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제노바 시.
"각하, 적어도 오늘까지는 안정을 취하심이-."
"어림도 없네."
퉷.
붕대를 칭칭 감은 장 란이 입안 가득히 차오른 피가래를 뱉으며 병상에서 일어났다.
"내 총이 안 보이는군. 가져오게."
"···관통상이었습니다, 각하."
군의관이 덜덜 떨며 대꾸했다.
"그것도 목을 관통당하셨었지요. 실로 성모의 은총으로 급소는 피하셨으나, 천계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오셨습니다."
"그랬었나?"
"예. 다행히 짓밟히시지는 않았으나 그 밖에도 엉덩이와 허벅지에 총상을 입으셨고, 오른쪽 어깨를 총검에 찔리셨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렇게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기적입니다."
"우리 프랑스의 척탄병이라면 당연한 일이지."
용맹하다 못해 한 줌의 인간미조차 느껴지지 않는 발언.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양 붕대로 칭칭 감은 제 목을 만지작거리는 장 란을 군의가 질겁하며 도로 병상에 눕혔다.
"안정을 취하셔야만 합니다, 각하. 봉합은 했으나 상처가 완전히 아물려면 보름은 더 기다리셔야 할 것이고, 활동이 가능해지려면 1달은 더 안정을 취하셔야만 합니다."
"그럼 난 도대체 언제 전공을 세우라는 말인가?"
한데 외려 장 란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분명 고통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창백하게 질린 낯이나, 쉴 새 없이 흐르는 식은땀이 그의 몸이 아직 성치 않다는 걸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난 본디 척탄병이었네."
하지만, 장 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또다시 병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 이 프랑스의 척탄병은 고통 따윈 느끼지 않는다네."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진짜로 죽는다니까요!"
"진정한 척탄병이라면 죽음보다도 불명예를 두려워하는 법이지."
"아니 진짜···!"
미치겠네.
마치 사람이 아니라 벽과 대화하는 듯한 답답함에 군의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그의 눈앞에 있는 상대가 엄연히 상관이고, 전임 독재관과도 안면을 튼 사이라는 것조차 까마득히 잊을 만큼 이 꼴 마초 냄새 풀풀 풍기는 척탄병과는 도저히 더 대화를 주고받을 자신이 없었다.
도대체가 척탄병이라는 족속들은 온통 마초이즘에 쩔은 전쟁하는 기계들 뿐이란 말인가?
사실 귀신 잡는 척탄병이 아니라 군의 잡는 척탄병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던 찰나.
"그럼 수고했네."
"아-."
툭.
장 란은 말릴 새도 없이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 제 총과 옷을 챙기고는 전장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채로, 이따금 휘청거리면서도.
"···뛰고 있네."
최전선에서 총검 돌격을 독려하다가 목에 관통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조금 전 깨어난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게 어떻게 인간이라는 말인가?
그간 군의로 복무하면서 평범한 인간의 생명력을 뛰어넘은 기인들을 몇이고 봐오긴 했으나, 그런 경우에는 보통 체급부터가 남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장 란은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체구는 군인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왜소했으며, 남다른 생명력이나 재생력을 보여준 것도 아니었다.
고로, 지금 저 산송장을 움직이고 있는 건 그냥 순수한 정신력이었다.
용기라기보다도 귀기(鬼氣)에 가까운 영역의 정신력.
"난 몰라."
적어도 군의 도미니크의 의학 상식 내에서 저 괴물 딱지를 설명하기란 불가능했다.
정말로 본인 말마따나 척탄병 혼이라는 게 있는 건지, 혈관에 피 대신 마초이즘이 흘러서 엥간한 부상 따윈 가뿐하게 넘어갈 수 있는 건지야 모르겠지만-.
저대로 죽으면 최소한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께서 그를 탓하진 않으리라.
이 세상엔 죽어야지만 세상의 이치에 맞는 환자들도 있는 법이니.
***
"부끄럽게도 병상에 누워 며칠씩 호위 임무를 내팽개치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닐세. 목에 관통상까지 입었던 친구가 임무를 내팽개치긴 뭘 내팽개쳤다는 말인가? 이게 전부 자네 덕분이야."
그보다 이놈 어떻게 아직 살아있는 거야.
몰라 뭐야 무서워.
분명 내 눈으로 총알이 얘 목을 관통하고 총검에 찔리는 걸 똑똑히 봤는데 뭘 어떻게 벌써 정신을 차려서 병상을 기어 나온 건데.
군의는 도대체 뭘 한 거야?
[말린다고 얌전히 있었겠나?]
아, 하기야 그렇네.
내 옆에서 호위 무관 노릇할 때만 해도 평범하고 얌전하던 친구가 갑자기 전투가 시작되니까 본인은 졸병에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이라고 척탄병 혼 운운하면서 막 최전선으로 달려 나가는데 진짜 미친놈인 줄 알았다.
솔직히 전향했다고 각서까지 썼다지만 저 공화 귀족들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해서 나중에는 내 호위보단 외국인 의용군들을 이끄는 소방수 부대 노릇이나 하라고 했더니 그야말로 단두대가 피를 만난 격.
말도 제대로 통하진 않았지만 나름 어디 가서 연대장 정도는 가볍게 할 양반이 몸소 말에서 내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최전선에서 총검을 휘둘러대니 비로소 길이 열렸다.
숫자만 잔뜩 끌어모은 시민군의 한계상 한번 기세에서 밀리면 와르르 무너졌을 테니 지난번 제노바 공성전의 일등 공신은 단연 장 란과 그가 이끌던 의용부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저거 사람 맞나?]
저도 몰루게쓰요.
뮈라처럼 막 사람을 주먹질 한방에 기절시키고 창을 휘둘러서 창째로 사람을 갈라버리고 뭐 이런 인간병기는 아니었지만, 저 작은 체구로 그렇게 두들겨 맞았는데도 어떻게 아직 살아있는거지, 싶었다.
또 그렇게 피를 흘리면서도 멀쩡히 상황판단까지 하면서 우왕좌왕하는 시민군들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고 지시까지 내리고 다녔으니 뭐.
심지어는 마지막에 목에 관통상을 입어서 쓰러질 때도 그 자리에서 세 걸음을 더 걸으며 자기가 쓰러지고 난 다음에 누가 지휘할지 어떻게 지휘할지 인수인계까지 끝마치고 졸도했다.
[아니 뭐, 오컬트도 있는 마당에 초능력자가 없으라는 법은 없다지만···으음.]
그래, 이건 본인이 초능력이라고 해명해도 진짜 인정한다.
이 정도면 뮈라나 나폴레옹과는 또 다른 방향성의 기인이다.
마세나가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추켜세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건 사나이가 아니라 인류를 멸망시키려 미래에서 날아온 전쟁 기계잖아.
뭔 전직 캘리포니아 주지사야?
"···그래서 전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역시 이게 본론이었구만.
조금 전 미안하다고 사죄할 때는 무뚝뚝하고 사무적이었는데 지금은 또 며칠 전 보여줬던 전쟁 기계 모드로 돌아갔다.
그래, 졸도할 때도 너무나 원통한 나머지 눈조차 감지 못했으니 그럴 줄 알았다.
솔직히 다들 그때 눈 감겨주면서도 애통해하고 통곡했는데 미약하게나마 숨이 붙어있는 걸 눈치채고 얼마나 기겁했었는지.
"우리가 이겼네."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저승에서 돌아온 산송장이 이승을 배회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눕히려 들었을 테니 우리까지 따라 할 필요는 없겠지.
"자네가 일등 공신이야. 목에 관통상을 입으면서까지 적 전열에 구멍을 제대로 뚫어놨으니 일등 공신이고 말고. 비록 기병이 모자라서 적들을 완전히 섬멸하지는 못했지만, 이것만 해도 어디인가. 다 자네 덕-."
"그렇다면 지금 당장 토스카나로 진공하여 조금이라도 해방구를 늘려야만 합니다."
···이 전쟁하는 기계 놈이 또.
아니 지금 당신 목에 관통상 당한 환자래도?
뭔 말 하는지야 알겠는데 당신은 이제부터 또 누워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니까?
"토스카나라면 이미 마세나 사령관께 몇차례 습격당했던 전적이 있으니 지금쯤 방어가 대단히 헐거울 겁니다. 얼마 전 포위전에서 등장한 적 병력을 보아하건대 신성동맹 측에서는 제노바를 해상봉쇄로 말려 죽이려 했던 모양이니 따로 증원이 오지도 않았을 거고요."
"이보게."
"이 승기를 절대로 놓치셔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수비대를 모조리 차출한 결과 제노바를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이봐."
"예, 위원장 동지."
척.
거 부동자세 한번 신속정확하구만.
그래도 폭주하는 와중에도 상관이 강하게 제지하면 듣기야 하네.
이런 거 보면 군인정신 하나는 똑바로 박힌 친구인데, 자꾸 전쟁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완전히 까뒤집혀서 미래에서 날아온 전쟁 기계가 되어버린다는 말이야.
"안 그래도 이미 토스카나로 혁명군이 진공하는 와중일세."
그래서 점령-장 란의 표현에 따르자면 해방까지 가능할지야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일단 저번에 마세나가 한번 거하게 노략질하기도 했던 만큼 그리 어려울 건 없을 거다.
신성동맹군은 개전 전부터 프랑스군의 남하를 견제하느라 알프스산맥 쪽에 주력군이나 예비대를 올인했으니 빈집 털이가 따로 없지.
물론 적 예비대가 본격적으로 투입되면 저 급조된 혁명군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겠지만, 그 경우 알프스 방면에서 마세나의 본대가 받게 되는 저항이 그만큼 줄어들 테니 대전략 측면에서 보면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어차피 아군의 관점에서 보건 적군의 관점에서 보건 이 자칭 로마군 자체가 계산에 없던 존재니까.
이를 어떻게 굴리건 너무 무모하게 나서지만 않으면 무조건 아군에게 득으로 돌아오는 꽃놀이패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자네는 이만 쉬면서 몸부터 회복시키고 있게. 지금 무리하다가 나중에 자네의 힘이 정말로 필요할 때 옴짝달싹도 못 하면 그거야말로 낭패 아닌가."
"···혹시 지금 당장 저를 토스카나로 보내주시면."
"안된다는 걸 뻔히 알만한 친구가 왜 자꾸 이러나?"
마세나가 추천해준 사람치고는 정상적이라고 생각했던 내 첫인상 돌려줘.
정상적이긴 개뿔이.
그냥 호전광이라는 수준도 아니잖아 이거.
"이만 쉬게. 이는 명령일세."
장 란은 그제야 아쉬운 티를 팍팍 내면서도 병상으로 돌아갔다.
저거 명령이라고까지 강하게 말해두지 않았으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채로 토스카나까지 달려갔겠지?
[그야 뻔할 뻔 자 아니겠나.]
어휴.
분명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미치광이까진 아닌데, 사고회로 자체가 좀 극단적으로 치우친 모양새다.
단순히 용맹하다는 수준을 뛰어넘어서 본인의 목숨이 계산서에 빠진 인간상이라고 해야 하나.
또 막상 지휘할 때는 아주 기똥찬거 보면 머리가 안 돌아가는 친구는 아닌데 왜 저러나 몰라.
[···그, 아니다.]
어허, 이놈이 누굴 동류로 취급하려고.
난 내 목숨 아니니까 막 굴리는 거고 저놈은 하나뿐인 자기 목숨을 막 굴리는 거잖아.
그게 어떻게 같냐.
[어? 잠깐만.]
톡톡.
"저기 위원장 동지."
때마침 연락 담당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상념을 깨웠다.
그보다 이제 위원장 아니래도 다들 계속 위원장이라고 부르네.
"혹시 바쁘십니까?"
"아뇨, 문제없습니다. 무슨 일 있나요?"
"이번에 회의에서 고대 로마 시절처럼 둔전을 재건하자는 안이 나왔는데, 이를 두고 위원장 동지의 조언을 구하고 싶다는 모양입니다."
"제 조언이라고요?"
뭐 못해 줄 건 없지만.
"한번 구경이나 해봅시다."
혁명동지들을 위해서라면 이정도야 얼마든-아니 잠깐 첫 장부터 이게 뭐야.
"? 무슨 문제라도?"
"···저기, 이래서야 장차 제노바계가 이탈리아의 모든 토지를 소유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장차 가장 많은 피를 흘릴 곳도, 혁명이 시작된 곳도 이 제노바니 당연한 일이지요."
오우, 피콜로 더듬이 빠는 소리 좀 작작 해주시고요.
이제 막 첫 지역을 해방하네 마네하는 판국에 벌써 둔전을 핑계 삼은 식민지 토지개혁이라니 제정신인가.
[뭐, 로마답다면 로마답군.]
해방구를 다짜고짜 식민지로 삼으려 드는 게 퍽이나.
하여간 혁명에 편승한 도제 아니시랄까 봐 이 양반이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아주 염병을 떠시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슬쩍 한 손을 들어 올려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장차 혁명전쟁에서 제노바계가 가장 많은 피를 흘릴 거라고요?"
"그렇다면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지요. 우리 프랑스가 있는데 왜 제노바인들이 가장 많은 피를 흘린다는 말입니까?"
"···아."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
하여간 혁명동아리 아니랄까 봐 이놈들은 또 이놈들대로 현실감각이 빠졌구먼.
"그런 식으로 계산하면 우리 프랑스군이 장차 우방의 수호와 혁명전파를 위하여 이탈리아반도 전역에 둔전을 설치해도 아무 문제 없겠군요."
"아니, 그."
"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직 제노바는 로마가 아닙니다. 로마와 그 동맹 시들이라는 관점으로 정책을 펼치시겠다면, 우리도 파리와 그 동맹시들이라는 관점으로 새로운 정책을 펼치겠습니다."
그러니까 기껏 여기까지 잘 와놓고서 우리 식민지나 보호국 되고 싶지 않다면.
"누구를 위한 혁명인지 제발 잊지 마십시오."
연락 담당과 똑바로 두 눈을 마주쳤다.
"제노바인들이 로마의 후예라면 저들 또한 로마의 후예입니다. 물론 우리 프랑스도 넓게 보면 로마의 후예지요."
"·········."
"아닙니까?"
끄덕.
그제야 연락관이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동공이 요리조리 흔들리고 식은땀이 비 오는 듯이 흐르는 게 마치 생명의 위협이라도 느낀 듯했다.
턱.
"모쪼록, 이탈리아인들의 혁명에 우리 프랑스인의 피가 더욱 많이 흐르도록 두지 마십시오."
긴장을 풀라는 의미에서 어깨에 손을 얹고 나지막이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서야 이게 누굴 위한 혁명인지 혼란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조언은 그거면 족했다.
털썩.
마침내 긴장이 풀렸는지, 연락관은 실이 끊긴 인형처럼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
마담 데물랭의 카페.
"대립교황."
자크 루 신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흥미 없으시오?"
"없을 리가 없지."
댕그랑.
프로방스 백작이 커피보다도 많은 설탕을 넣고 휘휘 저으며 대꾸했다.
요즈음 폭발적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는 그의 살집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쉬이 짐작게 하는 끔찍한 식습관이었다.
"어차피 현 교황 비오 6세와 화해하기란 이제 와선 불가능하네. 가톨릭 교회와 화해하는 건 가능해도 교황과 화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면 당연히 교황을 갈아치우는 수밖에."
"수구반동치고는 혁명적인 고견이구려."
"우리 왕가에서 교황 갈아치워 본 게 어디 한두 번인 줄 아는가?"
"하기야 그렇군. 수구반동다운 몰지각한 음모였소."
"어이쿠야."
장난스러운 대화였다.
만일 이들 사이에 법통파라는 끈이 없었더라면.
독재관 로베스피에르가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가볍고, 유쾌한 문답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대체 무슨 핑계를 내세우실 텐가?"
호록.
프로방스 백작이 설탕 탓에 걸쭉해진 커피를 들이켰다.
"아무런 핑계도 없이 교황을 갈아치울 수야 없을 텐데."
"탐욕."
쿵.
자크 루가 탁상을 가볍게 내리쳤다.
"도대체 하느님을 섬겨야 할 교회가 언제부터 사치와 향락의 온상이 되었다는 말이오."
"마치 위그노들 같은 말을 하는군."
"부정하지는 않겠소."
본래 종교개혁의 시작점은 그거였으니까.
결과물이 탐욕에 미친 해적, 수전노 듀오와 전쟁에 미친 나라를 가진 군대라서 그렇지.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작금의 교황령을 보시거든 뭐라고 하실지도 아실 텐데."
"그야 당연히 채찍을 휘두르시겠지."
프로방스 백작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 성심당과 협력하여 가톨릭 코뮌 운동으로 교황청의 타락상을 비판하겠다, 거기까지가 끝인가?"
"오, 그럴 리가 없지."
탁.
자크 루가 설탕 한 줌 들어가지 않은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이 커피 원두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소?"
"생도맹그···에서는 더는 재배하지 않을테고. 그럼 스페인 아닌가? 보다 정확하게는 스페인령 식민지들이겠지만."
"바로 그렇소. 라틴 아메리카요."
갑자기 왜 이런 소리가 튀어나오는 거지.
뜬구름을 잡는 듯 난해한 문답에 프로방스 백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가톨릭 교회와 커피와 라틴 아메리카를 연결 짓다가-.
"아."
예수회.
대항종교운동의 선봉장이자 인디오들의 보호자.
허나 그 공격적인 활동 탓에 세속군주들의 미움을 사 20년도 전에 교황 클레멘스 14세에 의해 해산되어 현재는 음지를 전전하거나 동유럽에서나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으니.
복권과 재건을 미끼삼아 그 잔당을 끌어들인다면-.
그제야 프로방스 백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아주 질색팔색을 하겠군."
"하지만 지지자들은 기뻐서 미치겠지."
"그것도 맞는 말이고."
아무렴 혁명이란 게 언제나 그런 법 아니겠는가.
자고로 혁명가란 인종은 반대자들의 극렬한 거부반응이 아닌 지지자들의 광신적인 찬동에 주목해야 하는 법.
쨍.
마침내 합의점을 발견한 두 사람은 말없이 잔을 부딪쳤다.
그들의 독재관이 그토록 강조해왔던 정반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