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적기사
덜컹덜컹.
"날씨가 참 좋네요-. 그렇죠?"
"어···."
···아니 당신이 왜 여기서 튀어나와.
이제 막시밀리앙 2세도 이유식을 먹어서 유모가 필요한 게 아니라 진짜로 순수하게 애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고는 했고,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쉴 틈 없이 옹알거리는 아이에게 시달리면서도 침착함을 잊지 않는 모습이 우리가 기대했던 보모 상이 맞긴 한데.
솔직히 그보다도 무섭다.
통칭 암살의 천사.
물론 마라 암살범 샤를로트 코르데와 우리의 여행에 따라온 이 보모가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없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께름칙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까놓고 마라한테 그랬던 것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평범하게 대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훼까닥해서 칼빵을 놓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무차별 살인마가 아니라 정치적 신념으로 뭉친 암살범이니까 별 감흥 없었겠지만, 지금 난 누구보다 정치적인 사람이라고.
자는데 뒤통수에 칼침 놓는 건 아니겠지?!
[에헤이, 겁만 많아서는. 그리고 지금처럼 후회할 거면 그때 결사반대라도 하지 그랬나?]
그야-.
"그러게요. 역시 지중해에 가까워져서 그런가? 갈수록 날도 포근해지고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게 모처럼 제 기분도 화사해지는 것 같네요."
"그렇죠? 아, 저기 과수원에 사과꽃 핀 것 좀 보세요!"
"어쩜! 남쪽 지방에선 벌써 사과꽃이 피는가 보죠?"
마님이랑 저리 쿵짝이 맞는데 어쩔꼬.
애초에 남편이 보모를 고른다는 행위 자체가 이 동물의 왕국에선 좀 그쪽 뉘앙스로 받아들여져서리.
안 그래도 신혼여행에 정부들 데려오지 말라고 엄포까지 들은 마당에 함부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보나 마나 그새를 못 참고서 또 새 여자를 들이냐는 소리가 나왔을 테니까.
애초에 마님과 정을 통한 적이 없는 이 돌쇠로선 참 억울하긴 하지만!
[돌쇠는 무슨. 정신 기생체 주제에.]
어허, 자꾸 그러면 나 운다?
이 배은망덕한 놈이 진작에 단두대 끌려갔을 놈을 여기까지 살려서 왔더니 또 은혜도 모르고서 맞먹으려 드네?
안 그래도 마님이랑 단둘이 있으니까 내게 주도권이 건너올 일이 별로 없어서 심심해 죽겠는데!
[그래, 그래. 나도 여인들 대화에 자연스레 끼어들 자신도 없고. 잠시 책이라도 읽을 테니 같이 읽으세나.]
꺼흐흑.
너튜브도 아니고 독서가 유일무이한 오락거리라니.
도대체 이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몰-.
"···흐응."
응?
[또 뭔가?]
아니, 저 예비암살범이랑 잠깐 눈이 마주친 것 같아서.
기분 탓이겠지?
[···기분 탓이어야지.]
그것도 그렇네!
그렇게 집주인 놈과 함께 재미없는 라틴어 고서들을 읽으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낸 지 며칠 뒤.
"오, 드디어 우리의 난쟁이 난봉꾼이 오셨군."
와락.
마르세유 초입부터 우리를 마중 나와 있던 마세나가 날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아니, 도대체 이 소문은 어디까지나 퍼진 거야.
"마르세유로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위원장님. 안 그래도 슬슬 오실 거라 짐작하고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그, 마르세유는 이번이 처음입니다만."
"에이,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저번에도 한 번 뵈었잖습니까?"
"그때도 아비뇽이었습니다."
"거기도 넓게 보면 마르세유지요. 뭘."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마르세유에서 아비뇽까지가 베르사유에서 파리까지보다 먼데?!
무슨 경기도는 전부 서울 변두리라고 말하는 서울 촌놈도 아니고!
"그리고 여기 계신 마담들은···?"
조금 전까지 쾌활하게 우릴 반기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마세나가 두 사람에게 느끼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역시 이탈리아 남자라서 그런가?
숨 쉬듯이 여자를 꾀려고 드네.
[우리가 남 말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커흠!
"정식으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마세나, 이 사람은 제 부인 되시는 엘레오노르라고 합니다. 엘레오노르, 이 사람은 앙드레 마세나입니다. 이곳 마르세유의 사령관이시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엘레오노르 드 로베스피에르랍니다."
꾸벅.
마님이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부인이셨군요. 반갑습니다, 마담. "
어쭈, 이놈 봐라. 아쉬운 티를 아주 팍팍 내내?
입맛까지 쩝쩝 다시는 게 늑대가 따로 없는데 이 고얀 놈을 어떻게 할까, 아우야?
[···오히려 정혼자가 있으니 얌전히 포기한다는 점에선 이 친구가 자네보단 훨씬 나은 거 아닌가?]
·········.
[그래도 양심은 있었나 보군.]
입 닥쳐, 막시밀리앙.
"그리고 여기 계신 분은 샤를로트 코르데, 이번 여행에 함께하게 된 보모이시고 아직 마드모아젤이십니다."
"반갑습니다, 마세나 사령관님. 우리 프랑스의 위대한 영웅을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이런이런. 단지 아리따우실 뿐 아니라 옥구슬이 굴러가듯 청아한 목소리에 마음씨까지 고우신 분이 아직 마드모아젤이시라니. 파리에는 온통 장님과 귀머거리 뿐인가 보군요."
쪽.
기습적으로 제자리에 무릎 꿇은 마세나가 코르데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햐, 아주 눈동자에서 꿀이 떨어지네.
저 선수 놈 혓바닥에 버터 발라놓은 거 보소.
"아리따운 마드모아젤, 혹시 제게 당신을 샤를로트라고 부르는 영광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어머나, 어머나. 세상에."
한데 코르데는 막상 얼굴에 홍조 하나 없는 모습.
쓱-.
오히려 있는 힘껏 마세나가 입을 맞춘 손을 빼더니.
"분명 영광스러운 제안이지만, 그냥 코르데라고 불러주시겠어요?"
라고, 무안하리만큼 단호하게 대꾸했다.
어···.
"물론, 그것이 당신의 바람이라면야."
···끄떡도 하지 않네?
솔직히 당장 험한 소리가 오고 가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는데 두 사람 다 얼굴에 주름이나 혈색 하나 없이 뻔뻔스레 웃고 있다.
이정도야 일상 다반사라는 건지, 아니면 워낙에 자존감이 확고해서 고작 이정도로는 흠집도 안 간다는 건지.
"아무튼, 하필이면 지금 같은 시국에 마르세유로 찾아오셨다면 순전히 여행이 목적인 건 아니겠지요."
무릎의 먼지를 훌훌 털고 일어난 마세나가 도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일 이야기는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제가 숙소로 찾아갈까요? 아니면 위원장님께서 절 찾아와주시렵니까. 시간은 언제쯤으로?"
"걸어가면서 합시다. 어차피 오늘은 짐을 풀고 숙소에서 푹 쉬려고 했으니까."
"···걸어가면서 일 이야기를 하시겠다고요?"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
마세나가 재빠르게 주변을 살피더니.
"알겠습니다. 그것이 위원장님의 바램이라면."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나는 딱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호위나 감시를 붙여둔 거겠지.
보란 듯이 손가락을 튕긴 건 일부러 내게 호위를 붙여뒀다는 걸 알려주기 위함일 테고.
겉보기와는 달리 배려심이 깊으시구만.
혹은 우리가 너무 조심성이 모자란 걸 수도 있겠지만.
"우선 위원장님께서도 익히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삽시간에 고요해진 거리.
여인들이 마르세유 구경을 하는 사이 짐꾼들과 함께 숙소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포문을 열었다.
"그 카를로라는 놈은 혁명가, 라기보다는 혁명을 핑계로 제 정치를 하려는 놈 같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혹시 제노바에서 뭐라고 연락을 해오진 않았나?"
"왜 안 했겠습니까. 당연히 파발이 날아왔지요."
내 하대에도 아랑곳없이 마세나가 이죽거렸다.
"뭐라고 했더라? 그래. 장차 제노바 혁명 정부는 하나의 기치를 공유하는 형제이자 우리 프랑스의 혈맹으로서 성의를 다하겠다고 했던가? 도와달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거꾸로 우릴 돕겠다는 말만 잔뜩 적어놨습니다."
"지능적이군."
"예. 역시 닳고 닳은 공화귀족답게 선거철을 정확히 겨냥한 것 같습니다."
타당한 추리였고,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만약 저쪽에서 먼저 도와달라고 적어놨다면 선거철에 앞서서 빅이벤트가 필요했던 파리는 당파별로 의견이 갈렸을 거다.
도움이 절실하다는 건 곧 적들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것이고,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전쟁에 찬성하는 여론몰이만큼이나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몰이도 필승전략 중 하나니까.
하지만 거꾸로 저쪽에서 프랑스에 힘이 되어주겠다고 잔뜩 적어놓으면?
신성동맹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현실은 별반 다를 바 없으나 이 경우에는 논쟁의 주제가 전쟁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아닌 현 원내 당파들이 제노바 혁명정부 수립에 각기 얼마나 기여했느냐, 가 되어버린다.
좌우지간 현 프랑스 코뮌은 혁명이라는 가치관을 전면에 내세운 혁명 공화국이고, 당파마다 목표로 하는 혁명의 지향점이 각기 다를 뿐 혁명을 긍정하고 있다는 점은 모두 똑같으니까.
벨기카처럼 프랑스군이 직접 개입한 것도 아닌데 기특하게도 자력으로 혁명에 성공한 저 제노바 혁명 공화국이 이들 당파 중 누구의 혁명노선을 추종하느냐, 를 두고 다가올 선거의 판도가 마구 뒤집힐 거다.
선거철이라는 특수한 상황 탓에 실질적인 힘을 가진 파리가 아니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을 제노바가 이 문제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이다.
[하여간 공화귀족들이란.]
뭐, 소국의 생리라는 거지.
저 사람도 딴에는 어떻게든 제 나라를 살려보겠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친 결과일 텐데 이것까지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단.
"그래서 실제 혁명 정부의 양상은?"
혁명정신조차 없이 단지 혁명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전자야 소국의 정치인으로서 어떻게든 대국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친 거지만 후자는 수구반동 재벌가의 더러운 기회주의인 거니까.
"짐작하신 대로."
마세나가 빙그레 웃었다.
"나름 보통선거제를 비롯한 이런저런 구실은 갖추고 있지만, 결국 요직은 옛 도제 일가에서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진짜 혁명가들은 워낙에 미숙한데다가 저들끼리도 의견이 갈려서 영 힘을 못 쓰고 있고요."
"아, 익숙한 이야기군."
그립구나.
저기도 딱 옛날 정치동아리 꼬락서니인가 보네.
하기야 우리는 하다못해 자력으로 혁명했지, 저기는 도제 일가에서 친위쿠데타를 벌인 거나 다름없으니까 더더욱 개판이겠지.
우리 프랑스는 파리지앵만큼은 확고한 친혁명 진영이었지만 아직 제노바의 민심은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을 테고.
그렇다면.
"이것 한 가지만 확인하겠네."
슬쩍 마세나를 돌아보았다.
"로마냐의 교황청에서는 이미 코뮌 혁명에 찬동하는 모든 이들을 파문하겠노라 엄포를 놓았던 걸로 기억하네만, 그럼 이제 제노바의 사제들도 파문당하거나 숙청당했을 것 아닌가.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아, 그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그건 또 뭔 소리래.
"교황청이 등장한 이래로 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몇 번이나 전쟁이 벌어졌는지 기억하십니까?"
한데 오히려 마세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럼 그 전쟁 중 교황청이 직간접적으로 관여되지 않았던 전쟁이 과연 몇 번이나 되겠습니까."
"···아하. 그러니까 이탈리아에서 교황청과 대립각을 세우다가 파문당하는 정도야 일상다반사다?"
"뭐 그렇죠. 베네치아가 유독 남다르긴 했지만, 애당초 다들 교황을 그렇게 무서워했으면 지금 저 도시들이 무슨 수로 독립을 지키고 있겠습니까. 진작에 교황령에 복속하건 하다못해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건 했지."
하기야 맞는 말이네.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리 종교적이었다면 교황이 이탈리아를 통일했겠지.
하물며 교황이 말과 덕만으로 작금의 영토를 차지했을 리도 없고, 끊임없이 이웃나라들과 전쟁을 치르면서 영토를 빼앗거나 도로 빼앗기면서 국경선이 정해졌을 텐데 이웃에 악감정이 전혀 없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봐."
"···어, 지금 뭔가 고약한 음모를 꾸미고 계시는 얼굴인데요."
어허, 고약한 음모라니.
내 민중혁명을 위하겠다는 거룩한 충정뿐이거늘!
[그래서 정부들은?]
시꺼!
"자네, 현 제노바 추기경이 누구인지 아나?"
"제노바 교구에 추기경은 없고, 대주교라면 아마 이름이 조반니였을겁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
뻔히 다 짐작했을 친구가 왜 이러실까?
우선 정리해보자.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독보적이지만, 막상 교황의 영향력은 교황령 너머에서 지극히 제한적이다.
따라서 제노바의 가톨릭 사제단은 정치적인 이유로 비협조적으로 군다면 모를까 이제 와서 공화국 체제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미 여러 차례 교황을 납치하고 갈아치운 전적이 있다.
[···이봐, 잠깐.]
아마 이 시대면 교황은 무조건 이탈리아계 중에서 뽑아야 했던가?
잘됐네.
"이보게."
"듣고 있습니다."
"대립교황이라는 우리 프랑스의 위대한 전통을 부활 시키는 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내 제안을 듣게 된 마세나의 얼굴이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
아일랜드 왕국.
으슥한 맥주 양조장.
"내 긴말은 하지 않겠네."
또각.
이날 자리에 모인 연합 아일랜드인 협회(Society of United Irishmen)의 면면을 하나하나 살피며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경이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 연합에 있어서 최대의 위기이자 최대의 기회일세."
어째서, 같은 설명은 불필요했다.
이들도 눈과 귀가 있는 이상 오늘날 유럽이, 대서양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리가 없었으니.
그들의 영원한 숙적, 철천지원수 런던이 설계한 모형 정원이 동시다발적으로 뒤흔들리는 지금이 아니고서야 두 번 다시 기회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건 누구나 쉬이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우리의 적들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런던은 이따금 그의 적들에게 주술이나 전시안 따위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드는 초월적인 첩보력과 설계력을 보여줘 왔으니.
어쩌면 오늘 그들의 만남조차, 하필이면 지금 아일랜드인들이 무장 혁명을 준비하게 된 것조차 런던의 설계는 아닐까 하는 의심이 내심 가시지를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 와 적들이 강하다고 낙심할 텐가?"
빙글.
피츠제럴드 경이 뒤돌아섰다.
"적들이 우리보다 언제나 한발 앞서고 있다는 걸 진정 몰랐는가? 마치 요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정보를 구하고 내통자를 끼워 넣어왔던 걸 진정 몰라서 이 자리에 나섰는가?"
"""아닙니다!"""
우렁찬 함성.
"그래, 동지들. 우리는 모두 죽지 못해서 황천을 떠도는 산송장이고 공포라는 감정마저 잊어버린 세상에 둘도 없을 머저리, 천치들일세."
그제야 피츠제럴드 경은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지 않고서야 왜 저 무시무시한 그레이트 브리튼에 도전하려 하겠는가? 지난 수 세기간 존재해본 적도 없는 나라를 위하여, 그저 못 본 척 등지고 떠나면 그만일 동포들을 위하여 목숨을 걸겠나?"
이런 대책 없는 친구들 같으니라고.
피츠제럴드 경이 낄낄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우리 같은 멍청이들을 돕겠다니, 파리야말로 우리보다도 대책 없는 멍청이들이지!"
사방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공식적으로는 프랑스 정부가 아닌 인터내셔널에서 소매를 걷어붙인 거였으나, 이런 뻔한 속임수에 속아 넘어갈 바보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리바이어던, 붉은 리슐리외, 절대로 부패할 수 없는 상간남, 그리고-혁명의 독재관.
그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몸소 창립했다는 단체가 프랑스 정부와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을 리가 있는가?
물론 이제서야 네덜란드와 미국을 우회하여 고작 연락선이 한 척 오고 갔을 뿐이었으나, 그게 어디든가.
그동안 도와주는 곳 하나 없이, 총 한 자루 구할 길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던 지난날에 비하면 소총 수백자루와 화약을 전해준 연락선의 가치는 절대로 '고작' 따위가 아니었다.
아무렴 저 인터내셔널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여느 때처럼 프랑스와의 직통 항로만 바라보다가 어디선가 나타난 단속선에 모든 물자를 빼앗기고야 말았을 테니까.
"최소한 헛되이 죽게 두지는 않을 거라 약속하겠네."
웃음을 그친 피츠제럴드가 정색했다.
"나의, 우리 모두의 죽음이 결코 헛되이 쓰이지 않도록 하세나."
고별사는 그거면 족했다.
"우리의 멍청이들을 위하여."
누군가가 맥주잔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아일랜드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사람이.
"후회 없이 멋들어진 자결을 위하여."
마지막 사람이 건배사를 선창하고, 연합 아일랜드인 협회는 겸허하게 맥주를 비웠다.
꿀꺽.
이 건배야말로 그들의 장례식 대신일 거라는 건 누군가 따로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