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154)

혁명의 적

"마세나, 자네가 최고야."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익살스레 허리를 굽히는 마세나. 

햐, 도대체 이 깃발은 또 어디서 구했데. 

물론 그 시절 유물은 아니고 고대 로마 배경의 연극에서 오랫동안 쓰이다가 버려진 폐기물을 슬쩍해온 거라는데, 적당히 해지고 낡은 티가 물씬 나는 게 오히려 현장미를 더하고 있다. 

마치 옛 깃발을 돌려주러 온 것처럼 말이지. 

[으음, 솔직히 난 아직도 제노바의 시민 동지들이 우리가 로마라 주장한 거라고 곡해해서 받아들일까 봐 불안하네만···.] 

뭐,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상선 사관 출신이 아니라는데 믿어봐야지. 

마세나의 설명에 따르자면 선박이 타국 항만에 정박하려면 자국기와 해당 항구를 소유한 나라의 깃발, 그리고 화물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신호기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중 자국기는 선미에 걸어서 우리가 어떤 국적의 선박인지를 밝히고, 해당 항구의 깃발은 어떤 화물을 실은 선박인지를 보이는 신호기와 함께 돛대에 나란히 건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돛대에 내건 S.P.Q.R의 의미는 「우리 선박이 로마 공화국에 입항하려 하니 허락해달라」는 것. 

선미에는 멀쩡하게 우리 프랑스 코뮌의 삼색기를 내걸었고, 신호기로는 외교관 기를 걸었으니 S.P.Q.R.과 조합하자면 「프랑스 국적의 외교관 선박이 로마 공화국에 입항하기를 청한다」가 된다. 

그럼 우리야 문외한이니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 난 다음에야 고개를 끄덕였지만, 제노바 시민들은 전원이 뱃사람이나 다름없으니 한눈에 알아보겠지. 

저 이탈리아 통일론자들의 역사적, 문화적 뿌리가 어디인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황홀하다 못해 광분할 수밖에 없는 메시지인 셈이다. 

[그럼 반대로 제노바 지역주의자들은-.] 

그쪽이야 반반으로 나뉘겠지? 

제노바 주도의 로마 재건=이탈리아 통일을 지지하겠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인다면 기뻐할 거고, 반대로 제노바라는 국체나 정체성을 부정했다고 여긴다면 분노할 거다. 

그런데 아마 내 사견이긴 하지만 전자가 주류지 싶다. 

당장 배에 오르기 전에 슬쩍 훑어본 기밀문서들만 봐도 제노바는 계몽주의 혁명가들과 신성동맹의 압박을 감당 못해 진지하게 주권을 포기하려 하고 있었다고 나와 있었으니까.

만약 제노바의 주권에 그렇게 연연하는 이들이 주류의견이었다면 상층부의 논의가 그쪽으로 흘러가긴 어려웠겠지. 

뭐, 대중여론과 괴리된 과두적 귀족 엘리트들만의 보신주의였을 수도 있으니까 섣불리 단정 지어선 안 되겠지만. 

"아, 저기 배가···." 

선장이 말을 하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과연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한눈에 봐도 사치스럽고 화려한 배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배가 있군. 무슨 문제 있나?" 

"···저건 도제의 배입니다." 

"도제의 배라고?" 

보통은 항구에서 손님을 맞이하지 않나? 

제아무리 제노바 같은 해양 공화국이라도 도선사가 탄 배에 도제까지 동승하는 경우나 그 반대는 드물 것 같은데. 

[아마 그 깃발 때문 아니겠나.] 

아하, 이 S.P.Q.R.에 항의하려고 몸소 행차하셨다? 

똑바로 제노바 공화국 깃발을 걸라고 말이지. 

그래, 그거라면 이해가 가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귀하신 손님이 오셨는데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있나. 승선하라고 하게." 

"···무장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척. 

선장이 활짝 열린 포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호, 제법 세게 나오시는데. 

"어디 쏴보라고 하게." 

"네?" 

"대포건 총이건 한발이라도 쏴보라고 하게. 도제라는 작자가 그렇게 멍청하다면 말이지." 

나도 죽겠지만 제노바 공화국은 그날로 끝장일걸. 

하다못해 저들이 혁명 공화국을 자칭하지 않았다면 우릴 기습적으로 잡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서 신성동맹에 투항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겠지만, 이제 와선 늦었다. 

설령 투항해봐야 신성동맹에선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기회주의자라 배척할 테고, 프랑스에선 눈이 까뒤집혀서 복수를 부르짖을 것이며 제노바 시민들은 줏대 없는 외교로 나라를 망친 도제를 외면할 거다. 

이미 라파예트와 오를레앙과도 겨뤄본 나다. 

이제 와서 도제 따위와 기 싸움에서 밀리면 전 유럽이 비웃고말고. 

"아···. 포문이 닫히고 있습니다." 

거봐, 저놈들은 못쓴다니까? 

멀리서 봐도 선원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게 조급한 나머지 뭐라도 해본 모양이지만, 이래서야 악수다. 

직접 만나기도 전에 기 싸움에서 지고 들어가다니. 

너 납치된 거야. 

"···가장 빼어난(La Superba) 제노바 공화국의 시민들을 대표하여 붉은 리슐리외께 인사드리겠습니다." 

선교에 오른 도제는 한눈에 보아도 어딘가 초췌해 보였다. 

아버지를 해친 패륜아라는 죄책감 때문일까? 

아니면 신성동맹으로부터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그도 아니면, 꼴도 보기 싫었을 폭도들의 우두머리가 되어버린 제 처지를 향한 비탄과 스트레스? 

[아마 전부 다 아니겠나.] 

뭐, 그렇겠지. 

하여튼 이 친구도 다소 억양이 있기는 해도 어려움 없이 불어를 구사하는 거 보면 프랑스어가 국제공용어이긴 한가보구만. 

[글쎄 그렇다니까.] 

"설마하니 위원장께서 몸소 여기까지 나와 손님을 맞이해주실 줄이야. 저야말로 귀국의 과분한 환대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그래서 뭐 하러 여기까지 나왔냐, 라는 비꼼조차 못 알아듣지는 않겠지. 

내 대꾸에 도제는 잠시 말없이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그 깃발은 무엇인지 여쭐 수 있겠습니까?" 

고리타분한 말 돌리기 한번 없이 다짜고짜 본론으로 넘어갔다. 

흠, 어지간히 급하셨나보구만. 

"제가 착각한 것이 아니라면 이 깃발은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사용되지 않는, 천년도 전에 폐기된 옛 제국의 깃발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반대로 여쭙겠습니다." 

도제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며 덧붙였다. 

"혁명 이후 새로이 정해진 제노바 혁명정부의 깃발은 무엇인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공화국은 지난 수 세기간 국기를 바꾼 적 없습니다." 

"그러니까 고리타분한 수구반동의 상징을 그대로 사용하시겠다?" 

그제야 아차, 싶었나 보지만 이미 늦었다. 

애초에 본인은 혁명 공화국이라는 자각도 없이 해양 공화국으로서의 국체를 그대로 계승했다고 여겼을 테니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깃발을 고칠 생각이 없었던 거겠지만-. 

"그럴 리가 없지요. 우리 프랑스만 해도 지난 수 세기간 사용해온 흰 백합을 버렸고, 미국인들도 성조기를 새로 그릴 때 가장 먼저 유니언 잭을 빼버렸는데 제노바라고 다르겠습니까?" 

"·········." 

"분명 무언가 새로운 국기를 고안하고 계실 텐데, 그렇다고 형제공화국에 입항하는데 수구반동들의 상징을 내걸 수도 없고. 또 아무것도 내걸지 않고 입항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그래서 도대체 이런 상황에선 어떤 깃발이 어울릴까, 가만히 생각해봤더니-." 

척. 

돛대 위로 힘차게 펄럭거리는 S.P.Q.R을 가리켰다. 

"모든 에우로파 공화주의의 원점, 그리고 모든 이탈리아 도시 공화국의 뿌리이자 직계 조상. 아무런 깃발도 정해지지 않았다면 오직 저 깃발만이 우리의 대의와 제노바 코뮌을 상징하기에 적법하다고 자신하게 되었습니다." 

도제는 답하지 않았다. 

잘근잘근 입술을 씹고 있는 게 반박하고 싶어서 미치겠는데 양국의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아무 말이나 할 수도 없고, 당장 저기 항구에서 열광하고 있는 시민들을 생각하니 억지로 끌어내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저 S.P.Q.R.을 펄럭거리면서 나와 함께 입항하면 바란 적도 없는 통일 이탈리아 운동의 상징이 되어버릴 테니 지금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일 거다. 

[쯧쯧. 그러게, 누가 함부로 혁명에 올라타라고 했나.] 

누가 아니래. 

간만에 혓바닥이 아주 쌩쌩하게 돌아가는 거 보니 이 친구도 아주 신났네. 

"뭐, 그렇지만 귀국에서도 새로운 깃발을 정할 자유가 있으니 이 깃발이 마땅치 않다면 이만 내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예. 그야 물론이지요. 국기를 정하는 거야 엄연히 귀국의 주권과도 직결된 사안일진대 일개 외국인이 개입해서야 되겠습니까."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 

반색, 이라는 두 글자를 고스란히 형상화 한 듯한 우리 도제님을 벌써 실망시키고 싶지야 않지만-. 

"이 깃발은 이만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아." 

그제야 내 말의 진의를 깨달은 도제의 얼굴이 또다시 새파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이미 시력이 좋은 이들이라면 맨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한 거리인데다가, 이날 항만에 구경나온 사람들이 마구 소문을 퍼트릴 테니 내일이면 이 도시국가의 모든 시민이 S.P.Q.R. 사건을 알게 될 거다. 

설령 여기서 이 로마 공화국기를 내리고 제노바 공화국기를 올려봐야 아무런 동요도 없기엔 이미 늦었다는 소리지. 

그럼 이 용도를 다한 로마 공화국기의 마지막 뽕까지 뽑아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아닙니다! 차라리 저 깃발을 걸고 입항해주십시오! 제발 그것만은···!" 

도제가 간절히 매달렸으나 이미 늦었다. 

잘못된 깃발을 정정해준 것만으로 프랑스는 아직 공식적으로는 동맹도 뭣도 아닌 이웃 나라를 위한 성의를 다했다. 

괜히 정략을 걸 게 아니라 내가 오기 전에 파리에게 먼저 제발 도와달라고 빌며 이런저런 협약을 체결해놨다면 이를 근거로 날 속박할 수 있었겠지만. 

"다들 뭘 꾸물거리고 계신 겁니까? 항만의 시민 동지들께서 우릴 기다리고 있잖습니까. 자, 어서 입항합시다." 

유감스럽게도 현시점에서 저들이 프랑스 정부에서 파견한 전권대사인 나를 구속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지난날 프랑스에서 그러했듯이 제노바 또한 혁명 이전 체결한 모든 조약을 일괄적으로 무효로 하거나 재검토했으니까. 

결국 도제의 필사적인 애걸에도 불구하고 외교선은 항만을 향해 나아갔고-. 

탁. 

마침내 배가 입항하는 순간. 

"불멸의 로마(Roma invicta)! 로마 공화국(Res Publica Romana) 만세!" 

"그래! 공화국도 아닌 로마가 어떻게 로마냐! 우리 제노바야말로 진정한 로마의 후예다!"

"참칭자 카이저에게 죽음 있으라! 침략자 튀르크에게 저주 있으라!" 

"에우로파는 로마의 적기 아래 하나다!" 

"로만 갈리아의 독재관, 붉은 리슐리외 로베스피에르께 신들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사방에서 절규와도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그야말로 제 모든 걸 쏟아내는 듯한, 영혼의 밑바닥으로부터 우러나온 환희였다. 

목이 쉬어서 피가래를 토해내면서도 만세를 부르짖는 이들까지 왕왕 보이는 지경이었으니 그 광기야 오죽할까. 

막상 우린 저 이탈리아어의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하긴 했지만. 

척. 

어차피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우선 도제의 애걸에도 아랑곳없이 곱게 접은 S.P.Q.R을 양손에 든 채 배에서 내렸다. 

"어···?" 

의아한 반응. 

내가 제노바 공화국군의 삼엄한 경계 태세에도 아랑곳없이 군중을 향해 다가가자 기뻐하기보다도 당황해서, 겁에 질려서 다들 한걸음, 두 걸음씩 물러났다. 

하지만 구경꾼들로 발 디딜 틈 없는 곳에서 뒤로 물러나 봐야 한계가 있는 법. 

결국 어느 순간 저들은 사람의 벽에 부딪혔고, 우린 아직도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안경쟁이 청년에게 다가가-. 

"주사위는 던져졌다(Ālea iacta est)." 

그 한마디와 함께 로마 공화국의 적기를 돌려주었다. 

이 낡아빠진 깃발의 본래 주인들에게. 

그리 크지 않게, 그러나 그 자리에 모여있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분명하게. 

파리가, 내가 그들이 장차 무엇을 해주길 바라는지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직후, 항만은 온통 통일혁명전쟁을 부르짖는 급진주의 광신도들의 절규로 가득 찼다. 

*** 

나폴리 왕국. 

"···기어이 터질 게 터졌군." 

나폴리 왕국의 총리 존 액튼 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한 가지만 확인하겠네. 파리에서 전권대사로 로베스피에르를 지명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인가?" 

"예. 틀림없습니다. 런던은 물론이고 빈에서도 교차검증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겠군. 안타까운 일일세." 

나지막한 한숨. 

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인인 그가 나폴리의 앞날을 근심하고 있는지. 

그것도 총리라는 요직을 차지한 채 마치 섭정이라도 되는 양 상석에 앉아서 국정을 논하고 있는지. 

누군가 한 사람 쯤은 이의를 제기해볼 법도 하건만,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나폴리에 이제 와 존 액튼 경의 치세에 반대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야 국왕 페르디난도 1세는 형님 나태왕 카를로스 4세처럼 신께서 위임하셨다는 절대권력으로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누구도 절 쫓아낼 수 없다며 제 취미생활-축첩, 야외활동, 게으름 피우기 등-에 몰두하는 암군이었으니까. 

그나마 페르디난도 1세가 형님보다 유일하게 나은 점이 있다면 야심 있고 당찬 아내를 둔 덕분에 최소한 고도이처럼 자격 없는 상간남에게 실권을 넘기진 않았다 한가지 뿐. 

보르본조의 충신들로선 도대체 명군 카를로스 3세의 혈통에서 어쩜 이렇게 글러 먹은 형제만 나왔는가 하는 한숨만 늘어갈 뿐이었다. 

"우선 본국에 원병을 청해두게." 

영국인 존 액튼의 본국이 스페인이 아니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합스부르크야 이미 언제건 출병할 준비를 마쳐뒀을 테니 따로 파발을 보낼 필요도 없겠지." 

"그럼 아국도 동원령을 선포할까요?" 

"음, 아직은 아닐세. 어차피 우리야 교황령이 한 번쯤은 막아줄 텐데 괜히 서두를 필요 있나. 당분간은 검열과 국내 단속에 집중하도록." 

"명 받들겠사옵니다." 

척. 

논의는 그걸로 끝났다. 

으레 한 번쯤 있을법한 국왕 폐하의 의사를 묻거나 어떻게 보고를 올릴지 하는 확인 절차조차 없었다. 

그야 그 암군은 이번에도 보나 마나 보고서조차 읽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알아서 하라고 할 테니까. 

차라리 귀족 의회나 젊은 왕세자라면 모를까 이 무렵 나폴리에서 국왕이란 존재의 가치는 존 액튼의 고용주라는 사실 단 한 가지뿐이었다. 

"하필이면 제노바라니." 

쯧. 

저절로 혓소리가 나왔다. 

하다못해 알프스 산골짜기 피에몬테에서 시작될 것이지, 제노바가 혁명의 진원지일 건 또 뭐란 말인가. 

객관적인 체급은 제노바보다 사르데냐-피에몬테가 낫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혁명전쟁이 시작되면 프랑스라는 본체가 들러붙을 테고 유럽 대륙 전체의 5분지 1을 차지하는 저 인구 대국에 비하면 사르데냐건 제노바건 거기서 거기니까. 

하지만 해전은 사뭇 이야기가 달라진다. 

비록 베네치아와 지중해 패권을 두고 경쟁하던 과거의 영광이야 온데간데없어도 그 해양 전통이 어디 가는 건 아닌 법. 

천년에 걸친 해양 전통으로 다져진 소수정예의 제노바 해군과 혁명 이래로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이 된 프랑스 해군이 더해진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조국 영국은 대서양이면 모를까 지중해에선 이제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려야 하는 처지인데 이대로 가면 제노바에서 지중해 각지에 설치한 무역상회나 자산들이 모조리 저 폭도들 손에 넘어갈 판이니 원. 

'···아니, 아니지. 그 귀한 보석들을 왜 저 폭도들 손에 그냥 내준단 말인가?' 

그들이 먼저 저 제노바의 해외자산들을 일제히 습격하여 탈취하면 되는 건데. 

혁명을 핑계 삼으면 신성동맹의 일원으로서 적들의 전쟁 수행을 훼방 넣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을 것이고, 아예 점령하기엔 눈치가 보인다면 제노바 망명정부라는 괴뢰를 내세우면 된다. 

그의 조국 영국과 협력한다면 중간에 새는 두캇 한 푼 없이 정말로 깡그리 회수할 수 있을 터. 

"좋아. 본격적인 전쟁까진 아직 시간이 좀 있을 테니 슬슬 준비해놔야겠군." 

아무렴 개전과 동시에 습격해야 명분도 살고, 아직 준비도 안 된 제노바 수비대가 적 함대인지조차 모르고 입항시켰다가 홀라당 항구를 내주지 않겠는가? 

프랑스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자란 영국인 존 액튼은 누구보다 앵글로·색슨다운 사나이였다. 

이튿날, 나폴리 왕국은 신성동맹의 일원으로서 로마 공화국을 사칭하는 무뢰배들의 선전포고문을 전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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