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154)

하나는 모두를 위해

프랑스군의 제노바 개선식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놀랍도록 폭발적이었다. 

"만세! 우리가 이겼다!" 

"갈리아의 형제자매들에게 은총이 있기를!" 

"신시대의 한니발! 해방자 앙드레 마세나에게 영광 있으라!" 

와아아-! 

누군가는 병사들에게 수줍게 꽃다발을 건넸고, 또 누군가는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며 만세를 부르짖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누구나 그들을 점령군이 아닌 해방군이자 동맹군으로서 환영했으며, 오랜 세월 헤어졌다가 재회한 형제처럼 대하며 얼싸안고 소소한 잡담을 나누거나 무용담을 뽐냈다. 

신기하구만. 

[또 뭔가?] 

우린 라틴어를 빼면 저 이탈리아인들이랑 말이 안 통하는데 저 친구들은 잘만 떠들고 있잖아. 

바로 이웃한 지역이라서 교류가 활발하다 보니 다른 나라 말이라도 회화 정도는 익힌 건가? 

[익혀? 아니. 저건 그냥 말이 통하는걸세.] 

말이 통한다고? 

[그래. 내가 알기로는 여기 리구리아에서 옥시타니아, 그리고 아마 카탈루냐까지도 그럭저럭 말이 통할걸세. 그걸 자네 시대에 뭐라고 분류했는지는 자네 지식에 없으니 나도 모르겠네만. 서지중해인들끼리는 기껏해야 방언 수준의 차이 정도밖에 없는 거로 알고 있네.] 

···어, 그럼 내 한국적 감성에서 보면 얘네들은 한 덩어리로 뭉쳐야 할 것 같은데. 

마르세유부터는 오히려 파리보단 제노바랑 같이 놀았어야 했던 거 아니야? 

[에헤이, 어디 가서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는 말게.] 

뭐, 나도 그럴 생각은 없다. 

어차피 혁명의 적기 아래 인류는 하나일진대 그런 인문학적 구분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는 필히 단결한 혁명진영의 내분을 획책하는 반동 부르주아지의 사보타주일져. 

[이 빨갱이 놈이 또.] 

"어이쿠, 우리 독재관님이 여기 계셨구만." 

때마침 객석에 앉아있던 날 발견한 개선장군 마세나가 껄껄대며 이쪽으로 다가와-. 

휙. 

그리 어렵지 않게 날 들어 올리더니 제 말 등에 앉혔다. 

···젠장, 21세기 시절 내 본래 체급이었다면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다뤄지진 않았을 텐데.

오늘따라 유독 대한민국 사춘기 남중생만도 못한 집주인 놈의 난쟁이 몸뚱어리가 서럽구나···! 

[입 닥쳐, 박민혁.] 

오우. 어디서 개미가 떠드나? 

"그래, 어디 그간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이 공화귀족이란 놈들이 뭐 성가시게 굴진 않고요?" 

"왜 아니겠는가. 당연히 틈만 나면 사보타주에 시달리고 있었지." 

"그 수전노들이 그럼 그렇죠. 뭘." 

마세나가 낄낄대며 웃었다. 

하지만, 눈매는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양한 의미가 함축된 질문이었다. 

아직 파리로부터 정식명령서가 도착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엄연히 이번 이탈리아 혁명전쟁을 총지휘할 권한을 위임받은 원정군 사령관. 

그리고 나는 이 이탈리아 혁명을 총지휘할 권한을 위임받은 전권대사. 

두 사람이 입을 맞춘다면 이미 노골적인 반혁명 사보타주를 벌인 도제 하나 갈아치우고 파리에 사후승낙을 받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다. 

"그 전에 그쪽 이야기부터 듣지." 

명령만 내리면 지금 당장이라도 궁전으로 달려가 한바탕 칼춤을 출 판이라 잠시 말을 돌렸다. 

"도대체 무슨 수로 이리 빠르게 알프스를 넘은 건가? 다들 못해도 3달은 더 걸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네만." 

"운이 좋았습죠." 

마세나가 희미한 눈웃음을 떠올렸다. 

"적장이 생각했던 것보다 기민하게 움직여준 덕도 톡톡히 봤고요." 

"아하, 그러니까 적들이 먼저 전선을 뒤로 물렸다?" 

"예. 후방에서 한바탕 휘저어주신 덕택을 톡톡히 봤습니다. 저놈들이 그거 대응하는 틈에 일점돌파했으니까요." 

저속한 손짓. 

···왜 하필이면 일점돌파한 비유가 그거야. 

"그럼 이제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고 보면 되겠나?" 

"아뇨. 아쉽지만 하나 뚫리자마자 저놈들이 비겁하게 일제히 후퇴하는 바람에 그만. 내륙에서 낙오된 놈들 한 1만 명 정도 싸 먹긴 했는데, 1개 군단은 싸 먹을 수 있었던 판세에 참." 

마세나가 아쉽다는 듯이 쩝쩝대며 입맛을 다셨다. 

과연, 대충 어떤 상황인지야 알겠다. 

별 볼 일 없다고 개무시했던 제노바에서 느닷없이 1개 군단이 튀어나오니까 질겁해서 전선을 뒤로 물렸구먼. 

이대로는 마세나의 원정군과 로마 혁명군 사이에 끼여서 방면군 전체가 통째로 포위섬멸 당할 판이 되어버렸으니까. 

어떻게든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물러나야 했으니 어지간한 물자나 중장비들은 모조리 버린 채 몸만 내뺀 거겠지만···.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그걸 전부 포기해야 한다는 판단이 서고 또 실제로 실행에 옮긴 것만 봐도 합스부르크 측 사령관도 보통은 아니다. 

이러면 마세나가 아쉬워하는 것도 당연하지. 

결국 저 물자나 장비야 다시 만들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그게 아니니까. 

잘만 하면 회전 한방에 이번 전쟁을 끝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적장의 기민한 후퇴로 놓치고 말았으니 그야 군인으로서 아쉬움이 뚝뚝 묻어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피에몬테는?" 

집주인 놈이 저번에 거기가 사르데냐 왕국 본체라던데. 

"우리에게 항복한 건가? 아니면 아직 저항군이 남아있는가." 

"그야 당연히 한방에 초전박살!" 

쾅. 

마세나가 주먹으로 제 손바닥을 내리쳤다. 

"···이었으면 좋겠지만, 아직 한창 잔당 소탕 중입니다. 왕실은 밀라노 쪽으로 도망쳤고요." 

"그럼 소탕까진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지?" 

"뭐, 그거야 멀었지요. 아무튼 저 녀석들에게 우린 뜬금없이 고향 땅을 짓이기는 침략자니까요." 

기약 없는 유격전이라는 소리군. 

지금 마세나군의 위용을 생각하면 일대를 안정시키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이래서야 민심을 얻기란 어려울 거다. 

이야기를 쭉 들어보면 지난번 전쟁 때의 상흔을 회복하지 못해서 허무하게 쓰러진 토스카나 공국이나 체급적 한계를 극복 못한 기타 소국들과는 달리 사르데냐-피에몬테는 마지막까지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저항 수단을 총동원한 모양이니까. 

개전과 동시에 비겁하게 도망친 것도 아니고 사보이를 내주면서까지 알프스 방어선을 지키고, 돌이킬 수 없게 된 다음에야 급히 탈출한 거니 신민들의 지지도 만만치 않을 거다.

그렇다면. 

"결정했네." 

마세나를 향해 열띤 환호를 보내는 시민들. 

그리고 이 역사적인 개선식에 제 자식들만 내보낸 채 어디론가 숨어버린 도제의 관저를 차례로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프랑스군이 확보한 점령지들만이라도 코뮌을 설치하세나." 

"···음, 그러기엔 아직 소탕까진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만." 

"내가 언제 제대로 된 선거를 치르자고 했나?" 

당장 우리 프랑스만 해도 파리와 경기권을 넘어서 지방까지 총선에 참여하는 데에는 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물며 이제 막 등장한 로마 공화국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 

그러니까. 

"토지 문서는 이미 챙겨뒀으리라고 믿겠네." 

"어이구야, 그거야 이를 말일깝쇼." 

마세나가 멋들어진 흰 이를 내보이며 열 손가락 가득 끼운 보석 반지를 내비쳤다. 

얼마 전 궁정과 저택을 털었을 그와 그의 병사들에게 이제 와 이 보석들의 출처를 캐묻는 것조차 새삼스러웠다. 

"잘됐군. 앞으로 코뮌의 민주시민으로서 한 표씩을 행사하는 이들에게만 그 토지 문서를 나눠주게." 

"···둔전 말씀이시지요?" 

"잘 알고 있군." 

단. 

"중복투표는 없게 하되, 가족 단위로 얼마나 토지를 불하 받게 될지는 따로 확인하지 말게. 물론 선거방해 따위의 비민주적인 범죄도 일벌백계하고." 

그제야 마세나가 짙은 눈웃음을 떠올렸다. 

이게 무엇을 노린 책략인지 눈치챈 것이다. 

이대로 프랑스 군정청에서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반발이 앞설 수밖에 없다. 

후보들이라고 해봐야 몽땅 군정청에서 정해줬거나 아니면 얼치기 혁명가들 뿐일 테니 보수적인 농민들 눈에는 도통 마땅찮은 후보들 뿐이겠지. 

당연히 투표율은 바닥을 칠 테고, 그럼 그렇게 뽑힌 의원들이라고 해봐야 대표성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투표를 행사한 이들에게 토지 문서를 나눠주겠다고 한다면. 

그리고 개인 단위 중복투표는 엄격히 단속하되, 가문 단위로는 집계조차 하지 않는다면? 

"맘마미아." 

마세나가 휘파람을 불었다. 

내가 비록 이탈리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지만, 21세기에도 대가족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는 정도로 혈연에 대한 애착이 짙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개인주의와 산업자본주의로 인한 핵가족화가 진전된 21세기에도 그 정도니 이 시대야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 

이제 공고가 나오면 농민들은 더욱 많은 가문원이 총선에 참여하여 표를 행사할수록 그들 가문이 더욱 넓은 토지를 분배받을 수 있을 거라는 걸 쉽게 눈치챌거다. 

물론 반대로 지주 가문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가문원이 표를 행사해야 조상 대대로 부쳐 먹은 땅을 지킬 수 있다는 걸 눈치챌 테고. 

그렇다면 다가올 총선에선 한치라도 더 땅을 빼앗으려는 이들과 지키려는 이들이 경쟁적으로 가문 단위 투표 전쟁을 벌이게 될 거라는 걸 익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어떠한 사병 활동도 용납해서는 안 되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알겠나? 어떠한 민병대도 용납하지 말게. 그들이 혁명군을 가장한 사보이 왕당파일지 대체 누가 안다는 말인가." 

점령지에서의 무장해제 또한 군정청이 해야 할 일이니 아무도 이를 트집 잡진 못할 거다. 

군정을 조기에 마무리 짓고 곧장 코뮌 민정으로 넘어간다면 혁명적으로도 바람직하고. 

그렇지만 투표를 빙자한 가문 간 땅따먹기 전쟁을 부추긴 마당에 자경단 활동을 금지한다? 

결국 억울함을 호소할 이들은 무력을 독점한 군정청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고, 반대로 정당한 표를 행사하고 상대 가문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빼앗아 와야 하는 이들도 군정청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다. 

군정청의 힘을 빌리기 위해 그 과정에서 온갖 알랑방귀를 뀌어야 할 건 물론이고. 

그럼 본인들이야 떳떳해도 누가 이들을 왕당파라고 믿어줄까? 

사실상 가문 전체가 공범이자 친 혁명파라는 딱지를 달게 되는 거지. 

[그럼 반대로 전쟁이 아니라 호적을 조작하면? 그러니까 모조리 가문원으로 등록해 일대의 토지를 독점한다면?] 

말했잖아, 저거 둔전이라고. 

결국 국민개병제를 위한 당근이고 코뮌 민주주의의 기반인데 그걸 힘이나 비겁한 수작으로 도둑질한다? 

흠, 아주 획기적인 자살방법인걸. 

장병들을 위한 군인노조 하나만 만들어줘도 사방에서 뚝배기가 깨지겠네. 

반대로 평소에 덕망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도와준거거나 진짜로 그 지역 전체가 집성촌인 경우부터는 우리가 고민해야할 문제가 아니고. 

우리나라 아니니까. 

[하여간 나쁜 꾀에 밝다니까.] 

그래, 그래. 

본좌가 볼셰비키 라이칸슬로프 박민혁이올시다. 

아우우-.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존경합니다." 

꾸벅. 

고삐를 놓아버린 마세나가 이쪽을 향해 익살스레 고개를 조아렸다. 

"역시 나라를 훔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군요. 또 한 수 배우고 갑니다." 

"···저기 잠깐. 동종업계라는 게 도둑이라는 소리였나?" 

"왜 아니겠습니까? 저도 이번에 토리노에서 악착같이 한몫 챙기면서 슬슬 발치까진 따라왔다고 믿었는데, 역시 진짜 대악당은 싹수부터 남다른 모양입니다. 재능의 차이를 한탄할 따름 입지요." 

낄낄낄. 

아니 이놈이 누구 마음대로 대체 날 어디에다가 취직시키는 거야. 

고삐조차 놓아버린 채 제 허벅지 근육만으로 말을 다루고 있는 놈을 밀칠 수도 없고. 

[자업자득 아닌가?] 

시꺼. 

"아무튼, 그럼 저놈은 일단 살려두겠습니다." 

누굴, 같은 걸 이제 와서 새삼스레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그의 시선은 저 너머를,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쏘아보고 있었으니까. 

"어디까지나 민주적으로, 맞지요?" 

"그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놈은 현 혁명정부의 최고지도자다. 

단지 이름만 이용했을 뿐일지라도 엄연히 외부인인 우리가 우악스럽게 제거하면 제아무리 혁명동아리들이 결사옹위해줘도 혁명정부 내에 금이 갈 수밖에 없다. 

최악에는 프랑스 패권주의에 맞서 제노바를 지키기 위하여 제 목숨마저 바친 애국자이자 순교자로서 선전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렇지만 순수하게 지지세가 모자라서 실각하면? 

혁명기에 흔히 등장하는 무능한 기회주의자일 뿐이다. 

"혁명가라면 당연히 민주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지." 

피에몬테 지역의 유권자만 제노바 전체의 두 배는 될걸. 

피에몬테 점령지에서 코뮌 세운다고 하면 당연히 다른 지역에서도 우리도 코뮌 세우자는 소리가 나올 테고. 

그럼 제노바 지역유지 따리가 어떻게 자리를 유지할지 두고 보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까. 

아니 왜, 내정간섭이라며? 

*** 

에스나퍄령 누에바에스파냐. 

애달픈 붉은 노을이 진 해 질 녘. 

"예수회라···." 

후미지고 낡은 교회에서 호롱불 하나에 의지하며 미겔 이달고 신부는 곱씹듯이 낡고 해진 종이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읽고, 또 읽었다. 

며칠 전 아이들이 쓸 잉크를 구하기 위하여 모처럼 도시에 상경하였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걸 줍게 된 선전지들이었다. 

프랑스와 그 동맹군의 교황령 침공을 맹비난하며 이 악마숭배자들에 맞서 가톨릭과 이베리아의 전통을 지켜내자는 내용의 반고도이 진영의 선전지였으나-. 

막상 이달고 신부의 관심은 전혀 엉뚱한, 선전지의 한 귀퉁이에 적혀있던 문구에 못박힌지 오래였다. 

바로 파리에서 이 스페인의 절대왕권을 훼손하기 위하여 예수회 부활을 획책하고 있다는 내용의 글귀. 

"이제 와서 그런 낡은 구닥다리를 꺼내다니." 

흉을 보는 듯한 어조. 

하지만 막상 이를 되뇌는 이달고 신부의 미간에는 회한과 그리움으로 얼룩진 깊은 주름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아무렴 어찌 그 그리운 이름을 잊을 수 있으랴. 

그의 대학 시절과 청춘을 함께한 뜻깊었던 나날을. 

힘없고 배운 것 없는 가엾은 인디오들을 위하여. 

너무나도 권위적이고 수구적인 본국의 일방적인 착취와 구시대적인 식민 통치법에 신음하는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그리고-그들 모두의 죄를 위하여 못 박히신 주님과 자비로우신 성모를 위하여. 

누구보다 낮은 곳에 임하시어 노예와 창부들이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우셨던 교부들처럼 그들 또한 누구보다 낮은 곳에 임하여 봉사하는 자세로 살아가자고 사형 사제들과 함께 노래하듯 황홀하게 되뇌지 않았던가. 

비록 힘없고 무고한 선한 이들을 착취해야지만 성이 차는 저 폭군들 탓에 그들의 정든 집은 사라지고 배움의 터전마저 더럽혀졌으나, 지금껏 이달고는 단 한 번도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던 그 젊은 시절을 잊은 적 없었다. 

지금도 눈을 감거든 I.H.S.(Iesus Christus:예수 그리스도) 세글자가 훤히 보이는 듯했거늘. 

"···하여간 고약한 놈들이로군." 

차마 선전지를 손에서 버리지도 못한 채 이달고 신부가 투덜거렸다. 

자아, 어찌하면 좋을까. 

우선 제게 아직도 못다 한 미련이 남아있다는 건 이번 일로 분명히 깨달았다. 

아마 이번 유혹을 끝내 이겨내는 데 성공하더라도 예수회 재건과 복권이라는 작고 익살스러운 악마는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끝없이 그를 부추기고 유혹해올 터. 

과연 이에 저항할 자신이 있는가. 

하지만 그래서 이 유혹에 따른다면? 

저들을 믿을 수 있는가? 

파리를, 그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고도이를 믿을 수 있는가? 

설령 저들이 이제 와 예수회 잔당을 끌어모아 복권 시켜준다고 한들 그게 그가 기억하는 봉사와 배움의 터전일까? 

보나 마나 이름만 달리한 괴뢰가 아니겠는가. 

그따위 괴뢰에 사형 사제들의 명예가 더럽혀지도록 둘 수는-. 

뎅그렁-. 

"···아." 

거룩한 종소리. 

하지만 그 혼자뿐인 교회에 저가 울리지도 않은 종이 울릴 리가 없을 텐데. 

"지진인가." 

그제야 이달고 신부는 미약하게나마 땅이 흔들리고 있었던 걸 눈치챘다.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가볍다고 하나 지진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까르륵-. 

저 너머에서 익숙하다는 듯, 오히려 땅이 흔들리니 즐겁다는 듯한 갓난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뎅그렁-. 

또다시 종소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 

그 종소리가 이달고 신부에게는 마치 계시처럼 비추었다. 

저 아이들을 위하여 가장 낮은 곳에 임할지어다. 

저들의 웃음을 지킬지어다. 

허수아비라면, 꼭두각시라면 뭐 어떻다는 말이더냐. 

네가 고집스레 정도를 걷는다면 그만인 일일진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주여." 

그거면 족했다. 

조금 전 그것이 환청이었는지, 제 착각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진정한 계시였는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털썩. 

이달고는 선전지마저 손에서 놓아버린 채 십자가 앞에 무릎 꿇었다. 

가장 낮은 곳에 임하여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섬기겠다며. 

그의 목자로서 거룩한 성호를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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