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154)

보편

어···. 

"저를 추대한다고요?" 

[···왜?] 

나도 몰?루. 

저번 참배가 정치적인 행보로 비추어졌다는 것까진 익히 짐작할 수 있었고 또 이에 따라 도제 일가의 지도력에 흠집이 갔다까진 이해하겠다. 

그거야 애초에 똑같은 시민군을 구분 지어서 좀 잘나가는 집안만 좋은 묘소로 모시고 평범한 집안은 가족묘를, 그조차 없는 이들은 교외에 가묘를 설치하게 만든 저놈들이 자폭한 거니까. 

물론 본인들이 의식적으로 그런 차별을 뒀다기보다는 연고 없는 용병들 가묘 설치하는 감각으로 별 생각 없이 처리한 거겠지만, 이는 결국 본인들이 국민국가의 생리에 너무나도 무지한 구체제의 일원이라는 걸 자백한 격이었다. 

이 연고 없는 이들의 가묘를 위하여 몸소 시체 진물로 얼룩지기를 택한 프랑스의 전권대사 부부. 

그리고 기존 시민들의 집단장례식에만 잠시 얼굴을 비췄을 뿐 함께 대의를 위해 싸웠던 전우들을 깊이 파묻히지도 못하고 관짝도 없이 짐승들이 시신을 파먹도록 만든 공화 귀족들. 

이 중에서 누가 그나마 낫겠냐, 하면 그야 전자겠지. 

거기까지야 알겠는데-. 

"이탈리아에는 인재가 없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왜 외국인인 저를?" 

"으하핫-!" 

내 어리둥절한 반응에 우스워 미치겠다는 듯이 마세나가 배꼽을 부여잡고 깔깔대며 폭소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소파를 내리치고,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으면서 새빨갛게 질린 얼굴로 한참을 웃어젖히더니. 

"야야, 지금 들었냐? 이 자각도 없는 독재관 양반이 뭐라고 지껄였는지? 이탈리아에는 뭐 인재가 없어? 본인이 경쟁자들을 죄다 담가버리고서는 뭔, 아학학학!" 

팡팡-. 

장 란의 등짝을 두드리며 더욱 자지러지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장 란은 장 란대로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이었고. 

뭐야, 얘넨 또 왜 저래. 

"진짜로 어느 날 눈을 떠보면 방패 위에 들려있어도 기어이 올 게 왔구나, 하십시오." 

방패 위는 또 뭐고. 

[뭐, 짧게 설명하자면 그냥 추대식이라고 생각하면 될걸세.] 

아하. 

그러니까 눈을 떠보니까 곤룡포를 뒤집어썼더라-뭐 그런 감각인 거구만. 

아니 그것보다도. 

"전 로마 공화국을 위하여 출마하겠다고 한 적도 없습니다만." 

"아하, 그래서 공직에 나설 생각도 없으셨다?" 

"공직이라면야 달게 받지요." 

어차피 앞으로 두고두고 이래라저래라할 작정이었는데 그럴 거면 행정부 내에 공식적인 직함이 있는 게 낫지. 

유럽에서 외국인 객장을 고용하게 그리 드문 일도 아니고, 또 혁명정부에서 믿을 수 있는 외국인 혁명가들에게 직책을 맡기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니 그 정도야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지만 출마는 다르다. 

"제가 출마하여 민선의원이 된다면 이 로마의 유권자들을 위하여 봉사해야 하잖습니까. 한꺼번에 두 나라의 국익을 양립 시킨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닐뿐더러 설령 양립시키더라도 누가 그걸 잘했다고 칭찬해 주겠습니까." 

박쥐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이지. 

앞으로 크고 작게 다투게 될 일이 한두 개가 아닐 텐데 제한 주권론도 아니고 진짜로 두 이웃 나라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하면 악마의 대변인은커녕 매국노 소리 듣기 딱 좋다. 

행정부에 잠시 고용된 것과 국민에 의하여 선출된 것은 분명히 다르다. 

"전 이중국적자가 될 생각도 없을뿐더러 파리와 로마를 천칭에 올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한데." 

장 란이 퉁명스레 답했다. 

"저 얼치기들이 동지께 기대하는 건 로마 재건입니다." 

"···?" 

"이해가 안 가십니까?" 

기막히다는 듯한 반응. 

내가 계속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으니 곁에서 아직도 숨넘어갈 듯이 낄낄대던 마세나가 덧붙이길. 

"로마가 분명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건 맞지만, 이탈리아만 있어서야 로마라고 할 수 없습죠." 

"속주들이 있어야 한다, 뭐 그런 소리입니까?" 

"예에, 그것도 맞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있잖습니까." 

척. 

마세나가 불끈 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아하. 

"패권이로군요." 

"예,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힘이지요. 로마는 언제나 이 대륙의 주인이었습니다. 저 신성하지도 로마도 아니라는 제국이 그럼에도 로마를 자칭할 수 있는 건 그들이 교황이 추대한 이 대륙의 주인이기 때문이었고요." 

그런데. 

"지금 이탈리아 반도 하나만 달랑 통일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래서 본인들이 로마라고 자칭해봐야 세간에서 누가 그걸 인정해주겠습니까? 대륙 패권은커녕 로마의 호수인 지중해 하나 장악하지 못한 로마가 어찌 로마란 말입니까." 

···과연, 무슨 소리인지 이제 좀 이해가 간다. 

결국 내가 필요 이상으로 로마 뽕을 남용한 업보였구만. 

그냥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웠다면 차라리 다들 나를 바깥에서 온 외부인이라는 이유로 잘라냈을 텐데,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로마 재건이라는 핑계를 내세워버리니까 갈리아까지 저들의 울타리 안쪽이 되어버렸다. 

그야 저 이탈리아, 아니 로마 통일론자들에게 이탈리아 반도는 '당연히' 손에 넣어야 하는 시작점에 불과하고, 최종적인 목표는 최소 서로마 재건에 가능하다면 동서로마를 아우르는 완전체 부활일 테니까. 

그래서 그게 현실성이 있는 구상이냐, 하는 논의는 여기서 아무 의미 없다. 

본인의 계획이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거든 계획을 고치는 게 아니라 내 계획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현실을 뜯어고칠 궁리부터 하는 게 혁명가라는 인종이니까. 

그리고 그 혁명가들에게 로마 재건이라는 답도 없는 꿈을 불어넣은 건 바로 나 자신이고. 

[나는 좋다고 생각하네.] 

하이고, 이 양반도 유럽인 아니랄까 봐 로마라면 또 사족을 못 쓰시네. 

그럴 만도 하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뭐. 

"좋습니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받아들이지요." 

이러쿵저러쿵 해봐야 결국 우리가 뿌린 씨앗이라는 소리잖아. 

그럼 우리가 책임지고 열매까지 거두는 수밖에. 

로마 재건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사람들 머릿속에 서로마 판도를 박아넣은 주제에 이제 와서 나는 그럴 생각 없다가 도망치면 오히려 그게 더 큰 일이 터질 위험이 크다. 

자고로 내셔널리즘이라는 건 언제 어떻게 폭주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으니까. 

이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이탈리아인」보다는 「로마인」이라는 이름의 내셔널리즘이 상부구조에서 하부구조까지 퍼져갈 텐데 전 유럽에 영유권 주장을 박아버린 통일 이탈리아가 어떤 식으로 폭주하게 될지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무솔리니식 자기최면도 아니고 다들 진짜로 본인들이 서로마를 계승한 적통이자 그때 그 로마인들이라고 믿고 또 그렇게 행동하게 될 테니까. 

"대신에 출마에 앞서서 파리의 허락부터 받아내야 하지 않을는지요." 

"어···." 

장 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야 통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왜 파리에서 동지의 대권 획득을 반대하거나 주저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거 따지고 보면 우리 프랑스 주도의 로마 재건사업인데요." 

···아. 

그렇네. 생각해보니 이쪽도 로마 클레임이 있었지. 

[사실 옛 로마의 일원이었던 나라라면 어느 나라에나 있지.] 

해적들만 빼고. 

"오히려 다들 좋다고 야단법석일 겁니다. 도중에 동지가 물러나셔도 파리에서 등 떠밀려고 들 거고요. ···아니 솔직히 이 정도는 상식 아닙니까?" 

"자네가 이해해야지 어쩌겠나. 이 독재관 아저씨가 우리의 상식이라는 게 통하지 않는 진짜배기 미친놈이고 괴짜인 게 잘못이지." 

마세나가 낄낄대며 덧붙였다. 

···아니 저번부터 이놈은 대체 날 어디에다가 취직시키려는 거야. 

21세기 한국인이 로마 뽕의 이해가 좀 부족할 수도 있는 거지! 

[그런데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로마 뽕을 그리 남용하셨나?] 

그야 그때는 리소지멘토 부추기려면 그게 직방이었으니까! 

그리고 댁도 그때 아주 신나서 이것저것 아이디어 내놨으면서 자꾸 마중 와서 딴소리 좀 하진 맙시다, 응?! 

"뭐, 아무튼 다행히 우리 독재관님도 결심이 서신 것 같고." 

툭툭. 

마세나가 기특하다는 듯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놈이 저번부터 자꾸 키 작다는 걸로 놀려먹네. 

"그럼 이제 우리는 뭐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우선 로마의 전통에 따라 군단병 선거제라도 해볼까요?" 

···미친놈아. 

그거 군사쿠데타잖아. 

[로마의 훈훈한 민속놀이지.] 

아니 이 양반이 나보 놈더러 프랑스의 카이사르라고 깔 때는 언제고?! 

"아니면 뭐 애들 풀어서 시민 총궐기라도 선동해 봅니까? 마르세유 놈이나 제노바 놈이나 다들 거기서 거기니까 작정하고 풀기 시작하면 구분도 잘 안될 텐데." 

"그러니까 제발 좀 유혈혁명에서 벗어나 주게." 

기껏 내가 친 사고에 휘말려 들게 만든 데에 사죄할 겸 모처럼 존대해주고 있었는데 꼭 이래야겠냐. 

일단 수습할 생각을 해야지 일을 더 키우는 건 또 뭐고. 

[흠, 로마 재건이 대체 왜 사고지?] 

그리고 댁도 이제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우선 이렇게 합시다-." 

뚱한 표정의 장 란과 인생을 즐기고 있는 마세나를 차례로 돌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제노바시 총독궁(Palazzo Ducale). 

"아버지." 

두 차례씩 도제를 역임했음에도 공화국의 죄인이라는 누명을 자진해 뒤집어쓴 탓에 가족묘에 묻혀야만 했던 고인을 떠올리며 장 카를로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제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장 카를로의 답답한 마음 또한 풀리지 못했다. 

가족묘에도 묻히지 못한 연고 없는 이들이야 교회에서 어련히 책임지고 매장하면 그만인 거지, 그게 왜 그들의 책임이라는 말인가. 

그래서 그가 집단장례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잖은가. 

화려한 개선식만큼이나 장례행사 또한 성대하게 치렀고, 그럼 그거면 끝난 일 아닌가. 

도대체 죽은 용병들의 시신을 언제 그렇게 열심히 신경을 써서 매장해줬다고 다들 이 난리인지 원. 

아닌 말로 그들이 진짜로 제노바 시민인지,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집시나 유대인 같은 놈이었는지 알게 뭐란 말인가? 

왜 교회에서나 신경 썼어야 할 일로 그가 세간의 질타를 받아야 하냐는 말이다. 

쨍강. 

"개자식!!!" 

하지만 저 우민들은 그들의 해명을 들을 생각도 없는 듯했다.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투석과 깨진 유리 사이로 성난 폭도들의 아우성이 들려오고 있었으니. 

"앞장서서 선전포고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모르쇠 하는 법이 어디 있냐!" 

"저 많은 청년을 전장에 몰아넣었으면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야!" 

"이럴 거면 대체 누굴 위한 총력전이고 총동원령이었는가!" 

"그들 모두 시조 로물루스의 자식이다! 어찌 늑대를 날벌레들이 파먹게 둘 수 있다는 말인가!" 

"""도제는 책임져라!!!"""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책임을 지라는 말인가. 

갈수록 안하무인이 되어가는 폭도들의 아우성에 장 카를로는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뱉었다. 

정 그 집시들의 죽음에 책임을 따진다면 애당초 폭도들을 선동하여 혁명전쟁을 부추긴 저 전권대사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또 그의 세 치 혀에 놀아난 저 어리석은 폭도들이 져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그가 그때 선전포고하지 않았다면 그냥 그걸로 끝났을까? 

총동원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갔겠냐는 말이다. 

결국 저 우민들이 앞장서서 장 카를로를 끌어내리고 선전포고와 총동원령을 내렸을 거면서 기대에 충실히 부응했을 뿐인 그에게 이제 와서 손가락질하는 건지 원. 

"해산시키게." 

도제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저런 후안무치한 폭도들과 괜히 대화해봐야 그만 골치 아플 뿐. 

집시들 참배야 이제부터라도 가면 그만이고, 사비를 들여서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싸하게 고쳐놓으면 폭도들의 집회야 금방 조용해질 것이다. 

자고로 우민의 분노란 끓는 냄비와도 같았으니. 

잠시 증기가 빠져나갈 때까지만 빵과 서커스로 관심을 돌린다면 그만일 일에 이런 폭동 하나하나 마음에 담아 둬봐야 저만 상할 뿐이리라. 

"뭣들하고 있나? 어서 해산시키라고 하지 않았나." 

"···그, 각하. 그게 어려울 것 같습니다." 

"뭐?" 

생각지도 못한 답변. 

혹시 이놈들마저 역심을 품은 건가, 하여 눈살을 찌푸렸으나. 

"창밖을 내다보시겠습니까?" 

호위대장이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슬쩍 턱 끝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조금 전부터 이따금 짱돌이 날아들고 있다는걸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말이다. 

가문 대대로 그들에게 사료를 얻어먹던 사냥개가 도제를 위험에 빠트리다니. 

참으로 기가 찰 따름이었으나. 

"좋아,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해보세나." 

반대로 궁금해지기도 했다. 

도대체 얼마나 모였길래 해산이 어렵다는 건지. 

하여 장 카를로는 호기심 반, 경계반으로 슬쩍 창 너머를 내다봤고-. 

"···어?" 

저 행렬의 선봉을 목격한 순간 숨이 멎는듯했다. 

휠체어가.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앞장서서 깃발을 휘두르거나 달걀 따위를 총독궁을 향해 집어 던지고 있었다. 

아마 그들 모두는 아닐지라도 개중 적지 않은 수가 얼마 전 전장에서 돌아온 상이군인일 거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그 순간 도제를 경악 시킨 건 상이군인들까지 폭동에 나섰다는 게 아니었다. 

대금이 밀린 용병이나 약속된 돈을 받지 못한 시민병이 파업에 나서는 정도야 그간 흔히 있었던 일이니까. 

하지만 저 추레하고 끔찍한 이들은 달랐다. 

단지 눈에 띄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불경한 것들. 

저 저주받고 뒤틀린 죄인들이 어찌 감히 밝은 대낮에 거리로 나와서 이리 당당히 그들을 모욕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들 같은 부자와 교회의 아량 덕택에 간신히 숨이 붙어있는 주제에! 

"당장 저 불경한 죄인들을 쓸어버리게! 내 눈에 띄지 않게 하란 말이야!" 

"그것이···." 

호위대장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제야 장 카를로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눈치챘다. 

본래라면, 그러니까 전쟁 전이었다면 저 폭도들도 날 때부터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여겨진 불경한 죄인들을 대열에 합류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그야 저 불경한 존재들에게 불쾌감을 느끼는 건 비단 장 카를로 같은 공화귀족들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저곳엔 전우들의 부당한 처우에 분노하고 있는 상이군인들이 있다. 

물론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 상이군인들의 가족이나 유가족들도 뒤섞여 있을 것이다.

그럼 중간에 저 불경한 존재들이 뒤섞여 있다고 해도 크게 눈에 띄지도 않을뿐더러, 하나하나 구분짓는 것조차 그리 쉽지 않다. 

그야 겉모습만 봐서는 저 상이군인들이 더 끔찍하다면 끔찍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았으니까. 

이들을 평소처럼 해산시키려 했다간 용도가 다한 불쌍한 약자들을 소모품처럼 폐기하려 했다는 식으로밖에는 해석되지 않으리라. 

"···안돼." 

도제가 무심코 비명을 내질렀다. 

"각하." 

"안돼, 안된다고. 이럴 수는 없는 거잖은가?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대체 왜 내게만···!" 

처절한 절규였다. 

저들의 배후에 그 저 잘난 맛에 사는 프랑스 놈이 있을 거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어떻게든 하루빨리 해산시키고,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음모를 꾸미지 못하도록 삭초제근하는게 옳았다. 

하지만 그랬다간 전선에 나간 병사들까지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할 거다. 

저 불결한 이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교회에서도 얌전히 있지는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약자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부족했다는 반대진영의 비판을 합당하게 만들어주는 선을 넘어서 제 죄를 자백하는 격. 

지금까지처럼 일부 귀족가문들의 사병이 나머지를 압도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총동원령 와중 이들을 동시에 적으로 돌리는 건 자살행위라는 것쯤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제가 대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변함없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화창한 햇살만이 언제나 그래왔듯이 차별 없이, 구분 없이 내리쬐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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