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54)

소비권

롤랑 장관 저.

"이거 아는가?"

"뭐가 말입니까?"

"지금껏 아내가 만든 애인 중에선 자네가 유일무이한 연하야."

"애인 아닙니다만."

손 한번 잡은 적 없는데 왜 애인이래.

눈살을 찌푸리니 롤랑 장관이 낄낄대며 대꾸했다.

"그럼 애인도 아닌 남녀가 뭐 하러 만난다는 말인가?"

"평범한 친구일 수도 있지요. 아니면 뜻을 함께하는 동지거나."

"···내 살아생전에 듣던 중 가장 프랑스인 답지 않은 변명이었네."

그럼 진짜 프랑스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눈을 마주쳐도 피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대화가 30초 이상 진행되었다면 당연히 내 애인이라고 대답했어야지.]

···어, 그런 기준이라면 확실히 애인이 맞기는 한데.

아니 오히려 첫 만남에서 내가 롤랑 장관이 보는 앞에서 마담 롤랑을 꼬셨던 거네?

그래서 엘레오노르 부인이 그렇게 화를 냈었나?

[그걸 이제라도 눈치채다니 다행이군.]

불란서천지복잡기괴.

그보다 잠깐만, 우리 둘 다 결혼한 사람인데도 그런 기준이야?

[고작해야 결혼 정도 가지고 뭘. 그런 건 이 프랑스에선 아무런 걸림돌도 될 수 없네.]

그뭔씹.

[루이 16세야 유명하니 넘어가고, 오를레앙 공작이 어떻게 프랑스 제일의 부자가 되었는지 아나? 아내가 프랑스 제일의 상속녀였거든. 그녀의 오라버니가 스무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성병으로 죽으며 대가 끊긴 덕분이었네.

그럼에도 공작은 아내를 홀대했지. 이미 신혼 시절부터 아내의 시녀였던 펠리시테와 불륜 중이었거든. 그래서 아내에겐 시녀처럼 자식들을 돌보게 하고 시녀를 여주인으로 삼았네.]

어···.

[잊지 말게. 당통은 이차 성징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알고 지내던 루이즈에게, 그것도 조강지처를 떠나보낸 지 반년도 안되어서 당당히 청혼했네. 그럼 그 알고 지내던 게 정말로 순수한 인연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추가로 마담 롤랑은 스무 살 연상의 롤랑 장관과 결혼하기 전에 서른 살 차이가 훌쩍 넘는 쉰다섯 먹은 홀아비와 사귀었네. 부모님 결혼식에도 참가했던 아버지의 절친이었는데, 소문에는 결혼까지 생각하는 진지한 관계였다더군. 그 밖에도-.]

그만, 그만!

대충 알겠다, 프랑스의 레벨.

듣기만 해도 유교 드래곤의 영혼이 꿈틀거리는구나.

이 무슨 동물의 왕국이란 말인가.

[뭐, 그건 솔직히 나도 동감일세.]

···어, 설마 호응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하기야 이 양반 노트에 서얼 문제도 있었지.

그것도 언젠가 한 번 손보긴 해야 하는데.

뭐 아무튼.

"의외로군요."

"뭐가 말인가?"

"당연히 화를 내실 줄 알았습니다만."

나야 그냥 평범하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접근한 거지만 세간의 인식이 그렇다면 굉장히 무례하게 받아들여지는 행동이었을 텐데.

막상 오늘 저택으로 초대한 것도 그렇고 날 대하는 롤랑 장관의 태도도 그렇고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다.

흠,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나?

그런 것치고는 내가 만날 때마다 롤랑 장관은 부하들에게 히스테리나 부리고 있-.

"아내가 내게 제 애인을 소개해준 게 이번이 처음인 줄 아는가?"

···잠깐, 뭐요?

"그럼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그야 당연하지. 적어도 애인이 생길 때마다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꼬박꼬박 내게 소개해줬거든. 정말이지 나도 참 늘그막에 아내 복 하나는 타고났다는 말이야."

[맙소사.]

오, 주여.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는가? 자네도 프랑스인이면서."

호록.

혹시 비꼬고 있는 건가, 하고 의심해봤지만, 전혀 그런 기색이 아니다.

오히려 커피를 마시는 입가에 새겨진 자랑스러운 미소도 그렇고 떳떳하게 펴진 어깨도 그렇고 진짜로 뿌듯해하는 눈치.

공자님 맙소사 제기랄.

주여, 아무래도 나 진짜로 프랑스랑 안 맞는 것 같아요.

진짜 몇 년간 살면서 볼꼴 못 볼 꼴 다 본 것 같은데 이놈의 성 관념은 적응이 안가네!

[걱정하지 말게. 나도 동감이니까.]

아아악!

제발 부탁이니까 내게 희망을 주지마!

이 동물의 왕국도 어떻게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유교 드래곤이 흡족해할 수 있게 고쳐놓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들지 마!!!

[···그, 유교 드래곤인가 뭔가 하는 게 흡족해하기보단 화병나서 졸하는 게 더 빠를 거라 생각하네만.]

오냐, 지금 이 내츄럴 본 반골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거지?

[아뿔싸.]

이미 늦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유교 드래곤만큼은 꼭 지켜내고 만다.

주여, 제가 꼭 이 동물의 왕국 놈들 사람 만들고 천국 가겠습니다.

[그래봐야 자네만 힘들지 뭔.]

입 닥쳐, 막시밀리앙.

"내겐 과분하리만큼 좋은 아내야."

탁.

롤랑 장관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어딘가 쓸쓸함이 느껴지는 자조였다.

"그러니 누구를 만나건 이제 와서 참견할 생각은 없네. 설령 상대가 포풀라레스의 술라라고 해도 말이야."

"그것참 거창한 별명이군요."

"그러게 누가 거창하게 놀랬나?"

롤랑 장관이 코웃음을 쳤다.

"그렇지만 이것 하나만 묻고 싶군. 대체 그녀와 무엇을 꾸미고 있는 건가? 이번만큼은 내가 아무리 물어봐도 어련히 알게 될 거라고 둘러대던데."

"시장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시장을 만든다고?"

돌연, 장관의 눈매가 변했다.

과분한 아내를 둔 보잘것없는 가장에서 닳고 닳은 경제학자이자 실무자로.

"···이야기하자면 복잡해집니다만."

"상관없네. 어디 말해봐. 혹시라도 내 아내를 속여먹을 셈이라면 이 장 마리 롤랑 드 라 플라티에르의 명예를 걸고 결투를 신청하겠네."

거참 애처가시구만.

아무튼 어차피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초대에 응했던 거니까 때마침 잘됐다.

끼익.

"좋습니다, 그럼."

의자를 장관 쪽에게 가져다 붙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마담께서 여성의 사회참여에 관심이 많다는 건 알고 계실 거라고 믿겠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부인도 여인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뭐, 요약하자면 그날 대화의 연장선입니다."

롤랑 장관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내 설명을 참을성 있게 들었다.

모두 듣고 난 다음, 천천히 몸을 뒤로 젖히면서 평하기를.

"반역이군."

"혁명이라고 해주시죠."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

"그래, 그럼 소비혁명이라고 해주지."

롤랑 장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경제학자라는 양반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겠지.

이건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가계부를 쓰던 주부들에게 소비라는 권력을 부여하려는 대계라는걸.

애당초 이 시대의 소비시장은 지극히 단순하다.

쇼핑해서 스트레스를 푼다는 개념은 귀족이나 왕족들만의 특권이고, 대다수는 작게는 가정에서 크게는 마을 단위로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한다.

당연히 이런 환경에선 가계부를 쓴다고 해봐야 주체적인 소비자라기보다는 구성체의 일원이 될 수밖에는 없다.

가계부를 쓴다는 건 권력이 아닌 노동이고, 특별한 사건·사고가 없으면 주기별로 돌아오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미리 준비해둔 재화를 지출하는 게 내용의 전부다.

하지만 편의성이라는 핑계로 공동체를 위한 소비라는 정당성을 부여하고 다시 이를 정치적 유력자의 유명세를 빌려서 널리 선전하며 접근성을 극대화한다면?

"우선 다들 지갑을 열어야 경제가 활성화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이웃 나라 침략해서 약탈하고 전쟁배상금으로 경제난 해결할 수는 없잖아.

"유행이라는 건 엄청난 힘입니다. 따라가지 않는 사람을 바보처럼 만들어서 평소라면 절대로 지갑을 열지 않았을 물건에 충동적으로 소비하게 만드니까요."

"그래서 그 잡지로 유행을 만들어보시겠다? 그럴 거면 좀 더 요란하게 해보는 게 낫지 않겠나. 가령 전단지 같은 걸 무료로 나눠주고 다닌다던가."

"말했잖습니까. 돈 벌려고 하는 사업이 아니라고."

그럴 거였으면 스팸 폭탄부터 시작해서 거창하게 갔지.

"물론 혁명은 구체제를 무너트리고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문화까지 평등하던가요?"

"···좀 더 자세하게 말해보게."

"그동안 소비와 유행이란 상류층만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경제적 여건이 안 되어서가 아니라, 법적으로 관습적으로 제3신분이 그런걸 따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하게 여겨졌지요."

롤랑 장관과 눈을 마주쳤다.

"그게 아니꼬운 겁니다."

"자네가 말인가?"

"아뇨, 아마 누구나 똑같을 겁니다. 우리도 저들처럼 편하게 살고 싶다, 화려하게 살고 싶다, 즐겁게 살고 싶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증오하는 건 귀족들'만' 그런 삶을 누리고 있었다는 점이지, 유쾌한 인생 그 자체가 아니니까."

21세기 자본주의 소비 천국이야말로 그 산 증거다.

"그래서 일부러 상류층의 마담들에게만 돌리는 겁니다."

"···대놓고 베끼라는 거군."

"예에. 마음대로 따라 하라지요. 단속할 생각도 없고, 비판할 생각도 없습니다. 오히려 장려해야 하고 말고요."

안 그래도 혁명 이후로 네가 하면 나도 한다가 기본으로 깔린 파리다.

일단 유행타기 시작하면 순식간일걸.

지금 신혼일지만 해도 짭이나 아류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판인데.

"장관님이라면 당연히 이해해주실 거라고 믿었습니다만."

"이해야 하지."

끼익.

롤랑 장관이 의자를 내 쪽으로 끌어왔다.

"하지만 그 돈은 어디서 벌어오게 할 작정인가?"

"물론 여성들이 직접 벌 수 있어야지요."

"너무 문란한데."

그뭔씹.

동물의 왕국 인증 좀 적당히 못 하겠냐.

"···험."

내가 눈살을 찌푸리니 롤랑 장관이 가벼이 헛기침하며 되물었다.

"그래, 그럼 도대체 어떤 일자리를 부여하겠다는 건가?"

"모직물이나 면직물 같은 거 말입니다. 세탁업소나 청소업체 같은 전문 가사노동도 있겠지요. 이미 전통적으로 여인들이 손대온 산업들 위주로 장려해야 반발이 덜하지 않겠습니까."

"아하. 아담이 밭 갈고 이브가 베 짤 때-그런 거구만."

롤랑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해. 결국 그 옷들도 여인들이 사들일 테니 시장에 하나의 거대한 순환이 만들어지겠군. 여성잡지나 가정용품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여인들의 힘이 부족하다면 이쪽에서 기계를 제작하거나 영국에서 사오면 되겠지. 무엇보다 지금 우리에겐 알자스와 라인란트가 있으니 수력이건 증기력이건 동력이 부족하진 않을 터."

딱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재료수급인데.

"미국에서 사 올 작정인가 보지? 그렇다면 목화건 양모건 부족함은 없겠군. 천하의 영국이라도 미국, 스페인, 네덜란드 삼국의 상선을 동시에 건드리지는 않을 테고 말이야. 잠깐, 설마 경제특구 루이지애나는 이걸 위한 대계였나? 이거 재미있구만. 시티 오브 런던의 금융자본이 우리 프랑스의 산업을 살찌우게 될 테니."

"···오."

[엄청난 헛다리를 짚고 있는데.]

그러게.

솔직히 자백하자면 여기까진 생각 안 했는데.

혼자서 막 영감이 샘솟는 모양인데 쭉 듣고 있다 보면 어, 그게 그렇게도 연결되나? 하는 생각 밖에 안 든다.

확실히 실무자는 색다르긴 하네.

"이거 당했네요. 설마 이렇게 쉽게 제 밥줄을 털어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튼 이럼 전부 내 계획대로 작전으로 가야지.

어차피 지금 나로선 저 롤랑 장관이 저 영감 하나로 어디까지 생각하고 또 계획하고 있을지조차 짐작도 안 가니 괜히 설전해봐야 백전백패다.

여기선 항복선언 하는 대신에 처음부터 당신 머리 위에서 놀고 있었습니다-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게 맞아.

[이런 양심도 없는 놈을 봤나.]

왜. 뭐. 왜.

그럼 모냥 빠지게 사실 거기까진 생각 못했는디여라고 자백해야겠냐?

자고로 정치꾼이라는 놈은 안면에 드래곤 등가죽을 두르고 물에 빠져도 혓바닥만 둥둥 떠야 해먹을 수 있는 법이여.

"그래서, 어떻습니까. 아직도 제게 결투를 신청하시고 싶으신지요?"

"결투는 다음 기회로 미뤄두기로 하겠네."

"에이, 그때까지 장관님이 살아계시진 않을 것 같은데요."

"오늘 내 집에서 살아서 나가고 싶지 않은가 보지?"

벌써 만 나이로 예순 먹은 노인네가 고작 이 정도로 발끈하기는.

그리고 평소 부하들이랑 싸우는 꼬라지 봐서는 조만간 한명은 결투 신청하겠던데.

[···저기 잠깐, 유교 드래곤은 어디 갔나?]

죽었어.

팔자에도 없는 동물의 왕국 실시간 중계받다가 심정지했지.

"아무튼, 내 힘이 닿는 한까진 최선을 다해 돕겠네."

롤랑 장관이 나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다.

"그동안 아내가 내 야망을 위하여 그만큼 힘써줬으니 최소한 방해가 되지는 말아야지 않겠나. 어디 잘해보시게. 나도 질투 정도는 하는 사람이니까 너무 내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그러지는 말고."

"그러니까 그런 사이 아니래도요."

"그건 자네의 희망 사항이겠지. 이 프랑스에서 그렇게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장관이 이죽거렸다.

나도 이번만큼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집에 돌아가고 나면 가장 먼저 집주인 놈과 함께 부인께 사죄하자고 다짐했다.

***

브뤼셀시.

"끄응···."

벨기카의 해방자, 벨키가 공화국 초대 최고평의회 의장 앙리 반 데르 누트가 골머리를 싸맸다.

그리 놀랍지 않게도 개신교-네덜란드계 우세지역인 플란데런 주에서 또다시 폭동이 일어난 탓이었다.

그동안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으며, 그 저항의 세기나 이유 또한 언제나 천차만별이었다.

언젠가는 평범하게 네덜란드와의 재통일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키는가 하면 또 언젠가는 종교가 문제시되었고, 브뤼셀 독재를 비방하며 지방 주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정도야 일상다반사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런던과 파리의 은근한 비호 아래 무력 진압해버리는 것 또한 브뤼셀의 일상다반사였고.

그러니 이번에도 그들의 비호 아래 총칼로 찍어누르면 되지 않겠느냐고 쉽게들 말하겠으나-.

"그러니까 이대로는 모직물 공장들이 모조리 고사할 판이다, 그런 소리인 거잖소?"

"예, 뭐."

재무장관이 한숨을 내뱉었다.

"슬슬 각오를 다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는 런던과 직접 경쟁해야 할 시기가 와버렸으니까요."

"동지, 설마 지금 독립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거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지."

제게 이의를 제기한 재무장관이 마침내 고개를 조아렸음에도 앙리는 조금도 기뻐하거나 우쭐댈 수 없었다.

그야 재무장관과 기 싸움을 한다고 해결될 일이라면 진작에 해결했을 테니까.

하지만 정말로 방법이 없었다.

애당초 왜 저지대에서 모직물 산업이 발달했는가?

바로 그들과 마주 보고 있는 브리튼 열도가 전통적으로 양모 산업이 발달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브리튼 열도에서 사 온 양모를 재가공해서 유럽 각지와 영국에 도로 내다 파는 것이 플란데런 지방의 전통적인 산업구조였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브리튼 열도에서 더는 저지대에 값싼 양모를 수출하지 않게 되었다.

값싼 양모를 수출하긴커녕 그들이 직접 공장에서 찍어낸 더욱 값싼 모직물을 플란데런에 대량 수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니 철광석이 풍부하여 전통적으로 중공업이 발달한 왈롱 지방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플란데런은 점차 몰락할 수밖에 없었고, 그동안 이들을 보호해주던 합스부르크-신성로마제국조차 사라지자 플란데런의 모직물 공업은 고작 1년 사이 고사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참으로 얄궂은 이야기였으나, 벨기카의 독립을 후원한 런던이 그 벨기카의 경제를 난도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한참을 주저하던 앙리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파리에 다시 한번 도움을 청해보겠소."

"···동지, 그건."

"내 알고 있소. 이럴수록 우리의 독립도 유명무실해지겠지."

침통한 대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저들을 고사시켜야겠소?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들도 우리가 책임져야 할 시민이고 유권자인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날 최고평의회에 참여한 의원들 누구나 딴청을 피우거나 한숨을 내뱉을 뿐 차마 뭐라 반박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미 그들 선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해봤다.

관세를 마구 끌어올려 보기도 했고, 런던에 사정해보기도 했으며, 없는 예산을 쥐어짜 가며 보조금을 후원하기도 했다.

이대로 모직물 산업이 몰락하여 지역경제가 붕괴한다면 그만큼 분리주의 같은 극단론이 힘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근본적으로 저 양모를 생산하는 브리튼 열도에서 모직물 공장까지 돌리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인데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벨기카가 제아무리 장벽을 쌓아봤자 값싸고 질 좋은 영국제 모직물과 경쟁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파리에 의지합시다."

그럼 최소한 고사는 피할 수 있을 테니까.

"뭐어, 프랑스야 사람도 많고 돈도 많은 대국이니 한 사람당 딱 옷 한 벌씩만 더 사 입어달라고 사정해보면 되지 않겠소?"

물론 아예 매년 새로 사 입어 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무도 거기까지 기대하진 않았다.

농노들에게 옷이란 평생 단 한 벌만 계속 기워가며 입는 게 일반적이었으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