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154)

새로운 국면

오스트리아 빈. 

"그래, 다행히 적들이 포강 너머에 진을 쳤다고···." 

하기야 그 넓다란 피에몬테를 며칠 사이 주파했으니 슬슬 퍼질 때도 되었지. 

하아-. 

땅이 꺼지라고 한숨. 

불과 며칠 사이 수척해진 카이저는 더는 말하기조차도 벅찬 듯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작센공에겐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건 내줄 터이니 하루빨리 피에몬테를 탈환하라고 전하게. 토스카나는···여유가 있다면 탈환하되 무리할 필요는 없네." 

"···그,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 반대가 아닐는지요?" 

무례한 지적이었다. 

하지만 합당한 의심이기도 했다. 

토스카나는 그들 합스부르크조의 영지지만 피에몬테는 사보이조의 영지니까.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당연히 토스카나가 우선되는 게 보통이겠으나-. 

"아니, 피에몬테일세." 

프란츠는 단호했다. 

"어차피 저들을 탈환하려면 포강을 건너야 하네. 그렇게 포강을 건너 토스카나를 탈환해봐야 손실만 누적되겠지만, 지금 우리가 피에몬테를 탈환한다면 족히 1개 군단은 부양할 수 있네. 무엇보다 알프스 방어선을 재건할 수 있을 테고." 

"하오나 폐하." 

"나는 내 동생을 믿네." 

카이저가 대신을 노려보았다. 

"그 녀석은 아직 더 인내할 수 있을게야. 안 그런가?"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합스부르크의 가주가 그렇다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으랴. 

또 신성동맹 전체의 승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토스카나보단 피에몬테를 우선하는 것도 맞으니 더더욱 반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아무튼 포강 방위선을 버리고 마음껏 공세에 나설 수 있을만큼 상황이 여유로운 건 아니었으니까. 

아직 제해권은 그들 신성동맹에게 있으니만큼 알프스 방어선만 다시 닫을 수 있다면 감히 이탈리아 왕국을 어지럽히는 저 무엄한 폭도들을 굶겨 죽이고 토스카나 또한 자연히 탈환할 수 있으리라. 

"그래. 아직 고작 초전을 내줬을 뿐이잖은가." 

프란츠가 중얼거렸다. 

곧 마음을 다잡기 위한 자기최면이었고, 조금이나마 전황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환기였다. 

아무튼 객관적인 전황은 그렇게까지 절망적이진 않았다. 

비록 예기치 못한 제노바의 총동원령으로 허무하게 피에몬테와 토스카나를 내주었으나 자칫 방면군 전체가 포위 섬멸당할 뻔했던 위기였던 것 치고는 비교적 가벼운 인명피해만으로 주력군을 지켜냈다. 

이 탓에 미처 파기하지도 못한 채 후방에 낙오된 대포들이나 공병 장비들이 대거 프랑스군에게 넘어간 건 물론 피를 토할만한 악재였으나, 이대로 전쟁에서 패한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개전 전까지만 해도 주력이라고 여겨졌던 나폴레옹의 라인란트 방면군은 이따금 도발-가령 증기차를 의도적으로 폭주시켜서 합스부르크 군영 근처에서 보일러를 폭발시킨다거나-을 걸어오는 걸 제외하면 아주 얌전하다. 

대신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라파예트가 이끄는 중앙군이 브르타뉴 반도에 집결하여 아일랜드에 상륙할 채비를 착착 갖추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는데···. 

과연 허장성세일지, 아니면 진짜로 아일랜드에 상륙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건 그들 합스부르크에겐 썩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만큼 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 줄어들뿐더러 이탈리아에 폭탄을 매설해놓고 자기들은 후방에서 약삭빠르게 꿀만 빨려던 해적 놈들이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허둥지둥 거리는게 퍽 마음에 들었으니까. 

뭐어, 그렇다고 진짜로 라파예트가 아일랜드를 해방 시키고 영국의 대서양 패권에 휘청거리기 시작한다면 합스부르크에도 하등 좋을 게 없겠지만. 

'···그래도 딱 상륙까지만 성공했으면 좋겠군.' 

그러니까 아일랜드 상륙에 성공하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긴 했지만 결국 섬에 갇혀서 보급 문제에 시달리다가 깡그리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정도. 

그럼 런던은 런던대로 반란 진압에 열을 올리느라 머리털이 있는 대로 빠질 테고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사기가 떨어질 테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결말이란 말인가. 

예로부터 이 에우로파의 군상극 결말 중 단연 으뜸은 동맹이건 적국이건 이웃나라끼리 서로 싸우다가 공멸하는 거였는데. 

"오스만 튀르크는 아직 움직임이 없는가?" 

프란츠가 외무장관 메테르니히를 돌아보았다. 

제 계획대로 저 자칭 로마 공화국에 찬동하는 여론만큼이나 강압적인 무력 통일에 반발하는 여론도 하루가 멀다하고 강해지고 있어서일까. 

신성동맹 전체가 위기라며 동요하는 와중에도 이 뺀질이 샌님만큼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콘스탄티니예는 침묵 중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파리에서 어지간히 공을 들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튀르크의 실정에 밝은 이라면 옛 왕정 시절의 외교관들까지 모조리 사면 조치하고 있더군요." 

그럼 그게 과연 단순한 우호 관계를 위한 노력일 리가 없었다. 

프란츠는 조용히 지끈거려오는 미간을 짚었다. 

"···그나마 긍정적인 면모를 찾아보자면 덕분에 당분간 마자르(=헝가리)인들은 조용하겠군." 

이대로 오스만 튀르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마자르가 술탄의 포화를 뒤집어쓰게 될 테니까. 

설령 오스만 튀르크가 끝까지 움직이지 않더라도 혹시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만 계속 남아있다면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마자르인들이라도 별수 없이 남쪽을 경계하는데 모든 여력을 쏟을 수밖에 없을 터. 

"콘스탄티니예에 우리가 지난 시스토바 조약 당시 그들에게 베오그라드와 왈라키아를 반환하는 관대함을 베풀었음을 잊지 말라고 전하게." 

이는 곧 언제건 세르비아인, 왈라키아인들과 손잡을 수 있다는 암시가 될 터. 

이제 와서 저들과 화해할 수도 없는 이상 이렇게 합스부르크가 종이호랑이가 아님을, 어디까지나 프랑스를 상대하기 위해 물러났을 뿐임을 꾸준히 과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지난 전쟁의 승자는 크림 칸국을 성공적으로 멸망시킨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었으니까. 

한창 예니체리들과 레슬링 하느라 숨 가쁜 젊은 술탄에게 고작 개혁동력 확보를 위해 건드려볼 만큼 합스부르크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려줘야만 했다. 

'···나 참. 이거야말로 본디 러시아가 해줬어야 할 일인데.' 

그 러시아는 아직도 폴란드 하나 끝장내지 못하고 있으니 원. 

그나마 그도 익히 이름을 아는 명장 수보로프가 야전원수로 승진하며 총사령관에 취임한 뒤로는 확실히 전황이 러시아에 유리하게 돌아선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아직 바르샤바를 함락 시키지 못했다는 소식에 프란츠는 내심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다부는 또 누구길래 다 끝난 줄 알았던 전쟁을 질질 끌고 있다는 말인가? 

그 수보로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벌써 3달째 바르샤바를 지켜내다니. 

"필요하다면 예니체리나 이맘들과 거래를 터도 좋고." 

"명 받들겠사옵니다." 

꾸벅. 

메테르니히가 모처럼 정숙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도 최소한 평소의 익살스러움이 통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점쯤은 눈치챈 것이리라. 

"그럼 이만 오늘은-." 

하여 프란츠 또한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상투적인 지시와 함께 조회를 마무리 지으려던 찰나. 

툭. 

그의 옥좌 뒤편에서 무언가가 오른손에 들어왔다. 

곧 카이저만을 위한 밀지였다. 

"잠시 실례하겠네." 

마음 같아서는 읽고 싶지 않았다. 

이런 위급한 시국에, 그것도 고관대작들이 보는 앞에서 오직 카이저만 알아야 하는 극비라니 또 얼마나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겠는가. 

하아-. 

프란츠는 한차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다잡고 서신을 펼쳤고. 

「예카테리나 여제, 위독.」 

"맙소사." 

과연 카이저만을 위한 밀지인 까닭을 짐작게 하는 내용에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어지간히 위독한 정도로 밀지가 날아왔을 리도 없으니 이는 정말로 여제가 올해를 넘기기 어려울 수준이라는 것. 

다시 말해 머지않아 황태자 파벨공이 보위에 오르게 될 거라는 이야기인데···. 

"···혹시 어떤 일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불가하네." 

프란츠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만, 저 폴란드와 러시아의 전쟁은 늦어도 올해 안에 끝날 것 같군." 

그게 합스부르크에게 있어서 득이 될지, 실이 될지야 이제부터 두고봐야겠지만. 

이것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러시아는 절대로 폴란드의 마지막 숨통을 틔워준 프랑스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 

바르샤바 외곽. 

"쯧···." 

주군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 러시아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원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폐하께서 얼마나 더 버티시겠는가?" 

"아마 올해를 넘기지 못하실 듯 하다고···." 

"이거 야단났군." 

이제서야 겨우 그가 오기 전까지 엉망진창이 되어있던 전황을 수습하여 폴란드인들의 마지막 저항을 뿌리 뽑으려던 참이었건만. 

하필이면 이럴 때 선하신 여제께서 쓰러지시다니. 

참으로 이번만큼은 러시아의 하느님께서 그들을 돕지 않을 모양이었다. 

"···어찌할까요?" 

부관이 조심스레 수보로프를 돌아보았다. 

이대로 휴전을 제의할지, 아니면 전쟁을 속행할지 물어본 거겠지. 

본디 이런 상황에선 잠시나마 휴전하고 포로를 교환하거나 전열을 정비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니까. 

"아니, 개의치 말고 진압을 계속하게." 

하지만 수보로프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제께서 위독하시다고 하나 아직 숨이 붙어계시잖는가. 그럼 그 전에 끝낼 노력을 해야지 벌써 약한 소리를 하면 쓰나." 

"그렇다면 병사들에게는 물론, 장교들에게도 일단 비밀로 해두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콰콰쾅! 

때마침 저 너머에서 우렁찬 포성과 함께 성벽이 허물어졌다. 

참으로 우아하고, 묵직하며, 무엇보다도 굳게 쥔 주먹처럼 일점을 정확히 타격하는 수려한 포선이었다. 

그렇게 자유사격 좀 하지 말라고, 제발 탄도학이라도 더 공부하고 오라고 옆에서 갈궈댄 보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쿠르릉-. 

"좋구나."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요새벽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카드 위의 성처럼 연쇄 붕괴했다. 

요 몇 달간 몇 번이고 보수하며 완전히 누더기가 되었던 게 마침내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희미하게 미소 지은 수보로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곧장 부관을 돌아보며 도로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예비대에 지금 당장 저 돌파구를 향해 총검 돌격하라고 전하게. 포격은 중단하지 말고 전진배치하여 좀 더 멀리-그래, 가령 청사 방면을 조준하라고 전하고." 

"그, 각하. 그 근방은 민간인 거주구획입니다만." 

"나도 당연히 알고서 하는 소리일세." 

수보로프가 코웃음을 쳤다. 

"자네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저 돼지들에게 자비를 베풀거든 훗날에라도 그 고마움을 기억해서 보은해올 것 같은가? 가령 저 프랑스 개구리들의 유혹에 속아 넘어가지 않겠느냐는 말이야." 

"···아닙니다, 각하." 

"그래, 그러니까 기회가 났을 때 밟아둬야지 않겠나. 저 돼지들은 모두 잠재적 폭도고 우리 러시아의 적일세. 대체 왜 적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후을 남긴다는 말인가." 

모조리 죽여 없애면 증오의 연쇄 또한 생기지 않는 법일진대. 

훗날에라도 복수를 당했다는 건 결국 적에게 어쭙잖은 자비를 베풀었다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철저하게, 두 번 다시 들고 일어날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공포를 그 혈통에 아로새겨주었다면 절대로 그럴 일도 없었으련만. 

콰콰쾅! 

"병사들에게 오늘만큼은 제한 없이 즐거움을 허락하겠다 전하게." 

아직도 시가지 방향에서 이따금 날아오는 적 포탄을 발견한 수보로프가 덧붙였다. 

일부 농노들이 피아의 대포 사격에 휩쓸릴까 두려워 겁쟁이처럼 총검 돌격을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겸사겸사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카자크들의 분노도 잠재울 수 있을테고. 

"장장 3달여를 저 돼지들 탓에 애를 먹었으니 그 정도는 허락해도 괜찮겠지." 

"알겠습니다, 각하. 어디까지 풀어주면 될까요?" 

약탈, 파괴, 강간, 학살 등. 

"모조리." 

즉답이었다. 

"기간은 나흘 정도면 되겠군. 그때까지 잔당소탕이 끝나지 않는다면 카자크 군단에게 군정을 위임하겠네. 여제께서 쓰러지신 이상 휴전 전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돼지들의 척추를 분질러놔야만 할테니." 

"···알겠습니다, 각하." 

척. 

딱딱히 굳은 부관이 절도 있는 군례와 함께 뒤돌아섰다. 

누가 봐도 마음이 약해진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것이 그들 러시아의 군인정신이었으니. 

"하여간 요즘 젊은것들이란." 

쯧. 

수보로프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들도 저 튀르크 놈들이 신앙의 형제들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러왔는지, 또 그들의 조국이 저 튀르크와 싸워 이기기 위하여 어떤 일마저 각오해왔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면 이제 와서 고작 이 정도로 마음 약해지지는 않았으련만. 

장차 러시아군을 이끌어갈 젊은이들이 저 서구인들처럼 나약해졌으니 참으로 근심이 컸다. 

자고로 러시아군을 강하게 만들어온 건 예나 지금이나 공포요, 이는 피아를 막론하는 절대적인 힘이었건만. 

저들은 적을 두려워하여 똘똘 뭉치지도, 반대로 적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하여 냉혹해지지도 못하니 참으로 눈 뜨고 못 봐줄 샌님 소굴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때마침 저 벽이 무너져준 덕분에 여제의 근심을 하나라도 덜어드릴 수 있겠구나." 

이대로 수보로프가 바르샤바를 잿더미로 만들어 놓는다면 그토록 많은 피를 흘리고서도 크라쿠프 하나만 간신히 건진 폴란드로서는 두 번 다시 그들 러시아에 대들 엄두도 내지 못할 테니. 

나약하고 쇠약해진 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삼국 사이에 포위된 폴란드는 프랑스의 든든한 우방이 아닌 짐 덩어리이자 근심거리로 전락하게 되리라. 

무엇보다 동쪽 평야 지대의 봉건지주들은 크라쿠프와 농노들의 보복이 두려워 전쟁 후에도 고스란히 차르의 신민으로 남고자 서약했으니만큼 전후 러시아의 영토는 더욱 넓어질 테고. 

결과 속 빈 강정만 남게 될 폴란드라도 프랑스에서 제 동맹이랍시고 애지중지해 줄지, 아니면 모른 척 내다 버릴지야 모를 일이었으나-. 

거기까지야 수보로프나 러시아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가질 수 없다면 남김없이 불사른다. 

지금껏 그들이 걸어온 역사를 비추어보건대 이것이야말로 중장기적으로 러시아에 더욱 큰 이익을 약속하는 정도이고 왕도였으니. 

우라-! 

때마침 예비대의 총검 돌격이 시작되었다. 

이따금 다부가 이끄는 별동대가 측면을 찔러오고, 사방에서 폴란드군 잔당이 어떻게든 발버둥 쳤지만 그것뿐. 

결국 수비를 포기한 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병력과 민간인을 크라쿠프로 후퇴시키려 발악하고 있었으나, 수보로프는 결코 적들을 무능하다고 얕잡아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수배 차이가 나는 적을 상대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버텨온 것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해줘야 하리라. 

"그러니까 더더욱 여지를 남기지 말고 짓이겨놔야지." 

그것이 적을 향한 최고의 경외일 테니까. 

사방에서 아녀자들의 비명과 폭발음과 괴성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곧 본격적인 바르샤바 해방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파멸의 전주곡이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폴란드 시민들이 죽어갈 것이며, 또 러시아의 갓난아이를 배게 될 것인가. 

얼마나 많은 것들이 파괴되거나 도둑질당할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피눈물이, 증오가 흐르게 될 것인가. 

벽 너머에 있는 그의 막사에서 이 상황을 가만히 관전하고 있는 노장으로선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나-. 

"러시아의 하느님이시여." 

수보로프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경건하게 성호를 그었다. 

"모쪼록, 당신의 어린 양을 어여삐 여기어 제 소원을 들어주소서." 

가능한 많은 적의 피가 흐르기를. 

그리하여 상처 입은 그들의 적이 공포에 사로잡혀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되기를. 

일말의 자비 없이, 일말의 여지없이. 

당신의 철권으로서 러시아의 적을 분쇄하소서. 

그의 조국이 지금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영원불멸할 번영과 아직도 손에 넣지 못한 안전을 누릴 수 있도록. 

"주여, 간곡히 바라나이다." 

털썩. 

눈길에 한 자루의 검을 꽂아 임시 십자가를 만든 수보로프가 그 앞에 무릎 꿇었다. 

꺄아악-! 

저 너머에서는 아직도 누군가의 비명과 불타는 소리와 쇳덩이가 맞부딪히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경건히 성호를 긋는 노장에겐 차리나의 아름다운 아기천사들이 러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노래하는 것처럼 들렸다.

오붓한 시간

"편히 잠드소서." 

마님이 조용히 성호를 그으며 고향에 돌아온 무명용사들을 위로했다. 

다들 연고도 없고, 찾는 이들조차 없이 그저 제 무의미한 생에 마지막으로 뜻깊은 일을 해보고 싶어서 용감히 전장에 나섰다가 숨을 거둔 이들이었다. 

온통 넘쳐나는 시신 탓에 가족묘에도, 공동묘지에도 묻히지 못하고 교외의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작은 숲에 제대로 된 관도 없이 파묻혀야만 했던. 

누구도 그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다시 죽었다는 사실 또한 알지 못할 이름 없는 이들. 

아마 이대로 산짐승들이 시신을 파헤친다고 한들 도시정치에는 아무런 파동도 일으키지 못하겠지. 

"쓸쓸하네요." 

콕. 

엘레오노르가 사제들과 함께 조립한 나무 십자가를 꽂으며 중얼거렸다. 

코르데는 이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다. 

아직 어린 막시밀리앙 2세가 목격하기엔 너무나 참담한 광경이었으니. 

지금쯤 바닷가에서 따뜻한 지중해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둘이서 함께 물장구라도 치고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도 살아서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하고 싶었을 텐데."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결국 혁명을 하다 보면 으레 사람이 죽기 마련이니까. 

비단 혁명만이 아니라 정치라는 게 그렇다.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고 해도 현 체제가 단지 유지되는 것만으로 고통받고 희생되는 이들이 그 사회 어딘가엔 반드시 존재한다.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체제를 파괴하거나 바꾸려 해도 필연적으로 그 변혁의 과정에서 고통받고 희생되는 이들이 반드시 소수나마 존재한다. 

고로,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누구도 고통받지 않는 유토피아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결국 누군가의 유토피아란 다른 누군가의 디스토피아인 법이니까. 

정치판에 뛰어든 놈이 어떠한 고통도, 희생도 만들지 않겠다며 모조리 책임지려 하는 건 전능감에 자아도취 한 사이비 교주 꿈나무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 산 자들이 하다못해 더 나은 미래로 보답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우리는 이제 죽음이 영원한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영혼이 실재함을 알게 되었으니까. 

우리에게 죽음이란 더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단지 죽은 자와 더는 만날 수도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는 아쉬움을 의미할 뿐. 

하지만 죽은 자들의 의식은 엄연히 존재한다. 

나 21세기 한국인 박민혁의 생령이 실재하듯이, 그들 또한 저세상에서 현세를 굽어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책임감을 느끼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줘야지. 

그들의 꿈을 대신 이뤄주는 것이야말로 죽은 자를 위한 최고의 위로이자 그들의 죽음에 이바지한 자로서 책임을 지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 

"그래야 먼저 저승으로 떠난 동지들도 제가 헛되이 죽지는 않았노라 흡족해할-." 

"어쩔 수 없지 않아요." 

콕. 

마님이 다가와 날카롭게 명치를 찔렀다.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 잔뜩 성이 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정말 그걸로 만족할지도 우린 모르는 일이잖아요." 

"···하지만 부인." 

"네에, 그런 거 하나하나 신경 써서야 어떻게 혁명가를 하겠어요. 저도 혁명가의 안사람이니까 그걸 모르진 않고, 부정할 생각도 없어요."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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