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154)

문화충격

"일 없수다." 

딸꾹.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진 백발의 주정뱅이-. 

아니, 증기 자동차의 위대한 발명가 니콜라 조제프 퀴뇨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마담이 호출해도 꿈쩍도 하지 않아서 결국 내가 직접 브뤼셀까지 행차하게 만들더니 참 요지부동이시군.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어르신?" 

"이유? 이유라-." 

퀴뇨 씨가 누굴 놀리냐는 듯이 나를 흘겨보았다. 

"내 보잘것없는 발명품을 위하여 선왕 폐하께서는 내게 죽는 날까지 매년 600 리브르의 연금을 약속하셨네." 

하지만. 

"당신네 혁명정부는 나의 연금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앗아갔지. 이래 놓고서 왜냐는 소리가 나오는가?" 

···음, 솔직히 할 말이 없네. 

퀴뇨 씨를 만나기 전에 기록을 찾아보니까 난 빙의도 하기 전에 라파예트, 마리보, 시에예스 트리오가 혁명정부를 이끈 시절에 벌어졌던 일이라서 좀 억울하기도 한데. 

그렇다고 이런 소리를 늘어놓으며 변명해봐야 퀴뇨 씨에겐 코웃음 밖에는 나오지 않을 거다. 

난 이미 혁명정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고, 퀴뇨 씨는 혁명 탓에 모든 걸 잃고 프랑스를 등져야만 했던 사람이니까. 

벌써 일흔이라는 나이에 정든 고향을 떠나 거지꼴로 하루하루를 허송세월하며 보내고 있었던 사람이 세상 물정에 그렇게 관심이 있었을 리도 없고, 이 사람에게 난 잘 쳐줘야 악의 카리스마 같은 존재일 터. 

"그럼 제가 퀴뇨 씨께서 연금을 되찾으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이미 르블랑 씨라는 전례가 만들어졌으니 소송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저번처럼 거창하게 공개토론회까지 열 것도 없이 진짜로 물증만 내세워도 충분하겠지. 

"자네가?" 

하지만 퀴뇨 씨는 오히려 웃긴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이봐, 여보게 젊은이. 보다시피 내 나이가 벌써 일흔이야. 따로 부양할 가족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와 이 늙은이에게 삶의 미련이 뭐 있겠나? 내가 그까짓 돈 때문에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 같은가?" 

"···그렇다면, 명예가 문제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자네들은 내 마지막 명예마저 빼앗아 갔네. 그 증기 자동차의 발명가라는, 나의 바보 같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선왕 폐하께서 인정해주셨던 명예 말이야." 

딸꾹.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퀴뇨 씨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러니 썩 꺼지게.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고. 그 망할 놈의 연금을 돌려주건 말건 상관없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너희 폭도들과는-." 

"좀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뒤에서 팔짱을 끼고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마리 테레즈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사람이 파리에서 브뤼셀까지 직접 찾아왔으면 하다못해 용무 정도는 들어보셔야죠! 무슨 이야기인지 듣는 시늉도 안 하는 게 어디 있어요?" 

"이보게, 꼬마 아가씨. 애들이 낄 이야기 아니니까 이만-." 

침묵. 

마리 테레즈를 목격한 퀴뇨 씨의 눈이 점차 크게 뜨이더니. 

"···공주마마?" 

그야말로 경악, 이라는 두 글자를 고스란히 형상화한 듯한 반응. 

"아니, 아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이분의 얼굴상은 모로 봐도 언젠가 뵈었던 왕비 마마의···!" 

"헤헹." 

마리 테레즈가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꼈다. 

덥석. 

그와 동시에 퀴뇨 씨가 내 멱살을 잡더니. 

"이런 후레자식을 봤나!!!" 

뻑-. 

있는 힘껏 내게 죽빵을 후려갈겼다. 

끄아악! 

"이 기름에 삶아 죽일 폭도 놈이! 국왕 폐하를 능멸한 것도 모자라서 공주마마를-." 

쿵. 

이번엔 마리 테레즈가 퀴뇨 씨를 어깨로 들이박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뭐, 뭣? 공주마마?!" 

모로 봐도 혼란한 반응. 

어안이 벙벙한 수준을 넘어서 혼백이 반쯤 빠져버린 퀴뇨 씨를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지 말라시는데요." 

"·········." 

침묵. 

정적. 

조금 전 얻어맞은 뺨을 내가 어루만지는 동안 마리 테레즈가 흥분한 퀴뇨 씨가 진정할 때까지 붙들고 있는 묘한 대치 상황이 이어지고. 

벌떡. 

"좋아, 역시 오늘 일은 꿈이로군." 

이내 현실도피를 택한 퀴뇨 씨가 마리 테레즈를 밀쳐버리고서 상쾌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이보셔요. 

"유감스럽지만 꿈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커다란 별이 반짝였다 사라졌다 하고 있어. 아하하, 커다랗군. 혜성인가?" 

"그건 환각이고요." 

"아니,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다고!" 

처절한 절규였다. 

···하기야 내가 골수 왕당파라도 이런 반응일 것 같긴 해. 

심지어 이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혁명 관련 정보는 1789년 바스티유 습격과 벨기카 해방, 그리고 끝일 테니까! 

[하핫! 루이 오귀스트도 집에서 이랬겠지? 내가 그놈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꼴을 직접 봤어야 했는데!] 

···그, 기분은 알지만 그건 좀. 

[기분을 안다는 친구가 그건 좀이라는 소리가 나오는가?] 

그것도 그렇네! 

미안! 

"허억! 허어억···!" 

털썩. 

앗, 잠깐. 

끝내 혁명의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퀴뇨 씨가 발작을 일으키며 자리에서 쓰러졌다. 

아직 이야기는 꺼내 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이렇게 돌아가시면 어떻게 해! 

"의, 의사! 여기 의사 아무도 없어요? 여기 사람이 쓰러졌습니다!" 

"앗, 그러고 보니 아저씨! 집시 아저씨는 괜찮아요? 안 그래도 봐줄 곳 없는 얼굴에 입까지 돌아가면 어떻게 해!"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니깐요?!" 

그것도 증기 자동차를 발명한 프랑스의 위대한 과학자가 죽어가고 있다고!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말려도 여기까지 따라와서 내 걱정해주는 건 고맙긴 한데 왕당파 퀴뇨 씨부터 신경 써주면 안 될까? 

[정말로 왜인지 몰라서 묻는건가?] 

빌어먹을! 

이젠 그놈의 우유 비누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하네! 

내가 내 무덤을 팠지, 진짜! 

"다행히 퀴뇨 씨의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이곳은 내 인망이 하늘을 찌르는 두 도시 중 하나인 브뤼셀이었다는 것. 

그리고 현 앙리 정권이 최근 프랑스에 아쉬운 소리를 하게 되면서 이전보다 더욱 눈치를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다름 아닌 이 로베스피에르가 의사를 찾고 있다는 정보가 퍼지자마자 온 브뤼셀을 넘어서 벨기카 공화국이 발칵 뒤집혀서 최고의 의료진들을 물색해준 것이다. 

뭐어, 그것까진 좋긴 한데. 

"그런데 거기 계신 그 여성분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요." 

"아하, 그 옛 부르봉 왕실의 장녀시라는-." 

털썩. 

···역시 이 사람에게도 감당하기엔 너무 힘겨운 현실이었나. 

지금껏 마리 테레즈와 내가 함께, 그것도 이 머나먼 브뤼셀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졸도와 질겁 두 가지 중 하나로 정리되었다. 

대체로 성 관념이건 정치관이건 보수적일수록 졸도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고, 중립적이거나 친혁명적이더라도 대부분은 질겁이지 유쾌하게 넘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이 동물의 왕국 놈들아. 

오히려 그동안 유쾌하게 넘기던 이상한 사람들만 봐서 그런지 마음이 놓이네. 

[그거 아나? 지금 여기서 자네가 공주 다음으로 가장 이상한 사람이야.] 

빌어먹을! 

입 닥쳐 막시밀리앙 주제에 내 제일 뼈아픈 약점을 찌르다니! 

"저 사람들은 대체 왜 남의 치정문제에 이렇게 유감이 많대요?" 

하지만 정작 그 가장 이상한 공주님께서는 이런 우민들의 반응을 불쾌해하고 계셨으니. 

난들 어쩌리오. 

"고리타분한 위그노들이라서 그렇습니다." 

"하여간 뒤에서 호박씨나 까는 놈들이 그럼 그렇지." 

삐죽 입을 내미시는 공주님. 

어째 내 안에서 가톨릭 교회의 이미지가 갈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가고 있지만 별문제는 아닐 거다. 

응. 

"오, 주여···." 

해가 저물고도 몇 시간이 더 지난 다음에야 간신히 눈을 뜬 퀴뇨 씨가 우리 둘을 보자마자 또다시 땅이 꺼지라고 탄식했다. 

코오-. 

그야 공주님 때문에 발작까지 일으켰다가 일어나고서 가장 처음 본 게 내 어깨에 기대어서 졸고 있는 마리 테레즈면 주여 소리가 절로 나오긴 하겠지만. 

그리고 조금 전까지 한창 조잘거릴 때는 꿈쩍도 않더니 딱 맞춰서 눈이 떠진 건-. 

···너무 신경 쓰지 말자. 

이 사람도 심장이 도려내지는 기분일 테니까. 

"이 사악한 악당아, 도대체 이분께 무슨 더러운 수작을 부린 게냐?" 

"이분이 깨어나시거든 직접 물어보십시오. 전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공주마마께서 먼저 자네에게 접근했다는걸 믿으라는 건가?" 

타당한 반박이다. 

솔직히 나도 이해가 안 가긴 하는데-. 

"아바마마 같다고 하시더군요." 

"뭐?" 

"공주님께선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러쿵저러쿵 해봐야 내게 주어진 단서는 이것뿐이니까. 

당장 삼총사에게 이걸로 꾸중을 듣기도 했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닮았나보다-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나로선 아무리 고민해봐도 왜 이게 아가씨들의 은유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게 도대체 무슨-아." 

한데 불같이 화를 내려던 퀴뇨 씨가 돌연 진정하시더니. 

"자네, 남녀관계에선 꽤 형편없었나 보지?" 

"···혁명하느라 좀 바빴던지라." 

"내가 듣던 중 가장 프랑스인답지 않은 변명이었네." 

그럼 진짜 프랑스인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데요. 

[자네라면 이젠 알 텐데.] 

시꺼! 

애당초 왜 네 노총각 경력 변명을 내가 대신 해줘야 하는 건데! 

그보다도 그 양반은 골수 왕당파에게조차 이런 이미지야?! 

"좋아, 알겠네." 

퀴뇨 씨가 지그시 눈을 감고 성호를 그었다. 

누군가의 행운을 빌듯 더할 나위 없이 경건하고 정숙한 기도였다. 

"내가 조국을 등진 동안 무언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들이 벌어진 거겠지. 나머지는 가면서 듣도록 하겠네." 

"그럼 함께 해주시겠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다면 나더러 공주마마를 그냥 모른 척하고 떠나라는 말인가? 아니 그보다도, 왕실에서는 대체 뭐하고 있었던 건가. 정녕 아무도 자네들을 막아서지 않았다는 말인가?" 

"음, 프로방스 백작께서 한번 제 따귀를 때리시긴 했습니다만." 

"국왕 폐하께서는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는 거군." 

···뭐, 그렇죠. 

듣자니 평소 취미로 제작하시던 시계와 가구들이 무언가 강렬한 외부적인 영감의 영향으로 제작수는 물론이고 품질까지 눈에 띄게 발전했다고는 하시는데···. 

[한심하군.] 

양심적으로 이번만큼은 안쓰럽다고 해줍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몇 번이고 우리 딸 혼삿길 막지 말라고 항의 편지를 보내는 동안 편지 한번 안 쓴 게 초라하긴 하지만! 

오히려 공주님이 아바마마께서 자꾸 잔소리한다며 나한테 꼰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이 모든 사달의 원흉으로서 안쓰럽다고는 해줍시다!!! 

"내 지켜보고 있겠네." 

퀴뇨 씨가 날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공주마마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흐르게 뒀다간 자네 눈에선 피눈물 날 줄 알아." 

"저도 지켜볼 거예요." 

언제 깨어났는지도 모를 마리 테레즈가 으르렁거렸다. 

아니면, 처음부터 자는 척했던 건가? 

아무튼 우리 둘 다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또 남의 얼굴에 함부로 주먹질하면 사타구니를 걷어찰 줄 알아요." 

""·········."" 

그렇다고 하시는데 달리 뭐라고 답을 드릴까. 

감히 뭐라 더 말을 꺼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우리 두 사람은 조신하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 

탈레랑의 소개로 해밀턴이 하숙집을 구하고 며칠 뒤. 

"알렉산더, 나의 친구여!" 

"오랜만입니다, 라파예트 후작님." 

덥석. 

해밀턴은 그가 프랑스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아껴둔 샴페인과 함께 찾아온 귀한 손님을-곧 라파예트 후작을 맞이하게 되었다. 

피차 괴팍한 성미 탓에 사람 사귀기 어려워하던 두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귀한 인연이었다. 

"그래, 이게 도대체 어쩐 일인가? 차기야 조금 어렵더라도 차차기 대통령이라면야 당연히 자네일 거로 생각하고 있었네만." 

"실은-." 

그렇게 술이 한잔, 두 잔씩 넘어가고. 

이미 탈레랑에게 한번 긍정을 받아서일까? 

해밀턴은 평소라면 절대 꺼내지 않았을 그의 치부를 라파예트에게 내보였고-. 

"···하여간 위그노들이란." 

라파예트에게서 지난날 탈레랑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반응을 돌려받았다. 

뭐, 거기에 추가로 청교도들의 위선을 향한 비꼼이 더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설마 이대로 우리 프랑스에 정착하려는 것인가? 그렇다면야 얼마든지 환영일세." 

"글쎄요, 이대로 국민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다면 그것도 고려해봐야겠지만···." 

해밀턴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래도 돌아갈 수만 있다면야 언제건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또 위하여 목숨을 걸었던 나라니까요."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사내대장부고 이 라파예트의 친우 알렉산더지! 말 한번 잘했네!" 

라파예트가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럼 잠시 여기서 지내는 동안 한 번 프랑스 은행에서 일해보는 것 어떻겠나? 이 라파예트의 소개장이라고 하면 다들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걸세." 

"흠, 프랑스 은행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조금 전 자네 입으로 언제건 기회만 오면 돌아갈 생각이라고 했잖은가?" 

그렇다면. 

"언제건 떠날 수 있어야 할 사람에게 공직을 추천하기는 좀 그렇지. 신대륙이면 모를까, 유럽에서 자네는 무명의 사나이니 논설로 밥벌이하기도 어려울 테고." 

"확실히. 언제까지 탈레랑 씨나 후작님의 호의에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리고 원래도 자네가 신대륙에서 하던 일이 이런 돈 만지는 일이었잖은가? 괜히 감각이 무뎌지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하네만."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물론 그도 프랑스로 건너오기 전에 비상금을 탈탈 털어왔으니 그리 쉽게 자금난에 시달리지는 않겠지만, 그를 향한 미국인들의 분노와 혐오가 언제쯤 가라앉게 될지야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가장으로서 처자식을 위해 생활비도 매달 부쳐야 할 테고. 

"좋습니다. 그럼 한 번만 더 후작님께 의지하겠습니다." 

"어허, 한 번만 더 라니. 우리 사이에 그런 섭한 말이 어디 있는가? 열 번이고 백번이고 의지하게. 당연히 열 번이고, 백번이고 도와줄 테니." 

덥석. 

그렇게 일단 라파예트의 추천서를 가지고 프랑스 은행에 들어선 뒤로는 모든 것이 순탄대로였다. 

자고로 군계일학이라고, 제아무리 약소국이라고 하나 일국의 재무장관까지 올랐으며 불어를 모국어만큼이나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줄 아는 해밀턴이 세간의 이목을 피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그 절세미남이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은 외모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파리지앵들조차 이론의 여지 없이 호평을 아끼지 않을 지경이었으니. 

불과 몇 주 사이 뭇 프랑스 여인들의 애간장을 타게 하는 이국의 은행가는 이 프랑스 은행에서 제일가는 유명 인사가 되었고-. 

"너 그거 알아?" 

"뭐가?" 

"해밀턴 씨가 프랑스에 오신 게 불륜을 폭로 당해서래." 

"뭐라고? 어쩜!" 

그의 스캔들 또한 대서양을 건너왔다. 

단. 

"그래! 그런 좋은 남자에게 정부 한 사람 없었을 리가 있니? 그 얼굴에 그 실력으로 정부 한 사람 안 두는 게 인류의 손실이지!" 

"누가 아니래. 하여간 위그노 놈들 음흉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얘, 그게 무슨 소리니? 덕분에 우린 횡재했으니까 이번만큼은 고마워해야지!" 

"그것도 그렇네! 고마워, 위그노들아! 너흰 진짜 남자 보는 눈도 쥐뿔도 없구나?" 

소식을 접한 파리지앵들의 반응은 이와는 정반대였으니. 

신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아쉬울 절세미남이, 심지어는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자 일국의 재무장관이라는 화려한 경력에 사교회의 풍류(?)까지 겸비한 완전체라는 소문이 퍼지자 파리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대서양 너머에서는 정계 은퇴를 각오해야 했던 그의 스캔들이 이곳에서는 그저 남성적인 매력을 극대화하는 미담(?)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게···.' 

맞나? 

이걸 그냥 개방적이라고 불러줘도 되나? 

고민해봤지만, 결국 그 불륜 스캔들로 쫓겨난 해밀턴이 할 말은 아니었다. 

허나 따지고 보면 해밀턴만 더러운가? 

저 딕시나 라틴 아메리카의 노예주들은 공공연히 성노예를 두고 착취하는 판인데. 

그에 비하면 최소한 서로 사랑하였던 그들은-. 

'아니아니 이게 아니지! 아니야! 아니라고!!!' 

해밀턴이 절규했다. 

하지만 저항한들 소용없었다. 

자고로 외눈박이 나라에서는 두눈박이가 비정상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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