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복
헉헉헉.
[진정하게, 이 빨갱아.]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
바뵈프란다, 바뵈프!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자!
그라쿠스 바뵈프!!!
까르륵!
[틀렸어, 이 친구. 완전히 맛이 갔군···.]
햐, 언제 만나러 가지?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이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려나?
그래, 우선 만나서-.
[이봐, 잠깐.]
왜 또.
[자네 얼마 전까지 혁명 공화국의 정치 구도가 어쩌고저쩌고하지 않았나?]
···어?
[그런데 자네가 그 빨갱이 친구를 영입해버리면 어쩌자는 건가. 그럴 거면 선거전략을 고민할 게 아니라 지금처럼 일당독재를 해야지.]
아뿔싸···!
[아뿔싸 좋아하시는군.]
시꺼.
아무튼 덕분에 정신이 들었다.
그래, 바뵈프가 있었지.
괜히 사람들에게 미래지식이라는 이질감을 주고 싶지 않아서 이쪽에서 먼저 찾아가 보지도 못하고 딱히 소식도 들리지 않길래 그냥 어디서 뭐 하고 있을까-만 궁금해하고 있었더니.
그냥 햇병아리 정치인답게 지방의회에서 묵묵하게 활동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개나 소나 내는 선전지도 올해 들어서부터 내기 시작했다니 그야 파리에서는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을 수밖에.
이러면 혁명가 바뵈프라면 모를까, 정치인 바뵈프라면 사실상 올해에 막 데뷔한 수준이라고 봐야겠네.
데뷔하자마자 에베르 지지층을 마구 파먹으면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거 과연 바뵈프라고 해야겠지만도.
"이봐, 동지. 괜찮은가? 얼굴이 벌건데."
때마침 자크 루 동지가 상념을 깨주었다.
···그보다 아까부터 얼굴에 다 드러나고 있었나.
이거 부끄럽구만.
"네, 너무 심려하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조금 개인적인 일이 떠올랐을 뿐이라."
"아···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끔 그럴 때가 있지. 그래서 루소만 해도 고백록을 쓰지 않았던가. 충분히 이해하네."
[아니, 이해 못 한 것 같은데.]
커흠!
"아무튼, 그럼 동지께서는 이 평등파의 활동이 당장에 위협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보시는 겁니까?"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나."
자크 루 동지가 자랑스레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 우리 정권이 이룩한 성과들을 돌이켜보게. 우선 보편선거권을 부여했고,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여 자연국경선을 확보했으며, 이제 루이지애나를 수복하고 노예제를 폐지하였으며 국제무대에 화려히 복귀했지.
그런데 이제와서 로베스피에르를 단두대로 보내라니, 몇이나 고개를 끄덕이겠는가. 훗날에 당론을 어느 정도 가다듬은 다음이라면 몰라도 당장은 다수당 따윈 어림도 없을걸세. 또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고."
"의외로군요."
당신이라면 바뵈프에게도 동조해줄 거로 생각했는데.
"동지께서는 평등파가 영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십니까?"
"물론 마음에 맞는 구석이 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네."
다만.
"난 성직자잖은가."
아하.
[그럼 당연히 저 무신론자들과는 함께 갈 수 없겠지.]
그러게.
바뵈프도 그렇게까지 무신론에 목매다는 인사는 아니니까 실제로 만나면 의기투합할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하필이면 무신론을 넘어서 반신론을 내세운 에베르파에 붙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바뵈프가 지적한 대로 내가 생산수단 국유화라던가 무화폐경제 같은 혁명과업에 소홀한 것도 사실이니까 나와 바뵈프가 대립각을 세우게 된 것도 어쩔 수 없고.
아니 그런데 이번엔 나는 진짜로 억울해.
나도 마음 같아서는 진작에 그러고 싶었다고!
집주인 놈이 곧 죽어도 안 시켜주는걸 왜 이 정신기생체만 탓하냐!!!
[입 닥쳐, 박민혁.]
우우! 반동 부르주아지! 로베스피에르는 물러가라!
나도 그냥 바뵈프랑 평등파할래!
빼애액!
"그리고 나는 우리가 민생에 미흡했다는 점도 동의할 수 없네."
자크 루 동지가 단언했다.
"우리는 저 라파예트와 시에예스가 망쳐놓은 토지개혁을 마무리 지었네. 보이지 않는 손 타령이나 하는 부르주아지들의 반발을 찍어누르고 행정 권력의 시장개입을 정당화 시켰고, 중앙은행을 정비하고 대외무역을 재건하여 소비재난을 해결했네. 한데 부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생에 소홀했다고?
웃기지 말라고 전하게. 그럼 그게 무장강도지 무슨 정부란 말인가? 저들이 뭐라하건 동지가 신경 쓸 필요 없네. 우린 최선을 다했고, 저런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길거리 선동가들 따위에게 비난받는다고 해봐야 아무도 저들에게 동의하지 않을걸세."
어···.
[정론이군.]
그래, 정론이긴 한데···.
내가 혁명사에서 봤던 자크 루 신부가 할 말은 아니라서 조금 당황스럽네.
물론 길거리 선동가가 보는 세상과 집권당의 간부가 보는 세상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식량난 해결을 위해 부자들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아야 한다고 했던 사람이 개량 사회주의 진영이나 사회 민주주의 진영에서 할만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원.
요 몇 년 사이 나와 어울리면서 이렇게 된 건지, 아니면 전 유럽과 전쟁을 치르는 와중 경제 파탄+공포정치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서 딱히 극단적인 해결책을 주장할 필요가 없는 건지.
"그러니 기운 내게. 저들이 되지도 않는 선동으로 싸움을 걸어왔으니 우리도 똑같이 되받아쳐 주면 될 것 아닌가. 동지가 신경 쓸 필요도 없도록 이미 카미유 동지와 이런저런 선전 문구를 논의해놨으니, 혹시 여유가 된다면 자네가 한번 봐주게."
"듣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기대하고 있지요."
뭐, 고민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지.
그리고 수고해준 자크 루 동지와 카미유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내가 저 선전 활동까지 관여할 시간적 여유는 없을 거다.
물론 동지도 그걸 모르고 한 소리는 아니겠지만, 요즈음 원내 교섭에서부터 인사청문회에 좀 바빠야지.
일단 내 군무감찰위원장으로서의 3년 임기가 마침내 끝났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이로써 군무감찰위원회 또한 해체.
그동안 군무감찰위원회에서 사실상 독점하고 있던 권한 또한 전쟁위원회 산하의 작전지원평의회(군수), 군사안보총국(군내 감찰)로 이관되었고 행정감찰권의 경우에는 기존의 감사위원회와 신설된 회계감사원에 나눠서 이관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민간 탐정들의 용돈벌이가 사라진 건 아니고, 그냥 감사위원회가 감찰위원회가 되어버린 거다.
겸사겸사 군무감찰위원회에서 기소하면 혁명재판소에서 처리하던 행정재판권은 따로 소송담당부로 빼버리고, 이 소송담당부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 그 상위기관이자 법률 자문기관으로서 국참사원(Conseil d'État)을 설치하자는 논의도 현재진행 중.
이렇게 사지가 찢기고 나고서도 감사위원회에 흡수된 게 아니라 역으로 꿀꺽 삼켰다는 게 새삼 군무감찰위원회라는 게 본디 얼마나 거대한 부서였는지 실감이 간다.
겸사겸사 군무감찰위원장을 겸직하고 있었던 내가 휘두르던 권력도 말이지.
[뭐, 비상시국엔 비상한 대책이 필요한 거 아니겠나. 남들 눈치만 보다가 비이성적인 모험주의와 반동주의에 휘둘려서 패망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그래, 댁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수다.
아무튼 나라고 군무감찰위원장을 포기한 게 아쉽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권력이라는 건 언제나 상대적인 법.
무작정 내가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게 항상 좋은 일만은 아니다.
그만큼 내가 져야 할 책임도 많아지고 적들도 더 많아진다는 소리니까.
오히려 필요한 만큼만 언제나 손에 쥐고 있는 대신에 나와 대적할 나머지들을 쪼개서 나약하게 만드는 게 더욱 이상적이고 안정적이다.
이래저래 토의나 협치도 더욱 왕성해질 테고 말이지.
무엇보다 내가 혼자서 모든 걸 해내기보단 각계각층의 인재들을 적재적소에서 활약하게 만드는 게 더욱 효율적이잖아.
물론 대신에 내가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많아지겠지만-.
[그게 정상적인 공화정치인 거지.]
얼씨구.
민주정치랑 공화정치 꼬박꼬박 구분하는 게 이 친구도 코쟁이 맞네.
똑똑똑.
"들어오게."
하여튼 그렇게 자크 루 동지를 떠나보내고 서류 더미에 깔려있자니 익숙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라부아지에였다.
"그래, 오늘은 어쩐 일로 나를 기쁘게 하려고 오셨는가?"
"기뻐해 주십시오, 각하. 지구의 자오선을 측량하기 위하여 됭케르크와 바르셀로나로 떠났던 원정대가 마침내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어···.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지?]
그러게, 전혀 짐작이 안 가는데.
우리가 멍때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잠시 라부아지에는 한심하다는 듯이 이쪽을 흘겨보더니 도로 굽신거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제 말은, 새로운 도량형을 위하여 떠났던 측량대 말입니다. 얼마 전 각하께서 미터법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셨던 도량형의 원기를 완성 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 사람아, 진작에 그렇게 말했어야지!"
애초에 지구 자오선이 뭔데 이 이과 놈아!
라부아지에가 순간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봤지만 개의치 않겠다.
왜 뭐 왜.
꼬우면 네가 수상하던가.
"지금 당장 이 미터법을 이 프랑스의 유일한 도량형으로 선포하겠네!"
"···그, 저기 각하. 이제 막 탐험대가 돌아왔으니 정확한 계산을 위해서는 아직 더 시간이-."
"그럼 작업이 마무리되는 대로 유일한 도량형으로 선포하겠네!"
뭐, 실제로는 바로 선포하지는 못하고 우선 원내의 동의를 얻어야 하긴 하는데.
일당독재 아껴둬서 어따가 쓰려고?
이제 총선 한 번 더 치르고 나면 못 쓸 놈인데 이럴 때 써야지.
제1차 급진당 단일내각의 마지막 결의안은 미터법 도입과 도량형 통일이었다!
크, 이 정도면 나중에 역사 공부할 프랑스 학생들에게 착한 일 해준 거 인정하는 부분입니까?
[적당히 좀 하게.]
어허,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미터법인데 이 정도는 육갑은 떨어야지!
내가 지금 일복 터져서 깔려 죽기 직전이라지만 이것까진 꼭 끝을 보고 골로 가야겠다!
"뭘 주저하고 있는 건가? 어서 서두르게. 이것만 끝내고 나면 자네들은 영웅이야! 프랑스만이 아니라 세계를 구한 영웅이지! 자, 전 세계가 자네들을 기다리고 있다네! 어서 서둘러!"
"·········."
라부아지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넘쳐나는 애국심과 임페리얼 단위계의 안락사라는 사명감 탓에 안면근육이 오작동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프랑스령 코르시카.
"어서 오너라, 자랑스러운 동생아!"
와락.
보나파르트 일가의 맏형,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있는 힘껏 나폴레옹을 끌어안았다.
"그래, 소문은 다 들었다! 네가 어디만치 왔는지 우리 식구들이 이 머나먼 코르시카까지 아주 생생하게 들리더구나! 과연 우리 보나파르트 가문의 자랑! 위대한 전쟁영웅!"
"제발 거기까지 합시다, 조제프 형. 우리 집안의 자랑께서 쑥스러워하고 계시잖소."
"그래요! 아직 오빠 덕도 못 봤는데 벌써 삐지게 만들면 어쩌자고요!"
"아니, 그 잠깐만···."
괜히 나 같은 풍운아가 귀향하는데 호위대 같은게 필요하겠냐고 허세를 부렸나.
조제프에 이어서 동생들까지 차례로 달려들자 나폴레옹으로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가 출세하여 당당히 코르시카에 개선하기 전까지만 해도 썩 가족관계가 나쁜 건 아니었어도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나폴레옹을 환영해주고 좋아해 주는 관계가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내심 이제와서 그에게 구애하고 떠받들어주는 가족들이 눈꼴사나운 것도 사실이었으나-.
'뭐, 새삼스러운 이야기군.'
아무렴 그동안 그의 명성에 조금이라도 편승하려는 날벌레들이 좀 많았던가.
이제와서 가족들이 추가된다고 낙심할 만큼 나폴레옹은 유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다만 한가지 눈에 밟히는 게 있다면.
"잠깐, 어머니는?"
"아, 그게···."
조제프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뤼시앵이 기다렸다는 듯이 비아냥거리기를.
"그럼 한마디도 없이 대뜸 파리로 가버려 놓고서 출세했으니 어머니께서 기뻐하시며 환대하실 줄 알았어?"
"뤼시앵 오빠!"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출세한 건 출세한 거고 불효는 불효인 거지."
"···윽."
이번만큼은 천하의 나폴레옹도 가슴이 욱신거리는 걸 피할 겨를이 없었다.
집안의 가장이자 기둥이 되어주셔야 했을 아버지께서 고작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에 요절하고 장남조차 아직 변호사 공부 중이던 와중 집안을 부양하기 위하여 어머니께서 얼마나 허리가 휘어가며 고생하셨는지 내심 모르진 않았기에.
출세하면 모조리 용서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느냐는 뤼시앵의 비아냥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는 듯하였다.
"진심 어린 사죄면 될 거다."
툭.
맏형 조제프가 나폴레옹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뭐, 부모·자식 관계라는 게 다 그런 법 아니겠냐. 가끔 속을 썩일 때도 있는 거고, 집안의 자랑거리일 때도 있는 거고 다 그런 거지."
"···중간에 반항기 한번 없었던 모범생이 할 위로는 아닌 거 같은데."
"하하핫! 꼬우면 너도 모범생 하지 그랬냐. 아무튼 휴가도 널널하게 받았다면서? 매일같이 찾아뵙고 또 사죄드려."
그게 최고의 효도니까.
단순하지만, 무거운 조언에 나폴레옹은 다만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는 엉망진창이었다.
보나파르트가 최고의 인격자 조제프가 몇 번을 나서면서 뜯어말려도 야심만만한 여동생들은 모처럼 귀향한 오빠를 보자마자 어디 좋은 남편감이 없냐며 떼를 썼고, 남동생들은 절 파리로 데려가 달라며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여기까지라면 그가 파리에서 겪어온 날파리들과 별 다를 바 없었으나 이들의 차별점은 다름 아닌 피가 이어진 가족이라는 것.
그리고 코르시카는 이웃 간에 모르는 게 없는 작은 섬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가 코르시카에 머무는 동안 어디를 가건 무슨 주술이라도 부린 듯이 사방에서 인파가 모여들고 그 선두에는 탐욕과 출세욕에 눈이 까뒤집힌 동생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야 어머니와 화해하긴 글렀군.'
그나마 조제프 형이라도 없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했을까.
답답함과 실망감에 하루빨리 파리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와중.
"너, 파올리 씨가 잠깐 만나시자 던 데."
어느 날, 조제프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어떻게 생각하냐?"
"파올리라면···그 파스콸레 파올리?"
"그래."
분명 모르는 이름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지.
파르콸레 파올리.
코르시카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나폴레옹이 혁명 이후 고향에서 사실상 무기한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 수십 년 만에 귀향하여 열렬한 환대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나폴레옹 또한 내심 존경했었고, 지금도 싫어하지는 않지만-.
"조제프 형, 제발."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 만나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아니, 앞으로도 절대로.
"제발 그거라고는 말하지 말아줘."
"네가 생각하는 그게 뭔데?"
"내가 그걸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
"동생아, 난처하다는 건 알겠지만."
조제프가 숨을 골랐다.
"코르시카는 우리가 나고 자란 고향이잖아."
그래, 그래서 더더욱 문제인 거다.
"그냥 잠깐 만나는 것도 안 되겠니?"
나폴레옹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식으로건 이 문제에 대꾸해서는 안 되었다.
결국 이날 나폴레옹은 끝까지 침묵을 지켰고, 조제프 또한 더는 그에게 파올리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나폴레옹의 마음은 닫혀버린 지 굳게 오래였다.
'이 저주받은 섬에서 어서 나가야 해.'
물론 코르시카는 앞으로도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조국은 아니었다.
아무렴 파올리가 이제 와 왜 나폴레옹과 만나고 싶다고 말하겠는가?
당연히 군신 나폴레옹을 내세워 또 한차례의 독립전쟁에 나서려는 심산일 테고, 어쩌면 그가 거부하더라도 나폴레옹을 강제로 독립군 총사령관에 추대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파올리는 코르시카 공화국 패망 이후 프랑스 혁명 발발까지 지난 20년간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보내온 친영파.
설령 그에게 아무런 흑심이 없을지라도 파올리를 통해 런던에서 마수를 뻗어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설마 조제프 형이 나를-.'
아니, 그럴 리 없다.
바보처럼 사람만 좋은 조제프야 나폴레옹이 평소 코르시카의 영웅 파올리를 흠모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 또 덜컥 알겠다고 한 거겠지.
허나, 누군가를 인간으로서 존경하는 것과 동지로서 함께하는 건 엄연히 별개잖은가.
나폴레옹은 그날로 또다시 가족들에게는 아무런 말도 없이 프랑스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빌어먹을! 이놈이 어디 간 거야?!"
"모두 찾아라! 아직 섬 안에 있을 거다!"
"저기 우리 코르시카의 영웅 나폴레오네 부오나파르테를 보지 못하셨소?"
프랑스로 떠나는 날, 나폴레옹은 항구에서 다급히 그의 행방을 찾는 무리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코르시카처럼 작은 섬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이방인들이었다.
작가의 말
원래 장 들랑브르와 피에르 메생의 미터법 측량대는 1792년 자오선을 측정하기 위하여 바르셀로나와 됭게르크로 각기 떠나면서 1년간의 여정을 예상했으나, 직후 루이16세가 사형당하고 프랑스가 무림공적으로 전락하면서 무려 6년 간 고초를 겪게 됩니다.
하지만 작중에선 전쟁이 일찌감치 끝나고 스페인과의 관계 또한 조기에 회복 되었기에 2년만에 여정이 마무리 된 것으로 설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