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그 소리는 안 하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더니만 꼭 사람 마음을 도려놔요. 진짜.
아무튼 이게 다 비누 보급과 위생 개선을 위한 설계고 희생정신이었다니까?
[풋.]
"은혜라고 할 만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신경 쓰지 말자.
공주님도 누가 뭐라건 나만 떳떳하면 그만이라고 했잖아.
어차피 내가 사라지고 나면 이게 전부 이놈 평판이 될 텐데 무슨 상관이라고!
[···어? 10할 잠깐만.]
이미 늦었어.
"오히려 제 정치를 위하여 르블랑 씨를 이용한 격인걸요. 서로서로 이용하여 고르게 득을 보았으니 그걸로 그만일 일입니다."
"아뇨, 은혜입니다. 설령 로베스피에르 씨께서 아니라고 하셔도 오늘만큼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르블랑 씨가 내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며 선언했다.
"이 세상에 선임료조차 받지 않고 억울한 사람을 위하여 정부에 소송을 내주는 변호사가 있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이 프랑스의 행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라니요. 로베스피에르 씨가 아니라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겁니다! 당신은 저의 생명의 은인이고, 헛되이 사라질 뻔하였던 제 모든 특허의 은인이십니다!"
어···.
혁명 정부가 아직도 그런 이미지였나?
나름 노력한다고는 했는데.
[그보다는 왕권신수설의 연장선일세. 행정부의 수장인 국왕의 권력이 신께서 내리신 거라면 행정부는 무엇이겠나? 천사지. 사람이 천사에게 책임을 추궁할 수 없듯이 행정부에도 어떠한 책임이나 이의도 제기할 수 없다는거야.]
거참 죽창 마려운 개소리일세.
그러니까 모든 행정공무원은 신성한 왕권을 집행하는 지상 대리인이니 미개한 농노들은 그 어떤 부당한 처사를 당해도 민원도 걸면 안 된다는 소리잖아?
난 그냥 특허법 홍보=발명 장려라고만 생각해서 덤벼든 거였는데.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이 왕권신수설의 잔재를 하나 더 박살을 내놨으면 이것도 나름 중요한 혁명과업이었구만.
아니 그보다도.
[뭔가?]
나야 몰랐을 수 있다고 치는데 댁은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왜 지금껏 입 꾹 다물고 계셨슈?
[아뿔싸-가 아니라. 내가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있었나?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겸사겸사 잘 때려 부쉈으면서 뭘. 이 세상에 농담보다 더한 탈권위 운동이 어디 있는가? 이제 우리가 행정소송을 농담처럼 만들어줬으니 다들 생각을 달리할걸세.]
···음, 그렇게 말하니까 또 할 말이 없네.
하기야 일단 반동을 때려 부순 게 중요하지 왜 때려 부숴야 하는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혁명무죄! 조반유리!
왕권신수설은 부숴도 돼!
"그뿐만이 아닙니다."
르블랑 씨가 배에 힘을 주며 언성을 드높였다.
"로베스피에르 씨가 아니셨다면 그 누가 본인의 치정극을 제 상품홍보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겠습니까!"
"···그, 목소리를 좀."
"하물며 부르봉의 공주님과 마담 롤랑이 그 주인공이라니! 세상에 이보다 사치스러운 홍보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창세 이래로 고서를 샅샅이 뒤져봐도 이만한 도움을 단기간에 후원자에게 몰아받은 과학자는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아닌 말로 나도 비누 보급이라는 공공을 위한 대의가 없었다면 여기까진 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르블랑 씨에게 도움을 준 건 사실이고, 내가 직접 고안한 여성향-남성향 비누는 앞서 설명했듯이 향수 산업을 위협하는 수준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중.
여기에 공업용 유리에 필요한 수요는 또 수요대로 끊임없이 소다를 요구하고 있으니, 정계의 비호와 파리 금융가의 총애와 소다 산업의 미래에 주목한 개인 투자자들이 몰리면서 르블랑 씨는 그야말로 벼락부자를 눈앞에 두고 있다.
어쩌면 조만간 파리 근교에 본인만의 소다 공업단지를 차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한번 따라해보게. 탄.산.나.트.륨.]
시꺼.
의미만 통하면 된 거지 뭘.
"그런 의미에서, 이걸 받아주십시오."
르블랑 씨가 개인비서에게서 고급 양피지 위에 적힌 계약서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이번에 우리 공장이 주식회사로서 상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하, 주식이었구나.
그런데 벌써 주식시장이 그렇게 활성화 되어있었나?
[미시시피 주식회사의 루이지애나 투기버블로 프랑스 경제가 한번 망했던게 벌써 75년 전일세, 이 친구야.]
···어, 75년 전이면 루이 오귀스트보다도 훨씬 전인데.
저기 혹시 프랑스 경제도 망해있는게 전통이야?
[·········.]
아하.
오케이.
"그럼 이건 저한테만 주시는 겁니까? 아니면 마담과 공주님께도···?"
"물론 두 분 다 드려야지요."
정색하는 르블랑 씨.
뭐, 나야 아무튼 이 사람으로선 생판 남의 치정극을 광고로 이용해 먹고서 입 싹 씻기에는 무섭긴 했겠지.
그러니까 이건 그간의 내 행동에 대한 진심이 담긴 감사에 더해서 예쁘게 봐달라는 처세술의 일환이겠지만.
"저는 됐습니다."
차라리 수고비를 받으면 모를까, 주식 같은 걸 가지게 되는 순간 청렴결백해질 수가 없다.
꼭 돈에 원수진 집주인 놈이 아니라도 이건 수지타산에 맞는 거래가 아니야.
장차 르블랑 그룹이 얼마나 큰 돈을 벌게 될지는 몰라도 내 최고의 정치자산과 천칭에 놓을 순 없다.
"애초에 대가를 바래서 도와드린 게 아니니까요. 몇 번을 말씀드렸지만 저는 저의 목적을 위하여 르블랑 씨를 이용하였을 뿐이고, 그 결과 각자 득을 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러니 이 주식은 제가 아니라 직원분들에게 나눠주십시오."
"직원들이라고요?"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
"네, 르블랑 그룹의 임직원분들에게 나눠주십시오."
이 시대의 금융이나 주식회사에 그렇게 해박한 건 아니지만, 힘없는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빠져있을 것이라는 것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약점 부분을 후벼파기 시작하면 아시냐 파동 때처럼 순식간에 과격하고 폭력적인 반자본주의 담론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내가 이 약점을 보완하기 시작하는 순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또한 그만큼 어려워지며 원리주의 진영에서 수정주의자들을 죽어라 비판하는 이유를 정확히 뒤따라가게 된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까 산업화가 어느 정도 진전되고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위한 토양이 준비될 때까지 일부러 이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있었던 건데-.
[이봐.]
"저는 르블랑 씨의 후원자입니다. 맞지요?"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르블랑 그룹의 얼굴이 제 얼굴이 될 거라는 것도 잘 아시겠군요."
그렇게까지 연속혁명에 목매달 필요 있을까.
이미 바뵈프가 보기에 나는 둘도 없는 수정주의자일 텐데, 괜히 무리하느니 수정주의자의 굴레를 짊어지지 뭐.
어차피 마르크스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바뵈프가 이미 원내에 입성했으니 털보 듀오가 우리의 혁명사를 연구하기 시작하면 원 역사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완성된 물건이 튀어나올 거다.
그럼 나는 역사의 선형적 진보와 끝나지 않는 투쟁사를 믿고 적당히 민주사회주의 정도로 만족하면 되는 거 아닐까.
[이제 좀 사람답군.]
극우 수정주의로 타락한 거지.
[호오, 그래? 치정문제에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까지 동시에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입 닥쳐, 막시밀리앙.
"저는 문명의 선형적 진보를 믿습니다."
르블랑 씨와 눈을 마주치며 분명히 선언했다.
"앞으로 과학과 산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그만큼 인간의 영역은 줄어들고 그 빈자리를 자동화된 기계설비가 대체해가겠지요."
"그건 좀, 너무 머나먼 미래처럼 들리는데요."
"글쎄요, 그거야 우리 하기에 따라 달려있겠지요."
과연 이 시대 사람들이 21세기의 지구를 본다면 몇 세기 뒤의 미래라고 생각할까?
생활상만 봐서는 천년 뒤라고 믿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거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천 년 전 프랑크 왕국과 작금의 프랑스 코뮌은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거의 조금도 바뀌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 선형적 진보를 위해 문명의 본분을 잃어버려서야 되겠습니까."
널리 인간을 편리하게, 그리고 이롭게 하라.
"저는 다만 혁명이 만들어갈 내일의 우리 사회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
꿀꺽.
르블랑 씨가 또다시 침을 삼켰다.
"···잘 알겠습니다, 로베스피에르 씨. 그렇다면 당신이 절 도와주셨듯이 저 또한 그들을 돕는 걸 보은이라고 믿고 또한 언제나 명심하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듣기만 해도 기쁘군요."
덥석.
마침내 우리 두 사람은, 아니 세 사람은 손을 마주 잡았다.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
마담 데물랭의 카페.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엘레오노르 드 로베스피에르.
"좋아요."
마리 테레즈.
"바라던 바랍니다."
마담 롤랑이 차례로 자리에 앉아 서로를 돌아보았다.
누구 한 사람 인상을 찌푸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이도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했다.
자고로 이 프랑스 여인들에게 치정살인이란 웃는 낯으로 교묘한 음모를 곁들이되 익명에 숨지 않고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며 살해하는 것이야말로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단연 으뜸이었으니.
꼭 치정살인이 오늘 이 자리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이 프랑스에서 누구보다 명예롭고, 품위 있어야 할 세 사람이 우아한 미소를 잃게 될 일은 단연코 없었다.
응애애-!
"우선, 먼저 이것부터 시작할까요."
울음을 터트리는 막시밀리앙 2세를 달래며 엘레오노르가 입을 열었다.
"에로스는 손을 들고, 플라토닉은 손을 내려주시길."
침묵.
"훗."
엘레오노르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솔직히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에요?!"
벌떡.
역시나, 가장 나이가 어렸던 마리 테레즈가 가장 먼저 인내가 끊어져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차라리 손이라도 댔으면 억울하지나마 않지 그놈의 우유 비누 때문에 요즈음 사교회에서 아무도 제 순결을 믿어주질 않는다고요!"
"체통을 지키소서, 공주마마."
마담 롤랑이 고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제아무리 여인들끼리 모인 자리라지만 아직 정혼자도 정해지지 않은 마드모아젤께서 어찌 그런 남사스러운-."
"다들 절 마드모아젤이 아니라 마담이라고 여긴다고요."
이러면 됐죠?
마리 테레즈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마담은 아무 말 없이 커피를 입안 가득히 머금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품위도 수치도 모르는 말괄량이가 왕정의 마지막 공주가 되었는지 원.
찌라시 속의 당차고 의기양양한 열녀와 판에 박은 듯한 모습에 엘레오노르 또한 남몰래 웃음을 삼켰다.
"전 아무런 불만 없어요."
탁.
마담 롤랑이 도로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연애 감정으로 제게 접근한 게 아니었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럼 그냥 이용당한 거 아니에요?"
"저도 어차피 똑같이 이용하려고 접근한 거니까요. 결국 서로서로 이용하기로 한 거니, 불평할 이유도 없죠."
사무적인 해석이었다.
논리적인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에요?"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어디 논리적이던가.
놀리듯이 이죽거리는 마리 테레즈의 도발에도 한참을 침묵하던 마담 롤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힘드네요."
무엇이, 같은 설명은 필요 없었다.
그녀의 품위와 명예를 지킬 수 있도록 적당히 완곡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대답을 고른 것일 테니까.
새근새근.
"방해할 생각은 없어요."
곤히 잠든 막시밀리앙 2세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가득 띈 엘레오노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무 저 혼자 질투를 불태우면서 집안에 꼭꼭 숨겨봐야 저도 그이도 흉을 당할 테니까."
"아, 우리 어마마마랑 아바마마처럼요?"
"공주마마, 제발."
마담 롤랑의 필사적인 제지에도 아랑곳없이 마리 테레즈가 대꾸하길.
"왜요? 전 우리 아바마마 같은 벽창호라서 좋은 건데."
""·········.""
본인의 취향이 그렇다는데 무슨 말을 더할까.
심지어는 옛 왕실의 장녀께서.
호록.
커피 한 모금으로 조금 전의 충격을 씻어낸 엘레오노르가 재차 입을 열었다.
"첫째."
"뭔데요?"
"사생아를 만들지 말 것."
혼전임신에 트라우마가 있는 양반이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지만-.
이미 한번 막시밀리앙 2세라는 전례가 만들어진 이상 또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타당하다면 타당한 요구에 마담 롤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다음."
"씨잉···."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울상을 지은 건 어떻게 해도 논란을 피할 수 없는 마리 테레즈 공주뿐.
그럼 런던 같은 북해 문화권에서는 얌전히 포기하거나 했겠지만.
"됐어요. 어서 마담이 되라는 소리죠?"
"뭐, 그렇죠."
"체엣-. 하여간 다들 마담뿐이라고 되게 유세 떠네."
이곳은 국왕과 정을 통한 상대가 처녀라면 얼른 정혼자를 정해서 사생아를 걱정할 필요 없는 정당한 불륜(?)으로 바로잡아주는 프랑스.
그리고 마리 테레즈는 이 부르봉 왕가의 아름다운 정부 문화를 몸소 창조하신 태양왕의 부계 혈통을 이은 몸이었으니.
고작해야 사생아 문제 정도로 그녀를 방해할 순 없었다.
"좋아요, 그럼 두 번째."
물론 엘레오노르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 또한 프랑스인이었으니까.
"허락받으라고까지는 하지 않겠어요. 최소한 사전에 통보 정도는 해주시길."
얼핏 대단한 것 없어 보이는 요구였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의 관계에서 자신이 모든 주도권을 독점하겠노라 선전포고한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
"그건 좀 너무 지나치지 않나요?"
그간 언제나 품위를 지키던 마담 롤랑이 드물게 인상을 찡그렸다.
"차라리 지금처럼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하겠습니다."
"? 이게 뭐 어땠는데요?"
"아직 모르신다면 그걸로 됐어요."
그건 그것대로 앞으로 사교회에서 그녀가 순결하다는 산 증거가 될 테니.
아무렴 그들이 오직 생식을 위한 행위만 인정한다는 저 천박한 위그노들도 아니고 거룩하고 정숙한 가톨릭 교회의 장녀들일진대 그 무수한 행위를 하나하나 통보한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된다는 소리인가.
당장 분개한 마담 롤랑은 물론이오, 이야기를 처음 꺼낸 엘레오노르조차 너무 지나친 요구를 했음을 후회하며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으나-.
"그럼 보고 있는 곳에서 하면 되는 거죠?"
""·········.""
너무나도 순진한, 하지만 그렇기에 섣불리 받아치기도 힘든 질문에 두 마담은 값진 침묵을 지켰다.
홀짝.
각자 진한 커피 한 모금으로 조금 전의 충격을 씻어낸 두 마담이 서로를 노려보며 중재안을 주고받았다.
"하다못해 사후 통보로. 그 이상은 양보 못해요."
"좋습니다. 그거라면 얼마든지요."
"엥? 결국 똑같은 거 아니에요?"
순진무구한 질문이었다.
두 마담은 조금도 입꼬리를 움직이지 않은 채 정숙함을 지켰다.
다만, 마침내 마마께서 모든 걸 알게 되실 그날은 넷이서 함께 샴페인이라도 마시며 축하하자고 조용히 눈빛을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