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154)

사명감

프랑스 은행. 

"빈자들의 교육과 기술개발을 위한 장학재단, 무지한 이와 정치범들을 위한 변호인단, 노동자와 여성들을 위한 교섭단체, 인텔리겐치아를 위한 지적 재산권 협회,오직 저렴한 생필품만을 다루는 생활협동조합과 은행가들은 거들떠보지 않을 소액예금과 생활비 대출만을 다루는 협동조합형 은행 기관이라···." 

톡톡. 

내 사업계획서를 읽던 해밀턴이 가볍게 펜촉을 두드렸다. 

"마치 교부 시절의 원시 교회 설화를 보는 것 같군요. 집창촌에 흘러 들어가 누구보다 보잘것없는 이들을 정성껏 보듬고 다시 이들을 앞세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널리 퍼트리고 교세를 확장했다는. 

궁극적으로는 이들이 로베스피에르 씨와 혁명의 예수회가 되어줄 테니 더더욱 더 종교적인 인상이 짙고요." 

"말씀하신 대로 교부 신화로부터 영감을 취했으니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설마 이성과 계몽을 섬기는 사이비 교주가 되실 작정은 아닐 거라고 믿겠습니다." 

[콜록콜록커흠!!!] 

얜 또 왜 이래. 

"물론 전 교주가 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습니다." 

옛 동구권에서 개인숭배에 열을 올리는 이유가 국가 무신론에 따라 찌그러진 종교들의 빈자리를 대체하고 대중동원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라던가? 

나는 거기까지 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요즈음 성심당에서 열심히 기독교-농촌 사회주의의 토대를 닦고 있으니 이제 와서 국가 무신론 타령할 필요도 없고. 

"다만 그들이 일종의 종교적 열망에 기초하여 공공선을 위하여 헌신하게 될 거라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종교적 열망은 긍정하겠다면서, 스스로 교주가 되지는 않겠다···." 

"흔히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크게 두 가지라고 하지요." 

"그게 무엇입니까?" 

"긍지와 재물." 

척. 

해밀턴을 향해 두 가지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이 중 재물은 제가 해밀턴 씨에게 설교할 처지도 아니거니와 청렴결백을 내세운 이상 함부로 손대기도 곤란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에게 긍지를 불어넣겠다는 말입니까?" 

"예. 지난날 교부들이 기독교 윤리에 기초하여 약자들을 보호하고 사회적 타락상을 바로잡고자 했듯이, 저는 장차 우리가 이성과 계몽의 교부가 되어서 약자들을 보호하고 또 그들이 스스로 사회적 타락상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당장 내가 아는 역사에서도 그러했으니까. 

정말로 날 때부터 너무나도 지혜롭고 선량해서 모든 문제를 꿰뚫어 보고 또 너무나도 이타적인 나머지 평생을 타인을 위하여 공공선을 위하여 희생한 사람은 유사 이래로 열 손가락 안에 꼽을 거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간 살아오면서 교육받았던 인문학적 지식에 기초하여 문제의식을 느끼고, 나아가 스스로가 보람찬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만족을 느끼면서 약자들을 구하고 공공선을 실현했다. 

다시 말해서 개개인에게 이 자기만족과 사명감을 불어넣는 것이야말로 본격적인 혁명 수출의 첫걸음이다. 

"저는 우리 소수의 계몽된 인텔리겐치아만이 아닌, 보편적 다수가 그와 같은 긍지와 목표 의식을 공유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인터내셔널이 필요하다. 

개인을 움직이는 건 애국심이 될 수도 있고, 신앙심이 될 수도 있으며, 순수한 인류애일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오직 이념을 위하여 움직이고 다시 제 머릿속의 이념을 현실화 시켰을 때 자기만족을 느끼는 인간상. 

그러한 인간상을 가능한 한 많이, 그리고 가능한 한 넓게 퍼트리기 위한 온실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 소수의 인텔리겐치아가 사명 의식에 불타오르는 보편적 다수를 올바른 방향으로-그들의 자기만족이 인류 전체의 공공선을 위하여 해소될 수 있도록 돕기를 원합니다." 

"···큭."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해밀턴이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었다기보다는, 그저 한없이 유쾌하여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냥 좀 모처럼 통쾌한 이야기를 듣게 된 지라." 

"흠, 저는 또 성경이라도 만들 셈이냐고 꼬집으실 줄 알았습니다만." 

"성경? 그야 당연히 만드시겠지요. 아니, 만드셔야만 합니다. 글로서 정립되지 않은, 개개인이나 정권의 필요에 따라 마음껏 곡해될 수 있는 교리라면 그게 한낱 컬트와 다를 게 뭐란 말입니까." 

[푸엣취!] 

거 시끄럽데도.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해밀턴이 한 손에 도장을 든 채 운을 뗐다. 

그렇다면 교섭을 하겠다는 건데. 

"한번 들어나 보지요. 무엇입니까?" 

"제게 재정 고문역을 맡겨주십시오." 

"···해밀턴 씨께서 재정 고문을 맡아주시겠다고요?" 

할렐루야. 

솔직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만세삼창이라도 하고 싶은 심경이지만-. 

"그게 지금 이번 일과 무슨 상관인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군요." 

그리 쉽게 포커페이스가 깨져서야 이 장사 못 해 먹지. 

무엇보다 해밀턴을 재정 고문으로 받아들이는 건 프랑스 은행과는 무관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청탁 내지는 제안. 

무턱대고 덥석 받아 물었다가는 얕보이거나 반대로 위험시되기 십상이다. 

"무엇보다 제가 듣기로 해밀턴 씨는 언젠가 대서양 너머로 돌아가셔야 할 손님 신분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아, 물론 절 인터내셔널에 아주 받아들여달라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해밀턴이 진정하라는 듯이 양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절 재정고문역으로 고용해달라는 말씀이었지요." 

"흠, 그렇다면 겸업이 될 텐데···본점에서 허가가 나오겠습니까?" 

"그야 나오고 말고요. 어차피 전 계약직이니까요." 

그리고. 

"이제 와서 돈놀이나 더하는 것보다는 로베스피에르 씨께서 인텔리겐치아로서 어떻게 보편적 다수에게 사명감을 불어넣겠다는 건지 곁에서 구경이라도 해보는 게 더욱 가치 있는 경험 아니겠습니까." 

확신과 기대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기도 했다. 

저렇게 독선에 가까운 확신에 가득 차 있는다는 건 이미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준이나 관점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소리니까. 

[저 친구가 아무래도 자네를 시험해보고 싶은가 본데.] 

더 정확하게는 '우리'겠지. 

이 양반이 독립전쟁 시절부터 평생 곁에서 섬겨온 전우이자 주군이 조지 워싱턴이었으니 대충 그 근처가 기준점이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까마득한데. 

[흠, 라파예트와도 알아주는 절친이라고 들었네만.] 

···어, 갑자기 기준이 확 낮아지는데. 

뭐야, 할만하네. 

설마 내가 조지 워싱턴처럼은 못해도 라파예트만큼도 못하겠어? 

"좋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신중을 기하는 듯한, 그러나 분명하게 승낙의 의사를 내비쳤다. 

"단,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흠, 무엇입니까?" 

"제 재량으로 해밀턴 씨와는 별도로 재정 고문을 한 사람 더 두겠습니다. 언젠가 떠나가실 손님에게 모든 걸 의지할 수도, 또 모든 걸 공개할 수도 없는 법이니까요." 

"그런 조건이라면야 얼마든지요." 

쿵. 

마침내 해밀턴이 내 사업계획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저 양반은 지금 내가 재정 고문 후보를 엘레오노르 부인과 마담 롤랑과 롤랑 장관 중에서 고민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짐작 못하고 있겠지. 

[잠깐, 마담이야 아무튼 나머지 두 사람은 뭔가?] 

왜? 최적의 인사라고 생각하는데. 

롤랑 장관은 누구나 아는 실무자이거니와 사적인 앙금도 지난 결투재판으로 다 풀었고, 엘레오노르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 현모양처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세상을 척지더라도 끝까지 우리 곁에 있어 줄 사람이지. 

어차피 큰일은 해밀턴이 처리해줄 테니까 곁에서 조금씩 실무를 배우다 보면 해밀턴이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쯤이면 슬슬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을 테고. 

[···그럴 거면 차라리 모조리 고용해서 사두정치를 하지 그러나.] 

어, 차라리 그게 맞겠네. 

큰 방향성은 우리가 정해주고 해밀턴에게 의장 자리를 준 다음 고문위원회에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잔가지를 쳐주면 되겠다. 

부부끼리 정기적으로 만날 창구도 될 테고. 

[유교 드래곤 맙소사.] 

어허, 동물의 왕국 주제에 감히 누굴 찾느뇨.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해밀턴 씨. 이 인연의 끝이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모쪼록 그때도 지금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아름답게-."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잉? 

해밀턴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검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제가 만일 필라델피아로 돌아가게 되면 이 인터내셔널의 신대륙 지부를 만들 수 있도록 혹시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단순히 이름만 빌려 쓰는 게 아니라 지부장이 되시겠다고요?" 

"물론 말씀하신 대로 아름다운 이별이 된다는 가정하에서 말입니다." 

해밀턴이 얼굴을 붉혔다. 

말하면서도 내심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싶었던 거겠지. 

미국 정계로 복귀하기 위하여 이 로베스피에르의 후광을 이용하겠다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뭐어, 그렇긴 한데. 

"좋습니다. 아름다운 이별이 된다면, 말이지요." 

덥석. 

냉큼 악수를 주고 받았다. 

상대가 그 알렉산더 해밀턴이잖아? 

달러의 아버지, 10달러 지폐의 주인공이자 미국의 산업혁명을 위한 백년대계를 짜줬다고 칭송받는 세기의 천재. 

어우, 그럼 이쪽에서 제발 내 이름 좀 팔아달라고 청탁해야지. 

심지어는 그것도 모자라 인터내셔널 북아메리카 지부까지 차려주시겠다고? 

오히려 좋아. 

"···다시 생각해보니 제가 너무 어려운 조건을 단 거 아닌지 후회되고 있습니다만." 

"아아, 괜찮습니다. 같은 여인을 사랑하게 되는 것만 아니라면 어지간한 히스테리는 가볍게 넘어가 드릴 테니까." 

"콜록콜록커흠!!!" 

해밀턴이 연신 피를 토하듯 기침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친구도 벌써 정분이 났다는 소문이 돈 마담만 몇인데 아직도 이쪽 방면으로는 내성이 전혀 없네. 

[삼가 고 유교 드래곤의 명복을···.] 

빕니다. 

동물의 왕국 만세. 

***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의 위대한 영웅 나폴레오네 보나파르테 만세!""" 

쨍강! 

또다시 유리창을 깨고 날아온 돌과 함께 창 너머에서 들려오는 젊은이들의 고함에 대평의회(Maggior Consiglio)의 의원들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코르시카가 공화국에 맞서서 독립을 선포한 게 벌써 30년도 더 전에 일이건만. 

저들은 단지 나폴레옹이 한때 제노바령이었던 코르시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화국의 위대한 영웅이라며 매일 같이 추켜세우고 있었다. 

막상 그 나폴레옹은 코르시카라면 모를까 제노바엔 아무런 미련도 없을 텐데도. 

"카이저의 앞잡이! 매국노 도제와 평의회는 지금 당장 사임하라!" 

"모든 군대를 임페리움에! 모든 권력을 임페라토르 나폴레오네에게!"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 위대한 공화국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기만 하면서 살아야 하냐!" 

"제노바 만세! 코뮌 만세! 민중 만세!" 

"""공화국을 좀먹는 공화귀족들은 물러가라!""" 

저들을 말로써 달래보려 한적이야 이제 와서 하나하나 헤아려볼 수조차 없었다. 

총이나 대포로 찍어누르려 한 적이야 두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지만 결국 아무 소용 없었다. 

애당초 이웃 프랑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기에 공화국은 저들과 너무도 가까웠으니. 

베네치아와 함께 지중해 패권을 경쟁하던 지난날이면 모를까, 이미 몰락할 때로 몰락하여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코르시카조차 놓아주고 식민속주는커녕 무역항조차 얼마 남지 않은 공화국의 공화귀족으로서 이들은 차마 청년들에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결국 저들이 되지도 않는 혁명을 부르짖고 있는 것도, 나폴레옹은 사실 제노바인이었다는 아전인수격 주장을 늘어놓고 있는 것도 이대로는 패망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으니. 

"자, 그럼···." 

제노바 공화국 제184대 도제 자코모 브리뇰레가 상석에서 천천히 400명의 대평의회 의원들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 항복하시겠소? 슬슬 표결해봅시다." 

일국의 수장이 내뱉기에는 너무나 비굴하고 비참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그를 탓하지 못했다. 

위기에 빠진 공화국을 위하여 취임식조차 마다하고 폭도들이 에워싼 궁전에 당당히 나선 저 늙은 애국자를 어찌 감히 탓하랴. 

다만 전지전능하신 조물주께서 그들에게 미소 짓지 않았을 뿐. 

이제 중립정책은 불가능했다. 

베네치아는 일찌감치 오랜 혈맹이자 종주국이나 다름없는 합스부르크의 손을 들어주었고, 로마냐의 교황은 코뮌제 통일을 부르짖는 공화주의 지식인들을 반가톨릭적 이단으로 규정하고 일제히 파문 시켰다. 

사르데냐와 나폴리는 아직 공개적으로 편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 봉건왕국들이 어느 편에 설지야 불보듯 뻔한거 아니겠는가. 

결국 제노바만이 남았다. 

혁명을 긍정하기엔 지나치게 귀족적이었으며, 혁명을 부정하기엔 너무나도 공화적이었던 그들만. 

쾅! 

때마침 저 너머에서 대포 소리가 들려왔다. 

곧 폭동진압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지랑이처럼 흩어지는 총소리, 비명소리, 그리고 분노에 찬 고함소리. 

"정녕 합스부르크에 다시 한번 도움을 청할 수는 없겠습니까?" 

"이미 카이저에게 받을 수 있는 모든 걸 받아냈잖소. 뭐 이제 와서 국권이라도 넘기자는 말이오?" 

"···댁은 지금껏 도대체 뭘 들은 거요? 다들 그 소리를 하고 있는 거잖소!" 

"차라리 사르데냐에 항복합시다. 그 프랑스와 이웃한 채 도시 하나로 여기까지 버텨왔으니 이만하면 할 만큼 했지요. 이참에 사보이 왕가에 정식으로 보호를 청합시다." 

"비토리오의 야심에 일조하겠다고? 그 작자는 왕권신수설 신봉자입니다. 우리의 공화 전통을 존중해줄 리가 없잖습니까!" 

"그럼 뭐 이대로 프랑스에 합병되자는 말이오?!" 

그러자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평의회에서도 고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우연한 결과였는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제 몸이 안전해졌다는 실감이 드니 뒤늦게 제 지위와 가문을 보전할 궁리로 넘어간 건지. 

어느 쪽이건 자코모에겐 도제로서 어지럽기만 할 뿐이었다. 

공화국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부강하게, 위대하게 만들 수 있을까가 아닌 누구에게 국권을 내다 팔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는 대평의회. 

이 400명 위에 군림하는 12인 위원회는 서로 이게 다 당신 탓이라며 손가락질이나 하기 바빴고, 유일하게 책임을 지려고 나선 칠순의 도제는 무력하기만 했다. 

시민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하고, 곳곳에서 민중주의에 경도된 폭도들과 공화귀족들의 사병이 정면충돌하는 가운데 제노바의 오랜 근심거리-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또다시 국토를 제멋대로 전장으로 쓰려고 들고 있었으니. 

"잠시 쉬고 재개합시다." 

쾅. 

갈수록 인신공격으로 치닫고 있는 대평의회의 논쟁을 보다 못한 자코모가 도제로서 휴정을 선언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하지만 그 뒤로도 소음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창 너머의 폭도들과 진압군의 피와 살이 튀기는 전투도. 

문 너머의 대평의회와 소평의회의 말다툼도. 

누구 한 사람 떠나가는 도제를 붙잡을 생각도 없이 서로 다투고 헐뜯기만 바빴다. 

"아, 아버-." 

그리고 문을 나서자 그를 향해 다가오는 장남 카를로를 발견한 바로 그 순간. 

"내가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주둥이들을 붙잡아두고 있을 테니 넌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 우리 가문의 모든 사병을 이끌고 저 폭도들에게 합류하거라." 

"···네?" 

"두 번 말하지는 않겠다." 

마침내 결심을 굳힌 도제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장남에게 속삭였다. 

"너도 우리 명가의 일원이니 이제부터 공화국이 살아남으려면 어찌 처신해야 할지 네가 가장 잘 알 거다." 

"하, 하오나 아버님. 그럼 나폴레오네는 어찌하시려고 이러십니까?" 

"그놈이 뭐가 아쉽다고 이 조그마한 소국의 황제가 되고 싶어 하겠느냐." 

자코모가 코웃음을 터트렸다. 

"저들 또한 우리 공화국의 시민들이다. 어차피 패망할 거라면 외세에 복속하느니 폭도들에게 무릎 꿇는 게 낫겠지." 

"···아버님." 

"난 이제 네 아버지가 아니다. 한낱 죄인이지. 자, 어서 가거라. 한시가 급하니라." 

그거면 족했다. 

장남 카를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고, 자코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느린 걸음으로 회장으로 향했다. 

저 게르만족의 침략 이래로 천오백 년간 공화국을 지켜온 공화귀족들에게 이 정도 음모야 호흡이나 다름없었으니. 

덜컹. 

"···그럼 재개합시다." 

자코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침울한 얼굴로 아직 분이 덜 풀린 듯한 의원들 앞에 나섰다. 

오지도 않을 나폴레오네나 찾고 있는 폭도들에게 달려갈 공화국의 로베스피에르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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