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하여간 저 양반도 아주 멍청이는 아니란 말이야.
"-하여! 제노바의 자유로운 시민들과 위대한 선조들을 대표하여 역사적인 재통일 전쟁을 선포하는 바요!"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보라색 토가까지 걸친 채 이 도시 공화국의 아마도 유일무이할 광장에서 있는 대로 청중을 끌어모아 놓고 통일전쟁 개전사를 늘어놓고 있는 것 보면 쇼맨십도 제법이고.
어차피 이제 와서 뭉개기엔 글러 먹은 거 같고, 그렇다고 대립각을 세우면 폭주하는 민심에 등 떠밀려서 날아가 버릴 것 같으니까 곧장 집단광기에 올라타서 본인이 가장 극단으로 달려버리는 거 보면 보통은 아니다.
결국 이렇게 제노바에서 노빠꾸로 꼬라박으면 선거철이 겹친 프랑스로서는 전면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혹시 우물쭈물하다가 전권대사로 파견된 로베스피에르 일가가 신성동맹에 인질로 잡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대참사고.
어느 쪽이건 도제 본인의 권력과 지위를 지키는 데에는 하등 문제가 없다.
졸지에 프랑스와 스위스를 제외한 인접국 전체를 대상으로 한 무차별 선전포고로 이탈리아 반도의 무림 공적으로 떠오른 제노바 시민들이 진짜 문제지.
[뭐, 그렇다고 저 도제 양반이 얌전히 있는다고 신사적으로 흘러갔을 리도 없잖은가.]
그거야 그렇긴 하지.
이미 통일 뽕이 치사량으로 차오른 얼뜨기 혁명가들이 옆에서 얌전히 있으라 한다고 얌전히 있었을 리도 없고, 지금처럼 도제가 노빠꾸로 달리지 않았으면 결국 도제가 실각하고 진또배기 혁명 정치동아리가 집권했을 거다.
그럼 그다음 어떤 사달이 나게 될지야 불 보듯 뻔하다.
지난날 파리처럼 자연국경선 타령은 기본일거고, 어쩌면 코르시카 영유권을 재주장하면서 물주 프랑스에까지 송곳니를 박아넣으려고 들었을 수도 있다.
그 결과 아군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고립무원에서 턱없이 모자란 체급을 쥐어짜다가 무참히 패망하는 건 물론일 테고.
아마 저 도제나 그 지지자들은 그렇게 되는 것보다는 본인들이 미친 척 가장하면서 광기 속에서 최소한의 합리성과 실리를 지키는 게 낫다-라고 판단한 거겠지.
"가자, 전장으로! 군신 마르스께서 로마인의 피를 갈망하시도다!"
"혁명정신으로 무장한 시민군은 실제 무적이며, 이는 마키아벨리의 저서로 증명 가능하다!"
"크흑, 우리는 도제의 혁명정신에 대해서 너무나도 얕잡아보고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위대하십니다, 위원장 동지!"
"붉은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곧 물고기가 물을 만나고 페가수스가 날개를 달은 격이 아니겠는가!"
"Deus Vult! 신께서 로마 공화국의 부활을 원하시도다!"
결과, 이 멋들어진 개전사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
치사량까지 차오른 로마 뽕에 간혹 앞뒤 분간 못하고 헛소리 늘어놓는 놈들도 간혹 보이긴 하지만 이거야 프랑스에서도 별 다를 바는 없었으니 넘어가고.
솔직히 쇼맨십이면 모를까 선동가로서 연설 내용 자체는 그냥저냥 평이했다고 보는데, 다들 연설보다는 로마 재건을 위한 통일전쟁 개막이라는 상황 그 자체에 취했지 싶다.
아무렴 저 도제일가까지 찬성표를 던진 이상 이제 남은 건 진짜로 로마 재건을 위해 수구반동들과 맞서 싸우는 것만 남은 셈인데 연설이 아니라 사무적인 선전포고만 있었어도 다들 뽕만으로 한 끼 정도는 굶어도 거뜬히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이제 또 막상 전쟁이 시작되고 신성동맹의 물량에 밀리기 시작하면 슬슬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하겠지만, 그때부터는 우리 프랑스의 30만 대군이 북이탈리아 반도로 쏟아져 들어올 테니 오히려 헛바람이 들지도 모르는 일이지.
모쪼록 이번 이탈리아 혁명이 끝날 때까지 저 도제란 양반과 그 일족이 괜히 헛바람 안 들고 제정신 붙들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불멸의 로마! 로마 공화국 만세! 로마 원로원과 인민들을 위하여!!!"""
천지를 쩌렁쩌렁 울리는 함성소리.
사방에서 꽃다발이며 월계관이며 온갖 귀하고 화려한 것들이 상석에 선 도제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곧 이날 개전사에 대한 제노바 시민들의 대답이었고, 나아가 본격적인 혁명의 서막이었다.
그야 프랑스의 전권대사로서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는 나도 피가 끓어오를 지경인데 당사자들의 흥분이야 두말해 무엇할까.
저 광기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랄 이 열광적인 호응이야말로 새로운 독재관의 탄생을 축복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세례성사일진대.
이제 이 혁명 공화국에선 저 도제의 말이야말로 곧 법이고, 다시 혁명이라는 가치를 훼손하는 순간 설령 독재관이라고 할지라도 살아나가지 못 하리라.
"경하드립니다."
광란의 취임식을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온 도제에게 태연하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까.
이쪽을 바라보는 장 카를로의 눈빛에는 원망과 증오가 서려 있었다.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인민의 영도자로 다시 태어나셨군요. 도제가 아닌 국민공회의 위원장으로 거듭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래서, 이제 만족하시오?"
"아뇨, 이탈리아의 혁명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잖습니까. 혁명을 완성하기 전에는 당연히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지요."
"개자식."
슬슬 말에 독기가 서렸군.
교섭의 여지도 뭣도 없는 미치광이라고 생각했나 보지?
"그러니 이제 그만 동포들을 용서해주시지요."
"내게 더는 동포 따윈 없소."
"아뇨, 공화명가들이 있잖습니까. 지난 수 세기간 이 자그마한 도시국가를 다스려온 실세들 말입니다."
그럼 슬슬 선물을 드려야지.
모름지기 동물을 조련하는 건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가면서 해야지, 너무 채찍만 휘두르거나 당근만 줬다가는 주인을 물게 되는 법이니.
"물론 누구를 풀어줄지, 풀어준 다음 어떤 자리에 앉힐지야 당신의 자유입니다. 당연하지만 설령 풀어주지 않는다고 한들 불평 한마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들을 사면하는 데에 당신의 이름을 팔게 해주겠다는 말이오?"
역시 보통은 아니시군.
직접 말로 해준 것도 아닌데 뉘앙스로 요점을 잡아내는 게 확실히 하루 이틀 복마전에서 구른 건 아니다.
"그거야 위원장 동지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여기서 그렇다고 답하면 이건 부추긴 게 아니라 강요가 되어버리니까.
나도 나중에 문제가 터졌을 때 빠져나갈 구멍 하나쯤은 남겨둬야 하는 거고.
무턱대고 나만 믿으라고 들이미는 것보단 저 닳고 닳은 공화귀족에겐 오히려 이렇게 적당히 치사해 보이는 게 더 신뢰감을 줄 수 있을 거다.
"다만-그렇군요.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해보자면, 혁명 공화국의 생존을 위해서건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건 이제 그만 다른 사소한 문제일랑 뒤로 미뤄두고 총력전에 집중해야 할 차례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총력전이라."
"예에, 총력전이지요. 물론 우리 프랑스 또한 이탈리아의 혁명동지들을 위하여 후원을 아끼지 않겠지만, 객관적으로 현 제노바가 신성동맹을 당해낼 수 없는 것도 사실이잖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다른 문제들보단 전쟁을 우선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한마디로 엥간한 조치는 혁명의 성공과 공화국의 생존을 위한 비상조치라는 핑계로 구렁이 담 넘듯이 피할 수 있도록 묵인하거나 돕겠다는 것.
그제야 도제의 눈동자에 서린 증오와 원망이 조금이나마 가셨다.
닳고 닳은 공화귀족이니 이 핑계로 뭘 할 수 있을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정도야 머릿속에서 딱딱 가이드라인이 나왔겠지.
그 정도도 못했으면 애초에 친위쿠데타고 나발이고 도제가 될 수도 없었을 테니.
"그렇지. 당장 로마 공화정 시절에도 전쟁에 나선 독재관은 예외로 쳐줬건만 그로부터 천년하고도 수백 년이 더 지난 오늘날 그보다 융통성 없게 굴어서야 되겠습니까."
어이쿠, 이제는 존댓말까지 돌아오셨네.
언제 히스테리를 냈냐는 듯이 영업용 미소를 장착한 도제는 변함없이 초췌해 보였으나 그의 눈동자에는 탐욕과 야심이 서려 있었다.
"그럼 저는 프랑스만 믿고 있겠습니다. 하루빨리 원병을 보내주시길 고대하고 있지요."
"아, 그거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때 외교선박에 같이 타 있던 제 호위 무관이 앙드레 마세나 사령관이었으니까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세나는 하선하지 않고 그대로 마르세유로 돌아갔다.
아무리 그래도 방면군 사령관씩이나 되는 친구가 간다는 이야기도 없이 이웃 나라에 상륙했다간 무력 시위라는 수준이 아니니까.
물론 프랑스군 마르세유 방면군 사령관이 제노바까지 왔다 갔다는 걸 신성동맹에서도 모를 리가 없으니, 이미 여기까지만 해도 런던이나 빈의 호사가들 사이에선 북이탈리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중대한 무력 시위-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대고 있을 거다.
설마하니 이쪽에서 먼저 미친 척하고 전방위 선전포고를 날릴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겠지만.
"이제 우리 마세나 사령관도 마르세유에 도착했을 테니 우리 프랑스군이 피에몬테를 휩쓸고 이곳 제노바까지 당도하는 데 기껏해야 보름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아니면 그보다 더 짧을 수도 있고요."
"·········."
도제는 대꾸하지 않았다.
언제 탐욕과 야심을 내비쳤냐는 듯이 또 침울해져서 축 늘어진 어깨로 터덜터덜 관저로 돌아갔을 뿐.
하여간 감정변화 한번 활발한 친구일세.
[저도 모르는 사이에 코앞까지 방면군 사령관이 왔다 갔다는데 안 그러게 생겼나.]
뭐,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S.P.Q.R.에만 한눈 팔린 나머지 진짜 위험인물을 놓치고 말았으니 정치가로서 자기혐오가 스멀스멀 올라와도 이상할 게 없다.
무엇보다 내 손아귀에 놀아난 격이라는 걸 슬슬 눈치챘을 테고.
보자, 이렇게 한 두 번 정도 더 놀려주면 얌전히 포기하고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려나?
[역시 자네가 사라진 건 자네 조국의 홍복이야.]
그리고 개막장유사국가 혁명 프랑스의 홍복이지.
서로 득 본 거로 퉁치자고 안 했던가?
"이야기는 끝나셨습니까?"
때마침 저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도중에 마르세유로 돌아간 마세나를 대신해서 이번 내 전권대사 임기 동안 날 호위하고 국방무관으로서 복무하기로 한 친구였다.
"그래, 보초 서느라 수고 많았네. 오늘 나 때문에 종일 앉지도 못하고 고생이군."
"아닙니다. 이게 제 일인걸요."
씩씩한 대답이로군.
그래서 이름이-뭐였더라.
[장 란이라고 했었지, 아마.]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어째 프랑스인이라기보다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라고 해도 믿을 이름이라 해놓고서 또 까먹고 있었네.
군인치고는 키가 작은 친구라 괜찮을까 싶긴 한데, 마세나가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극찬을 했으니 믿어봐야지.
애초에 우리가 키 작은 거로 남을 흉볼 처지도 아니고.
[커흠!]
"그래서, 자네가 보기엔 어떻게 보였는가?"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제노바군 말일세. 직접 싸우는 걸 본 건 아니지만 군인으로서 느낀 게 있을 것 아닌가. 그걸 가감 없이 말해주게."
"···군인으로서, 말씀이십니까?"
장 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솔직하게 부탁하네."
"딱 집 지키는 거위들입니다."
···여기까지 솔직하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누가 마세나 밑에서 일하던 친구 아니랄까 봐 진짜 노빠꾸네.
"···혹시 또 제가 지나쳤습니까?"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장 란.
그래, 본인에게 문제가 있다는 건 알고 있으면 됐다.
알면 차차 고치면 되는 거지.
"아니, 아닐세. 애초에 내가 가감 없이 말하라고 했으니 누굴 탓할 일도 아니지. 그래, 이 제노바 하나나 간신히 지킬 군대라는 소리로군."
"예, 그렇습니다."
"···그게 끝인가?"
"···끝입니다만?"
단호하시구먼.
그렇지만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다.
일단 숫자가 너무 적다.
당장 제노바 도시의 인구가 9만 남짓으로 10만이 채 안 되고, 그 너머 농촌들까지 다 합해도 100만이 채 안 된다.
이웃 교황령이 190만 명, 베네치아가 그보다 조금 더 적고 사르데냐-피에몬테부터는 250만을 넘기기 시작하니 비교 자체가 안되지.
그나마 저번에 마세나가 털어먹었던 이웃 토스카나가 110만 명으로 엇비슷한 수준이고, 지도상으론 나오지도 않는 소국들을 제외하면 현 제노바는 이탈리아계 국가 중 최약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턱없이 모자란 체급에 해군까지 운영하기 시작하면 인력이 남아나지 않는 것도 당연하긴 한데-.
"그럼 가용인력을 두 배로 늘리면 되는 거지."
"예?"
"아니, 잠시 총력전의 의미를 되새겨봤을 뿐이네."
유럽에서 정말로 전쟁 한 번에 나라가 망하고 흥하게 된 건 프랑스 혁명 이후라고 했던가?
당장 저번에 카우니츠도 내게 전쟁 한 번에 나라가 망하는 법이 어디 있냐고 항의했었고.
그렇다면 저 친구들에게 진짜 전쟁 맛을 보여줘야지.
왜 국민국가 간 전쟁에 붙은 이름이 하필이면 총력전인지도.
***
파리 조병창.
푸쉬익-.
"···나 참."
그때만 해도 이런 여유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는데.
힘차게 돌아가는 증기기관과 일사불란하게 망치질하는 노동자들을 돌아보며 라자르 카르노는 즐거이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이라도 더 생산성을 늘려야 한다, 규격화만이 혁명이 살아남는 길이다, 공장식 노동이야말로 공화국을 구할 산업현장에서의 혁명이다.
로베스피에르와 처음 그리 떠들던 시절만 해도 당연히 전 유럽에서 수구반동들이 침략해오고 아직 어린아이나 늙은이들까지 남김없이 징병하여 무장시키는 극단적인 상황을 생각했지.
지금처럼 현역병들을 모조리 무장시키고도 총과 탄약이 남아서 이웃 혁명공화국들에게까지 전달할 여유가 생길 거라고는 누가 감히 짐작이나 했을까.
당장 그 로베스피에르조차 그때만 해도 우리에겐 스키피오가 아니라 굼벵이 파비우스가 필요하다며 고개를 끄덕였었는데.
"스키피오가 아니라 카이사르가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나."
그리고 그때만 해도 프랑스의 카이사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요즈음 들어서는 이따금 저 로베스피에르야말로 카이사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그들 프랑스는 멈출 때를 놓치고 끝도 없이 폭주하게 되었을 테니까.
카이사르의 군재를 더욱 높이 칠 것이냐, 아니면 정치력을 더욱 높이 칠 거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겠으나 카르노는 그의 오랜 친우 또한 카이사르라 불릴 자격을 갖추었다고 자신했다.
똑똑.
"카르노 동지, 제노바와의 납품 계약이 성사되었다고 합니다."
"그래?"
당장 이 동지나 동무라는 칭호부터 그러했다.
처음에는 분명 급진당 내에서나 통용되는 존칭이었으나 어느샌가 혁명가라면 누구나 당연하다는 듯이 입에 달고 살게 되었고, 언젠가부터는 파리지앵들까지 서로를 동무나 동지라 구분 짓기 시작했다.
고작 그의 독재관 임기 2년 만에 각하니, 님이니 하는 권위를 상징하던 옛 시대의 존칭들이 너무도 자연스레 잊혀 가게 된 것이다.
이렇듯 오늘날 코뮌의 구석구석에 그의 세심한 배려와 영향력이 깃들어있거늘 어찌 경외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데도 혁명가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서 몸소 이탈리아 혁명의 복판으로 몸소 뛰어든 친우를 근심하고, 또한 마음 깊이 예찬하며 카르노는 계약서를 집어 들었고-.
"···이거 숫자가 잘못된 거 아닌가?"
"저도 그런 줄 알고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해봤지만, 정확하다고 합니다."
"그래···?"
이 정도 물량이면 현 제노바군을 모조리 프랑스제 무기로 무장 시키고도 또 그만큼이 더 남을 텐데.
물론 프랑스에서도 입 아프게 양질 전환을 떠들어대던 친구이니 가장 먼저 국민개병제 도입부터 부추겼을 테고, 지난날의 프랑스보다도 급박한 상황이니 그때 미처 실현에 옮기지 못했던 온갖 구상을 동원하고 있기야 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은 숫자가 아닐까, 싶었다.
뭐.
'그 친구가 주도한 일이니 또 뭔가 생각이 있겠지.'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호응이 기대 이상으로 폭발적이라 사방에서 의용군이 모여들고 있다던가, 아니면 제노바 시민들이 지난날 파리처럼 우국충정에 불타오르고 있다던가.
여하간 이만한 물량이 필요할 이유라면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쾅.
카르노는 여느 때처럼 친구를 믿고 도장을 찍었다.
붉은 리슐리외가 아녀자들까지 무장 시키고 사업장에 투입하도록 부추기고 있다는 소식에 목덜미를 부여잡기 전 평화로운 나날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