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154)

국가소송

···이거 곤란한데.

"제발 사람 한 명 살리는 셈 치고 한 번만 눈감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넙죽.

아니 뭐, 나름 과학 아카데미에 상까지 받았다는 위대한 과학자가 눈물 콧물 다 쏟으면서 필사적으로 남의 집에서 누군가에게 자비를 애걸하고 있다는 게 참 보기에 안타깝긴 한데.

하필이면 또 오를레앙 공작 관계자일 건 또 뭐야.

괜히 그때 그 마지막 장면 생각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래요! 이 르블랑 아저씨가 뭐 반혁명적인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그냥 하필이면 그때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한 후원자가 쿠데타를 시도한 죄 밖에 없잖아요!"

···이 전직 공주님 정치에 욕심 없는 거 맞나?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활발하게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하필이면 내 아픈 구석만 콕콕 찌르면서 말이야.

설마 일부러 이러고 있는 건가?

[음, 내가 보기엔 그건 아닌 거 같고. 그냥 루이 오귀스트의 핏줄이 발현된 것 같네만.]

오, 이해 완료.

어떻게 된 게 루이 오귀스트란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이해가 가네.

그래, 아무렴 이렇게 성실하게 지뢰밭을 향해 돌진하는 핏줄이 이 프랑스에 둘씩 있을까.

이 아가씨도 참 저주받은 재능을 타고났구먼.

"···? 뭐야, 사람을 뭘 그렇게 쳐다봐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보아하니 지금 위험한 짓을 하는 자각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본인 딴에는 진짜로 순수한 선의와 동정으로 움직이고 있는 게 맞는 것 같네.

그 순진한 선의가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를 난처하게 만들고 있어서 그렇지.

역시 이 아가씨는 루이 오귀스트의 장녀가 확실합니다!

"일단 일어나주십시오."

아무튼 제발 살려달라고 찾아온 사람을 모질게 내쫓기에도 좀 그렇고.

공주님 체면을 봐서 이야기는 해봐야겠지.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을 해주시기 전까지는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 양반이 진짜.

"그러니까 우선 일어나보시라니까요."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대로 가면 전 꼼짝없이 파산입니다! 제 전 재산이 걸린 꿈의 공장이!!!"

"···도와드릴 테니까 일어나십시오."

벌떡.

그제야 니콜라 르블랑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기립.

아니 라부아지에도 그렇고 왜 내가 만나는 과학자들마다 이렇게 뻔뻔한 사람들밖에 없지.

[그만큼 절박하다는 거 아니겠나.]

하기야 그것도 그렇네.

라부아지에는 목숨이 걸렸고 이 사람은 전 재산이 걸렸으니.

전자는 자업자득이지만 후자는 진짜로 난데없이 똥물 뒤집어썼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지만.

"커피라도 한 잔씩들 하세요."

"감사합니다, 마담."

아무튼 접객실로 이동하여 각자 자리에 앉으니 어느덧 완쾌한 부인이 손님들에게 한 잔씩 커피를 건넸다.

더불어 정중앙에는 큼지막한 설탕 봉까지.

크으, 역시 결혼하면 집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니까.

이젠 슬슬 설탕 없는 커피가 오히려 어색하다.

뭐어, 생도맹그와의 설탕 무역이 재개되면서 가격이 안정된 덕분도 있지만.

여전히 커피는 콩 볶은 물맛뿐이지만 부인 덕분에 설탕 하나는 원 없이 탈 수 있게 되면서 그래도 숨통이 트였다.

그래, 이게 커피지 이 집주인놈아.

[커피에 물 타서 마시는 미개한 바르바로이가 커피론으로 내게 도전장을 내밀다니 가소롭군.]

네가 식후 땡으로 마시는 아메리카노의 참맛을 알어?

덧붙여서 나는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우선···."

커피를 들어 올리며 슬며시 르블랑과 시선을 마주쳤다.

"본디 왕정에서 약속했던 포상금은 제 재량으로 어떻게든 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오, 그렇다면!"

"다만 공장은 솔직히 어려울 것 같군요."

일단 이 사람이 오를레랑 공작 관련 인물이고 또 오를레앙 명의와 자본으로 지은 공장인지라 자칫 오를레앙파에게 면죄부를 줄 수도 있어서-라는 이유도 있기는 한데.

애당초 소다공장의 권리가 이미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넘어가 버려서 되찾아오려면 꽤 번거롭다.

지금이야 전쟁배상금으로 숨통이 트였다지만 전쟁 와중까지만 해도 이것저것 돈 되는 것이라면 죄다 담보로 내놓거나 즉석 경매로 팔아치웠으니 뭐.

그렇게 이 악물고 돌려막다가도 끝내는 못 버텨서 파산 선언할 뻔했는데 혁명정부에서 압류했던 소다공장의 권리가 멀쩡히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도 당통에게 부탁해서 알아본 결과 인수자는 막상 공장을 사들이고도 이게 어떤 원리로 운영되는 시설인지 몰라서 부지는 물론이고 시설이나 설비 같은 것들도 죄다 다른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처분해 버렸단다.

말로는 본인이 공장을 샀으니 특허권까지 가져야 한다, 반역자의 투자를 받았으니 당연히 특허권도 혁명정부에서 압류했어야 한 건 아니냐고 주장했다는데-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 양반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그게 뭔 개소리야?

특허비 주기 싫어서 별 고집을 다 부리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은 아직까진 파리에서 그 기술력을 가진 건 오직 르블랑 씨 한 사람뿐이라는 점이겠군요. 적어도 제가 알아본 바로는 소다공장을 모방하거나 기술을 빼돌려서 따로 대규모 공장을 차렸다는 소식은 없었습니다."

"그, 렇습니까···."

털썩.

르블랑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우는 듯, 웃는 듯한 얼굴이 그의 참담한 심경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야 전 재산이 걸린 꿈의 공장이 본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로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난도질해 버렸다는데 도대체 누가 기뻐할 수 있을까.

기술력이 유출되진 않았다는 것도 아직까진 그렇다는 거지 또 언제 새로운 도전자가 등장할지도 모르는 거고.

그런데 그보다도.

[또 뭔가?]

탄산 나트륨이 뭐야?

소다면 탄산음료를 말하는 건가?

아직 콜라가 있는 시대도 아닐 텐데 탄산수 같은 걸 만들던 공장이야?

[···탄산 나트륨은 유리를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일세. 이 정도는 나도 알고 있네, 이 친구야.]

어, 그래?

우리 문과 동지가 웬일로?

[그야 벌써 20년 전에 과학 아카데미에서 엄청나게 크게 공고를 냈었거든. 산업현장에서 매일 같이 탄산 나트륨이 모자라서 유리와 비누 제작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고-.]

뭐, 비누?!

야 이 양반아, 진작에 비누 이야기부터 했어야지 유리가 뭐야 유리가!

[아뿔싸···!]

아뿔싸 좋아하시네 정말.

"대신에 한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비누 제작에 필요한 재료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탄산 나트륨을 위해 과학 아카데미에서 크게 공고를 냈을 정도면 저 르블랑이라는 사람이 가진 기술력은 비누 대량생산과 직결된 엄청난 단서라는 이야기잖아?

그럼 절대로 이대로는 못 보내주지.

"제안이라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십시오. 제가 담당 변호사로서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소, 소송이라고요?!"

"예. 안 그래도 궁핍하실 테니 수임료는 따로 받지 않겠습니다."

꿀꺽.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이로군.

뭐어, 나 같아도 한때 수상까지 했던 양반이 정부 상대로 소송 내라고 하면 당황하기야 하겠지만.

"그러니까 공장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내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뇨, 이미 권리도 사방으로 흩어지고 무엇보다 반혁명적 쿠데타를 도모했던 오를레앙 공작의 투자자본으로 지어진 공장을 되찾겠다고 하면 실리도 없거니와 여론전에서도 완패할 겁니다."

고로 저 소다공장은 이만 잊어버리는 게 좋다.

지금 이 사람에게 필요한 건 그게 아니라.

"지적재산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특허지.

이 프랑스에 특허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르블랑씨는 이미 분명히 혁명정부로부터 르블랑 공법의 특허를 인정받았다.

다만 아직 이 특허법이 제정된 지 꼴랑 몇년 안되었다 보니 존중 받아야 할 재산이라기보다는 구시대적인 전매권으로 인지되고 있고 또 실제 법정에서 법관들의 해석도 그쪽으로 치우칠거라는 게 문제인데.

"우선 분명히 단언하건데, 당신의 르블랑 공법은 단순한 발명품이 아닙니다."

"···네?"

"지적활동의 결정체이자 하나의 작품이지요. 당연히 르블랑 씨는 창작자로서 작품을 회수할 권리를 보장 받아야만 했습니다."

특허법만으로는 안된다면 법을 하나 더 끌어오면 되는거지.

요컨대, 저작권법이다.

혁명 이후 입법된 프랑스 저작권법은 창작물을 저작자의 인격의 연장선이라고 분명히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영국법과는 달리 창작자는 본인의 명예와 품위를 지킬 권리를 가지며, 저작물이 본인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오용되거나 모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판단이 서면 이의를 제기하거나 설령 세간에 공표했더라도 도로 이를 철회하고 회수할 권리 또한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창작물이란 오롯이 정신 활동의 결과물이고, 저작권이란 개인의 인격에 대한 존중과 자아 표현에 직결된 권리니까.

"하지만 르블랑 씨는 창조자로서의 적법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의 소다공장은 오체분시 되어 뿔뿔이 흩어졌으니까.

이는 르블랑의 지적활동에 대한 모독이다.

"고로 혁명정부가 당신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했다고 공개적으로 소송을 내십시오. 담당 변호사가 이 로베스피에르라면 현 정부에서도 이를 가볍게 넘기지는 못할 겁니다. 무엇보다 과학 아카데미에서 내리기로 한 포상금조차 받지 못했다고 선전하면 여론전에서도 수월하게 우위를 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러기엔 돈이-."

"그렇다면야 모금 광고를 내면 되지요."

안 그래도 슬슬 우리 잡지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끌 만한 사건·사고가 필요했는데 잘됐네.

마담 롤랑이건, 마리 테레즈건 파리와 그 주변 경기권이면 몰라도 프랑스 구석구석에 아는 사람들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아니면 이참에 제 명의로 과학 아카데미에 직접 도움을 청해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군요."

이번 소송에서만 이기면 덩달아 본인들 특허권도 존중 받을 수 있을 텐데 열심히 호응해줬으면 해줬지, 방해하진 않을 거다.

하물며 담당 변호사가 이 로베스피에르니까 다들 무조건 이긴다고 확신하고 마구 베팅하려 들겠지.

···가만, 아예 이참에 이걸 엮어서 인텔리겐치아 노동조합을 만들어봐?

정부에서 공인받게 한 다음 본인들이 저작권이나 특허 위반사례 나올 때마다 소송 걸게 만들면 이게 다 본인들 밥그릇이니까 죽자 살자 멸사봉공할 것 같은데.

[그럼 그냥 저작권협회라고 부르면 되는 거지 뭔 인텔리겐치아 노동조합인가?]

어허, 아저씨는 혁명 감수성도 몰라요?

하여간 이래서 반동 부르주아지는 안된다니까.

"아니면 아예 둘 다 취하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그게 더 확실하겠지요. 선택이야 르블랑 씨의 몫입니다만."

이게 선택의 여지를 주는 거로 보이지는 않겠지.

하지만 내가 뭐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본인에게도 최선의 길로 정성껏 유도해주고 있는건데 착한 일 하는 거? 아닐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르블랑 씨께서 허락해주신다면야 이 로베스피에르가 마지막까지 책임져드리지요."

"···감사합니다."

르블랑 씨가 고개를 떨구었-어이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폭포수처럼 흐르는 눈물.

그간의 서러움과 마음고생을 한꺼번에 쏟아내듯이 르블랑 씨는 그 자리에서 끅끅대며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흠, 결국 그 공장은 포기해야 할 텐데 이렇게 감사받을 일인가?

따지고 보면 이 사람 공장이 난도질 당한 거에 나도 책임이 없다고는 하기 어려운데.

굳이 책임 공방을 따지자면 끝내 제 욕심 못 버리고 쿠데타나 일으켜서 공장 압류시킨 오를레앙 공작이 가장 크겠지만.

[그건 그거고, 꼼짝없이 망할 판에 이렇게까지 도와주겠다고 그러면 당연히 고마운 거지.]

그런 건가?

난 잘 모르겠다.

항상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읽기 쉬운 듯하면서도 어렵다는 말이야.

"그거 알아요?"

아무튼 펑펑 울고 있는 르블랑 씨를 어떻게든 달래서 돌려보내고 나니.

지금껏 가만히 우리 둘을 관찰하고 있던 이번 사건의 원흉-마리 테레즈가 말했다.

"가끔 보면 우리 아빠 보는 것 같아요."

"잘못 보신 겁니다."

하필이면 그 루이 오귀스트랑 비교하다니.

이처럼 끔찍한 인격 모독적 발언이 이 프랑스에 존재할 줄이야.

"와, 어떻게 이렇게 예상을 단 한 글자도 안 벗어날 수 있지."

마리 테레즈가 키득거렸다.

"그럼 역시 돈이랑 원수진 무슈 청렴결백인 거로 해둘게요. 이번엔 고마웠어요."

"제발 부탁이니까 한창 해결 중인데 또 새로운 사건 끌고 오고 그러지만 마십시오."

"그러니까 끝나고 난 다음에는 상관없다는 거죠?"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를 제멋대로 긍정이라 단정했는지 마리 테레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베르사유로 돌아갔다.

***

튈르리 궁.

"···그 친구 뻔뻔한 거야 진작부터 알고 있기야 했네만."

국민공회 위원장 당통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혀를 찼다.

"본인 수상 임기 시절 일로 공개소송을 내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안하무인도 정도가 있지 본인이 직접 압류 서명까지 했으면서 뭔."

"뭐, 그래서 공장을 돌려달라고 하지는 않았잖은가. 이 르블랑이라는 친구의 지적재산권을 침해당했다고 했지."

"염병하고 있구만 정말."

진저리가 난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급진당 원내 지도부 중 누구 한 사람 이에 반박하거나 당통이 지나쳤다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그래, 딴에는 공익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특허법이 제정된 지 몇 년이 지나도 아직 세간에서는 그런 법이 있는지도 모르거나 전매권쯤으로 알고 있으니 자작극으로 홍보 효과를 노린 것도 알겠다.

하지만 이래서야 그들을 악당으로 몰아세우는 격이잖은가.

정작 오를레앙 공작의 자산을 압류할 때 혁명정부를 이끌던 책임자이자 직접 서명까지 했던 장본인은 오히려 그들을 고발하는 쪽에 붙어버렸고.

"아무래도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닌가, 싶네."

마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문 말인가?"

"마담 롤랑을 정부로 삼았다는 소문 말이야. 그 친구가 이제 와서 오를레앙 공작 관련자를 건드릴리도 없고, 보나 마나 마담의 청탁 아니겠는가."

"아하,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베갯머리 송사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언제 그렇게 성을 냈냐는 듯이 당통은 모든 걸 이해한다는 얼굴로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늦바람이 났으면 진작에 그렇다고 말을 하던가. 하여간 이 친구도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숫기가 없어서야 원. 치정문제였다면야 얼마든지 이해해주고말고. 그동안 그 친구가 내 치정문제로 배려해준 게 얼마인데 이것 하나 감내 못 해주겠나?"

"듣자 하니 공주까지 정부로 삼았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건 절대로 아닐걸세."

당통이 정색하며 단언했고, 다른 참가자들 또한 이론 없이 인정했다.

아무렴 그 혁명하는 기계가 결혼에 골인한 것만으로도 역사적인 위업이라며 칭송해줘야 할 판에 세 다리는 무슨 얼어 죽을 세 다리인가.

저 마담 롤랑만 해도 여느 때와 별 다를 바 없는 정략적인 목적의 접근이지 오늘날 호사가들이 지껄여대는 그런 유쾌 발랄한 이야기는 절대로 아닐 텐데.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자크 루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가 저 투기장에 나갈 텐가? 위원장 동지가 나선 이상 어지간한 인물로는 상대가 안될 텐데."

"저기 신부님. 지금 위원장은 저입니다만."

"어이쿠, 이거 실례했네. 입에 너무 익어서리."

그야 그동안 위원장이라면 으레 로베스피에르뿐이었으니.

그 권위를 은근히 빌려 쓰고 있는 당통으로선 차마 자크 루를 탓할 수도 없었다.

"우선 우리 중 한 사람이 나설 수는 없네."

카미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야 내분이나 내부 총질이라는 소리가 나올 테니까. 야권 인사들 쪽에서 나가야 할 텐데-."

"그럼 진짜 개싸움이 되는 거 아닌가?"

아무렴 누가 소송에서 지려고 나선다는 말인가.

하지만 구경꾼들만 수천수만 명이 몰려든 사실상의 공개토론회가 될 게 확실한 상황에서 무명의 변호인을 내보내는 것도 영 모양새가 아니다.

정말로 공범이 아니고서야-.

"잠깐만."

문득, 마라가 장난꾸러기 악동 같은 미소를 떠올렸다.

"저 친구가 재산권을 들먹였으니 따지고 보면 이건 경제문제 아닌가?"

"···뭐어, 그렇지?"

"그럼 재무장관이 나가야지 않겠나."

침묵.

다들 설마 하는 심경으로 마라를 돌아보았으나.

"왜? 어차피 특허법 홍보용 자작극이라면 이정도 상징성은 있어야 다들 즐겁지."

마라는 오히려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정부(情夫)와 정부(正夫)의 드림 매치가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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