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154)

혁명가의 혼

요즈음 로베스피에르 일가의 하루는 고달프다. 

으아앙-! 

"···에고." 

바로 어느덧 미운 두 살을 맞이한 우리 막시밀리앙 2세 때문이지. 

전문용어로는 제1 반항기라고 부른다던데, 이걸 고작 반항기라고 불러도 되나 싶었다. 

이유식이 마음에 안 든다고 울더니만 또 나중에는 배가 고프다고 울고, 식기라도 쥐여주려고 하면 손등을 마구 찌르지를 않나, 조금만 안 보고 있으면 혼자서 걷다가 넘어져서 또 울고, 이상한 거 입에 넣지 말라고 했더니 또 밉다고 울고. 

반항기가 아니라 그냥 얜 세상 모든 게 미운 거 아닐까? 

왜 매번 사고란 사고는 혼자서 다 쳐놓고서 마치 세상이 억까하는 것처럼 야단법석이지? 

그리고 도대체 얜 내 아들도 아닌데 왜 나까지 이 개고생을 해야 하는 거냐, 이 집주인 놈아? 

[그래서 나도 내 애인도 아닌 치정사에 따른 오명을 감내하고 있잖은가.] 

오케이, 무승부인 거로 치자고. 

육아 담당 민혁 삼촌이에요. 

우쭈쭈. 

"···또 악몽이라도 꾼 걸까요? 아니면 소변?" 

"뭐, 어제 저녁이 부실했으니 일찌감치 배가 고픈 걸 수도 있지요. 제가 보고 올 테니 몇 분이라도 더 주무십시오." 

"그럼 부탁 드릴게요오···." 

[자네도 쉬고 있게. 어제 밥 먹이느라 고되었을 텐데.] 

메르시. 

적당히 둘러대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몸을 되찾아간 집주인이 어기적어기적 아기방으로 내려가 상태를 확인했다. 

역시나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배고파서. 

어이구, 그러게 죽자 살자 입으로 숟가락을 집어넣는데도 절반을 뱉어내더니만. 

까르륵. 

별수 없이 화로에 불을 지피고 어젯밤 먹고 남은 스튜를 졸여서 떠먹였더니만 그제야 아기천사처럼 맑은 웃음을 터트리는 막시밀리앙 2세. 

그러게 어제 저녁에 이거 반만큼만 고분고분하게 먹어줬어도 좀 좋아. 

"진짜로 보모를 두어야 하나···." 

어이쿠, 하다 하다 집주인 놈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다. 

돈이랑 원수진 놈이 보모를 찾는 것 보면 육아가 고달프기는 했나 봐? 

"그럼 변덕이 미쳐 날뛰는데 나더러 대체 어쩌라는 말인가. 조만간 선거철인데 지금처럼 육아에만 붙들려 있을 수도 없고, 부인을 생각해서라도 보모를 두긴 해야지." 

하기야 그렇다. 

지금이야 자연인이니까 평소에는 집에서 육아건 가사건 돌보다가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외부 활동까지 챙길 수 있었던 거지만, 이제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면 이쪽이 덤이 되어야 할 테니. 

그렇다고 현 로베스피에르 일가가 보모 한 사람 둘 수 없어서 엘레오노르가 고달파야 하는 처지도 아니고 슬슬 지금부터 물색해두는 게 이치에 맞기야 하겠지. 

그래야 또 둘째도 만들고 셋째도 만들 짬이 나올 테고. 

"커흠!" 

···응? 우리 친구가 이쪽으로는 아직도 내성이 없나 봐? 

그동안 봐온 게 있을 텐데 희한한 일이구만. 

"반대로 자네는 유교드래곤 타령하던 주제에 얼마 사이에 뭘 이렇게 뻔뻔해진 건가···?" 

말했잖아. 

걘 죽었다니까? 

자고로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법. 

정신없이 변화하는 현대사회에 발맞추지 못하는 놈은 현대인이라고 할 자격이 없다, 마리야.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말 안 했는데? 

생각했지. 

코오-. 

어이쿠, 그래도 배를 채워놨더니 고놈 참 잘 자네. 

아직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화로에 불 지피고 밥 먹이고 하면서 아비 잠은 다 깨워놓고서 말이지. 

아주 고약한 불꽃 효자로구먼. 

"자네도 갓난아이 시절에는 똑같았을 걸세." 

호오. 지금 이 유교드래곤에 효심대결을 신청하시겠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그 유교 드래곤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놈 이름은 부부유별이라고 한다오. 

부자유친, 군신유의, 장유유서, 붕우유신 사천왕은 건재하지. 

크큭, 부부유별 그놈은 우리 오두룡 중 최약체···! 

"하여간 싱겁기는." 

어어, 배은망덕한 놈이 또 안 놀아주려고 드네? 

툭. 

하여튼 막시밀리앙 2세를 재우고, 잠도 진작에 깼겠다. 기왕에 음식까지 데웠겠다 간단한 아침까지 마치고 나니 조간신문이 날아들었다. 

"신문 배달이요!" 

"네. 좋은 아침입니다, 다비드 씨." 

"어이쿠, 또 깨어계셨네. 역시 한창 미울 나이라 힘드시죠?" 

"예에, 뭐. 어쩌겠습니까. 저도 이 나이일 때는 똑같을 테니 어머니를 생각해야죠." 

"어휴. 마음씨도 고우시지." 

그거 다 옆에서 내가 하라고 잔소리 했-. 

[입 닥쳐, 박민혁.] 

···쳇. 

이것도 입 밖으로 내뱉었으면 완벽한 사회적 암살이었는데 까비아깝소잉. 

[그랬으면 자네도 똑같이 불편했을 거면서 뭘.] 

아뿔싸. 

"하여간 싱겁기는." 

"네?" 

"아뇨, 그냥 혼잣말입니다." 

능숙한 문답.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조간신문을 받아서 들고 커피 원두를 갈자니-. 

"···응?" 

1면부터 기사가 영 심상치 않다. 

이건 내가 나설 차례구만. 

"제노바 공화국에서 혁명? 도제의 장남이 친불파 민중을 선동해 평의회를 습격하고 코뮌 정부를 선포했다?" 

한동안 저쪽에서 방귀가 끊이지를 않더니만 기어이 건더기가 튀어나왔네. 

하필이면 스페인 식민지 반란과 겹친 게 어째 좀 묘하긴 한데, 아직까진 심증이니 이 부분은 넘어가고. 

문제는 이 급진당 선전지를 얼마나 믿을 수 있냐는 건데-. 

[그거야 날이 밝거든 직접 당사건 정부 부처건 찾아가서 확인해보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글쎄? 

평소라면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겠지만 하필이면 선거철이 코앞이라 썩 내키지 않는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VIP도 들이박을 수 있게 되는 시기에 한 번 보위에서 물러났던 전임 독재관을 향한 시기와 견제야 여야를 막론하고 두말해 무엇할까. 

무엇보다 당통 그 친구도 권력욕이 강한 친구라 그리 쉽게 우리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려 하지 않을 거다. 

가봐야 아무 일 없다고 답하거나, 아니면 아예 선거유세에 집중하라고 발목에 족쇄를 채우려 들지 않으면 다행이지. 

[···쓰읍. 하기야, 우리가 쉬는 동안 코뮌을 이끌어온 건 저 친구들이었으니. 그리 쉽게 권좌를 돌려주지는 않겠군.] 

그래. 

그러니까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정리해보자. 

일단 제노바 공화국은 그 이름 그대로 이탈리아 반도의 공화국이다. 

물론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반동 냄새 물씬 풍기는 귀족적 상업 공화국이긴 한데, 그래도 꼴에 공화국인데다가 우리 프랑스와 이웃해 있는지라 다른 지역들보다 코뮌제 통일에 호의적인 여론이 많다-라고 지난번 마세나의 서신에 나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 도제의 장남-장 카를로 브리뇰레가 공화명가의 일원으로서 코뮌 체제에 심취한 열성 공화론자라면 본인이 직접 혁명정부를 세우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러기엔 이 친구, 나이가 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한 20, 30대면 그럴듯하다고 솔깃해했겠는데 이 양반은 세상을 배울 만큼 배웠을 나이 지긋한 중년이다. 

저 상인공화국을 현대로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재벌공화국인 셈인데, 삼땡까진 아니라도 나름 전경련 회장까지 배출한 재벌 집 장남이 갑자기 늘그막에 혁명정신에 불타올랐다? 

말이 안 될 것까진 없지만 좀 이해하기 어려운 가정이지. 

당장 본인부터가 그 재벌공화국의 지옥 같은 복마전에서 거무튀튀한 악의와 탐욕에 길들여져 인간혐오에 찌들어있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데. 

이건 장 카를로 본인이 혁명가, 라는 가능성보다는 혁명가들과 손잡고 뭔가 다른 걸 추구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호록. 

오, 커피 맛있게 볶아졌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니까. 

이 시대 커피의 지옥 같은 맛을 탓할 게 아니라 내가 직접 현대적인 커피 맛을 낼 방법을 찾아내면 그만이었다. 

나중에 이것도 잡지에 실어봐야지. 

[우선, 내 생각을 말해보겠네.] 

커피 맛 칭찬은 안 해주시나? 

매정하시구만. 

[그래, 그래. 알겠으니까 그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지. 우선 내 생각을 말해보자면, 이 장 카를로라는 친구는 아마 새로운 이탈리아의 마리우스나 술라가 되기를 꿈꾼 것 같네.] 

술라? 

아하, 동맹시 전쟁 이야기구만? 

그러니까 제노바 공화국이 새로운 통일 이탈리아의 주역이 되기 위한 대계다? 

[뭐, 꼭 그게 아니라도 우리 프랑스의 침략으로부터 제노바 공화국을 지키기 위한 구국의 결단일 수도 있지만 말일세. 솔직히 베네치아와 지중해 패권을 겨루던 지난날이면 몰라도 작금의 제노바는 초라한 도시국가에 불과하니까.] 

···그, 구국의 결단이라는 표현은 한국인으로서 PTSD 올라오니까 좀 삼가실래요? 

[앗.] 

뭐, 아무튼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다. 

한마디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구먼. 

도제는 나이가 너무 많으니까 이제 와서 친혁명노선으로 갈아타 봐야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다른 재벌들에게 이제부턴 우린 친불파다! 라고 해봐야 으아악, 빨갱이다! 라는 반응밖에는 돌아오지 않을 터. 

그러니까 도제보다는 젊은 장남이 나서서 친혁명노선을 내세우고, 혁명정부를 핑계 삼아서 반대파들을 쓸어버린 다음 우리 프랑스의 지지를 등에 업고서 이것저것을 시도해볼 작정인 거다. 

그래서 이 친구가 그냥 제노바 하나만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라는 방어적 애국자인지, 제노바가 주축이 된 이탈리아 통일을 꿈꾸는 패권주의자인지, 그도 아니면 권력에 눈에 뒤집힌 독재자일지야 두고 보면 될 일이고. 

[순진한 이상론자라는 전제는 단 하나도 없군.] 

아까도 말했잖아? 

저 친구는 재벌 집 장남이라고. 

혁명정신 따윈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게 뻔할 뻔 자고, 자칫하면 이탈리아 혁명 자체가 저놈의 뜻대로 곡해되거나 망가질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러니까 한 번쯤 남쪽으로 가서 직접 만나보건 배후 조종을 하건 해봐야지. 

선거유세고 나발이고, 파리에서 연설 몇 번 하는 것보다 이게 최고의 선거유세고 또 혁명가로서 다시 한번 이름을 떨칠 절호의 기회니까. 

[···흐, 모처럼 피가 끓는구만.] 

그래, 혁명적 부르주아지라면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다. 

우리 깐부 영원하자! 

"커피 냄새···." 

하아암-. 

늘어지는 하품. 

저혈압과 공복에 시달리는 야생의 마님이 나타났다. 

[시꺼.] 

내가 무슨 흉이라도 본 것처럼 말하네? 

하여간 애처가라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코르넬리." 

"좋은 아침이에요오···. 아침은 또 감자스튜?" 

썩 내키지 않는 듯 미간에 주름을 잡는 님. 

뭐, 아직 감자가 프랑스에서 그리 대중적인 식재료가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프랑스의 감자보급을 위해 군말 없이 먹어주는 엘레오노르가 나로서도 고맙기만 하다. 

[엣헴.] 

···아니 넌 또 뭔데. 

"저기 부인." 

"뭔가요오···?" 

늘어지는 답변. 

저혈압 때문에 아직 어지러운지 감자스튜를 입에 퍼넣으면서도 해롱거리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다. 

"다들 선거 치르느라 신혼여행도 못 다녀왔는데, 어떻습니까. 잠시 따뜻한 지중해 바람도 쐴 겸 우리 아이와 함께 마르세유에 다녀오는 건?" 

덜컹. 

오, 님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볼에 슬그머니 홍조가 도는 게 저혈압도 해결된 것 같고. 

다만-. 

"···흐으응." 

전혀 우릴 믿는 눈치가 아니구만. 

[그야 전적이 있으니까.] 

그거 남 말할 처지 아닌 거 알지? 

"아하." 

마침내 좀 전까지 우리가 읽던 조간신문을 발견한 엘레오노르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내가 못살아요. 또 이거에요? 혁명가의 혼이 불타올랐다, 뭐 그런?" 

"아하핫···." 

"하여간 혁명가들이란 왜들 이렇게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지." 

님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커흠.] 

그래, 그래도 부끄러워할 줄은 아니까 됐다. 

[아니, 잠깐! 자네도 부끄러워해야지!] 

오우, 프랑스말 넘후 어려워효. 

"좋아요. 어차피 다 각오하면서 결혼한 거였으니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 

척. 

엘레오노르가 검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두 가지 조건이 있어요." 

"손가락은 하나입니다만." 

"지금 부인 말에 토를 다는 거예요?" 

콕콕. 

님의 검지가 미간을 찔렀다. 

"첫째로, 그년들은 데려가지 않을 것. 속 좁다는 흉을 당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혼여행까지 공유하는 건 용납 못 해요." 

···커흠. 

[···자네 설마.] 

아니 잠깐만, 이번엔 나 진짜 억울해! 

엘레오노르가 네 부인이지 내 애인은 아니잖아?! 

어차피 같은 몸 쓰는 처지에 상부상조 좀 합시다! 

[어휴.] 

"잘 알겠습니다. 그럼 두 번째는?" 

척. 

엘레오노르가 아무 말 없이 곤히 잠들어 있는 막시밀리앙 2세를 가리켰다. 

설명은 그거면 족했다. 

"아하." 

하기야 제아무리 여행은 핑계고 혁명이 본업이라지만 거기까지 가서 막시밀리앙 2세만 돌보고 있기도 좀 그렇지. 

보모를 데리고 가야겠구나. 

그날, 날이 밝는 대로 로베스피에르 일가는 잡지에 보모 모집공고를 내걸었다. 

똑똑똑. 

"계시나요-?" 

며칠 뒤 로베스피에르 가를 찾아온 보모는 절 샤를로트 코르데라고 소개했다. 

*** 

주프랑스 폴란드 공사관. 

"저를 초대하시겠다고요···?" 

"그렇습니다." 

유제프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대 경험 자체가 낯설어서, 는 분명 아니었다. 

크라쿠프 혁명 정부에서 얼마 전 바르샤바를 탈환한 뒤 유제프가 공식적으로 공사에 부임한 이래로 구애를 보내온 사교회나 이런저런 모임들이야 하나하나 헤아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만일 이대로 폴란드가 러시아와의 불평등조약을 청산하고 주권을 회복한다면 그는 이제 어딜 가나 폴란드의 왕족이자 신성로마제국의 변경백으로서 환대받게 될 테니까. 

저들로서는 프랑스-폴란드 양국의 새로운 동맹관계를 상징하는 이 젊은 공사에게 일찌감치 얼굴도장을 찍어두고 싶은 게 당연했고, 반대로 유제프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친우를 사귀며 조국 폴란드의 승전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더 많은 후원을 끌어내야만 했다. 

그런데도 유제프에게 있어서 뜻밖이었던 건-. 

"설명만 들어서는 이 인터내셔널은 프리메이슨 같은 계몽적 성격의 비밀결사로 보입니다만. 저처럼 세간의 이목을 끄는 사람이 가입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요." 

"그 반대입니다."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동생,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터내셔널은 장차 비밀결사가 아닌 공개적인 국제 민간기구로서 활동하게 될 것입니다." 

"···음, 그럼 프리메이슨보다도 더한 악명을 뒤집어쓰게 되겠군요." 

"우리 계몽주의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명성이지요. 이 세상에 적들의 저주보다도 더한 칭찬이 어디 있답니까?" 

참으로 오만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유제프는 내심 오귀스탱의 설명이 옳다고 여겼다. 

그야 이들에겐 프랑스 코뮌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까. 

적들의 공세에 맞설 힘과 버팀목이 있는데 대외활동과 조직확장의 이점을 버리고 음지로 숨어들 이유가 없었다. 

괜히 음지로 숨었다가 프리메이슨처럼 온갖 중상모략과 음모론의 주인공이 되는 것보단 「그래, 우리가 했다」라고 적들과 지지자들을 향해 당당히 응답하는 게 여러모로 세간의 인식개선에도 도움이 될 테고. 

"형님께서는 장차 인터내셔널이 소수의 계몽된 지식인과 유력자들만의 비밀결사가 아닌, 보편적 다수의 참여를 전제로 한 세계혁명의 사령탑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당장 오귀스탱 또한 바로 그 프리메이슨의 한계점을 꼬집고 있잖은가. 

의견이 일치했음을 확인한 유제프가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그리고 비단 프랑스만이 아닌 세계 각지에 지부를 둔 국제적인 민간기구가 되기를 원하시고요." 

"무슨 말씀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다만. 

"그래서 저의 인터내셔널 가입이 당장 제 조국에 어떤 이득이 있을는지요?" 

어찌 보면 오늘의 핵심 안건이었다. 

설령 제아무리 숭고하고 거창한 이상을 가진 조직이라도 그것이 폴란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유제프로선 하등 가입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슥. 

그러자 오귀스탱이 한 장의 종이를 건넸다. 

빼곡히 누군가의 인명으로 가득한 명부였다. 

"···? 이게 다 뭡니까?" 

"지난날 귀국의 성원에 대한 보답입니다." 

일명. 

"국제여단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국제여단." 

그제야 유제프는 지난날 그와 그의 부하들이 프랑스군을 위하여 복무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비록 실제 전장에 나서서 공을 세우지는 못했고, 유제프와 폴란드 장교들은 대부분 후방에서 오합지졸 신병들을 조련하며 시간을 보냈으나-. 

"휴가를 낸 군인들이 어디에서 누구를 위하여 싸우고 있을지야 프랑스 정부에서 상관할 바가 아니지요. 미국혁명 때도 다들 그랬잖습니까?" 

과연 이들도 그러할까. 

유제프는 슬그머니 최상단에 새겨진 인솔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루이니콜라 다부 대령. 

"···허." 

생전 들어보지 못한 무명의 장교.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쓱쓱. 

이날, 유제프는 인터내셔널 바르샤바 지부장으로서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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