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54)

신혼일지

볼록.

"어머나, 어머나. 세상에."

어느덧 둥그러진 배 위로 튀어나온 갓난아이의 발 모양에 뒤플레 아가씨-가 아니라.

엘레오노르 부인이 배시시 미소 지었다.

로베스피에르 부인은 어감이 영 별로야.

"슬슬 식사 시간이라 얘가 출출해졌나? 뭐라도 간식거리를 가져올까요?"

"괜찮아요. 지금은 보고만 있어도 즐거우니까. 아, 저는 건포도로 부탁드릴게요."

"기꺼이 명을 받들지요, 마담."

우웩.

[입 닥쳐, 박민혁.]

그래서 계속 닥치고 있었잖아.

종일 집에 처박혀서 알콩달콩 대는 거 봐줬으면 됐지 뭘 더 바래.

오히려 이 경우엔 현부양랑(賢父良郞)을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내가 감사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참나···그래, 고맙네. 화목한 신혼생활을 위해줘서. 이만하면 됐나?]

옹냐, 고맙다.

설마하니 남들은 한창 투표하고 있을 총선당일에 집에서 시간 보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물론 몸만 집에 있는 거지 총선승리를 위해서 이런저런 설계를 깔아두긴 했는데, 18세기 프랑스에 떨어지고서 이렇게 오랫동안 쉬었던 적이 처음인지라 슬슬 몸이 근질근질거리려한다.

매일같이 새벽처럼 일어나서 출근하고 한창 싸우고 일하고 나면 해가 저문 다음에나 퇴근해서 하숙집으로 돌아오거나 추가적인 정치공작을 하거나 가끔 회식에 나가거나가 일상 루틴이었으니 오히려 그동안이 비인간적이었던 건 맞는데···.

그래도 그때는 숨돌릴 틈 없는 대신에 내가 할 일이 있었잖아.

요즈음은 진짜로 가끔 머릿속으로 토의하거나 손님들 만날 때 말고는 뭐 할 일이랄게 없으니 아주 죽을 맛이다.

집주인 놈아, 진짜 아무 곳에나 부탁해서 네 머릿속에 인터넷 회선 깔아주면 안 되겠니?

하다못해 너튜브 같은 거라도 있으면 이렇게 지겨워죽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런 건 없지만 대신 명상이라도 해보는 거 어떤가? 아니면 기도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잠시 마음을 어지럽히는 미혹을 덜어내고 내면의 자신과 직시하여-.]

미혹 그 자체인 나날을 보내고 있는 새신랑 놈이 아주 지랄염병을 하고 있네!

내가 인간미를 뽐내자고 했지 언제 멜로 드라마 찍자고 했냐?!

이건 뭐 우리 기계가 달라졌어요도 아니고!

아니 잠깐, 나중에 육아는 어쩔 거야?

우리 집 형편에 보모를 쓰지는 않을 것이고, 설마 나한테 떠넘길 생각은 아니겠지?

[···좀 같이 해주면 안 되겠나?]

네 자식이지 내 자식이냐!

책임 없는 쾌락도 정도가 있는 거지 이놈이 아주 날로 먹으려고 드네?

아이고! 내가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양심 출타한 놈이랑 운명공동체로 묶이게 되었을꼬!

[그거야 국보ㅂ-.]

입 닥쳐, 막시밀리앙.

"첫째는 사내아이라면 좋겠네요."

엘레오노르 부인이 방긋방긋 미소 지었다.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쏙 빼닮은 막시밀리앙 2세, 어때요?

"음, 이런. 저는 당연히 첫째는 당신을 닮은 딸아이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어머나, 왜죠?"

"그야 저랑 닮은 사내놈이 이렇게 얌전할 리가 없잖습니까."

호우, 자기 객관화 잘되는 거 보소.

나 모르는 사이에 양심과 눈치를 등가교환 하셨나 봐?

[입 닥쳐, 박민혁.]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저 같은 놈이 둘씩 있는 것보다는 당신이 두 명 있는 게 세상이 조금 더 화사해지지 않겠습니까. 저로서도 어린 막시밀리앙을 당해낼 자신은 없고요."

"음, 그거야말로 모르는 일이죠."

틱.

엘레오노르 부인이 장난스레 우리의 코끝을 건드렸다.

"저도 좋아하는 사람 앞이라 내숭 떨고 있는 줄 어떻게 알고 단정하세요? 저야말로 아직 어린 엘레오노르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데."

키득키득거리는 부인님.

오, 솔직히 귀엽-.

[입 닥쳐.]

넵.

순애만세.

"그럼 이렇게 합시다. 작은 막시밀리앙이 나오면 당신이 더욱 사랑해주고, 작은 엘레오노르가 나오면 제가 더욱 사랑해주는 거로."

"어머나. 그렇다면 작은 막시밀리앙과 엘레오노르가 같이 나오면 어쩌죠?"

"그 경우에는-."

어쩌긴. 뭐 빠지게 고생해야지.

[입 닥치랬지.]

···이럴 거면 그냥 엑소시즘 해주면 안 되냐?

진작에 단두대 끌려갔을 놈 이 악물고 여기까지 살려놨더니 서럽다, 서러워.

"우리의 지극한 사랑을 질투한 아기천사들이 저흴 곤란하게 만들려고 앙증맞은 장난을 친 거겠지요."

집주인 놈이 덧붙였다.

"그러니 우리 누구 한 사람 서운해하지 않을 충만한 사랑으로서 아기천사들을 놀라게 해 줍시다. 우리 아이들의 앞날에 충만한 은총과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기를."

"어머나, 어머나."

엘레오노르 부인이 행복에 겨워 입을 가렸다.

뎅그렁-.

때마침 저 너머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아주 꿀이 떨어지길래 집주인놈 대가리에서 나는 소리인 줄 알았더니 고막이 울리는걸 보면 진짜 종소리다.

날이 저문 거 보면 아마 투표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겠지.

하도 청렴결백하게 산 탓에 수상씩이나 되어서 다소 교외에 치우친 곳에 신혼집을 잡아서 이게 그 종소리가 맞는지는 애매하긴 한데-나참.

신혼일지 팔아서 번 돈도 결국 선거비용으로 써버릴 뻔했으니 원.

카미유와 당통을 비롯한 유부남 동지들이 입을 모아서 앞으로 돈 나갈 일투성이일 텐데 헛짓거리 하지 말라고 꾸짖어서 그렇지, 아니었으면 집주인 하자는 대로 그냥 전액 공금으로 돌렸을 거다.

청렴결백도 정도가 있는 거지 이건 뭐 돈과 원수진 사람도 아니고.

[그거야 나도 할 말 없긴 한데. 따지고 보면 무화폐경제 타령하는 자네가 오히려 나보다도 돈과 원수졌어야 한 거 아닌가?]

···씁.

이건 진짜로 반박할 말이 없네.

그렇지만 선생님, 21세기 한국인은 원래 다들 내츄럴본 자낳괴란 말입니다!

너도 진짜 21세기 자본주의 소비 천국에서 살아봐라!

자낳괴 안되게 생겼나!

똑똑똑.

"이런, 손님이 오셨군."

봐봐.

진짜 호랑이 아니랄까 봐 투표 끝나자마자 바로 입질이 오네.

집주인 놈에게 모처럼 몸을 건네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네에, 다녀오세요."

배시시 미소 짓는 엘레오노르 부인.

흠, 역시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미용인가.

갈수록 윤기가 돌고 농염해지는 것이-.

[이봐.]

넵.

순애최고.

덜컥.

"아, 동지인가."

"예. 좋은 저녁입니다, 동지."

문을 열자 나타난 건 요즈음 나를 대신해서 지지자들을 독려하고 담론을 주도하던 나폴레옹.

조금 전까지도 한창 투표를 독려하며 다녀서 그런지 모처럼 장교정복이 아니라 평범한 정장 차림이었다.

"보아하니 짧은 이야기는 아닐 듯 한데. 일단 안으로 들어오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부인이 계시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 그냥 여기서 서서 할 텐가? 동지가 편할 대로 하시게."

가벼운 농담이었다.

솔직히 그리 무거운 이야기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짧게 하겠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폴레옹이 단언했다.

···흠, 괜히 불편할까 봐 그러나?

신혼집이 썩 넓지는 않아도 거실이랑 접객실 정도는 따로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총각이 남의 신혼집에 막 들어가고 싶을리가 있나. 숫총각 아니랄까봐 뭘 모르는군.]

내 서른 넘어서 첫 경험한 아저씨한테 듣고 싶지는 않수다.

"우선 이번 총선도 무난하게 원내 다수당을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런데?"

우선이라는 건 뒤에 따라올 말이 하나 더 있다는 거잖아.

"예, 그것이-."

그러자 나폴레옹이 난처하다는 듯이 덧붙이기를.

"···투표 직전에 마담 롤랑이 자크 루 동지와 의기투합하는 바람에 그만."

"설마 자크 루 동지가 탈당을 희망했나?"

"그 반대입니다. 마담 롤랑께서 급진당에 힘을 실어주기로 하셨습니다."

···?

"그럼 좋은 일 아닌가?"

아무튼 지지자가 늘었다는 소리잖아?

내가 도통 이해가 안 가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되려 나폴레옹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뭐가 문제인데?

[···자네 설마 마담 롤랑이 누구인지 모르는 건가?]

내무장관 장 마리 롤랑 드 라 플라티에르의 부인이잖아.

나와는 정반대로 자유시장 신봉자여서 자주 다투기도 했는데, 혁명정부에서는 보기 드문 실무파고 경제학자로서 이런저런 조언도 많이 해줘서 그냥저냥 좋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튼 라자르 카르노와 더불어서 내 산업혁명 구상을 긍정해준 몇 안 되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왜?

[그녀도 혁명가니까. 원래 대외활동은 별로 없는 사람이긴 했네만.]

···어? 그럼 페미니즘 혁명가야?

[아니, 그건 아닐세.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한 적은 없거든. 다만 본인은 정치참여에 아주 욕심이 많고, 또 혁명가로서 모임에서 본인의 생각을 뽐내는데 거침이 없는 여성일세.]

흠-그러니까 여성권 문제에 아주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시대적 한계에 순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

자크 루 동지는 반대로 예전부터 여성참정권에 관심이 아주 많았던 사람이니까 의기투합하는 것도 말이 되고.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또 뭔가?]

이 시대의 여성이 그렇게 유명하다는 소리는 사교회에서 날고 기는 사람이라는 거잖아.

심지어 혁명가로서 사상을 드러내는데 거침이 없었다면 나름 혁명동지들이 모이는 굉장히 유명한 사교회겠지? 

그런데 왜 지난 몇 년 사이 단 한 번도 우리한테는 초대장이 오지 않은 거야?

[·········.]

···아하.

오케이.

"동지가 무엇을 근심하고 있는지야 알겠네."

우리 집주인 놈이 노총각에 인기가 없어서-도 물론 있겠지만 그래도 수상씩이나 되어서 한 번도 초대장이 오지 않았다는 건 근본적으로 정치적 이념이 달랐던 거겠지.

그 롤랑 장관도 제한선거권과 완전 자유시장을 지지하는 전형적인 부르주아지였으니 아마 마담 롤랑도 비슷하거나 아예 똑같거나 할 거다.

나폴레옹이 걱정한 것도 아마 이거랑 성관념 때문이겠지.

이번에 호감을 드러낸 건-아마 신혼일지로 가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 덕분 아닐까, 하고 짐작은 대강 가는데 여기서부터는 직접 만나봐야지 알 일.

"그렇지만 우리가 대변할 수 있는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더 많아지고, 넓어진다는 건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혁명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 말이야."

"물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아.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나폴레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베스피에르 일가의 신혼집에 고정된 그 시야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야 불 보듯 뻔했다.

"···혹시 공주님이십니까?"

"아직은 아니네만, 그렇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있네."

나 말고 집주인 놈이.

"그럼 이야기는 여기까지인가?"

"아, 아닙니다. 우선 당내 강경 인사들이 공식적인 탈당을 선언했습니다. 이번 총선으로 원내에 입성할 바뵈프의 평등파에 합류할 작정인 거겠지요. 따라서 개헌선 사수는 어려울 듯 보입니다."

"그거야 다들 각오한 바 아니겠는가."

구심점 노릇을 하던 에베르가 사라졌으면 걔넨 당연히 바뵈프에게 모조리 흡수되겠지.

거기에 생쥐스트가 끼어있던 건 다소 유감이지만-애초에 걘 내 지지자나 동지라기보단 숭배자고 광신도였으니 이 기회에 떨어질 수 있다면 솔직히 내 쪽에서 환영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강수를 두면서까지 개헌선을 잃기야 했지만, 대신에 프로방스 백작이 성공적으로 농민들의 분노를 달래며 성심당을 원내 입성시켰으니 내가 원했던 정치 구도는 대강 완성된 거고.

여기에 생각지도 못했던 마담 롤랑의 지지 선언이 보여준 지지층 확장 가능성을 보면 오히려 남는 장사한 거지.

이참에 가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부각해서 다음 총선에서는 여성권을 아젠다로 써보는 것도 생각해봐야겠네.

물론 쉽진 않겠지만-뭐 언제는 쉬운 길만 걸었던 것도 아니니까.

"늦은 시간까지 수고가 많네. 계속 서 있게 만드는 것도 미안한데, 이만 돌아가 보게."

"아, 아닙니다. 동지. 군인이 부동자세가 뭐가 그리 힘들겠습니까?"

아니, 내가 직접 해보니까 진짜 힘들던데.

계속 보고 있기 미안해서 그러는데 안에 들어와서 앉아있을 거 아니면 돌아가 주지 않을래?

하지만 나폴레옹은 내 마음의 소리 따윈 들리지 않는 듯 한참을 주저하며 서 있더니.

"저어, 위원장 동지."

대뜸 내게 질문을 던졌다.

"가정을 꾸린다는 건 어떤 느낌입니까?"

"···가정이라."

이건 아무리 봐도 초열지옥에서 사는 나보다는 에덴동산에서 하루하루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계신 우리 새신랑이 답해줘야 할 것 같은데.

[커흠!]

"글쎄, 이 기분을 도대체 어떻게 짧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네만-."

집주인 놈이 한참을 어려워하다가 대꾸하기를.

"평범한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일세."

"···평범한 사람."

"그래. 이제서야 비로소 어디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내가 될 수 있었던 듯하네."

집주인 놈이 멋쩍게 웃었다.

나폴레옹은 대꾸하지 않았다.

백마 탄 초인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라는 듯이 한참을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

롤랑 장관 저.

"그, 여보? 혹시나 해서 말인데-."

롤랑 장관이 절절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화났소?"

"화를 내다니요, 숙녀로서 어찌 그런 상스러운 일을."

마담 롤랑이 우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만-그렇네요. 저는 한창 배가 불러오고 헛구역질이 날 때 혼자서 아등바등했었는데. 역시 대혁명 이래로 세상이 참 많이 바뀐 것 같네요. 안 그런가요, 무슈 롤랑?"

"·········."

난 몰라.

롤랑 장관은 더는 뭐라 반박하지도 못하고 창백하게 질려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일상적인 짜증과 독선에 체념해버린 부하들에겐 감히 상상조차 못 할 광경이겠으나, 그들 롤랑 일가에서는 이는 일상적인 풍경에 불과했다.

그야 타고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고질적인 성격적 결함 탓에 20살 연하의 아내 덕에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소리까지 듣는 그가 무슨 수로 아내에게 큰소리를 친다는 말인가.

그녀는 그의 아내이기 이전에 도저히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공격적이고 히스테리로 가득한 그의 연설과 저서들을 곁에서 하나하나 정성껏 교정하여준 은인이었는데.

"혁명은 참 많은 것을 바꿔왔었죠."

마담 롤랑이 슬쩍 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처럼 거리를 가득 메운 폭도들.

그들 일가처럼 교양있는 문명인이라면 이해하지도, 결코 이해해서도 안 되는 야만을 퍼트리는 이 사회의 종양들.

저들이 끝내 권력의 핵심에 접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울고 또 로베스피에르라는 이름을 저주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나 뼈를 깎으며 노력하고 또한 교양을 쌓아도 누군가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야 간신히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데.

저 천박한 바르바로이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도 단지 성년이 되었다는 이유로 당당히 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부조리하다는 말인가.

저 폭도들의 야만성과 모험주의가 만들어갈 나라야 누구나 불 보듯 뻔한 것인데.

그날 이래로 로베스피에르라는 이름은 그녀에겐 같은 하늘 아래에서 공존할 수 없는 원수가 되었다.

제 독재 권력을 위하여 그들 모두가 꿈꿔온 이상적인 신체제를 파괴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폭도들에게 혁명을 팔아넘긴 더러운 카이사르로서.

하지만-.

"아니면, 그가 바꿔놓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작금의 프랑스가 바르바로이로 전락하였는가?

혁명이란 저 아무것도 모르는 약탈자들이 제 악업을 정당화하기 위한 공허한 악업으로 전락하고야 말았는가?

아니,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공화국의 독재관으로서 훌륭히 포퓰리즘을 견제하였고, 최종적으로 제 권력을 포기하면서까지 포풀라레스(Populares)의 독주를 성공적으로 저지하고 옵티마테스(Optimates)를 보호하여 공화정으로서 이상적인 다당제 의회정치를 설계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저 위대한 독재관에게 매혹되었다.

아니, 비단 그녀만이 아닌 한때 독재관의 탄생을 한사코 거부했던 공화주의자 상당수가 그러했다.

결과적으로 저 로베스피에르는 그들이 장차 수십 년, 아니 어쩌면 수백 년에 걸쳐서 이뤄질 거라 여겨졌던 무수한 구상을 불과 2년 사이에 해치우고 임기를 마치는 즉시 내려왔으니까.

그리고 그는 이를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서, 라고 설명했다.

그의 위대한 정치경력을 위해 아내를 희생시키는 대신, 아내를 위하여 제 정치경력 일부를 희생시켰다.

그런데 왜 그보다 위대하지도 못한 저 양반은.

"저도 이제 그만 그림자에서 걸어 나오려는데, 역시 안될까요?"

마담 롤랑이 남편을 돌아보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러나 롤랑 장관은 차마 저 아리따운 미소에 기뻐할 수 없었다.

다만 서늘한 전율과 식은땀만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오른손에 쥔 누군가의 화사한 신혼일지가 롤랑에겐 이날따라 사신의 명부처럼 보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