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54)

파리 제국

"파리가 곧 프랑스다!"

내가 아비뇽에서 돌아온 이래로 파리는 또 한 번 아수라장이 되었다.

"독재가 아니면 죽음을!"

"애당초 우리가 저 왕당파 쓰레기들에게 왜 양보를 해야 한다는 거야!"

"그동안 급진당에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놓고서 이제 와서 뭔 딴소리냐!"

"배신자 로베스피에르를 죽여라!"

그리고 국민투표일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이 분노한 민중의 목소리는 더욱 커지기만 할 뿐 조금도 사그라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개중 일부는 바뵈프나 에베르의 사상에 이끌려서, 혹은 본래부터 에베르의 추종자였기에 모여든 이들이었으나-본디 한 줌에 불과했을 이들이 고작 며칠 사이 지금처럼 세를 불린다는 건 무리수가 많은 가정이고.

대다수는 파리의 수위권과 중앙집권을 넘어선 중앙독재를 지켜내기 위하여 모여든 파리주의자, 라고 보는 게 정확할 거다.

내가 이것저것을 양보해주겠다고 확답을 준 건 아니라도 저 사람들과 면담을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이들에겐 곧 배신이고 실망스러운 모습이었다.

하기야 관점에 따라선 프랑스 내셔널리즘에 정면으로 도전한 격이니 그럴 법도 했지만.

"파리는 프랑스의 일부일 뿐이다!"

그 반대편에 선 이들도 적지 않았다.

"독재는 어떤 형태에서건 독재일 뿐이다!"

"더는 저 멋모르는 폭도들이 날뛰게 둘 순 없다!"

"열심히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남의 재산이나 탐내는 무장 강도가 무슨 얼어 죽을 평등이냐!"

"혁명의 조타수 로베스피에르 동지를 결사옹위하자!"

다만-이들도 파리의 수위권을 부정한다거나 옥시타니아에 동정적이어서 반대편에 선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다수의 경우 지난 보통선거제 이래로 거듭되어온 상퀼로트들의 폭주에 질색한 우파진영이거나 나 로베스피에르 개인을 흠모하고 광신적으로 지지하기에 그 반대편에 섰을 뿐.

내가 아비뇽에서 제안했던 세 가지 모델 중 파리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야 어떤 식으로건 타협한다는 것 자체가 왕정 시절부터 이어져 온 파리의 절대적인 수위권을 훼손하게 될 테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야기가 복잡해졌군."

마담 카미유의 카페를 찾아온 당통은 오히려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형식적인 절차로 끝날 줄 알았더니 다가올 국민투표가 아주 팽팽해지겠어. 안 그런가?"

"···그래서 즐겁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야 당연하지. 자네가 알아서 지는 쪽에 붙었는데 내가 싫어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

아, 덧붙여서 나는 이기는 쪽에 남을걸세.

당통이 덧붙였다.

졸지에 이번 국민투표가 왕정 존속 여부를 넘어선 좌우익간 정면충돌로 화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그간 언제나 좌익에 치우쳐져 있던 나와 내 지지자들은 지난 아비뇽 방문 이래로 우익에 치우쳤고.

뭐, 이번만큼은 좌익 측 담론이 파리독재였으니 별수 없는 일이긴 했는데.

"글쎄, 그거야 모르는 일 아니겠나."

파리가 곧 프랑스라고 하지만 프랑스 인구의 과반수가 수도권에 모여 사는 건 아니다.

물론 유의미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사실이고, 그동안 유권자 대다수가 파리 시민이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건 우리의 행정력이 지방에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지, 지방에 유권자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지방까지도 오롯이 우리 혁명정부의 수중에 들어왔다.

보통선거권의 은총 아래 옛 농노들 또한 당당하게 한 표씩을 행사하며 의사를 표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 누가 승자고 패자가 될지야 두고 봐야 할 일이지.

중요한 건 다가올 국민투표에서 어떤 식으로 패하고 다가올 총선에서 어떻게 승리할까지, 아비뇽으로 달려가던 그 순간부터 두 번 다 승리를 가져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안 했다.

"결국 모든 건 나 하기에 달린 거 아니겠는가. 물론 파리와 원내의 분노를 산 건 뼈아프지만, 아직 내가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야. 3달 후면 이 맹목적인 분노도 조금은 가라앉겠지."

"이 친구야. 자신감이 넘치는 건 좋지만 그건 아닐세."

그제야 당통이 정색했다.

"잊지 말게. 우리는 정치가이기 이전에 혁명가고, 파리는 혁명의 심장일세. 저 혈통 잘 타고난 기사 나으리들이라면 모를까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우리가 파리를 거스른다는 건 그렇게 가볍게 다뤄도 되는 문제가 아니야."

"이거 뜻밖인데. 지금 날 걱정해주고 있는 건가?"

"그야 당연히 걱정해주고말고. 자네의 지도력이 도전받는 정도면 모를까 자네가 몰락하면 나는 물론이고 현 혁명정부 자체가 산산조각이 날 거야. 정녕 혁명의 배신자로서 역사에서 지워지고 싶은 건가?"

탁.

당통이 내게 설탕이 가득 들어간 커피 한잔을 양보하며 덧붙였다.

"원기나 양껏 보충하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요즈음 승승장구하면서 자존감이 흘러넘치고 있는가 본데, 패기 있는 것과 만용을 부리는 건 다른 거야. 난 이 바닥에서 자네를 가급적 오래오래 보고 싶네."

"그렇다면야 감사히 받도록 하지."

"···이 친구 이거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당통은 끝내 혀를 차면서 자리를 떠났다.

흠, 그 정도인가?

[그야 당연하지.]

왜? 연방제나 합중국이면 몰라도 지방자치나 공동수도 정도 가지고 너무 과잉 반응 아니야?

한국도 서울 공화국 소리 듣고 살지만 그만큼 과도한 중앙집중 해소하려는 시도나 구상도 많았는데.

[그런 수준이 아닐세.]

···어, 진짜로 심각한 모양이네.

[파리가 왜 프랑스인지 아나? 파리 백작 위그 카페와 그의 후손들이 지난 천년에 걸쳐 정복한 영토들을 뭉뚱그려 프랑스 왕국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네.]

그러니까 도시국가 로마가 정복한 영토를 로마 제국이라고 부른 것처럼?

[그래. 저 옥시타니아나 브르타뉴 등은 이 파리 제국의 속주들인 셈일세. 다시 말해서 이건 자네가 생각하는 지방분권 같은 게 아니야. 차라리 동맹시들과 식민지 문제에 가깝지.]

···구주천지복잡기괴.

아니 이건 뭐 조선은커녕 고려도 아니고 통일신라적인 민족관 아닌가.

봉건 제국 소리 듣던 고려도 전쟁을 연달아 치르면서 나름 단단한 동질 의식이 만들어진 거로 알고 있는데 여긴 그렇게 주구장창 전쟁했다면서 왜 아직 이 단계야.

벨기에 가상국가 타령할 게 아니라 이제부터 파리를 넘어서 전 프랑스를 아우르는 「프랑스 민족」부터 재발견도 아니고 창조해내야 할 판이잖아.

괜히 당통이 정색한 게 아니었구만.

"""평등파 만세! 파리독재 만세! 바뵈프 만만세!!!"""

그리고 저 친구들이 괜히 악을 악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지금껏 파리가 곧 프랑스였고 다시 프랑스가 곧 파리 제국이었다니 맙소사.

···어, 잠깐만. 이럼 21세기인 박민혁이 옥시타니아 문화나 언어를 알지 못하는 건 파리 제국의 식민지 동화정책 탓이라고 해석해야 하는 건가?

갑자기 막 의욕이 솟구치면서 입맛이 싹 도는데?

모두 기립하시오!

[이 친구야, 제발 좀···!]

"혼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시는 거예요?"

때마침 귀에 익은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마리 테레즈 공주였다.

한창 성장기라서 그런가, 아이 티는 온데간데없이 슬슬 발랄한 중학생다운 모습이 엿보이긴 하는데-.

"···공주님께서 어쩐 일로 이런 누추한 곳에?"

그 전에 호위는 뭐 하고 있는 거야.

암만 왕정 폐지가 눈앞이라지만 그래도 중요 인사인데 이렇게 시가지를 막 쏘다니게 해도 되나.

하지만 마리 테레즈 공주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길.

"정리해고 당한 실업자가 대낮부터 갈 곳이라고 해봐야 뻔하잖아요? 당연히 산보 나온 김에 카페에서 커피나 한잔 하러 왔죠."

"네?"

"가출청소년이라고요."

[···맙소사.]

오, 주여.

정리해고한 당사자에게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깡다구라니.

아니 그보다도 앞으로 나흘간은 공주님이신데요.

왕정 폐지가 기정사실이라 다들 이미 왕실 취급도 해주지 않고 있지만!

암만 그래도 그렇지 호위 책임자는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농담이고 몰래 도망쳐 나왔어요."

"···농담이라고요?"

"네. 지금쯤 다들 한창 찾고 있을 테니 한 한 시간 정도 놀다가 잡혀주려고요."

마리 테레즈 공주가 키득대며 덧붙였다.

···지금 날 놀려먹은 거 맞지?

[아마 맞는 것 같은데.]

나원 기가 막혀서.

깡다구가 좋은 건 좋은 거고, 왜 이 아가씨는 볼 때마다 날 이렇게 편하게 대하는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호의를 살만한 일은 전혀 안 했던 것 같은데.

···아니 잠깐.

[또 무슨 일인가?]

호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동안 프랑스가 파리 제국이었다면 부르봉 왕실은 파리 제국의 황제였다는 소리잖아.

그런데 왜 지방의 식민지인들이 파리 식민제국의 수장을 좋아하는 거야?

무슨 악의 카리스마를 추종하는 스톡홀름 증후군 피해자들인가?

[그야···부르봉 왕실은 파리를 부담스러워했으니까.]

마치 조선왕들이 사대문 대감댁들을 부담스러워한 것처럼?

[그것과도 조금 다르네. 태양왕 루이 14세는 파리를 떠나고 싶어 했거든. 베르사유가 그렇게 만들어진 계획도시였고, 베르사유 궁전은 천도사업의 결실이었지. 그래서 혁명 이후에야 베르사유의 왕실을 파리로 납치해왔었고.]

잠깐만, 납치해왔다고?

[그래, 수천명의 아녀자들이 베르사유로 쳐들어가서 납치해왔지. 아무튼 공식적인 유일수도는 파리였으니까.]

어, 그러니까 실질적인 행정수도 노릇은 했지만 공식적인 천도 선언은 못 했고. 그것만으로도 기존 수도권 시민들의 눈총을 산―.

···세종시?

베르사유 궁전은 사실 정부세종청사였다?

"공주님."

하지만 덕분에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은 실마리가 보인 것 같다.

"네에, 무슨 일이신가요?"

"혹시 그 다음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겁니까?"

무엇의 다음인지야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다.

언급하지 않아도 어련히 알 테니까.

"그야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없죠."

마리 테레즈 공주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누구는 죽여야 한다고 그러고, 또 누구는 내쫓아야 한다고 그러고, 다들 우리를 가만히 두지 못해서 안달인데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있나요."

"···음."

전부 실제로 논의된 방안들이니까 할 말이 없네.

그냥 시민 루이 오귀스트 일가로 조용히 살게 두면 되지 않나, 싶었는데 그렇게 그냥 놔주려는 친구들이 얼마 없더라고.

이것도 파리만 그런거고 저 너머 지방에는 아직 왕실 존속이나 왕직은 폐하더라도 귀족으로서의 작위는 남겨달라는 의견도 많긴 한데.

"그럼 파리를 떠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뭐야, 수상 아저씨도 저흴 대서양 너머로 내쫓으려는 거에요?"

"아뇨."

장난스레 덧붙였다.

"베르사유 말입니다."

순간 마리 테레즈 공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처음에는 곤혹스러워하고, 그다음에는 기뻐하더니 이내 의심스레 눈살을 찌푸리며.

"지금 절 떠보려는 거에요? 막 잡아넣으려고?"

"아뇨, 진심입니다."

"거짓말하지 마요. 아저씨들이 이제 와서 우릴 베르사유궁에 돌려보내 줄 리가 없잖아."

"베르사유 궁전이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뭐, 중화민국 수립 이후 청나라 소조정이나 이탈리아 통일 이후 바티칸 시국처럼 베르사유 궁전에 국한된 소조정 같은 걸 만드는 것도 한가지 방안이겠지만 그건 나 혼자서 결정할 방안도 아니다.

그 청나라 소조정의 결말이 만주국이었으니까 썩 좋은 방안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게 지금 필요한 건 사치의 절정이라는 베르사유 궁전이 아니다.

"파리 시민이 아니라 베르사유의 시민이 되어보시는 것 어떻겠습니까?"

행정수도 세종-이 아니라 베르사유시.

태양왕 루이 14세가 파리독재를 무너트리고 전 프랑스를 두루 다스리기 위하여 건설한 계획도시.

혁명 이래로 유명무실해졌다고 하지만 아직 바스티유 습격 이래로 만 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베르사유시 또한 혁명 전에 비하면 쇠락했을지라도 아직까진 대도시의 기능이 유지되고 있을 거라는 것.

그 베르사유시에 옛 부르봉 왕실이 돌아왔다는 상징성이 필요하다.

파리가 곧 프랑스라는 저들의 독선을 정면으로 반박하려면 이보다 알기 쉬운 증거도 달리 없을 테니까.

"만일 공주님께서 제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신다면, 제 모든 직권을 사용하여 정착을 후원해드리리라 약속해드리지요."

"···지금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마리 테레즈 공주가 입술을 비죽 내밀며 당통이 내게 양보했던 커피잔을 채갔다.

호록.

아악! 저게 얼마 만의 슈가커피인데!

삐뚤어질 테다! 저주하겠어!

언젠가 지옥의 솥에 떨어지면서 이 박민혁의 분노를 떠올리거라!

[그러게 진작에 마시지 그랬나.]

당신이 설명하는 거 듣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잖아!!!

그다음엔 저 공주님이 쳐들어와서 정신이 쏙 빠졌었고!

"그렇지만 뭐-파리보다는 낫겠네요."

탁.

텅 빈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마리 테레즈 공주가 배시시 웃었다.

그런다고 용서해줄 생각 없으니까 돌아가.

"우선 아바마마나 어마마마께도 이야기해볼게요. 커피 잘 마셨어요."

"···예, 도움이 되었다면야 영광입니다."

그 길로 마리 테레즈 공주는 알 수 없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마담 카미유의 카페를 떠났다.

지금 왕궁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 맞겠지?

[···아마도?]

···그래, 솔직히 나도 못 믿겠다.

저 말괄량이 공주님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 게 어디 하루 이틀이어야지.

나중에 직접 책임자에게 확인을 해봐야지, 그전까지는 완전히 슈뢰딩거의 공주님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베르사유 정착을 추진해 보려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저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게 해야지 안 그래도 아비뇽 다녀온 거로 사방에서 공격당하고 있는데 이것까지 주도했다간 파리 시민들과 철천지원수가 될 거다.

혹시 저쪽에서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고 해도 누명이라고 철저히 잡아떼야지.

솔직히 루이 오귀스트 일가에게 거기까지 고려할 머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다행히 지금은 프로방스 백작이 외부 장착 정치 회로로 붙어있으니 별문제 없을 거다.

오히려 문제가 있다면-.

[이 참에 루이 오귀스트를 잡아죽이려는 평등파겠군. 꼭 에베르가 아니라도 다들 루이 오귀스트 일가가 파리를 떠나지 못하게 붙잡으려 들 테고.]

아니, 내 달콤한 커피다.

내 바닐라 라테 내놔!

[진정하게, 이 빨갱아. 어차피 저걸 마셨어도 자네가 기대하는 그 맛은 아니었을 거야!]

그걸 아니까 더 빡치는거라고!!!

이런 망할 18세기!

무슨 커피가 종류별로 콩 볶은 물맛밖에 없냐!

아악, 나 돌아갈래!

날 21세기 현대문명으로 돌려보내 줘!

***

오스트리아 빈.

"···한심한 놈들 같으니."

하아-.

프란츠 2세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저들끼리 사분오열하여 다투느라 바빠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는 말인가?"

"예, 폐하."

"그러게 그냥 혼란만 일으키라니까 무슨 분리주의를 건드린다고."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녀석.

카이저는 불현듯 이번 음모를 주도했던 메테르니히 가문의 젊은 애송이를 떠올렸다.

분명 큰 그림을 그리는 솜씨는 나쁘지 않은 듯한데, 이렇게 잔가지를 정리하는 재주가 부족해서야 원.

"이만 분리주의는 놓아주라고 전하게."

경험부족이라고 단정 지은 애송이 카이저가 덧붙였다.

"어차피 런던에서 나폴레옹을 놓친 마당에 무슨 재주로 피를 흘릴텐가. 기껏해야 사소한 소란 밖에 못 일으킬 텐데. 괜히 헛고생하지 말고 교황청과 협조해서 불신을 불러일으키는데에만 집중하라고 하게."

"명 받들겠나이다, 폐하."

외무장관이 고분고분히 고개를 조아렸다.

늙어빠진 카우니츠가 굴욕외교로 실각하고 내로라하는 권신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사임하거나 책임을 지고 실각해서일까.

이제 궁전에서 더는 젊은 카이저를 얕잡아보는 권신은 온데간데없었다.

"···비참하군."

그를 찾아오는 손님들 또한 온데간데없어져서 그렇지.

아무렴 그렇게 찾아와봐야 대접받을 수 있는 게 없는데 뭣 하러 손님들이 그를 찾아오겠는가.

접객비를 아껴가며 배상금을 갚고 신병을 조련하는 판국이었으니 저들을 탓할 것도 없겠으나, 내심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끝은 창대할지라."

빠득.

프란츠가 이를 악물었다.

부국강병.

오직 그것만이 살길이었다.

적들을 모방하고, 최대한 많은 동맹을 모으며 반대로 적들이 힘을 합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것만이 제국을 구하는 유일무이한 길이었다.

그러니 서두를 필요는 없으리라.

서두름이란 급진주의의 다른 말일지니.

그의 적들이 눈먼 황소처럼 달려 나간다면, 저 황소가 제 풀에 지쳐 무너질 때까지 끈덕지게 다리를 거는 것이야말로 그의 투쟁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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