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3/154)

폰티펙스 막시무스

교황령 로마시. 

"오, 주여." 

마침내 적그리스도의 군세가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소식에 교황 비오 6세가 나지막이 탄식을 내뱉었다. 

루스의 차리나가-혹은 쓰러진 차리나를 대신해 섭정 노릇을 하고 있을 그녀의 정부가-전면 참전을 결의했다는 소식에 원군이 도착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건만. 

역시나 그리 쉽게 일이 풀리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경건히 성호를 그은 교황이 그의 장군들에게 되물었다. 

"그래, 이제 어찌하면 좋겠는가? 정녕 로마의 시민들에게 피난령을 내려야만 해야겠는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근위대장이 말꼬리를 흐렸다. 

설명은 그거면 족했다. 

털썩. 

"···그럼 서두르게." 

로마의 방패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떠났다. 

분명 병력이 모자란 건 아니었다.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건 했고, 또 종파에 불문하고 그저 용병이라면 모조리 사들여 루비콘강과 아펜니노산맥에 의지하여 방어선을 설치했다. 

이제 객관적인 병력 차이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오히려 저 자칭 로마 공화국을 제하자면 신성동맹이 크게 웃돌고 있는 상황. 

단순히 수치만 놓고 따지자면 적의 선공을 기다릴 게 아니라 신성동맹이 열띤 반격을 퍼부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 인재가 턱없이 모자랐다. 

적들은 마부의 자식, 여관집 아들, 전직 밀수업자 등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불세출의 명장이라면서 두각을 보이는데 그들 신성동맹군은 일부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그저 고만고만할 뿐이었다. 

전쟁에 통달하였다는 이탈리아의 용병대장들 또한 머나먼 르네상스 시절의 이야기요, 수만 대군이 맞부딪히는 이 새로운 전장에서 기껏해야 백에서 천 단위 무용담을 늘어놓는 게 고작인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분견대를 이끄는 정도였으니. 

"도대체 이를 어찌하면 좋다는 말입니까?" 

교황은 또다시 하늘을 우러러 질문을 던졌다.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의 지난 만 21년에 걸친 교황임기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시작은 합스부르크와 스페인 보르본조였다. 

지금에 와서는 의아하게 보이지만 그때만 해도 카이저 요제프 2세는 계몽주의에 심취하여 교황권을 크게 억누르려 했고, 이는 카를로스 3세와 그를 추앙하는 스페인 각료들 또한 매한가지였다. 

반대로 무기력한 루이 16세는 그럭저럭 교황령과 양호한 관계를 유지했었고. 

그 계몽 군주들은 앞서 프로테스탄트나 무슬림이 그러했듯이 영내의 모든 사제가 교황이 아닌 국왕에게 오롯이 충성을 맹세하기를 원했다. 

영내의 세수가 단 한 푼도 새어나가지 않고 오롯이 행정부에 귀속되고, 나아가 그들 영내의 모든 신민이 카이저와 국왕이 임명한 행정관료들에 의하여 통제되고 관리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국왕이 아닌 교황에게 세금을 바치는 주교령들을 크게 억누르고 무릎 꿇리려 들었고, 이를 훼방 놓는 예수회를 해산시켰으며 그때까지 관습적으로 교황의 봉신이라 여겨졌던 나폴리 왕국과의 조공무역을 단절시켰다. 

비오 6세는 그때마다 이는 전통을 파괴하는 부당한 처사라고, 교권과 왕권은 상호공존해야 한다고 반박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오히려 계몽주의에 심취한 에우로파의 지식인들은 그를 아직도 제 낡은 아집을 버리지 못하고 시대착오적인 반동주의를 고집하는 적그리스도라고 몰아세우며 계몽 군주들의 조치를 열렬히 옹호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계몽 군주들로도 모자라 저 혁명을 부르짖는 폭도들이 모든 걸 불사르기 위하여 달려오고 있으니. 

'진정 이 추락의 끝은 어디인가?' 

알 수 없었다. 

점차 시대가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대에 교황령이 있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걸 지난 20년간 비오 6세는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아무렴 종교개혁을 시작으로 계몽 군주, 계몽 혁명에 이르기까지 이 냉혹 무도한 역사의 선형적 방향성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잖은가. 

그가 제아무리 로마 시민들을 위하여 곡가를 안정시키고, 총독을 질타하며 부정부패를 단속해도 아무도 그를 칭송해주지 않았다. 

로마냐의 세속 군주로서 배수시설을 정비하고 늪지를 개간하거나 무역과 예술을 장려하여 재정을 풍족하게 만들어도 그는 단지 역사의 진보를 저해하는 적그리스도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저 자칭 로마 공화국이 끝내 로마냐를 함락시킨다면 교황의 세속권력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기반이었던 최고신관(Pontifex Maximus) 지위부터 빼앗으려 들겠지. 

곧 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교황령이 역사의 한 장으로 사라지는 순간이리라. 

"···아니, 아니 될 말이다." 

뿌드득. 

비오 6세가 이를 악물었다. 

물론 이는 미련일지도 모른다. 

저들의 말대로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바뀌지 않으려는 아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천칭 앞에 떳떳했다. 

삿되이 사치한 적도 없었고, 육욕을 탐한 적도 없었으며, 전쟁을 일으켜 어린양들을 괴롭게 하거나 누구도 따르지 않을 부조리한 명령을 내리거나 무고한 이들을 벌주거나 한 적도 없었다. 

그가 한 일은 무엇 하나 남김없이 사제로서 평생 배워온 가치와 윤리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로마냐의 시민들을 위함이었고 나아가 전 세계의 신도들과 가톨릭교회의 독립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설령 이것이 역사의 선택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에게,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단지 지난날의 가르침과 가치가 더는 세속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 한가지 뿐이었으니. 

만일 이를 고집하다가 스러지는 것이 진정 전지전능한 조물주의 뜻이라면. 

"순명하겠나이다." 

저 계몽이라는 오탁에 추잡하게 더럽혀질 바에야 있는 그대로의 순결한 모습으로 사라지는 것이 나을지니.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로마냐의 세속 군주는 다시 한번 결사 항전을 다짐했다. 

하늘은 어지러운 그의 마음만큼이나 흐릿하고, 어둡기만 했다. 

*** 

성 니콜라 교회. 

짝짝. 

"자, 우리 잠깐만 회의 좀 하세." 

언제나 그래왔듯이 상석에 앉은 당통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이야기는 또 무슨 이야기?" 

"우리의 사고뭉치 친구 말이네. 하라는 유세는 안 하고 이탈리아로 달려가시더니 무려 프린켑스가 되셨다는 소식이 들어왔으니 대책 정도는 논의해봐야 하지 않겠나." 

"아하." 

그제야 카미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응?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좋은 일 아닌가? 대책은 또 웬 대책?"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게 로베스피에르의 프린켑스 취임 소식에 대한 파리지앵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라는 표현조차 모자를 지경이었다. 

우리 프랑스야말로 패망한 서로마의 적통을 이은 샤를마뉴 대제의 후예라는 긍지로 똘똘 뭉쳐있던 이들에게 공화국의 전임 독재관이 부활한 로마 공화국의 최고지도자, 심지어는 그 직함만으로도 가슴 벅차오는 프린켑스라는 지위에 취임했다는 소식에 반쯤 미쳐버리고 만 것이다. 

이참에 우리 프랑스도 정부 수반이나 직함들을 라틴어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놈이 튀어나오지를 않나, 아예 국호를 갈리아 코뮌으로 고치고 저 로마 공화국과 통일하자고 하는 더한 미친놈이 나오지를 않나. 

그야말로 여론조사마다 급진당의 압승을 예견하며 덩달아 이들 원내지도부 또한 선거주간임에도 긴장감 하나 느끼지 못할 만큼 한껏 느슨해져 있었으나-. 

"혁명에는 긍정적일지 모르지." 

하지만 그 밖의 관점으로 이번 사건을 본다면? 

그제야 지도부의 관심이 일제히 당통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대로 가면 옴짝달싹 못 하고 단물만 빨아 먹힐 판이잖은가." 

당통이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물론 우리는 혁명가일세. 나도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진 않고, 부정할 생각도 없어. 그렇지만 일단 우리 프랑스부터 잘되어야지 않겠나." 

"말이 좀 지나친데." 

마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저 친구가 프랑스를 배신했는가? 아니잖은가. 저 이탈리아반도의 동지들은 그들을 지휘할 이보다 나은 사령탑을 찾지 못했고, 저 친구는 추대를 받아들였다. 아직까진 그게 끝이잖은가." 

"물론 지금은 그렇겠지." 

당통이 냉소했다. 

"그렇지만 저 로마 혁명이 장기화 되도 그럴 수 있겠는가? 저들이 단기간에 국체를 정비하지 못하고 저 친구의 장기 집권을 애걸한다면. 프린켑스 로베스피에르를 이웃 나라의 지도자로서 대하게 된다면 감당할 수 있겠나?" 

"그건-." 

마라는 다만 눈살을 찌푸릴 뿐 대꾸하지 못했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전개는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에서 그러했듯이 단기간에 혁명을 마무리 짓고 파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이대로 혁명군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돈좌되거나 혁명 뒤에도 안정되지 못하고 모든 게 장기화한다면? 

그럼 이야기가 복잡해졌다. 

우선 저 부패할 수 없는 상간남이 혁명동지들을 등지고-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유기 하고 맨몸으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앞서 파리에서 그러했듯이 로베스피에르는 그의 손이 닿는 범주 내에서 모든 역량과 수단을 총동원하여 혁명을 위해 헌신할 거고, 그럴수록 로마 공화국은 프랑스의 국력을 있는대로 빨아가며 득이 되기보단 실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들이 생각하는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과정에서 타협이 있을지언정 혁명 그 자체를 포기하거나 타협하는 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프랑스 혁명과 급진당의 우상이 도움을 청하는데 그들이 모질게 내칠 수도 없을 테고. 

"···이거 귀찮게 되었군." 

쯧. 

자크 루 신부가 혀를 찼다. 

"동지의 혁명정신이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게 될 줄이야." 

"그래서 네 생각은 뭔데?" 

마라가 언짢다는 듯이 대꾸했다. 

"뭔가 생각이 있으니까 이야기를 꺼냈을 것 아니야." 

"오, 물론 있고말고." 

펄럭. 

당통이 빙그레 웃으며 서류 한 장을 건넸다. 

로베스피에르가 전권대사에서 물러나겠다는 내용의 서류였다. 

물론 거기에 그의 친필은 단 한 글자도 적혀있지 않았다. 

"야." 

그 즉시 마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건 물론이었다. 

"지금 싸우자는 거냐?" 

"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네." 

"끝나지 않기는 개뿔이. 이게 지금 추방령이랑 뭐가 달라? 그래서, 나중에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지금 잘라내자? 하!"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아직 총선 결과가 발표되기도 전이니 로베스피에르와 현 프랑스 정부를 연결하는 유일한 직함인 전권대사직조차 빼앗거든 이제 그는 진짜로 프랑스 출신의 로마 정치인이 되는 거니까. 

대권을 탐낸 당통이 로베스피에르를 추방하려 한다고밖에는 생각하기 어려웠으나-. 

"그러니까 다들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보게." 

반드시 부패하는 자는 제 탐욕과 야심을 구태여 숨기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념과 애국심을 담아 한 마디 한 마디를 토해냈다. 

"어차피 저 친구에게 중요한 건 혁명이지 로마가 아닐걸세."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인가? 로마 혁명한다고 우리 프랑스 혁명을 포기하진 않을 거라는 소리지. 저 인터내셔널 재단만 봐도 그 친구의 꿈이 뭔지는 이제 다들 알잖는가." 

"세계혁명이지." 

그제야 마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실현 가능한 공상이긴 한가, 하는 지적은 지금 이 순간 아무 의미 없었다. 

그들이 아는 로베스피에르란 사나이는 불가능하다면 가능한 선까지 최대한 지혜와 노력을 쥐어짜서 조금이라도 목표지점에 더 가까운 곳에서 객사하기를 원할 인물이었으니. 

총선 기간 와중에 이웃 이탈리아에서 혁명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신혼여행을 핑계 삼아 곧장 현장으로 달려간 것만 봐도 로베스피에르란 사나이는 침대에서 편히 죽을 팔자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친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추앙하고 따르는 추종자들로 가득할 테지." 

어차피 앞으로도 얌전히 어디 가지 말라고 붙들어둘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그때마다 계속 전권대사로 임명해주거나 할 바에야. 

"그냥 지금 우리가 저 친구를 총재 선거에 입후보 시키세나." 

"아하, 그러니까 총재로-." 

침묵. 

이 숨 막히는 정적이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다발적인 반응이었다. 

그만큼 황당했고, 또 충격적인 제안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총선을 며칠 남겨둔 채 후보 교체와 동군연합, 아니 동통연합을 동시에 추진하자는 소리인데.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제정신이냐고만 묻지 말고 거꾸로 자네들이 한번 생각해보게." 

당통이 여유롭게 좌중을 둘러보았다. 

"애당초 저 총재란 직함이 뭐 하는 자리인가?" 

"그야-." 

명목상 행정부 수장이지. 

그러나 막상 실권은 없는 명예직에 가까웠다. 

이 프랑스 코뮌의 정치 역학 자체가 로베스피에르의 독재관 임기를 사실상 고스란히 계승했다 보니 당시 행정부 수장이었던 국왕과 섭정의 지위를 계승한 총재는 언제나 입법부 수장인 국민공회 위원장에게 눌려 지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었다. 

형식적으로는 입법부가 행정부에 협조를 요청하는 식이라도 실제로는 도장 찍기나 외국에서 귀빈이 찾아왔을 때 응접하는, 딱 그 정도 실권밖에 없었다. 

애당초 어지간한 일은 그들 선에서 처리할 자율권을 보장받은 지역 코뮌들 등쌀 때문에라도 국민공회 없이 행정부 단독으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기도 했고. 

하지만 좌우지간 총재는 행정부의 수장이며, 위원장과 함께 프랑스 코뮌을 대표하는 얼굴로서 무게감을 갖춰야하는 지위다. 

고로. 

"저 친구가 지금처럼 사방팔방으로 혁명하러 다닐 수 없도록 감투를 씌워 오롯이 프랑스의 국익을 위하여 봉사하게 만들자는 말일세." 

"지금 내가 이해하기로는 말이야." 

자크 루 신부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위원장 동지를 루이 17세에, 자네를 독재관에, 그리고 코뮌 최고평의회장을 그 시절의 프로방스 백작에 대입 시키려는 걸로 들리네만. ···아닌가?" 

당통은 긍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정하지도 않았다. 

"···흠." 

그제야 비로소 이게 무엇을 노린 책략인지 모두의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우선 현 국민공회 위원장은 당통이고, 이는 그가 현 프랑스의 실권자임을 의미한다. 

현 프랑스 코뮌의 건국 이념상 총재와 위원장을 한 사람이 겸임한다는 건 불가능하며, 총재가 명목상의 행정부 수장이 아닌 실권을 행사하려면 먼저 국민공회와 자치 코뮌들을 길들여야 한다. 

하지만 국민공회는 파리를 비롯한 도시를 대변하고 코뮌은 방데를 비롯한 농촌을 대변하니 이들의 견해차를 조율하는 것도 여간 고생이 아니거니와 이미 이것만으로도 기력이 모조리 바닥날테니. 

당장 외지에서 이탈리아 혁명에 매달리고 있는 로베스피에르로선 현장을 믿는 것 외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이는 국민공회 위원장의 실권을 일부 코뮌 최고평의회장에게 나눠주는 대신 총재를 완전한 명예직으로 삼고 책임만 지는 자리로 만들려는 정치적 설계였다. 

"교활하군." 

카미유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주 자네다운 발상이야." 

"칭찬이라고 듣겠네." 

당통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이대로 저 친구를 놓치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그것도 정답. 

그렇기에 난제였다. 

좌우지간 겉으로 보기에는 현 프랑스의 최고지도자로 추대하자는 식이었으니. 

반대할 명분도 마땅치 않았거니와 그렇다고 반대했다간 당통이 경고한 대로 로베스피에르가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프랑스의 국력만 쪽쪽 빨아가는 꼴을 보게 될지도 몰랐다. 

결국 이도 저도 못한 채 다들 끙끙 앓는 소리만 내고 있던 와중-. 

"잠깐, 이럼 인터내셔널은 뭔데?" 

마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국가 공인 대민봉사단체에 계몽주의를 선교하고 다니는 게 주된 설립목적이니 파리외방전교회인가? 아니지, 국내에서도 활동하고 국내 정치에도 영향력을 발휘하니까 갈리아 교단?" 

"뭐···구태여 비유하자면 그렇게 되겠지?" 

"그럼 저 친구가 인터내셔널을 통해 권고하는 것도 함부로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족쇄를 채운다는 건 체제의 일부로 편입 시킨다는 것. 

인터내셔널이 국교회고, 총재가 모든 책임을 지는 세속군주이며 마침 이탈리아에 제 영지까지 만들어졌으니 이는 영락 없이 혁명가들의 교황. 

그리고 가톨릭 교인들은 누구나 태어난 왕국과 세례를 받음으로써 입국한 하느님의 왕국 두 나라의 백성이다. 

이를 혁명진영에 고스란히 대입한다면-. 

"···어?" 

당통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미 주워 담기에는 늦은 모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