추고, 시종들의 부축조차 받지 않으며 오롯이 홀로 걸어 나와 대지에 선 낯선 사내에게서 윌리엄 피트는 수천만 명의 인간이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거인의 환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로크의 후예인 피트로선 결코 따라 할 수도, 따라 해서도 안 되는 무게감이었다.

꿀꺽.

그제야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며 피트를 귀찮게 하던 고도이 또한 마른침을 삼켰다.

저 보잘것없는 애송이조차 리바이어던의 환상을 본 것일까.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 애송이야 오늘 이 자리에 동석했다는 것만으로도 평생의 훈장으로 삼아야 할 관객이자 들러리에 불과했으니.

"이런, 제가 가장 늦었군요."

이것 참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리바이어던이 뻔한 너스레를 떨었다.

"이게 배라도 얻어탔으면 하루라도 앞당길 수 있었을 텐데, 아시다시피 우리 프랑스가 아직 내부적으로 영 어수선한지라. 모쪼록 두 분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어, 그렇지만-."

"물론이지요. 아무튼 약속한 시일까진 늦지 않게 도착하셨으니 된 거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로베스피에르 경."

눈치 없이 트집을 잡으려는 애송이를 단호히 잘라내고 피트가 치고 나갔다.

그야 물론 이게 뻔한 거짓말이라는 건 피트도 잘 알고 있다.

아무렴 프랑스에서 스페인까지 탈 배조차 없는데 무슨 수로 미국이나 생도맹그까지 연락선을 보내겠는가?

결국 저들이 일부러 약속 시간에 빠듯하게 늦게 도착했다는 거야 누가 봐도 뻔했으나-.

그걸 불평한다는 것 자체가 초짜라는 증거였다.

그야 오늘 이 자리에서 당장 급한 건 영국이라는 걸 자백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저 또한 대서양의 저명한 노예해방자와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피트 경."

꽈악.

그리하여 두 사람은 빙그레 웃으며 악수를 주고받았다.

거기에 고도이가 낄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뭐지.'

가까이에서 목격한 로베스피에르라는 사내의 첫인상은 도저히 밑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사내라는 것이었다.

단순하게 지혜로워 보인다, 경험이 많아 보인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냥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마치 머릿속에 한 사람 이상의 인격체가 공존하는 양 쉴 새 없이 눈빛이나 표정이 세세하게 바뀌니 런던 정가에서 닳고 닳은 피트로서도 도저히 겉으로만 봐서는 어떤 인간상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만약 저 모든 감정변화가 정말로 무의식적으로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이라면 위대한 지도자라기보다는 그냥 미치광이라고 평가를 고쳐야 할 지경이었다.

'결국 직접 경험하면서 판단하는 수밖에 없나.'

설마하니 그럴 리 있냐며 나서기 좋아하는 고도이의 안내를 받으며 협상장으로 이동하는 내내 관찰을 거듭해보았으나 역시 결과는 무참한 실패.

별수 없이 판단을 보류하고 지난 바야돌리드 논쟁 당시 인디오들 또한 이성과 문화를 간직한 하느님의 자녀임이 선포되었다는 역사적인 궁정에 도착한 순간.

"노예무역 폐지라니, 좀스럽게 그게 대체 뭡니까?"

좌석에 앉기가 무섭게 도로 일어선 리바이어던이 폭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충격 때문에 완급조절, 뭐 좋다 이겁니다. 당연히 눈치들 보이시겠지요. 하지만 그걸 우리 파리에서 고려해줘야 합니까? 예? 우린 이미 노예무역은커녕 이 지구상에서 모든 형태의 노예제를 영구퇴출 하겠노라 결의했다, 이 말입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어버버 거리고 있는 고도이와 피트를 차례로 흘겨보더니 덧붙이기를.

"기왕에 삼자 회담에 나섰다면 전 유럽이 열광할 수 있는 통 큰 결과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대서양을 대표하는 삼국이 노예제 폐지를 선언해버립시다. 펜촉으로도, 외교로도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걸 만천하에 보여주잔 말입니다."

이놈은 또 왜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에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지.

피트는 내심 한탄했으나,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런던이야 어떻게든 그들 세 나라가 모일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노예를 핑계 삼은 거지만, 실상은 루이지애나와 북미의 세력균형 문제 때문이라는 걸 저들이 모를 리가 있는가?

당연히 어떻게든 둘러대려 들 거라고 예상하였고, 그 핑계가 완전한 노예해방이라면 그럭저럭 런던이 각오한 범주 내의 사고였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여, 피트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꾹.

동시에 두 거인 사이에 끼인 고도이가 한심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노예제만큼 저주스럽고, 혐오스러운 제도가 또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이 노예제를 지구상에서 영구히 퇴출하기 위한 범 기독교적인 연대가 없었다면 지난 반천년간 수십수백차례에 걸쳐서 반목하고 또한 경쟁해온 우리 세 나라가 이 역사적인 도시-바야돌리드에 한날한시에 모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딸꾹. 딸꾹.

"즉각적인 노예무역 폐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장차 우리 세 나라는 노예제의 항구적인 근절과 퇴출을 위하여 항시 힘을 합치고, 또한 입을 맞추어야만 합니다. 250년여 전 바야돌리드가 부도덕한 노예농장주들의 착취에 신음하던 인디오들의 희망이 되었듯이, 오늘날 바야돌리드는 전 세계인의 빛으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과연 노예해방자 피트 경!!!"

짝짝짝.

로베스피에르가 피트의 열정적인 연설에 감동했다는 듯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딸꾹딸꾹딸꾹.

변함없이 입도 뻥긋 못하고 있는 고도이야 아무튼, 두 사람은 또다시 서로를 향해 도발적인 미소를 주고받으며 각자 자리에 주저앉았다.

치열한 공방이었다.

피트는 노예무역에 대해선 즉각적인 폐지라고 거론한 반면 노예제 폐지의 정확한 시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다시 로베스피에르는 이를 트집 잡는 대신 열렬한 환호로 응답함으로써 이미 노예제를 폐지한 선발주자로서 후발주자의 열정을 독려하는 구도를 만들어냈다.

어차피 정확한 시점을 말해달라고 계속 트집 잡아봤자 피트에겐 귀족원과 국왕이라는 지루하고 복잡한 핑곗거리가 남아있다는 걸 훤히 꿰뚫어 본 것이다.

'···이야기가 생각보다 짧아지겠군.'

그게 런던에 썩 유리한 상황이 아니라서 그렇지.

"그럼-."

내심 혀를 차면서도 피트는 재빠르게 생각을 정리하여 주도권을 이어 나갔다.

"신대륙의 노예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아, 물론이고 말고요. 오늘날 노예제가 가장 왕성하게 운용되고 또한 거래되고 있는 지역을 빼놓아서야 되겠습니까."

리바이어던이 빙그레 웃었다.

"저는 장차 히스파니올라섬의 혁명적인 저항사례가 전 아메리카 대륙의 모범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딸꾹.

"실례지만 로베스피에르 경, 그건 마치 신대륙에 혼란과 파괴를 퍼트리겠다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만."

모처럼의 발언권조차 살리지 못하는 고도이를 대신하여 피트가 반박했다.

"아,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자유시장이라는 게 으레 그런 법이잖습니까? 제아무리 양심적인 사업주들이 가격을 조금이라도 더 올려서 직원들의 몫을 늘려주고, 더 나은 환경에서 근로하게 만들어주고 싶어도 남들이 가격을 확 낮춰버리면 저 혼자 고사하게 될 뿐입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똑같이 가격을 올리고, 처우를 개선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아하."

그제야 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컨대, 생도맹그의 물라토 혁명 같은 사례를 사방팔방에 부추기겠다는 게 아니라 노예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가격 인상과 노동환경개선을 협의하자는 제안이었다.

물론 그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건 말건 생도맹그의 사례를 보고 영감을 얻은 물라토 노예반란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좋습니다. 그런 이야기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지요. 런던은 카리브해에서의 부도덕한 노예노동을 근절하기 위한 어떠한 외교적 해결책이라도 동참할 의향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피트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야 영국은 카리브해에서 부도덕하게 흑인 노예들을 착취하여 폭리를 취하는 악덕 노예주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사실대로 말하자면 네덜란드, 포르투칼, 스페인보다 한발 늦게 식민사업에 뛰어든 후발주자라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지만.

결국 앞으로 카리브해의 노예들이 일제히 바야돌리드 조약을 근거로 처우개선과 임금인상을 요구해서 피를 토하게 될 건 네덜란드와 스페인이지 영국이 아니었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기립박수를 쳐주면 모를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리고 그제야 고도이가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즉각적인 노예무역 폐지는 좋습니다. 노예제 폐지도 고려···는 해봐야지요. 하지만 이건 이야기가 다르잖습니까!"

"왜 다르다는 말입니까?"

"왜냐니, 그야-."

"카리브해 전역에서 동시에 처우개선에 나서지 않는다면 결국 저들에게 조금이나마 도덕적이고 인본적인 노동환경을 제공하고자 한 윤리적인 사업주들만 피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리바이어던이 으르렁거렸다.

"그럼 그게 어찌 정의로운 사회겠습니까? 장차 해방노예들이 당하게 될 고통과 수모가 노예노동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노예라는 꼬리표만 사라진다면 하루아침에 자유로워집니까? 자유롭게 농장을 떠나지도, 더 인간적인 대우를 요구하지도 못하는데 그게 어떻게 자유인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

"자유란 사유재산으로부터 비롯되는 법입니다. 사유재산을 가지지 못한 자는 어떠한 자유도 가질 수 없습니다. 고로, 우리는 먼저 카리브해의 자유인과 앞으로 자유로워질 해방 노예들에게 사유재산을 가질 권리를 부여해야만 합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홉스의 적자가 로크가 들으면 기립박수를 쳐줄 논리를 펼치고 있는데 로크의 후예로서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노예노동과 다를 바 없는 노동착취 또한 형태를 달리한 노예제나 다름없습니다. 모름지기 노동이란 생존과 축재를 위한 수단일진대 축재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단지 숨이 붙어있을 뿐인 이가 어찌 노예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예. 당연히 노예고 말고요."

"···?"

따라서 피트는 왜 그 순간 리바이어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반드시 이 구문을 선언서에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는지도 말이다.

'로크의 저서들이 그렇게 인상 깊었나?'

훗날 로크의 노동가치설이 어떻게 반박되고 또 변형되는지 알지 못했던 피트의 한계였다.

"장차 루이지애나는 이 바야돌리드 선언을 실현하기 위한 살아있는 선전지가 될 것입니다."

미처 깊게 생각해보기도 전에 로베스피에르가 선수를 친 탓도 있었지만 말이다.

"루이지애나에 이주하고자 하는 이는 피부색에, 신분에,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나 환대받게 될 것입니다. 노동의 가치를 존중받고, 축재할 권리를 보장받고, 자유로이 생각하고 발언할 생득권을 부여받을 것입니다!"

"저기, 그렇다면-."

"아, 물론 무장할 권리 또한 빼놓을 수 없겠군요."

리바이어던이 뻔한 너스레를 떨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촌극이긴 했으나-.

'···나쁘지 않군.'

아니, 오히려 결과만 놓고 본다면 기대 이상이었다.

결국 저 무장할 권리라는 건 현지에서 민병대를 조직하는 걸 방관하겠다는 소리고, 그럼 프랑스에서 직접 통치하는 대신에 식민지 의회에 의한 자치를 허용하겠다는 이야기니까.

자고로 권력이란 총부리에서 나오는 법이었으니.

프랑스군을 직접 루이지애나에 배치하여 영국령 북아메리카를 노리진 않을 거라는 생각에 피트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세상에 돈벌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 그래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왜 날 보면서 하는 건데.

어서 친구비를 대라는 압박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피트는 내심 투정을 부렸다.

'하기야, 이 정도면 싸게 산 평화지.'

아무렴 대놓고 돈을 뜯어낸 것도 아니고 루이지애나를 개발하는데 필요한 투자금을 대라는 식이라면 그렇게까지 날강도 수법은 아니잖은가.

정확한 액수나 기한을 따로 정해두지 않은 게 괘씸하긴 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었다.

혹시 누가 아는가?

저 루이지애나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기름진 땅이었을지.

그때 가서 배 아파하는 것보다야 어차피 돈 주고 살 평화라면 금융투자라는 핑계를 대는 게 나으리라.

"물론 돈벌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지요."

하여, 피트는 이번에야말로 회심의 미소를 떠올렸다.

오늘 이 자리에서 가장 치명적이었던 양보는 기한도 정해지지 않은 노예제 폐지도, 카리브해에서의 처우개선 협의나 루이지애나의 친구비가 아닌.

다름 아닌 그의 입을 통해 재확인된 노동가치설이었음을 윌리엄 피트는 끝까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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