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당
빈.
"···뭔가 이상한데."
카이저 프란츠 2세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폭도들의 다음 노림수는 이탈리아 아니었나? 이제와서 라인란트의 나폴레옹 군단에게 저 신병기를 우선적으로 배치하겠다고?"
"그리 우려하실 필요 없을 듯 사료되옵니다."
테셴 공작 카를 루트비히 사령관이 고개를 조아렸다.
공적인 자리임을 의식한 것일까, 친형제 관계임에도 혈육을 대하기보단 영락없이 주군을 섬기는 기사의 태도였다.
"아마 아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기만전이 아닐는지요."
"···그러니까 저들이 나폴레옹의 명성을 이용하려 하고 있다는건가?"
"폐하, 이탈리아 왕국의 파국이 머지 않았사옵니다."
참담한, 그러나 냉혹한 현실인식이었다.
"특히 적들의 선거일이 점차 다가오고 있으니 그 전에 이탈리아에서 분란을 일으키려 들겠지요. 이제 양국이 피를 흘리기까지는 길어야 반년도 남지 않았을테지만, 저 증기자동차라는 기물을 전선에 배치하려면 그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아하."
그제야 프란츠 2세의 동공에 총기가 돌아왔다.
"다시말해 나폴레옹의 명성과 저 로베스피에르가 직접 후원한 신병기 사업이라는 허명으로 우리가 이탈리아와 라인란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만들려는 책략이다, 그런 이야기로군."
"망극하옵니다, 폐하."
카를 대공이 재차 고개를 조아렸다.
악몽과도 같았던 지난 전쟁에서 현장지휘관 중 유일하게 제 몫을 다하며 합스부르크의 체면을 세워주었던 전쟁영웅이 겸허하기까지 하다니.
부족한 형으로선 언제나 그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 한켠이 든든하기만 했다.
'···그래도 가끔은 약한 소리라도 좀 해줬으면 더 귀여우련만.'
어쩜 이렇게 동생이라는게 귀여움이라고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지.
형제관계라기보다는 군신관계라는 표현이 들어맞을 어색한 우애로부터 애써 시선을 돌리며 프란츠 2세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라인란트는 이번 전쟁 중에는 안전하겠는가?"
"송구하오나···."
그렇지 않다는 소리군.
혀를 차는 프란츠에게 카를 대공이 솔직담백하게 답했다.
"저 증기자동차가 없다고 하여 나폴레옹이 나폴레옹이 아닌 것은 아니지요."
"하기야 그렇군. 지난 전쟁에서도 증기자동차 덕분에 저놈이 황충 마냥 라인란트를 휩쓸던 건 아니었으니까."
"예. 물론 주공은 어디까지나 이탈리아겠으나, 적들이 신병기를 배치하는 등 기만작전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감히 주제넘게 짐작컨데 아군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라도 한번쯤은 반드시 공세를 취해올 듯 사료되옵니다."
그리고 그 단 한번의 공세라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지는 순간 또 다시 제국해체를 피하기 위해 자비를 애걸해야만 했던 카우니츠의 전철을 밟게 될 거라는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물며 그 공세를 이끌 선봉장의 이름은 그 무시무시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일게 불보듯 뻔한 바.
"···쯧."
적들이 뻔히 기만작전을 펼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쪽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나폴레옹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한다는 불합리한 현실에 프란츠 2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카를 경, 아무래도 그대가 가주어야겠네."
"명 받들겠사옵니다."
카를 대공이 또 다시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 일관적인 저자세에 내심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 우직함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모순적인 형제애에 프란츠는 내심 쓰게 웃었다.
하다못해 이럴 때는 혈육으로서 간단한 안부인사나 아니면 농담이라도 주고받으며 서로의 긴장을 풀어주는게 올바른 형제관계이련만.
저 앞날이 창창하다 못해 어린 제국의 방패는 제 주군이자 형님의 총애조차 허락하지 않는 듯 했다.
'하지만 이걸로 라인란트는 안심이겠지.'
본디 이탈리아로 가야했을 제국의 방패를 라인란트로 재배치한 건 뼈아픈 손실이기야 했지만, 달리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만일 이런 기만작전이나 명분조차 없이 나폴레옹 군단이 무작정 동진하기 시작했다면 프랑스는 전 유럽의 공적이 되었겠지만 동시에 신성로마제국은 이번에야말로 제국해체라는 멍에를 받아들여야만 했을테니까.
오히려 적들이 무작정 동진하는 대신 이러한 기만작전으로 제국의 방패를 끌어내려했다는 사실 자체가 저 폭도들도 그동안 합스부르크가 경험해보지 못한 유형의 상대일 뿐 최소한의 합리성과 이성을 갖춘 존재임을 반증하고 있었다.
'고모님과 귀여운 사촌들도 아직까진 무사한 것 같고.'
아니, 단순히 무사하다는 수준을 넘어서서 풍문에는 저 독재관과 그의 사촌누이가 사귀고 있다고 했지만-.
프란츠는 빨갱이들의 중상모략 따위에 속아넘어갈만큼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는 보나마나 고모부와 사촌누이의 명예를 더럽히고 혁명가들의 남성성을 과시하기 위한 헛소문일터.
아니, 헛소문이어야만 했다.
똑똑.
그렇게 제국의 방패 카를 대공이 떠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구인가?"
[폐하, 신 외무장관 메테르니히이옵니다.]
"들어오게."
하여간 한시도 쉬게 해주지를 않는군.
혹은, 일부러 그들 형제가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는지 염탐하고 있었던건가?
우직하고 정직했던 카를 대공을 상대할 때와는 또 정반대의 불편함에 사로잡힌채 프란츠는 음험한 손님을 맞이했다.
"그래, 어쩐 일인가?"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마침내 나폴리의 페르디난도가 아국에 전폭적인 협조를 약조하였사옵니다."
메테르니히가 과장스레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과연 축하할만한 낭보였다.
나태왕 카를로스 4세의 친동생이자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군주 페르디난도 1세가 합스부르크와의 동맹관계를 암시했다는 건 그만큼 현 마드리드의 지도력에 실망한 이들이 적지 않다는 증좌요, 스페인 보르본 왕실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으니.
마침내 그들 신성동맹의 필사적인 밀실협상이 화려한 결실을 거둔 것이다.
"드디어 장인어른께서 크나큰 결단을 내리셨군."
프란츠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되물었다.
"그래서, 장인께선 뭐라고 하시던가? 설마하니 형을 몰아내고 제가 스페인의 왕이 될 수 있게 도와달라. 뭐 그런 이야기를 꺼내신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낭보라고 보고 드리진 않았겠지요."
메테르니히가 빙그레 웃으며 서신을 건냈다.
내용은 비교적 간단했다.
저 야만스러운 폭도들이 이 땅을 더럽힐 수 없도록 도와달라.
장차 그의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이 무슬림들의 침략에 맞서서 지중해를 지키는 기독교 세계의 방파제가 될 수 있도록 조력해달라.
가타부타 부연설명이나 미사여구를 빼고 요구사항만 정리하자면 딱 이 두가지였다.
'···꽤나 야심만만한데.'
허나, 자고로 요구사항이란 단순명확할수록 강렬한 법.
저 폭도들의 남진에 맞서 협력하자는거야 여느 왕권신수설 신봉자나 마찬가지이니 대수롭지 않았으나, 그가 주도적으로 바르바리 해적들과 맞서겠다는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레판토 해전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세기 간 지중해 세계의 공포로 군림했던 지난날과는 달리 오늘날 저 무슬림 해적들은 하루가 다르게 몰락해가고 있었으니.
이 서신은 페르디난도 1세가 스페인 보르본 왕실로부터 독립하여 그만의 해상왕국을 완성한 뒤 합스부르크를 우방 삼아 북아프리카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좋아, 받아들이겠다고 전하게."
하지만 프란츠는 개의치 않았다.
물론 먼훗날에야 저 양시칠리아 왕국이 그들의 눈엣가시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어린 시절 토스카나 대공이셨던 아버지 곁에서 낙후되고 후진적인 남이탈리아의 현실을 뻔히 목격했던 프란츠로서는 가소롭지도 않았다.
아무렴 시칠리아가 그 옛날 로마 시절에나 지중해의 빵바구니였지, 스페인의 지중해 해상거점으로서 방치된 게 언제적인데 이제와서 마그레브를 경영해보겠다는건지 원.
페르디난도의 야심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걸로 그들의 거래도 끝, 성공한다면 다시 마그레브 속주를 유지하기 위하여 합스부르크에 전적으로 기대게 될테니 프란츠로서는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제후들에게도 우리 합스부르크는 절대로 이탈리아의 자치를 회수할 의향이 없음을 분명히 전하고."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메테르니히가 익살스레 고개를 조아리며 주저없이 물러났다.
그 유쾌하면서도 음험한 모습에 또 다시 눈살이 찌푸려졌으나, 그렇다고 겉으로 불쾌함을 내보일만큼 프란츠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러니저러니해도 오늘날 그들 합스부르크의 거의 모든 외교 대전략은 메테르니히의 손으로부터 빚어져나오거나 최소한 한번쯤 손길을 거치고 있었으니.
'처음에 옥시타니아 분리주의 타령을 할때는 이게 대체 무슨 헛소리인가, 싶더니만···.'
요는 간단했다.
오늘날 이탈리아 반도에는 통일을 열망하는 계몽주의자들만큼이나 개별 공화국, 또는 공국에 충성하는 계몽주의자들 또한 결코 적지 않다.
가령 작금에 와서는 몰락하기야 했으나 과거 지중해를 호령하던 가장 고귀한 공화국 베네치아가 대표적이었고, 비단 베네치아만이 아니라도 이탈리아 통일을 위하여 제 조국의 패망을 감내할만한 열성 통일론자는 한손에 꼽았다.
고로, 메테르니히는 이들의 애국심을 집중공략했다.
이웃 프랑스와 옥시타니아의 사례를 통해 통일이란 곧 개별정체성 상실이고, 저 통일론이라는 이름의 프랑스 패권주의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지키려면 합스부르크와 손잡는 수 밖에 없다.
통일을 부르짖는 폭도들은 모조리 프랑스의 앞잡이고 그들의 고향을 파괴하려는 반달족이다-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각인 시키려 한 것이다.
'···뭐, 생각했던 것보다는 잘 되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거야 합스부르크와 교황청의 지지를 등에 업은 성심당이 예기치 못한 대활약을 보여준 덕분이었으니 메테르니히에겐 몰라도 프란츠에겐 썩 나쁜 결과만은 아니었다.
아무튼 저 성심당이 지금처럼만 남아있어도 고모님과 귀여운 사촌형제자매들은 무사할테니까.
"언젠가 프로방스 백작을 만나게 된다면 꼭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야겠군."
더하여 그 되도 않는 사촌누이를 둘러싼 낭설들이 저 폭도들의 거짓선전이라는 확답도 돌려받고.
아무렴 정부를 두는 정도야 누구나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지만 숫처녀가, 그것도 폭도를 정부로 두는 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는가.
"···차라리 친지 중에서 고를 것이지."
이 또한 외부인이 듣거든 기함을 할 만한 이야기였겠으나, 프란츠는 개의치 않았다.
물론 그의 시종들도 개의치 않았다.
카페와 합스부르크의 숙명적인 경쟁관계는 치정사에서도 매한가지였으니.
***
"응···?"
"무슨 문제라도?"
"아니, 갑자기 귀가 막 간지러워서."
누가 로베스피에르 욕하나?
[그거라면 짐작가는 구석이 너무 많은데.]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원래 슈퍼스타는 빠와 까를 동시에 미치게 만들어야 한다는데 나도 그동안 해온게 있으니 오죽할까.
때마침 마리 테레즈가 귀를 긁적거리고 있는것 보면 아마 치정문제인 거 같은데-.
[큭큭큭.]
···신경쓰지 말자.
어차피 내 욕하는 놈이 어디 한둘이겠어.
그냥 으레 욕하겠거니, 하고 넘어가야지.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천천히 이날의 참가자들과 한사람한사람 눈을 마주쳤다.
보다 붉게의 최고경영자 마담 롤랑.
하루가 다르게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현 프랑스 산업계의 초신성 르블랑 씨.
이제 막 본인만의 사업장을 차리게 된 퀴뇨 씨.
전속 광고모델 마리 테레즈.
마지막으로 피부병 대표 마라.
[···이봐.]
왜? 틀린말은 안했잖아.
아무튼 마라야 도움을 받은적도 많으니 넘어가자면, 다들 내게 은혜를 입었거나 아니면 나와 사적으로 각별한 관계라고 소문이 난 사람들이다.
다시말해 장차 우리의 정계활동에 직간접적인 자산이 되어줄 귀중한 인연들이라는 거지.
"이번에 여러분들을 한자리에 모은 것은 이번 기회에 혁명활동을 후원할 재단을 차리고자 해서입니다."
"재단이라고요?"
의외라는 듯이 마리 테레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저씨는 돈이랑 원수진 거 아니었어요?"
"돈을 벌기 위한 재단이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뭐야, 괜히 놀랐네."
···그래, 기대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아서 미안하다.
뭐, 여하튼 간에.
"음, 시민단체라고 풀어서 설명하면 혹시 이해하시겠습니까?"
역시나 다들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군.
근대적인 정당활동조차 내가 직접 소개해야했던 시대이니 이정도 쯤은 짐작했다.
"요는 간단합니다.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하여 늘상 공동체의 관심과 투자가 필요하지만 정부가 일일히 관여하기 어렵거나 관여해서는 안되는 분야들을 대신 관리해주는 민간차원의 안전장치를 마련하는거지요."
"그러니까 아저씨를 위한 교회를 차리겠다고요?"
오, 역시 공주님.
하기야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국왕의 앞잡이라고 했었지?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그들이 사회적 약자를 돕기야 했지만 대중계몽이나 문명발전에 기여한 적은 없잖습니까. 저는 기독교 윤리를 위함이 아니라 계몽과 이성의 신전에 미사를 드릴 목자들이 필요한겁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거고 실제로 계몽과 윤리를 위해 기도하거나 미사를 드리지는 않겠지만.
[큭, 머리가···.]
"앞으로도 저 개인은 청렴결백의 상징으로서 돈과 철천치 원수를 져야만 할겁니다."
그렇지만.
"저조차 결국 돈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는걸 모두 보셨잖습니까? 만일 마담 롤랑께서 협조해주시지 않았다면 보다 붉게가 이뤄낸 무수한 구상들은 첫삽도 떠보지 못한채 제 망각 속에 파묻혀 사라졌을 겁니다.
공주님께서 협력해주지 않으셨다면 르블랑 씨와 함께한 비누보급은 지금처럼 성공할 수 없었을거고, 다시 르블랑 씨게서 투자해주지 않으셨다면 퀴뇨 씨의 꿈을 이뤄드리진 못했겠지요."
물론.
"그 이전에 이 로베스피에르라는 인물의 명성과 권력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을테고요."
그제야 내 구상이 이해가 간 듯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야 따지고 보면 내 활동들 자체가 원래 이런 비영리재단들의 활동을 혼자서 해치운거나 다름 없었으니 그동안 내 전적을 돌이켜보면 장차 이게 어떤 식으로 굴러갈지 대강 짐작들이 가겠지.
앞서 가톨릭 교회에 빗대기도 했으니 어떻게 사람들을 모으고 자금을 굴려야할지도 설명 될테고.
쉽구만.
역시 하늘이 열리고 이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건 없다니까.
"그런데 그것 뿐입니까?"
르블랑 씨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로베스피에르 씨께서 무슈 청렴결백인거야 저도 알고있습니다만, 듣기만 해서는 공공선을 위하기만 할 뿐 본인에겐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는 것 같은데요···?"
"이 재단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이득이지요."
착.
마담 롤랑이 깃털 부채를 펼쳤다.
"이제야 알겠네요. 돈이 아쉬울 때마다 재단에 아쉬운 소리를 하시려는거군요? 제게 언제나 아쉬운 소리를 하셨던 것처럼."
"···커흠."
[역시 자네가 최고야.]
입 닥쳐, 막시밀리앙.
"네에, 뭐.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왜, 이 프랑스에서 나만 더러워?
원래 동물의 왕국에선 유교 드래곤이 제일 이상한 놈이라고!
"여기 계신 모두가 기억하시다시피 혁명 이전 가톨릭 교회는 그 자체로서 프랑스 제일의 이권단체이자 교섭단체이기도 했습니다. 힘없는 약자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면 주저없이 사제들에게 기댔고, 힘있는 강자들은 구석구석 요직을 차지하고 신도들의 숫자로서 압박해오는 가톨릭 교회를 꺼려했지요."
"그리고 프랑스 제일의 금융기관이기도 했었지."
마라가 덧붙였다.
"그래, 이제 왜 날 끌어들였는지 알겠네. 비누보급과 위생개선을 핑계로 정부와 직접 연결되는 연락선을 만들어두려는거군? 두고두고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부르라고 말이야."
"이봐. 자네가 그러면 내가 설명할 몫이 없어지잖은가?"
"뭐 어때. 슬슬 여기까진 다들 짐작했을텐데."
마라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정부에게 매번 아쉬운 소리를 했다는 뒷담이 나오게 두는 것보단 훨씬 낫네요."
착.
마담 롤랑이 부채를 접었다.
"그래서, 재단의 이름은 정하셨나요?"
"그야 물론이죠."
마음 같아서는 국제노동자협회라고 답하고 싶지만 그건 무리일테니까.
"인터내셔널(L'Internationale). 그 한 단어면 족합니다."
청소년, 여성, 인텔리겐치아, 기술공, 혁명적 부르주아지.
비단 프랑스만이 아닌 언젠가 전 인류의 공동번영과 민중혁명을 위하여.
쨍.
우리는 함께 샴페인잔을 주고받으며 인터내셔널의 역사적인 탄생을 축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