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열정리
나폴리 왕국.
"어림도 없네."
"하오나 폐하."
"내 안된다고 했을 터인데."
페르디난도 4세가 총리 존 액튼을 빤히 노려보았다.
"이보게, 경."
"예, 폐하."
"내가 바보인 줄 아는가? 도대체 이 세상에 군대에 가고 싶어 하는 농노가 어디 있으며, 한창 농노를 바삐 놀려야 할 시기에 그리 쉬이 일손을 내줄 지주는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차라리 증세하여 용병을 한 사람이라도 더 고용하면 될 일이지, 징병령은 결단코 불가하네."
타당한 지적이었다.
오늘날 남이탈리아의 턱없이 모자란 도시화.
그리고 이로 인한 봉건 지주제를 떠올려 보면 오히려 그동안 국정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던 국왕이 사실 누구보다 자국의 실상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그러니 여기까지였다면 존 액튼도 이 암군을 다시 보게 되었을 테지만-.
"하오나 폐하, 토스카나가 끝내 저 역도들의 손아귀에 넘어가고야 말았나이다. 이제 토스카나가 함락되었으니 그다음은 교황령일 것이고, 교황령마저 함락된다면 아국이 직접 저들을 맞이해야 할 터인데 미리 채비를 갖추어야 하지 않을는지요?"
"그거야 교황령까지 함락되고 난 다음에 생각하면 될 일이지."
"·········."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제 권력의 생리에 대해서만 밝을 뿐 앞날에 대한 고민이나 국가의 생존을 위한 비전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존 액튼은 새삼스레 눈앞의 상대가 나태왕 카를로스 4세의 친동생이 맞음을 재확신했다.
하기야 저러니까 옆에서 몇 마디 부추겼다고 곧장 영국-합스부르크와 손잡고 지중해의 패자가 되어보겠다는 야심에 불타오른 거겠지만.
"아무튼 징병령은 안되네."
하암-.
페르디난도 4세가 늘어지게 하품을 늘어놓았다.
"대신 징병령만 아니라면 내 너른 아량을 베풀어주지. 모름지기 군주가 전쟁에서 이기려면 용맹한 장군과 쓸모 있는 총신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 법. 내 총애를 배신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 보잘것없는 종을 폐하의 총신이라고 불러주시다니 이 지중해를 비추는 따스한 햇볕과도 같은 어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개자식.
하여간 이럴 때만 왕 노릇이지.
뿌득.
존 액튼은 남몰래 이를 갈았다.
"경은 본디 해군 장관이었잖은가."
이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페르디난도가 눈을 가늘게 치켜뜨기 시작했다.
"그럼 그 본분을 잊어서야 쓰나. 도대체 언제부터 경이 육전까지 근심하는 처지가 되었는가?"
"···송구하옵니다, 폐하."
"그걸 근심하는 건 국왕인 내 몫일세. 그리고 짐이 보기엔 아직 거기까지 급해 보이지도 않고, 무엇보다 우리에겐 합스부르크가 있잖은가."
쓱쓱.
암군이 보란 듯이 길게 자란 손톱을 갈며 쏘아붙였다.
"무엇을 근심하는지야 알겠으나, 경이 나설 차례는 아닐세. 이만 돌아가도록."
그걸로 끝이었다.
그 이후로 국왕이 따로 사람을 모아다가 무언가 대책을 논의했다던가, 아니면 본인이 직접 무언가 조치를 취했다든가 하는 소식은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존 액튼이 월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 같으니 한번 기강이나 잡았을 뿐.
국왕은 또다시 제 애첩들과 함께 흥청망청 하루하루를 지새우느라 바빴다.
"···미쳐버리겠군."
어휴.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그간 이용해 먹기 딱 좋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국왕의 성정이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을 줄이야.
도대체가 저 머저리는 저 자칭 로마 공화국이 토스카나 공국을 함락 시켰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건가?
제아무리 토스카나가 앞선 전쟁 당시 한번 습격당했었다지만 이리 쉽게 함락당했다는 건 현 합스부르크 군 주력은 온통 프랑스군의 남하에 맞서기 위하여 알프스 방면에 달려가 있다는 소리다.
한마디로 배후지는 텅텅 비어있고, 지금 저 폭도들이 이대로 남하하기 시작하면 내륙으로 이어진 교황령은 물론이고 나폴리까지 위험하니 하루빨리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온 간언이었건만.
그걸 또 감히 제 권력을 넘본다고 내쳐버렸으니.
지금쯤 합스부르크를 믿고 최소한의 수비대를 제외한 모든 병력을 서진시켰을 교황령과 베네치아를 생각하면 저절로 눈앞이 컴컴해졌다.
그조차 없이 봉건지주들의 사병과 한 줌 밖에 안되는 왕국군으로 어떻게든 저 자칭 로마군과 맞서야 할 나폴리 왕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숨조차 쉬기 버거워졌고.
'···본국에 한 번만 더 도움을 청해봐?'
레드코트가 투입된다면 저 머릿수만 많은 폭도쯤이야 쉬이 격퇴할 수 있지 않을까?
분명 타당한 생각이었으나, 이내 존 액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원병을 청한다고 모국에서 그리 쉽게 지상군을 보내줄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제 권력을 지키는 데만큼은 민감한 국왕이 존 액튼에게 지금보다 더한 권력과 기반을 약속할 영국군을 그리 쉬이 받아들일 리도 없고.
결국 어떻게든 지금 수중에 있는 걸로 저 폭도들을 맞이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빌어먹을, 대체 뭔 수로 육군을 해군으로 틀어막으라는 거야?"
설마하니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시칠리아에서 결사 항전할 작정도 아닐 테고.
저 국왕이라는 놈은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제 권력을 넘본다고 생각하니까 서열정리에 나선 것일 거라는 너무도 합당한 추론에 존 액튼은 홀로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차라리 이럴 거면 평소처럼 게으름이나 피울 것이지, 고용주 하나 잘못 만났다가 대체 이게 뭔 개고생인지 원.
결국 고민해봐도 별수 없다는 합리적인 결론에 그 또한 시에스타를 위하여 잠시 휴게실로 이동하던 찰나.
쾅!
"뭐, 뭐야?!"
갑자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급히 창가로 달려가 주위를 살피니 조금 전 그가 떠나온 왕궁에서 매연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지야 불 보듯 뻔했다.
"폐하! 폐하-!"
그다음부터는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충심인지, 아니면 이대로 고용주를 잃어서야 제 권세도 끝장이라는 알량한 야심이었는지도 모른 채 존 액튼은 왕궁에서 달려 나오는 시종들을 해치며 미친 사람처럼 폭심지를 향해 달려갔다.
다행히도 두 번째, 세 번째 폭음은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무능한 폭군에게 죽음을! 공화국에 영광 있으라! 혁명 만-!"
"입 닥쳐!"
"이 역도 놈이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퍽!
존 액튼이 현장에 도착했을 무렵 아마도 이번 암살모의의 주모자일 일당은 이미 호위대에 붙들려 구타당하고 있었다.
존 액튼 또한 한 번쯤 지나가듯이 마주쳤던 젊은이들이었다.
외국인인 그와는 썩 사이가 좋지 않아 교류가 있었던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귀족 집안의 자제들이었던 청년들이 이런 끔찍한 음모를 꾸미다니.
"폐하께서는 무사하신가!"
"···아, 총리 각하."
심문이라는 핑계로 감정적인 분풀이를 늘어놓던 호위대가 그제야 존 액튼을 발견하고 저 너머를 가리켰다.
"저쪽에 계십니다. 다행히 옥체는 건사하셨지만-."
"국왕 폐하!"
대화는 그거면 족했다.
그도 절 좋아하지도 않는 이들과 오랫동안 교류하는 취미도 없었거니와 지금은 조금이나마 저 옹졸한 고용주의 마음을 얻어두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아무렴 이렇게 한번은 얼굴을 비춰야 이번 음모에 무관하다는 걸 보여줄 수 있을 것 아닌가.
"오, 주여!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무사하시다니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폐하, 폐하!"
털썩.
하여 존 액튼은 바닥에 누운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국왕의 발치에 무릎 꿇었고.
"주, 죽여!"
"···예?"
"감히 저 무엄한 놈들이! 어찌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인을 해하려 들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추악한 악마 숭배자들 같으니라고! 죽여야 하네. 모조리 죽여야 해!"
횡설수설.
도저히 제정신이라고 보이지 않는 모습에 존 액튼이 다가가 그를 말리려 했다.
"폐하, 고정하소서."
"고정하다니, 고정하다니! 짐은 제정신이니라! 경은 내가 지금 미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아니옵니다. 절대 그렇지 않사옵니다."
만일 저들이 그냥 평범한 농노나 부르주아였다면 그도 구태여 국왕의 미움을 사며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작위가 낮다고 하나 귀족 자제를 재판도 없이 처형하는 법이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우선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공화폭동 따위에 찬동하는 이가 어찌 귀족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이 이탈리아에서는 제법 흔히 있는 일입니다만.
당장 그의 모국 영국도 공화파 귀족들이 왕모가지 자른 거나 다름없고.
이걸 새삼스레 지적해드려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저 악의 씨앗들을 모조리 뿌리 뽑아야 하네. 아니, 뿌리 뽑게! 지금 당장!"
왕권신수설이, 나아가 제 안위가 위험하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국왕이 선수를 쳤다.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나, 이럼 좋건 싫건 고용주의 의향대로 나라를 다스려야만 하는 존 액튼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그는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테러가 일어나지 않도록 신료들의 사상을 일괄적으로 검증하고, 나아가 더욱 삼엄하게 반정부 혁명가들을 단속해야만 했다.
물론, 적군의 남하에 대비한 용병고용과 요새선 구축은 그것대로 알아서 해내야 할 테고.
"니미(Bloody)···."
저도 모르게 모국의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어전이었으나, 다행히도 그를 책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나라의 총리가 영국인임에도 누구 한 사람 그 자리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이가 없었던 덕분이었다.
과연 그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존 액튼은 끝내 답할 수 없었다.
***
로마 공화국 제노바시.
"···적당히 좀 하십시오."
장 카를로 도제가 상석에 앉은 채 이쪽을 빤히 노려보았다.
"각하께서는 전권대사이지 우리 공화국의 감찰관이 아니시잖습니까. 의결에 관여하셔도 후일 외교 문제가 될 터인데 대체 무슨 자격으로 행정 집행 절차에까지 관여하려 하십니까."
"이탈리아 혁명을 위하여 달려온 혁명가로서."
뭘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이 맞받아쳤다.
"혁명의 기치와 대의를 흩트려놓는 혁명의 적에게 날 선 비판을 세웠을 뿐입니다."
"이는 중대한 내정간섭입니다."
"그렇다면 제게 정식으로 감투를 맡겨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기꺼이 아무런 사심 없이 이탈리아 혁명을 위하여 봉사해드리고 말고요."
"하, 리구리아어도 구사하실 줄 모르는 분께서 말씀이십니까?"
주제를 알라는 듯한 조소.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다들 좋아할 것 같은데요."
똑같은 눈빛을 담아 되받아쳐 주었다.
"우리 도제님보다 더."
침묵.
도제는 다만 눈살을 찌푸린 채 이쪽을 노려볼 뿐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내심 알고 있는 거겠지.
처음부터 혁명을 이용하려고 한 그와 혁명을 위하여 달려온 나.
점차 이 혁명이 본궤도에 오를수록 전자보다는 후자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는 거.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군요."
달리 말하여, 혁명에 제동을 걸려면 지금 밖에는 없다는 것.
딱.
도제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신호를 주자 사방에서 위병들이 방안으로 우르르-몰려들었다.
흠, 보자.
이놈도 바보는 아니니까 이제 와서 우릴 죽이거나 포로로 잡으려 들리는 없을 테고-.
"가택연금입니까?"
"아뇨, 외교관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히 하라는 완곡한 권고입니다."
도제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전권대사에게 타국의 부정부패를 수사하고 제멋대로 단죄할 감찰권이 있었는지 저로서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만일 이게 혁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외교법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저는 이를 구체제보다 더한 압제라고 부르겠습니다."
[오, 붉은 제국주의.]
시꺼.
"의결과 행정은 엄연히 아국의 주권과 직결된 사안입니다. 이번 사건은 우리 혁명정부에서 어련히 수사하고 단죄해야 할 일이지, 대사님께서 월권을 행사하실 일이 아니었습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군.
그 속내가 너무 뻔히 보여서 그렇지.
결국 우린 사보타주한 적도 없고, 토스카나의 농민들에게 돌아가야 했을 둔전을 중간에서 가로챈 건 어디까지나 그놈들이 부정을 저지른 거라는 논리인데-.
[차라리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지 뭔 헛소리를.]
누가 아니래.
물론 저놈들도 처음 혁명하는 거니까 중간에 진빠가 생길 수도 있지.
꼭 저 토지 문제가 아니라도 현지 보급을 위해 혁명군이 약탈을 벌인다던가 제 육욕을 채운다든가 하는 식의 사건·사고들이야 하나하나 헤아리는 것조차 불가능할 거다.
하지만.
"그렇다면 앞서 파리에서 그러했듯이 머지않아 로마 공화국에서도 군무감찰위원회가 설치되어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에 기초한 자정 조치가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해보아도 되겠습니까?"
그걸 시정조차 안 하는 건 다른 문제지.
무엇보다 병사 개개인의 일탈은 그들을 단죄하고 끝낼 개인의 죄지만, 구체제를 상징하는 공화귀족들이 부정부패를 핑계 삼아 부의 원천인 토지를 도둑질하려 했다는 건 혁명 그 자체의 성격을 뒤틀고도 남을 중대한 결점이다.
왕실이 존재하지 않는 중세 공화국에선 결국 저들이야말로 앙시앵 레짐 그 자체니까.
"그것 한 가지만 약조해주신다면 얼마든지 귀국의 바람대로 제 관저에서 처자식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드리고 말고요."
"물론 감찰위원회라면 머지않아 설치될 예정입니다."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는?"
도제는 끝내 대꾸하지 않았다.
쿵.
다만, 위병들이 짠 듯이 일제히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위협할 생각인가.
[하여간 이래서 도제란 놈들은.]
뭐, 이정도야 예상한 범주 내잖아.
좌우지간 저쪽에서 지적했다시피 이번 일이 명백한 내정간섭이었던 건 사실이고, 내게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을 거라는 약속을 받아낸 것도 아닌 이상 관저에서 나올 수 없게 가둬두는 정도는 로마 공화국의 정당한 주권 행사다.
물론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애초에 혁명의 대의가 왜곡될만한 부정부패를 범하고 또 그걸 제대로 시정하려 하지도 않는 저들이야말로 단죄받아 마땅할 죄인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에게 혁명이란 그저 우리 프랑스의 침략을 피해 보기 위한 핑곗거리에 불과하니까.
아직 마세나가 알프스 방어선에 부딪혀 고전하느라 옴짝달싹 못 하는 틈을 타서 날 무력화 시킨 다음 파리에서 본격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에 혁명의 방향성을 뒤틀어 놓으려는 거겠지.
나중에 가서 사실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라고 방침을 뒤집어엎어 봐야 이미 첫인상을 조진 뒤니 혼란만 빚어질 테고, 무엇보다 제노바 너머의 민중들이 혁명의 기치를 믿어주지도 않을 테니까.
"얌전히 따라주십시오."
도제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었다.
"이는 명령이 아닌 부탁입니다."
"제 요구사항은 이미 말씀드린 걸로 기억합니다만."
"혹은, 중대한 주권침해와 간첩혐의로 인한 강제퇴거라는 방안도 있겠군요."
단호하기도 하셔라.
이럼 협상 결렬이로군.
[···그래서, 이제 어쩔 텐가?]
글쎄.
가장 이상적인 전개는 내 혁명적인 연설에 위병들이 마음을 달리 먹고 도제에게 반기를 드는 거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보아하니 이 친구들은 도제 쪽 가문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 밑에서 오랜 세월 일해온 사병집단인 모양이고.
그러니까 여기선 우선.
"후회하실 겁니다."
도제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민중의 참여가 전제되지 않은 혁명이 어찌 혁명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국의 주권 행사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혁명진영의 보편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개별국가의 주권은 제한될 수 있다."
도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아뇨. 그리고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군요."
"그렇다면 유감이로군요."
지금 바깥에서 얼치기 혁명동아리들이 뭐라고 지껄여대고 있는지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어도 바로 알아들을 텐데.
"혁명적 방법론에 관한 최소한의 지식도 없으실 줄이야."
도제는 끝내 대꾸하지 않았다.
아마 여기서 내게 반박해봐야 괜히 내 여론전에 휘말릴 뿐이라고 여긴 거겠지.
그리고 그게 정답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당연히 저 혁명동아리들을 부추겨서 도제를 끌어내거나 허수아비로 삼을 계획을 짜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마세나가 알프스를 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