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54)

구주삼걸

[이런 빨갱이 놈을 봤나.]

칭찬 감사요.

[칭찬 아니네만.]

칭찬인가 비난인가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는거야.

[···어휴, 말을 말아야지 진짜.]

그걸 이제라도 깨닫다니 성장하셨구려.

여하간 이날 바야돌리드에서 프랑스, 영국, 스페인 3국이 협의한 내용은 크게 다음과 같았다.

1. 오대양에서의 즉각적인 노예무역 철폐와 육대주에서의 단계적인 노예제 근절을 위한 협력.

2. 이 지구상의 피조물은 누구나 피부색과 성별, 종교, 신분에 상관없이 전지전능한 조물주의 자녀임을 재확인.

3. 피고용인의 축재를 불가능케 하는 무임금-저임금 노동착취 또한 노예노동으로 규정.

4. 위 3항을 근거로 카리브해의 해방 노예들이 노예노동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서의 생활을 보장받기 위한 최소한의 처우 개선사항을 명시.

5. 노예노동의 근절과 대서양 경제권의 공동번영을 위한 경제협력 확대.

6. 위 5항을 구체화 시키기 위하여 누벨 프랑스(Nouvelle-France), 이하 루이지애나를 경제특구로 설정하여 향후 30년간 직접세, 보조세, 관세장벽 등 일체의 의무로부터 면제.

이것 말고도 도합 11항에 세세하게 들러붙은 주석까지 합하면 훨씬 복잡하고 길어지긴 했지만, 그거야 이번 루이지애나 반환으로 인한 어업권 문제나 수렵권 분쟁, 새 국경선에 기거하고 있는 원주민 부족들 같은 실무문제였으니 넘어가고.

대내외에 걸쳐서 이 바야돌리드 선언의 핵심 성과로서 발표될 것도, 실제 핵심 주제도 위 여섯 개 항이었다.

가히 외교 혁명이라고 할 만한 성과였고, 사회진화론이나 골상학 같은 유사 과학이 등장한 뒤였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협의였다.

다른 건 몰라도 2항은 절대로 명시할 수 없었을 것이고, 4항도 왜 저 덜 진화된 원숭이들을 노예노동 피해자라고 불러줘야 하는 거냐는 반발이 나왔을 테니까.

아직 사회진화론 등장 이전인 지금도 2항에 「인간」이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포괄적인 표현을 써서 우회해야 했는데, 그 이후라면 그냥 상상조차 하기 싫다.

당장 이번에 우리 집주인 놈이 빨갱이적인 음모라며 질색하면서도 순순히 협력해준 게 이번 기회 아니었으면 인종 평등 담론을 꺼낼 계기도, 자리도 없을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고.

[그래서 3항에 피고용인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쓴 건가?]

그야 당연하지.

그냥 인간이라고 적어두면 훗날 왜 저것들이랑 우리랑 종족 자체가 다른데 쟤들을 인간이라고 불러줘야 하냐? 하는 반응이 나오겠지만 아예 피고용인이라고 명시해버리면 그냥 일부러 실업시키거나 대놓고 납치해서 불법 노예농장을 굴리는 수밖에 없다.

곧 아직까진 기호품에 불과한 설탕이 머지않아 생필품이자 저임금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각성제가 되리라는걸 감히 짐작하지 못한 윌리엄 피트의 외교 참사였다.

결국 이에 따라 스페인-네덜란드의 플랜테이션 사업이 방해받을수록 노동자들의 생존과 칼로리 보급을 위하여 공장주들이 지급해야 할 최저임금 또한 천정부지로 올라갈 테니까.

그러니까 실컷 남용하고 악용하라지.

무임금 노동 또한 노예노동과 다를 바 없다며 스페인-네덜란드의 플랜테이션 사업을 괴롭힌 업보가 머지않아 본국의 노사갈등으로 돌아오게 될 테니.

"대단히 만족스러운 논의였습니다, 로베스피에르 경."

윌리엄 피트가 또다시 소름이 끼치는 미소를 떠올리며 내게 악수를 권했다.

첫 만남 때부터 느낀 거지만, 참 도마뱀 같은 사람이란 말이야.

틈만 나면 이쪽을 흘겨보면서 핥듯이 위아래로 훑는데 솔직히 징그러우니까 그만하라고 몇 번을 소리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래서 렙틸리언 음모론 같은 게 흥했나 싶어질 정도로 표독스럽고, 창백하며, 교활한 인상의 사내였다.

[지금 음모론 그 자체인 사내가 할 말인가?]

입 닥쳐, 막시밀리앙.

"덕분에 근 10년을 끌어온 제 오랜 골칫덩어리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버리듯이 간단하게 해결되었으니 이를 대체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허, 그런 섭섭한 말씀 마십시오. 전 인류의 보편적인 자유와 계몽을 도모하기 위하여 함께 구체제와 맞서 싸우는 동지를 돕는 게 어찌 감사받을 일이라는 말입니까."

여하튼 뻔한 너스레를 떨었다. 

"언제 어떤 시대에나 변혁을 주도하는 건 우리 젊고, 패기 넘치는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대서양을 대표하는 우리 세 나라에 짠 듯이 젊고 패기 넘치는 총리들이 등장했으니, 이는 곧 오늘을 위하여 전지전능하신 조물주께서 안배하심이 아니겠습니까?"

고로, 감사 인사는 아직 받지 않겠습니다.

툭.

혼자 축 처져있던 고도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덧붙였다.

"대신 다음번에는 총리께서 제 골칫덩어리를 해결해주시면 되잖습니까? 앞으로도 우리 셋이 함께 바꾸어 나갑시다. 우리를 보며 꿈을 키워나갈 다음 세대를 위하여 만천하에 이 젊은 패기를 떨칩시다. 우리가 저 미래의 영웅들을 위한 우상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여, 영웅···!"

그제야 고도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 친구도 참 분수에 넘치는 허영심의 사나이란 말이야.

반대로 피트는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얼굴과 함께 눈빛이 짜게 식어갔다.

그야 마음 같아서는 괜히 친한척하지 말라고 하고 싶겠지.

까놓고 이번 루이지애나 위기가 여기까지 커지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렇게 서로 만날 일도 없었던 잠재적 적국이었으니 혹시 런던에서 친불파라는 불똥이 튀지는 않을까 머릿속으로 열심히 주판을 튕기고 있을 거다.

그렇지만.

"그래도 감사드리겠습니다."

피트는 이내 빙그레 웃으며 내 손을 마주 잡았다.

"프랑스의 위대한 혁명가께서 이런 보잘것없는 애송이를 영웅이라고, 우상이라고 불러주셨으니 응당 감사드려야지요. 다시 한번 즐거운 논의였습니다, 로베스피에르 경."

"하하핫! 겸손하시군요. 모쪼록 다음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피트 경."

끝까지 후일을 기약할 여지를 남기질 않는구만.

하지만 「위대한 혁명가」라는 단서로 구체제에 맞서는 투사라는 이미지를 날름 받아먹었으니 나쁠 건 없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공식 석상에서 혁명가라는 단어를 칭찬으로 쓴 건 지금 이 양반이 처음일걸?

그동안 잘나신 귀족들이 점령한 국제외교가에서 혁명가라는 건 그냥 폭도와 동의어였으니 이 친구는 앞으로 친혁명파로 구분될 거다.

[흠, 그냥 면전에서 자네를 비꼰 건 아니겠나?]

당연히 그렇게 해석될 여지도 남긴 거지.

만약 일이 꼬이게 되면 저 친구는 다시 혁명가라는 단어를 폭도와 동의어로 사용하기 시작할 거다.

이 정도는 되니까 마계 런던에서 24살이라는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총리에 올라 어느덧 10년째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끌고 있는 거고.

"과연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이로군요!"

그에 반해서 이쪽은···.

[쓰레기지.]

···그래, 그냥 말을 말자.

루이지애나 할양 자체는 나름 국가대전략상으로 합리적인 판단이었다고 치는데, 막상 이번 협상을 주도했다는 실물을 보고 나니 내심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합리적인 외교 전략이면 뭐하나?

그래서 루이지애나를 반환하고 난 다음 국내 개혁을 지휘해야 하는 사령탑이 이 모양인데.

아, 스페인의 앞날이 어둡구나.

우리도 썩 밝지는 않았는데 여긴 아직 혁명도 안 터졌는데 타르타로스 최하층일세.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로베스피에르 경! 자고로 영웅에겐 적이 많은 법이라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믿을 수 있는 전우와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해 나가기에 뭇 민중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에, 동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요."

"핫핫핫! 그렇게 말씀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이 마누엘 데 고도이가 로베스피에르 경의 아그리파가 되어드리겠습니다!"

···네 주제에?

그냥 한마디 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또 그러기엔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너무 아까웠다.

하필이면 국가지도부가 이 모양 이 꼴이라서 그렇지, 스페인이라는 나라 자체는 여전히 남부럽지 않은 식민열강이자 강대국이었으니까.

[안타깝군.]

그러게.

진짜 딱 이 고도이랑 카를로스 4세만 날려버리고 제정신 박힌 친불파 인사 박아넣을 순 없나.

···어 잠깐, 설마 이래서 나폴레옹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삽질했나?

"말씀만으로도 든든합니다. 우리 프랑스의 역사적 우방 스페인과의 오랜 협력이 부활한다면 두려울 게 어디 있겠습니까."

"넵! 그래서 말인데, 이 4항만큼은 어떻게 좀···."

그러자 또 언제 우쭐거렸냐는 듯이 고도이가 양손을 살살 비비며 굽신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본론이었나···.]

뭐, 그야 당연하겠지.

저 4항을 근거로 두고두고 스페인을 괴롭힐 피트가 보는 앞에서 이야기를 꺼냈으면 단칼에 안 된다는 소리가 나왔을 테니 나와 단둘이 있을 때 어떻게든 해결을 보려는 심산일 거다.

여기서 알겠다는 대답이 나오면 그다음엔 이제 루이지애나라던가 이번 수교 과정에서 스페인 국내의 원망을 샀던 굴욕스러운 조항들을 하나하나 고쳐보려는 생각도 있을 테고.

제 주제도 모르는 옹졸한 소인배치고는 나름대로 머리를 썼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안 됩니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그때 진짜로 전쟁까지 불사할 기개를 보여줬어야지.

다 지나고 나서 좀 굽신거린다고 양보해주면 나까지 호구 잡힌다.

"다만 한가지 조언을 해드릴 수는 있겠군요."

"···조언이라고 하심은?"

"취업 이민제도를 활용해보십시오."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야말로 노예제가 폐지되고 난 다음에 실질적으로 그 빈자리를 대체해버린 놈이니까.

가령 쿨리라던가, 쿨리라던가, 쿨리라던가.

뭐, 아직 이 시대엔 쿨리보단 서아프리카인들과 형식적인 고용계약서를 작성하는 정도겠지만.

"무엇보다 단기적으로는 처우개선 요구로 인한 부담보단 가격 인상으로 인한 수익이 부각될 것입니다. 총리께서 이 두 가지를 내세워 귀국의 농장주들을 설득한다면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안정적인 개혁을 도모하실 수 있겠지요."

"오오오···!"

[이리 같은 놈.]

다시 한번 칭찬 감사요.

결과적으로 플랜테이션 사업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샛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게 썩 잘하는 짓은 아닌데, 이 플랜테이션을 유지하는 게 노예가 아닌 고용 계약직이 된다면 자연스레 흑백 가리지 않고 사회 취약층이 일하러 가게 될 거다.

물론 곧 죽어도 흑인만 고집하는 뻑킹 레이시스트들도 있겠지만, 당장 공급량이 급감하면서 인건비가 오르는 마당에 혼자 고집부려봐야 가격경쟁에 못 따라가서 고사할 뿐이다.

그럼 이제 흑백 가리지 않고 농장주들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 피고용인들이 함께 싸우기 시작하겠지.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는 흑인들만 희생당할 때보다 공론화도 더 잘될 테고.

아직 국제주의라 부르기엔 미흡해도 피고용인의 노동권을 규정한 제3항은 장차 대륙을 가리지 않고 불합리한 노동착취에 신음하는 소외된 약자들의 입에 끝없이 오르내리게 될 거다.

"설마하니 로베스피에르 경께서 우리 스페인의 사정을 이렇게 헤아려주고 계셨을 줄이야! 정말이지 상상조차 못 하였습니다!"

"아무렴 당연히 걱정해드려야지요. 저 런던은 언젠가 결판을 내야 할 적국이고, 마드리드는 우리 프랑스의 역사적인 우방이잖습니까? 설마 이 간단한 우선순위를 헷갈리기야 하겠습니까."

"로베스피에르 경···!"

덥석.

혼자 감동해서 울먹이고 있는 고도이와 손을 마주 잡았다.

"혹시 신경 쓰이는 문제들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선 안이라면 무엇이건 함께 고민하고, 또한 조언해드리겠습니다."

"넵! 그래서 말인데-."

[아니 이봐 잠깐만.]

아무리 내가 의지해도 좋다고 했지만 진짜로 자기 나라 국가기밀을 타 털어놓는 총리가 이 세상에 어디 있냐!!!

그제야 뒤늦게 고도이를 뜯어말리려 했으나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결국 이날 나와 집주인은 왕비의 점이 몇 개인가처럼 온갖 알고 싶지 않았던 다채로운 비밀들을 알게 되었다.

***

필라델피아.

"귀국의 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탈레랑이 안타깝다는 듯이 덧붙였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는 본국에서, 그것도 내로라하는 열강들과 체결한 조약이니 저 한 사람이 이에 왈가왈부하기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 주여."

제퍼슨이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도 탈레랑이 뻔한 내숭을 떨고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겠으나, 한편으로 탈레랑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던 것이다.

아무렴 뭐 보잘것없는 이류 국가도 아니고 오늘날 신대륙의 태반을 손에 넣은 스페인과 대서양의 패자 영국이 각기 총리급 인사가 모여서 바야돌리드라는 역사적인 도시에서 노예제 폐지를 선언했다는데 그 혼자서 뭐 어쩌란 말인가.

이제 노예제 폐지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이 녀석은 왜 실망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탈레랑으로서는 제퍼슨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문제 당사국 중 하나였던 미국은 바야돌리드에 초대도 받지 못한 채 소외되기야 했으나, 결과적으로 북미대륙을 뜨겁게 달구었던 루이지애나 위기는 열강 간 담판으로 평화롭게 해결되었으며 경제특구 루이지애나의 등장은 미국의 경기부양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면 미쳤지, 악영향을 줄 리는 없다.

아무렴 지금 루이지애나에 뭐가 있다고 미국과 경쟁을 하겠는가?

지금껏 개발된 것보다 앞으로 개발해야 할 게 더 많은 오지에 시티 오브 런던까지 끼었으니 조만간 엄청난 토목경기 활황이 찾아올 텐데.

오히려 당장 제퍼슨을 죽일 듯이 달려들던 반대자들에게 거꾸로 너무 성급하게 평가했던 건 아니냐며 당당히 반박하면서 실리외교를 부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탈레랑은 탈레랑대로 큰소리 떵떵 쳤던 걸 지켰으니 잘됐고, 제퍼슨도 열심히 탈레랑을 달래서 이만한 성과가 나왔으니 오늘은 함께 축배라도 들자고 해야 정상일 텐데.

'설마 다 핑계였나? 실리고 정치공학이고 다 핑계고 진짜로 노예제 그 자체가 쟁점이었던 거라고???'

허.

탈레랑은 내심 기가 막혀서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자국의 전쟁 위기가 해소되고, 경기 호황이 약속된 데에 대한 기쁨보다도 노예무역 폐지와 노예제 폐지 노력으로 인한 실망이 더 크다니.

이 나라의 노예 농장주들에게 있어서 노예제란 실리가 아니라 신앙의 영역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대신에···."

하지만, 그렇기에 거꾸로 저들의 심리를 악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가지 장관님께 제안하고 싶은 사업이 있습니다만."

"사업이라고 하심은?"

"간단한 이민사업입니다."

탈레랑이 덧붙였다.

"아시다시피 이제 우리 생도맹그에는 그렇게까지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설탕 사업이야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서야 무슨 수로 파괴된 농장들을 재건하고 섬의 인구를 부양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예. 히스파니올라섬의 과잉인구 해소를 위하여 귀국과의 취업이민을 장려해보면 어떨까, 하는 구상을 해보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제퍼슨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분명 설령 대서양 노예무역은 폐지될지라도 흑인 노예를 공급할 공급처나 수단은 어떤 식으로건 계속 남아있으리라는 희망을 발견한 것이리라.

아무렴 남부 주에 이주한 흑인이 어찌 자유인일 수 있겠는가?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이민사업은 형태만 바꾼 노예무역이 될 것임이 분명했지만-.

'좋아, 이걸로 혁명정부에 내세울 공이 하나 더 늘었군.'

애초에 탈레랑은 흑인들을 보낼 생각이 없었다.

히스파니올라섬의 백인들을 보낼 작정이었지.

아무렴 저 원수지간들 보고 언제까지 공존하라고 할 수도 없는 거고, 그렇다고 자국인을 추방하거나 할 수도 없고, 본국에 데려가면 데려가는 대로 정부가 검둥이 편들만 든다고 반정부여론을 형성할 게 뻔하잖은가.

그렇다고 노예들이나 부리면서 편하게 살던 작자들이 이제 와 아무것도 없는 루이지애나에서 다시 시작하라고 하면 몇이나 기뻐할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똑같이 흑인 노예 부리면서 호의호식하는 남부 주에 모조리 몰아넣어 버리는 게 그들도 좋고 프랑스 정부에게도 이상적인 결말이리라.

"제가 듣기에는 충분히 합리적인 제안인 것 같군요."

"장관님이시라면 그렇게 말씀해주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아무렴 탈레랑은 현 생도맹그가 인구과잉 상태라고 했지, 그게 흑인 때문이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잖은가.

그걸 본인이 제멋대로 특정 인종 탓이라고 재단한 것을 탈레랑이 책임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