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권유
며칠 후 마담 카미유의 카페.
펄럭.
"저희 사업 하나 합시다."
마담 롤랑이 탁상 위에 멋들어진 글씨로 쓰인 계약서를 내밀었다.
···잠깐 보자길래 뭔가 했더니 엄청나게 서두르시네.
아니 그보다도.
"전 사업 같은 거 하지 않습니다만."
"아하, 청렴결백하셔야 하니까요?"
마담 롤랑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제가 그 신혼일지의 발행권을 사버리면 그만이겠네요. 인세는 꼬박꼬박 드릴 테니까 불만 없으시지요?"
"···무슨 출판사라도 차리실 작정입니까?"
"어머나, 명석하기도 하셔라."
짝짝.
"덕분에 이야기가 빨라지겠네요. 네에, 바로 그거랍니다. 기왕에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는데 이대로 사라지게 두면 아쉽잖아요? 이참에 아예 잡지사를 차려서 여인들이 좋아할 만한 글이나 광고들을 잔뜩 실으려고요."
오···.
[제법 날카로운데.]
그렇지?
우리야 미래지식을 알고 있으니까 당연한 거지만 그날 잠깐 이야기 나눈 정도로 여성지를 생각해내고 또 이걸 오늘날 파리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로베스피에르 일가의 신혼일지와 연결 지은 거 보면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다.
아니 그런데 잠깐.
[또 뭔가?]
이 시대에 잡지라는 게 있었어?
선전지는 구태여 분류하자면 신문 아닌가?
[···우릴 무슨 원시인인 줄 아는 건가? 당연히 있지. 꼭 정치적인 목적의 선전지가 아니라도 저기 런던의 젠틀맨스 매거진(Gentleman's Magazine) 같은 종합지는 벌써 60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네.]
그래?
난 또 잡지라는 것 자체가 저 마담이 처음 생각해낸 건 줄 알았지.
그렇다면 잡지라는 건 이미 진작에 유행하고 있었고, 아예 여성들만을 겨냥한 여성지가 없었던 거구나.
뭐 아무튼.
"그런 이유에서라면야 기꺼이 동참하고 말고요."
솔직히 나나 집주인 놈이나 재테크 경험이 0이거나 마이너스이거나 한 사람들인데 뭘.
그렇다고 별 관심 없어 보이는 카미유나 다른 친구들을 끌어들이기도 좀 그렇고, 혼자 내뺀 주제에 코뮌 건국 이래로 한창 바쁠 친구들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도 뭣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 방면에 관심도 많고, 재테크 경험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을 마담 롤랑에게 힘을 실어주는 게 맞겠지.
어차피 돈벌려고 신혼일지 찍어냈던 건 아니니까.
"다만-사업방침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그 정도라면야 얼마든지. 구체적으로는?"
"우선 누굴 겨냥하실 겁니까?"
여성이라는 건 당연한 거고, 어떤 여성을 겨냥할 건가?
파리의 고풍스러운 귀부인들? 아니면 지방의 투박한 시골 처녀들?
"물론 파리의 귀부인들이지요."
마담 롤랑이 코웃음을 쳤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무런 구매력도 없는 가난뱅이들이 아니에요. 우리의 사업을 눈여겨보고 기꺼이 투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지. 언젠가 더욱 시장을 드넓히고 활기를 돌게 하려면 당연히 그들도 포용해야겠지만-."
"당장은 귀부인들에게 집중하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네에. 당연히 종이도 최고급으로, 표지도 양피로 고풍스럽게 바꿀 거랍니다. 대신에 화장품이나 가정용품 같은 광고들을 가득 실어서 광고비로 벌충하면 되겠지요. 본사는 투자가 되었건, 광고가 되었건 언제건 연락을 받을 수 있도록 교통이 원활한 대로변을 골라야 할 테고요.
아, 특히 어여쁜 아가씨들에게 잡지를 선전하게 하면 효과도 더 좋겠지요? 대신에 경호 인력도 엄선해야겠지만-그거야 제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너무 심려하지 마시길. 의원님께서 그저 집필활동에만 집중하실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을 각오니까요."
어···.
[···이게 부자의 행동력인가?]
그러게.
사업상의 난점이라던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려고 준비하고 있었더니만 이건 뭐 그런 이야기를 꺼낼 상황이 아닌데.
물론 오롯이 롤랑 일가의 자금력이라기보다는 평소 알고 지내던 살롱의 마담들에게 투자나 협력을 끌어낸 거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무시무시하다.
아니 애초에 따지고 보면 그 살롱의 마담들이 이 고급형 여성지를 사갈 고객층이고 투자자인 거잖아.
여기서 내가 뭔가 더 조언할 게 있기는 한가?
"또 궁금한 게 있으실까요?"
"그···."
···아니, 기죽으면 안 된다.
저 송곳으로 찔러도 차라리 비명을 지를지언정 입가에 미소가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 한번 휘둘리기 시작했다가는 끝장이야.
뭐 없을까.
내가 지적할만한 게-아.
"규격."
"규격?"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담 롤랑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대꾸했다.
"미터세 말입니다. 적발 시 한 건당 10프랑씩이니 대단한 액수는 아니겠지만 잡지사업처럼 대량 발행해야 하는 사업장에서는 특히 주의해야 해야지요."
"아아, 그 특별세라는···."
처음으로 마담 롤랑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렇네요. 설마,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세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종이 규격이라고 손대지 말라는 법이 없지요. 차라리 일찌감치 이쪽에서 기준을 만들어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무서워!
아니 그보다 마담이 규격을 정한다니, 그게 가능한가?
일단 실권자들은 우리 급진당일 텐데?
[하지만 실무자들이 부르주아지잖은가.]
···아, 그렇지.
아직 이 시대의 부르주아지는 산업자본가와 금융가뿐만이 아니라 관료와 학자, 기술공 등을 포괄하는 굉장히 폭넓은 개념이라는 걸 까먹고 있었다.
혁명 전까지만 해도 상류층은 어디까지나 귀족과 사제들이었고, 부르주아는 오히려 중산층에 해당하는 개념이었으니까.
그럼 이 실무자들과 한 다리씩 건너서 전부 아는 사이라면 종이 규격을 정해버리는 거야 일도 아니겠지.
흠.
"? 왜 그러시나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새삼스레 좀 무시무시해져서.
이런 사람이 지금껏 그림자 속에서 발톱을 감추고 있었다는 말이지···?
물론 공식적인 직함이나 작위가 있는 건 아니니까 함부로 전면에 나설 수도, 나설 힘도 없었던 거겠지만.
반대로 나서겠다는 의지와 힘을 발휘할 창구만 있다면 정말로 해내지 못 할 일이랄게 없네.
그야말로 이면 정치의 여왕이라고 할까.
나와 급진당이 도중에 주도권을 가로채서 그렇지, 만일 원 역사대로 프랑스 혁명이 부르주아지 혁명으로 흘러갔다면 능히 이 나라의 실세로 군림하고도 남았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쓰읍, 이거 독거미한테 잘못 걸린 거 같은데.
덜컥.
"어, 뭐야. 또 누가 왔나 보네?"
순간, 문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마담 카미유의 카페에 걸어들어왔다.
마리 테레즈 공주-아니 전(前) 공주였다.
아직도 성심당에서는 공주마마라고 꼬박꼬박 존칭 붙여주는 모양이지만 우리까지 그럴 필요는 없겠지.
"이, 무슨."
"별건 아니고 사업 이야기를 좀 하고 있었습니다."
"뭐야, 사업 이야기요? 돈과 원수진 무슈 청렴결백이 웬일이래."
드륵.
새파랗게 질린 마담 롤랑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서 내 곁으로 다가온 마리 테레즈가 주변에서 의자를 끌어다가 옆에 걸터앉았다.
털썩.
"그래서 무슨 사업인데요?"
"이번에 제가 신혼일지를 발간하고 있잖습니까."
"아아, 그거? 저도 잘 읽고 있어요. 그런데 매일 읽기에는 좀 너무 순탄하고 밍숭맹숭해서 우리 작가님께서 슬슬 시류와 좀 야합해주셨으면 하는데."
마리 테레즈가 짓궂게 웃었다.
···이거 그 이야기하는 거 맞지?
[뭐, 사춘기 아가씨니까 그럴 수도 있지.]
오, 프랑스여.
"그래서, 그게 어쨌는데요? 드디어 우리 작가님이 시류와 야합하기로 하신 건가?"
"시류와 야합···이라기보다는 사업확장이라고 불러주시길."
"사업확장?"
마리 테레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럼 진짜로 신문사나 출판사라도 차리려고요?"
"네에, 뭐 비슷합니다. 정확하게는 잡지사업이지만요. 이참에 아예 귀부인들을 대상으로 한 여성용 잡지를 대량 발간해보려고 합니다."
"오올-."
가느다란 실눈과 장난스러운 미소.
영락없이 고양이 같은 얼굴을 한 마리 테레즈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아픕니다."
"에이, 인두에도 지져져 봤을 사람이 이 정도로 뭘. 그보다 우리 무슈 청렴결백께서 웬일로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 하셨데? 재미와 담쌓은 만큼이나 돈이랑 원수진 거 아니었어요?"
"그야 돈이나 벌려고 벌이는 사업이 아니니까요."
"우와, 또 판에 박힌 재미없는 소리."
···아니 이럴 거면서 왜 자꾸 찾아오는 건데.
암만 베르사유에서 파리까지 고작해야 서울에서 성남이나 수원 정도 거리밖에 안 된다지만 자동차가 있는 시대도 아닌데.
혹시 이 말괄량이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파리에 하숙집 얻어뒀다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흠, 구태여 듣고 싶은가?]
아니, 전혀.
"아무튼 정말로 돈을 목적으로 한 사업이 아닙니다."
애초에 이번에 마담 롤랑에게 발행권을 팔고, 다시 인세 정도만 받아도 우리 일가가 먹고살기에는 충분할 테니까.
고작 돈 좀 벌겠다고 청렴결백한 이미지를 버린다니 말도 안 되는 손해지.
"흐음, 그렇다면?"
"그야 물론 여기 계신 마담 롤랑의 사회활동을 도와드리기 위함이지요.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독려하고 가사노동의 편의성 개선을 위한 광범위한 투자를 도모하는 선전지라고 생각해주시길."
"흐응-."
그제야 마리 테레즈의 시선이 마담 롤랑에게로 향했다.
"마, 망극하옵니다. 공주마마."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는 마담.
그런 마담 롤랑을 마리 테레즈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더니.
"좋아, 그럼 나도 낄래요."
도로 이쪽을 돌아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니, 또 뭔데요.
"그러니까 투자를 하시겠다는 말입니까?"
"설마요. 저희 돈 없어요."
마리 테레즈가 텅 빈 주머니를 끄집어내 먼지를 터는 흉내를 냈다.
뭐어, 진짜로 돈이 없다기보다는 베르사유 궁전을 포함해서 왕정 시절 궁전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논의가 한창인지라 당장 쓸 돈이 없다는 게 정확하겠지만.
솔직히 이 문제는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깡그리 몰수해서 박물관으로 쓰건 정부청사로 쓰건 할 계획이었는데, 또 이번에 농촌-가톨릭 코뮌들이 한입을 모아서 결사반대하고 있어서.
지금은 베르사유의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지만 조만간 정말로 베르사유 궁전에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지.
"대신에 제가 아는 사람들은 좀 많걸랑요?"
"그야 적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지요."
"에이, 도와주겠다는 사람한테 반응이 그게 뭐예요? 뭐 마당발 공주님이라던가, 진짜 진짜 대단하다던가 그런 의례적인 한마디도 못 해줘요?"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와,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진짜 너무하시네."
아니 이거면 됐지 뭘요.
"됐어요. 돌아갈래요."
"안녕히 가십시오."
"···좀 붙잡으라고요! 어떻게 사람이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라던가 그런 말도 못 해요?!"
"제게 그런 재주가 있었다면 지금처럼 사생활이 깨끗했겠습니까."
"아, 그것도 그렇네."
짝.
마리 테레즈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집주인 놈 흉을 본 건데 왜 내가 가슴이 막 아리고 그렇지.
[풋.]
"아무튼 열심히 소문내고 다니면 되는 거죠? 혹시 초판본 나오면 말해줘요. 베르사유에서 자랑하고 다니게."
"그렇게 해주신다면야 영광일 따름이지요. 협력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님."
"와, 진짜 배웅도 안 나오네."
이쪽에선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마리 테레즈는 홀로 뭐라고 투덜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그야말로 태풍 같은 사람이었다.
뭐 오겠다는 선약도 없이 아무 때나 불쑥불쑥 나타났다가 또 제멋대로 떠나가니 어떻게 가닥을 잡을 수가 있나.
"···당신."
"네?"
그때 마담 롤랑이 날 불렀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언제나와 같은 영업용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창백하게 질린 마담이 있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예요?"
"···글쎄요?"
천생반골 박민혁?
21세기의 여의도 꿈나무?
[내 몸에 들러붙은 잡귀지.]
입 닥쳐, 막시밀리앙.
***
필라델피아.
"이것이 그 소문의 미터법입니까?"
"그렇습니다. 제 자신작이지요."
황동 자를 이리저리 뒤집어보는 해밀턴을 향해 탈레랑이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그야 이 미터법을 완성한 건 라부아지에와 과학 아카데미일지라도 이걸 처음 만들자고 제안하고 또 추진했던 건 탈레랑이었으니까.
그에겐 누구보다 그 공훈을 주장할 자격이 있었고, 또 실제로 미터원기가 완성되는 즉시 가장 먼저 그 사본을 전달받음으로써 입증받았다.
"과학적이고, 길이뿐만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 등의 개별단위와도 매끄럽게 상호보완되며, 무엇보다도 공화적이지요."
"공화적이라."
"네. 이제 우린 더는 국왕의 신체 길이 같은 하잘것없는 정보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 없습니다. 국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규격을 정할 필요도 없지요."
왜냐하면.
"이 지구가 불변하는 한 미터도 영원불변하니까요."
뭐어, 듣자 하니 과학 아카데미에선 이조차도 부정확하다며 다른 기준을 정하겠다고 투덕거리고 있다지만 그것까지야 과학자도 아닌 탈레랑이 상관할 바는 아니고.
요는 마침내 학계가 국왕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중요했다.
아무렴 그간 존재해온 무수한 도량형들을 보라.
흔히 팔 길이, 다리 길이, 손가락 길이라고들 하지만 인간의 육체라는 게 어디 모두 똑같은 길이와 부피를 가지던가?
결국 계측을 위해 인간의 육체를 사용하는 이상 도량형들의 기준점이 되는 오직 한 사람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고-왕정국가에서 그 한 명은 필연적으로 그 나라의 국왕이 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국가별로, 시대별로 도량형이 조금씩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이 미터가 런던의 원시적인 야드 파운드를 묻어버릴 겁니다."
탈레랑이 자신 있게 선언했다.
"더는 우리에게 국왕 따윈 필요 없습니다. 비단 정치에서만이 아니라, 학계에서조차 국왕의 잔재를 영원히 지워버립시다. 애당초 조지 국왕의 다리 길이, 거시기 길이 같은 걸 누가 궁금해한단 말입니까?"
"음, 거시기 길이라면 좀 궁금하긴 합니다만."
"한 손너비(Hand) 정도겠지요."
덧붙여 영국 단위계에서 손너비란 3인치, 또는 4인치를 의미했다.
"풋."
해밀턴이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렸다.
"좋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지요. 이제 우리 미합중국도 조지 왕으로부터 독립한 지 한 세대를 바라보고 있는데, 아직도 조지 왕의 육체 같은 걸 도량형으로 쓰고 있다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란 말입니까."
"과연 장관님.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이 미터법의 일등 공신으로서 감히 단언하던데,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탈레랑이 뻔뻔스레 콧대를 드높였다.
아무렴 저들이 말한 이유만 있을 리가 없었다.
프랑스의 새로운 도량형을 도입하겠다는 건 곧 그만큼 프랑스와의 경제교류를 확대하겠다는 의미요, 그걸 만든 장본인인 탈레랑에게 잘 보이려는 속셈일 테니.
'이번에야말로 파리로 돌아갈 수 있겠군.'
하필이면 그놈의 루이지애나 때문에 영영 필라델피아에 발이 묶일 뻔했으니 원.
내심 안도의 한숨과 함께 되지도 않는 굴욕외교를 벌인 고도이 내각을 향한 원망을 쏟아내며 탈레랑이 해밀턴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제 저도 머지않아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테니, 혹시 프랑스로 오실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십시오. 다른 건 몰라도 손님을 즐거이 하는 재주라면야 자신있답니다."
"그거 기대되는군요."
"···?"
해밀턴이 쓰게 웃었다.
탈레랑은 별일 아닐 거라며 가벼이 넘겼다.
중요한 건 그의 이력서에 미국인들에게 미터법을 소개했다는 한 줄을 추가했다는 사실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