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154)

"죽은 사람 앞에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건 꼭 어차피 죽어야만 할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잖아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 또한 답하지 못했다. 

대꾸할 논리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 논리를 지금 입 밖에 내뱉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까 두 번 다시 제 앞에서 그런 소리일랑 꺼내지도 마요." 

콕. 

엘레오노르가 또 다른 나무 십자가를 땅에 꽂으며 덧붙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 입으로 듣고 싶진 않으니까." 

그 계산서에 우리의 목숨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다운 발언이었다. 

한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으랴. 

"도와드리겠습니다." 

덥석. 

수레에 가득 담긴 나무 십자가를 들어 올렸다. 

"···그럼 너무 정치적이라고 하지 않았었나요?" 

"뭐, 그렇기야 하지요." 

도제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무명용사들의 묘지에 프랑스의 전권대사 부부가 참배도 아니고 묘지를 조성하는데 이바지했다고 하면 그 정치적 파장이 과연 어떨까. 

뒤늦게 공화귀족들이 부랴부랴 참배하더라도 총동원령 와중인 제노바의 민심은 그야말로 죽이네 살리네 소리가 터져나온 뒤일 테고, 현 도제 정권이 갑작스레 붕괴하는 건 우리 프랑스에건 혁명에건 썩 달가운 전개는 아니다. 

최소한 각지에 코뮌 정부들이 설치된 다음이라면 또 모를까, 아직 뚜렷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닌 와중에 그런 사달이 벌어지면 한동안 혁명전쟁보단 뒷수습에만 매달려야 할 테니까. 

그러니 마님께서 우리라도 돕자고 보채지 않았다면 좋건 싫건 정치적인 행보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무명용사 묘지 참배에 나서지도 않았을 테지만-. 

"부인에게 미움받는 남편이 되고 싶지는 않은지라." 

덧붙여 이건 내 제안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집주인 놈의 의견이기도 했다. 

솔직히 우리 둘 다 아직도 소위 「평범한 감성」이라는걸 이해하진 못하겠다. 

비단 동물의 왕국만이 아니라 마담이 폭소하는 와중에도 우리 둘 다 어리둥절해했던 거 보면 그냥 유머 감각을 포함해서 우리 둘 다 평범한 감성과는 인연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사랑받는 남편이 되려면 혁명하는 기계도 가끔은 인간 흉내 정도는 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엘레오노르가 장난스레 키득거렸다. 

언제 화가 났냐는 듯이 즐거움으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저 처음부터 화가 난 척 한 건지도 모르지. 

그래야 다른 사람 앞에선 엘레오노르가 듣기 싫어했던 소리를 하지 않을 테니까. 

"참, 당신다운 신혼여행이네요." 

덥석. 

마님이 아무렇게나 가매장한 탓에 흙더미를 뚫고 나온 손을 조심스레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이미 부패가 진행될 대로 진행되어 진물과 구더기가 새어 나오고 있건만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우리 둘만의 오붓하고 낭만적인 시간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게 특히나." 

"···그건 참,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괜찮아요. 기대해본 적도 없으니까." 

[커흑···.] 

그만둬! 

집주인 놈의 라이프는 0이라고! 

"그러니까 제가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봐야죠." 

엘레오노르가 경건하게 성호를 그었다. 

"어때요, 이만하면 평생 기억에 남을만한 둘만의 밀회 아닌가요?" 

"···예." 

여기까지 함께 따라와 준 것만으로 달리 어떤 말로 감사를 전할 수 있을까. 

다만 조용하게, 경건하게 그녀를 뒤따라 성호를 그었다.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밀회고 말고요." 

"어머나. 따라 할 생각도 없는, 을 잘못 말씀하신 것 아닌가요?" 

마님이 배시시 미소 지었다. 

흙더미와 진물에 얼룩진 그녀는 그 여느 때보다 아리따웠다. 

*** 

제노바의 으슥한 뒷골목. 

"다들 진정 좀 해보게." 

장 란이 으르렁대며 그의 외국인 의용군단-다른 말로 얼뜨기 혁명가들을 달랬다. 

사용하는 언어도, 고향도, 조국도 각기 달랐음에도 지금 이 자리에는 동시통역사 한 사람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 장 란을 포함하여 그들 모두 서지중해 인이었으니까. 

이제 와 장 란이 갑자기 북부식 오일어를 고집하지 않는 이상에야 그들 사이에 통역 따윈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로베스피에르 전권대사를 이 로마의 위원장으로 추대하자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도대체 그럼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느냐는 말이야." 

벌떡. 

"그럼 반대로 로베스피에르 위원장보다 나은 인물이 있습니까?" 

로마냐에서 왔다고 소개한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보다 이름 높고, 그보다 유능하며, 그보다 보잘것없는 이들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정치인이 있기나 하냐는 말입니다." 

"···이봐." 

"그 말이 옳습니다." 

이번엔 토스카나에서 왔다는 청년이 이어받았다. 

"냉정히 말하자면, 위원장 동지께서 이 머나먼 이탈리아 반도까지 달려오실 이유가 하등 없었습니다. 이미 그분은 조국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공화국의 독재관이시고, 프랑스에는 그분을 영웅시하고 숭배하는 이들로 가득합니다. 한데 이제 와서 무엇 하러 이 피와 살이 튀기는 이탈리아로 달려오셨겠습니까? 

도대체 무엇 하러 습격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몸소 전선에 현장 시찰을 나서며 추잡한 반동 귀족들의 부정을 바로잡고, 힘없고 선량한 이들을 위하여 손수 토지문서를 나누어주셨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혁명을 위해서 그러셨겠지. 

파리에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장 란은 더는 이들을 말릴 수 없었다. 

그야 이들이야말로 바로 그 이탈리아 반도의 혁명을 꿈꾸는 얼뜨기 혁명가들이니까. 

왜, 무엇을, 어떻게조차 협의하지 못하고 사분오열을 거듭하던 이들에게 분연히 나타나 로마 재건과 코뮌제, 그리고 토지개혁과 둔전병의 결합을 통한 인민의 바다라는 교시를 내려준 로베스피에르가 과연 어떤 식으로 보이겠는가. 

최소한 저 틈만 나면 사보타주를 시도하는 고리타분한 공화귀족들 따위보단 훨씬 믿음직한 혁명전쟁의 총사령관이자 지도자감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혁명입니다." 

로마냐 청년이 강한 확신을 담아 부르짖었다. 

"파리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군정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위원장 동지만큼은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한낱 국익을 쫓았다면 무엇 하러 선거마저 뒤로한 채 본인이 직접 이 땅에 임하셨겠습니까? 단지 프랑스만을 생각했다면 파리에 남아서 배후 조종하는 것이 훨씬 이로웠을 텐데!"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세계시민입니다! 곧 최후의 로마인입니다! 서로마가 무너지고 어느덧 천오백 년을 바라보는 오늘날, 아무런 사심 없이 로마의 영광을 재건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위원장 동지뿐이십니다!" 

"어차피 국호만 바뀌었을 뿐 저 추잡한 공화귀족들을 섬길 운명이라면 차라리 위원장 동지를 추대하는 것이 백번 나을 것입니다! 우리에겐 단지 통일된 조국이 아닌, 혁명의 기치 아래 계몽된 민주공화국이 필요합니다!" 

이어서 토스카나가, 밀라노가, 피에몬테가. 

저마다 각기 다른 근거를 내세우며 언성을 드높이기 시작하니 안 그래도 말주변이 모자란 장 란으로서는 도저히 이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게 오해라면, 그러니까 저 전임 독재관이 사실 그 유명한 당통처럼 반드시 부패하는 자라거나 이탈리아를 착취하여 프랑스의 잇속만 챙길 궁리를 하고 있다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 파리에서 저 양반을 뭐라고 불렀던가. 

혁명하는 기계 아닌가. 

그의 별명이 부패할 수 없는 상간남이 되면서부터는 더는 불리지 않게 되었으나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장 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저 로베스피에르는 정말로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오직 혁명을 위하여 이곳까지 자진하여 달려왔을 거다. 

이를 위해 프랑스를 배신하지야 않겠으나 그렇다고 그의 머릿속 우선순위에서 혁명보다 국익을 위에 두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러니까 본인이 이탈리아어를 할 줄 몰라서 라틴어로만 소통한다는 점만 빼면 뚜렷한 인재가 없는 이탈리아의 혁명가들에겐 분명 이상적인 독재관감이긴 했지만-. 

'···아니 잠깐. 이 얼치기들에겐 오히려 그것도 매력인가?' 

따지고 보면 이탈리아어라는 것 자체가 환상이요, 르네상스 시대에 신곡을 집필한 단테를 비롯해 뛰어난 문인들을 잇달아 배출하며 공용어 지위를 획득한 토스카나 지방의 방언을 관습적으로 이탈리아어라고 부르는 것뿐이니까.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탈리아어는 라틴어와 그들 서지중해인들의 언어적 뿌리가 된 민중 라틴어뿐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 라틴어를 모국어처럼 능숙하게 구사하는 로베스피에르는 분명 로마를 이끌 자격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안 되네." 

그거야 이 얼치기 혁명가들만의 생각이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감성은 아니잖은가. 

제아무리 외국인 군주나 객장에 관대한 유럽이라지만 그렇다고 그런 구분 자체가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혁명이라는 것 자체가 그전까지 존재했던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거나 더 나은 형태가 되도록 바꾸어가는 과정이라지만 그래도 국제사회나 민중의 눈치를 살피긴 해야 할 것 아닌가. 

장 란은 인민이라는 바다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로서 이는 절대로 헤엄쳐서는 안 되는 구정물이라고 확신했다. 

"애당초 위원장 동지께서 로마를 책임지고 이끌어주시겠다는 말씀을 단 한마디라도 하셨는가? 그런 것도 아니잖은가." 

"하지만 동지, 그렇지 않다면 왜 그분이 우리 로마의 토지개혁 문제에 그리 관심을 보이셨겠습니까? 동지께서도 곁에서 도우며 부정을 바로잡으셨으니 아실 것 아닙니까!" 

"그건···." 

장 란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한참을 고민하다 대꾸했다. 

"···아마 옛 로마의 공화정치가들과 견주신 것 아니겠는가. 가령 그라쿠스 형제라던가." 

한마디로 그 양반도 야망이 있었다기보단 별 생각 없이 자아도취 했을 뿐일 테니 너무 환상 가지지 말라는 권고였으나. 

"""오오오···!""" 

오히려 이 얼치기 혁명가들은 감격했다는 듯이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기 시작했다. 

그제야 제 실수를 눈치챈 장 란이 오해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역시 이 혼란한 공화국을 이끌 재목은 위원장 동지뿐이십니다!" 

"갈리아를 제패하고 로마로 찾아와 주사위를 던지신 분이 어찌 카이사르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사실 혁명이란 로마적 가치들의 부활과 복권을 의미했던 것!" 

"하모! 모름지기 진정한 로마라면 출신과 지위에 상관없이 임페라토르가 될 수 있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감!" 

"아니, 독재관도 아니고 임페라토르는 좀···." 

와아아-! 

그야말로 폭발적, 이라는 표현조차 모자란 함성이었다. 

아직 당사자는 로마 공화국을 위하여 봉사하겠다고 나선 적도, 하다못해 이를 암시하는 행보조차 제대로 보여준 적 없건만 이들은 이미 로베스피에르를 공화국의 태양으로 추대하기라도 한 양 낯 뜨거운 언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럼 무뚝뚝한 장 란이 할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뿐이었다. 

"어휴." 

덜컹. 

장 란은 이 얼치기들이 알아서 질릴 때까지 신나게 수다 떨 수 있도록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 

말릴 자신도, 감당할 자신도, 그렇다고 그까지 동참하기도 싫었던 것이다. 

그가 자리를 비운 지도 모른 채 토의라는 이름의 빽빽 소리 지르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 보면 어지간히도 흥이 오르긴 한 모양이었지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하다못해 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도 아니고 프랑스의 전임 독재관이 바로 이웃 공화국의 최고지도자로 추대되면 다들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최소가 동군연합에 최악 흡수합병이라고 단정 짓겠지. 

그리고 장 란은 괜히 이 외교 참사를 자초한 전범이라고 손가락질당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 당장 동지께 보고드려야겠군." 

그럼 말주변이 모자란 장 란은 주먹을 휘두르지 않고서야 이뤄낼 수 없을 일들을 대신 해치워 주실 테니까. 

하여 그 길로 곧장 척탄병은 관저로 향했고. 

"동지라면 지금 여기 안 계시는데요?" 

"···네?" 

아우-. 

장 란의 멋들어진 구레나룻을 잡아당기는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와 그의 보모만을 만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당분간은 관저에서 서류작업 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예, 그렇긴 한데 사모님께서 조르셔서요." 

"아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자고로 부부란 그런 법이니까. 

괜히 부부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할 수도 없으니 나중에 찾아오는 게 예의일 터. 

"그래서, 동지께서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여 장 란은 호위 무관으로서 하다못해 호위 대상의 동선이나마 파악해두려 했다. 

"여기, 근처 교외의 무명용사들을 위한 가묘에 참배하러 가셨는데요." 

"아하. 그러니까 도제도 찾아간 적 없는-." 

땡-. 

무언가 쇠망치 같은 것이 뒤통수를 후려치는 듯했다. 

"·········." 

"저기, 무슨 문제라도?" 

놀리는 듯 방긋방긋 웃는 보모 따윈 더는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한없이 어지러웠고, 저 혼자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에 한바탕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장 란은 생각했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고민 하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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