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154)

계몽

사무실. 

"―그렇게 되었답니다." 

아니 저기 마담, 대체 뭐가 그렇게 되었는데요.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건지는 알겠는데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 

애초에 당사자인 내 의사가 빠졌잖아! 

뭘 멋대로 남의 하반신을 나누어 가지려는 거야! 

[그래서 정혼자도 안정해진 마드모아젤을 비누 모델로 쓴 건 잘했다고?] 

넵. 

제 자업자득입니다. 

새파란 처녀의 혼삿길을 막았으니 당연히 제가 책임을 져야지요! 

그런데 마담은 다르잖아! 

[그 전에 공개토론회에서 마담을 앉혀놓고-.] 

빌어먹을! 

어느 쪽도 자업자득뿐이라서 책임회피가 안 되네! 

유교 드래곤 살려! 

[···따지고 보면 자네가 죽인 거 아닌가?] 

아냐, 지가 알아서 온갖 못 볼 꼴 다 보더니 심정지했다고. 

아무튼 자연사임. 

난 그저 언제나처럼 정치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그렇다면 설마 오늘 밤은 비워두라는···?" 

"품위도 없으셔라." 

착. 

깃털 부채를 접으며 마담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제가 그런 낭만도 뭣도 없는 애욕에 미친 짐승으로 보이셨나요?" 

"···넘겨짚어서 죄송합니다." 

"됐어요. 경험도, 배려도, 양심도 없는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쉴 새 없이 날아드는 폭언. 

"이제 와서 화내봐야 별수 있나요. 경험자로서 이 숫총각보다 더한 목석을 계몽시켜주는 수밖에." 

"윽." 

하지만, 막상 폭언을 날려오는 마담은 어딘가 들떠 보였다. 

왜인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넌 알겠냐? 

[당연히 모르지.] 

그래, 우리 사이 변치 말자.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게 노력하실 필요는 없어요." 

착. 

마담이 도로 깃털 부채를 펼치며 입가를 가렸다. 

"솔직히 당신이 제가 보지 않는 곳에서 멋대로 혼자 바뀌기 시작하면 굉장히 짜증이 날 것 같으니까." 

"짜증이 나요?" 

"설마 이런 것까지 설명해드려야 할 줄은 몰랐네요. 그럼 제가 목석을 사람으로 만들어줘야 재미가 있는 거지, 안 보는 사이에 카사노바가 되어서 돌아오면 도둑고양이랑 바람피운 거잖아요?" 

···어, 따지고 보면 이것도 바람기 아닌가요? 

[우리 프랑스 기준에서는 아닐세. 오히려 건전하고 정숙한 남녀관계지.] 

정실부인이 인정해줬으니까? 

[오, 이제 좀 프랑스 남자 티가 나는군. 바로 그걸세. 평범하게 불륜 사실을 숨기거나 아니면 아예 과시하면서 정부가 정실에게 싸움을 거는 게 보통이니까.] 

제기랄! 

당장 내 머리에서 나가라, 이 음란 마귀야! 

"그러니까 당신은 지금 같은 목석이고, 벽창호로 남아주시길." 

마담 롤랑이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벌써 당신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음, 그럼 평소처럼 일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됩니까?" 

"···당신 도대체 지금까지 뭘 들은 거예요?"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 

뭐어, 이번엔 나도 눈치 없었다는 거 이해하긴 하는데. 

"이게 노력하지 않은 평소대로의 제 모습 아닙니까?" 

아무렴 내가 그런 거 눈치 보는 놈이었으면 비누로 이 사달을 냈겠냐고. 

마담이 먼저 날 계몽시켜주겠다고 말했으니 내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일 이야기만 하면서 벽창호처럼 굴면 저쪽에서 적극적으로 교정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내 인정하겠네. 역시 자네가 최고야! 이렇게 훌륭한 치정극을 매일 일등석에서 공짜로 관람하고 있다는 사실에 일말의 죄악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입 닥쳐, 막시밀리앙. 

"하아아···." 

땅이 꺼지라고 한숨. 

착. 

"그래요,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죠." 

도로 깃털 부채를 접은 마담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분 탓일까. 

조금 전까지 들떠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마담은 조금 심통이 난듯했다. 

아마 나 때문이겠지만! 

[우리 민혁이 다 컸구나···.] 

시꺼! 

"그래서, 어떤 이야기죠?" 

"요즈음 의류공장과 섬유공장들이 크게 늘면서 석탄 수요가 급증하고 있으니 그 대책을 논의해볼까 합니다만." 

"···그거 지금 자연인이 고민해야 할 문제가 맞나요? 다음 총선에서 당선되시고 난 다음에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마담 롤랑이 기가 찬다는 듯이 혀를 찼다. 

뭐, 나 하나만 생각하면 그게 맞긴 한데. 

"사업이잖습니까." 

나야 인세 정도나 받고 있지만 마담 롤랑은 엄연히 사교회로부터 투자를 받아서 사업체를 일으킨 몸이다. 

보다 붉게가 처음에야 여성지로 시작했으나 점점 이런저런 유행을 주도하고 공장들과 독점 계약을 따면서 문어발 패션 재벌이 되어가고 있으니 당연히 가장 먼저 고민해봐야지. 

이 석탄 부족 문제를 누구보다 먼저 해결하는 사업가가 장차 프랑스 산업계를 지배하게 될 테니까. 

"정부에서 대책을 논의할 때까지 기다리는 순간 도태될 뿐이지요. 저희가 지금이야 앞서가고 있다지만 언제까지 지킬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정부 인사가 아닌 민간사업가이기에 더더욱 급히 논의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마담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좋아요, 그럼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방안은 뭐죠?" 

"혹시 증기기관차라고 말씀하시면 알아듣겠습니까?" 

"증기기관차요?" 

음, 역시 모르는군. 

생각보다 이것저것 찾아보면 잔뜩 나오길래 기대해봤는데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닌가. 

"그러니까 철로 위에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마차를 얹고 석탄을 끌게 하는 겁니다. 광산에서 쓰이는 광차를 저희 사업장까지 직접 연결하는 거지요." 

"아하." 

짝. 

그제야 마담 롤랑이 손뼉을 쳤다. 

"영국인들이 쓰는 마차 철로에서 영감을 얻으신 거군요? 내용물은 조금 더 상위호환 같지만." 

"···예, 그렇습니다." 

역시 영국에선 진작에 철로를 깔고 있었나. 

하기야 이미 철로가 있으니까 그 철로 위를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개발한 거겠지만. 

철로가 없었으면 일반도로에서 쓸 수 있는 자동차 개발에 집중하고 말았겠지. 

"우선 이 철로를 까는 건 그리 어려운 것 없어 보이네요." 

"어, 벌써 그렇게 자본이 모였습니까?" 

"아뇨. 광고를 내서 투자받으면 되죠. 그걸로 부족하면 대출을 끌어 쓰면 될 테고. 안 그래도 알자스 쪽에 공장을 새로 지으려고 했으니 딱 거기까지만 시험적으로 깔면 되겠네요." 

하기야 그렇네. 

오히려 당연히 현찰박치기일 거라고 생각한 내가 뇌가 굳어있었던 거구나. 

로베스피에르와 롤랑의 사회적 신용도를 내세운 철로 공사라면 그야 투자자본이건 투기자본이건 아쉬울 게 없겠지. 

자, 여기까지라면 아무 문제 없는데···. 

"증기기관차는 정말로 불가능하겠습니까?" 

"글쎄요···." 

난감한 반응. 

아니, 그 이전에 그게 그렇게 필요한가? 라는 반응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증기기관차의 실물을 알지 못하는 마담 롤랑에게 내 계획은 장난감처럼 느껴질 테니까. 

심지어 이 철로를 먼저 깔아서 쓰고 있는 영국도 그냥 마차를 굴리고 말지 기관차는 아직 생각지도 않고 있거나, 개발 와중이다. 

아마 우리 두 사람이 애인 관계가 아니었다면 애당초 지금처럼 진지하게 고민해주지도 않았을 테지. 

반대로 말하자면 지금 이 고뇌의 깊이야말로 사랑의 무게라는 건데-. 

"···증기 기관차는 몰라도 증기 자동차 발명가라면 아는데." 

할렐루야. 

이것이 파워 오브 러브? 

[프랑스어로 하게.] 

비브 라 아모르! 

[옳지, 착하다.] 

"증기 자동차라고요?" 

"예에. 20년 전인가? 30년 전인가 선왕 시절에 증기 자동차를 발명해서 포상금을 타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 프랑스의 위대한 발명가는 어디 있습니까!" 

위대한 기술자 떴냐?! 

불가사의 완성 가즈아! 

"이미 파산했을걸요?" 

···아니 르블랑 씨도 그렇더니 왜 다 이 모양이야. 

혹시 프랑스의 발명가들은 대접을 못 받고 파산하는 게 전통인가? 

[커흠.] 

"파산했다고요?" 

"네에. 증기 자동차를 발명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시연에 성공하기는 했거든요? 그랬었는데-." 

"그럼 된 거 아닙니까?" 

루이 15세 시절에 개발된 증기 자동차가 일단 멀쩡히 굴러갔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거 아닌가? 

한데 마담이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이길. 

"쾅." 

"···쾅?" 

"전진은 문제없이 가능했는데, 시동을 끄는 것 말고는 멈출 방법이 없어서 민가에 부딪혔어요. 어찌나 힘이 좋은지 그러고도 몇 바퀴를 더 굴러가서 그 일대를 아주 쑥대밭을 만들어놨죠. 물론 증기 자동차 자체는 군대의 요구대로 대포도 끌 수 있었으니 포상금은 받았지만-." 

절레절레. 

"멈출 수도 없는 마차가 대체 무슨 소용이겠어요? 결국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고, 특별채용도 취소되면서 그 위대한 발명가는 감옥에 갇혔어요. 그 뒤로도 몇 번이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를 운전하다가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증기 자동차마저 압수당했지요." 

···뭔 이딴 개씹억까가. 

[어허, 고운 말.] 

알어, 안다고. 

결국 이러쿵저러쿵해도 교통사고를 낸 거잖아? 

그러니까 감옥에 갇히는 것도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억까로 인류문명의 진보가 저해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눈에서 막 땀이 나려고 한다. 

"아마 혁명 뒤로는 브뤼셀에서 거지꼴로 지내고 있다고 들었는데···한번 연락해볼까요? 별로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겠지만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담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그 이름도 모르는 위대한 발명가의 문제는 주행이 아니었다. 

브레이크가 없었다는 거지. 

노력은 해봤지만 끝내 개발에 실패한 건지, 아니면 그 점을 생각하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람과 마차가 시도 때도 없이 돌아다니는 인도 위에서 운행해야 하는 자동차면 몰라도 정해진 철로를 달리면 그만인 기관차라면 이는 대단한 흠결이라고 하기 어렵다. 

일정 구간을 지나면 시동을 끄고, 그래도 멈추지 않으면 임시로 뭐든지 간에 바퀴에 마찰을 가할 수 있는 부착물을 달면 그만이니까. 

물론 중간중간에 치이는 사람이나 동물을 아예 없앨 순 없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최소한 도중에 멈추질 못해서 가정집을 냅다 들이박는 참사는 없을 거다. 

[···잠깐, 너 누구냐? 탄산 나트륨도 모르는 박민혁이가 아닌데?] 

나도 운전면허 정도는 땄거든? 

탄산 뭐시기면 몰라도 브레이크가 뭐 하는 물건인지도 모르면 그게 현대 한국인이냐. 

"그리고 앞으로 사업과 관련하여 논의해야 할 사안이 있다면 따로 제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언제건 말씀해주십시오." 

마담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하, 씨. 

그런 소리까지 듣고 나니 괜히 의식하게 되네. 

"신혼일지나 써낼 때야 몰라도, 지금은 마담께서 최고책임자이시고 또 최고경영자시잖습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제게 조언을 해주겠다고요?" 

"예에. 비록 제가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야 않더라도 조언이라면 아끼지 않고 말고요. 저도 이제 와서 무책임하게 우리 사업을 모른척할 생각은 없-." 

"생각이 바뀌었답니다." 

마담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오늘 밤은 비워두시길." 

"네? 조금 전에는 분명히-." 

"당신이 나쁜 거예요." 

그래서 제가 대체 뭘했는데요?! 

"정녕 모르시겠나요?" 

어딘가 한기가 느껴지는 미소. 

"뭐어, 그렇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지요." 

"저기, 마담?" 

"말했죠? 당신이 나쁜 거라고." 

또각. 

마담이 슬그머니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나는 다시 한걸음 뒤로 물러났고-. 

덥석. 

그 전에 마담이 내 손을 낚아챘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입 닥쳐, 막시밀리앙! 

"그렇다면 알려드리지요." 

쿡. 

마담이 곱게 접은 부채로 내 목젖을 찔렀다. 

"당신을 계몽시켜드리겠다고 했으니까." 

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마담도 더는 말로써 설명하지 않았다. 

*** 

파리, 탈레랑 저. 

"물론 제가 언제건 찾아와달라고 말씀을 드리긴 했습니다만···." 

탈레랑이 난처하다는 듯이 모국에 돌아와 미처 짐을 정리하기도 전에 그의 문을 두드린 불청객을 흘겨보았다. 

"보시다시피 아직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터라." 

"괜찮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이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하숙비라면 준비해왔으니까요. 꼭 방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집을 소개해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지금 제가 떳떳하게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잠시 몸을 피하러 온 몸이니 그리 존대해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거참." 

그게 문제가 아니래도. 

탈레랑은 잠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가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지워버렸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듯한데, 우선 안으로 모시지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해밀턴이 고개를 숙였다. 

부인도 없이 여비와 옷가지 정도만 들어갈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나타난 것이 정말로 급히 몸을 피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장관님께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탁. 

해밀턴을 위해 파리에서는 보기 힘든 홍차를 건넨 탈레랑이 포문을 열었다. 

"음, 그게 말씀드리기 좀 곤란합니다만." 

"이유야 어쨌건, 제게 의지하려고 찾아오신 거잖습니까. 집주인으로서 이 정도는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타당한 요구였다. 

또 그게 예의에 맞기도 했고. 

"···알겠습니다." 

결국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해밀턴이 입을 열었다. 

"스캔들이 있었습니다." 

"스캔들?" 

"예. 부끄럽지만, 아내가 아닌 다른 유부녀에게 한눈을 팔고야 말았습니다. 심지어는 그 남편에게 들키고 협박받는 처지가 되었지요." 

"불륜이라···." 

확실히. 

미적 감각에 까다로운 탈레랑이 한눈에 보아도 조각미남이라고 마지못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해밀턴이라면 그리 놀랍지 않은 이야기였다. 

설령 그가 제아무리 금욕적으로 굴었어도 첫눈에 반한 여인들이 육탄공세를 사방에서 퍼부어댔을 테니까. 

여기까지야 그리 놀라운 것 없는 사연이었는데. 

"흐음, 그래서?" 

"그 남편에게 약점을 잡혀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거액의 돈을 내야 했고, 다시 이 과정에서 국고에 손을 댔다는 누명을 써서 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제 불륜 사실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그게 끝입니까?" 

"···끝입니다만?" 

탈레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찬가지로 해밀턴 또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젊고, 잘생기고,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리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가 고작 불륜 때문에 내쫓겼다고요? 공금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걸 증명했는데도?" 

"그야 그렇죠. 불륜이잖습니까? 당연히 손가락질받아야죠." 

"나 원 참." 

탈레랑이 코웃음을 쳤다. 

"그랬으면 지금쯤 저 전임 독재관은 단두대로 끌려가야겠군요." 

"···네? 절대로 부패할 수 없는자 아니었습니까?" 

"부패할 수야 없었죠. 하지만 상간이야 할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속한 손짓. 

아연실색한 해밀턴에게 탈레랑이 이죽거리며 조간신문을 건넸다. 

불어 능력자 해밀턴에게 설명은 그 한 장이면 족했다. 

"이 뭔···?!" 

"그러니까 장관님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호록. 

입에 맞지도 않는 홍차를 홀짝이며 탈레랑이 위로를 건넸다. 

"불륜도 할 줄 모르는 탈락자들이 중상모략 좀 한 거로 뭘 상처받고 그러십니까? 아찔한 스릴도, 아내에게 집에서 내쫓기는 것도 흔히 있는 인기남들의 숙명이지요." 

"···네?" 

"정말로 고작 그런 어처구니없는 이유 때문이라면야 얼마든지 제 저택에서 머물다가 가셔도 좋습니다. 아니, 아예 정착하셔도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프랑스 사나이 탈레랑이 보기에 이 사건에서 해밀턴은 모로 봐도 되지도 않는 중상모략을 당한 피해자요, 정치적 희생양에 불과했으니. 

아무렴 처녀와 사생아까지 만들어놓고서 대충 묻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엄연히 유부녀에 심지어 남편에게 돈까지 줬으면 끝난 일이지 대관절 이게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하여간 미개한 앵글로·색슨 놈들 같으니라고.' 

하다못해 그들 프랑스처럼 당당하기라도 하던가. 

지들도 뒤에서 다 똑같이 더럽게 침대에서 물고 빨고 구르고 있으면서 뭘 들키면 죽을죄라도 지은 양 덤벼든다는 말인가? 

참으로 쪼잔하고 미개한 습속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푹 쉬십시오.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이런 날이라도 푹 쉬어야지 않겠습니까." 

고로, 탈레랑은 해밀턴을 동정했다. 

아무 연락 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것조차 가뿐히 용서해버릴 수 있을 만큼. 

절세미남이 인기가 많다는 게 무슨 죄라도 되는 양 호들갑 떠는 미개한 족속들 사이에서 사느라 그간 얼마나 피곤하고 괴로웠을까. 

"힘내십시오." 

턱. 

탈레랑이 가볍게 해밀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해밀턴은 다만 멍하니 얼이 빠져있을 뿐 한참을 꿈쩍도 못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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