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승법
로마냐 전선.
타타탕!
"···사치스럽군."
장 란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일주일에 몇 번씩 연달아 전투를 치르고 다시 하루에 수차례씩 일제사격을 가하면서도 화약이 남을 지경이라니.
물론 그렇다고 영국인들처럼 쏟아붓기 시작하면 언젠가 동이 나기야 하겠으나, 계속되는 단순 반복에 점차 하루가 멀다 하고 정확한 사격을 보여주고 있는 동맹 군단을 보고 있자면 새삼 조국의 국운이 피긴 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인도에서 기어이 초석을 구해오는데 성공한 건지, 과학 아카데미에서 조국을 구할 질산칼륨 합성법이니 어쩌니 떠들던 게 대성공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 건지.
잠깐 호기심이 앞서기도 했으나, 장 란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와 같은 군인들에게 중요한 건 '왜'가 아니라 그래서 이 남아도는 화약을 어떻게 활용할 것 인가였으니까.
그리고 장 란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척탄병, 앞으로."
척척척.
군단장의 지시에 따라 한 무리의 척탄병이 적 전열을 향해 용맹하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흔히 세간에서 이르기를, 죽고 싶어서 환장한 자살돌격대.
언제 터질지, 터지기는 할지도 알 수 없는 무거운 수류탄을 들고 투척할 수 있는 거리까지 용맹하게 다가가 수류탄을 던지고 다시 그 수류탄이 터지기도 전에 적 전열을 향해 총검 돌격에 나서야 하는.
여차하면 제가 던진 수류탄과 함께 폭사할 각오로 적들과 투덕거리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 귀신 잡는 척탄병.
이러니 척탄병이 등장과 동시에 정예병과의 상징이 되어버린 건 너무도 당연한 이치였다.
일단 무거운 수류탄을 안전거리까지 집어던질 수 있는 신체조건을 가진 이부터가 한 줌이었을뿐더러, 다시 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수류탄을 끌어안고 적의 총탄을 뚫고 전우들과 함께 오와 열을 맞추어 걷는다는 것 자체가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장 란처럼 의용부대로 군 생활을 시작한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고서야 신체적으로건 정신적으로건 글자 그대로 기사도 문학에서나 등장할 법한 용자들로 가득 채워야 했다.
뿌우우-.
"···흠."
하지만, 지금 저들을 보라.
당당하게, 용맹하게 적진을 향해 나아가는 로마의 척탄병들을 보라.
수년에 걸쳐 고된 훈련과 죽음보다 두려운 채찍질을 당하면서 두려움을 거세하지도 않았고, 말도 안되는 빚이나 가족들 생계로 인생을 저당 잡히지도 않았다.
물론 투포환처럼 무거운 수류탄을 던질 수 있어야 하니 다들 수개월 간의 훈련으로 팔뚝만큼은 기형적일 정도로 두껍게 발달하긴 했으나, 달리 말하면 딱 그것뿐.
그들은 누구나 조국을 위하여, 혁명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총알을 뚫고 적진을 향해 당당히 나아가고 있었다.
마치 혁명을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기로 다짐했던 지난날 장 란의 의용척탄부대처럼.
앞서간 전우가 쓰러지면 공포에 질리는 게 아니라 그의 복수를 다짐하며 뒷줄이 빈자리를 채우고, 혹여 아까운 수류탄을 낭비하지 않도록 그것만 회수하여 짊어졌다.
그리하여 두려움을 모르는 척탄병들은 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에도 아랑곳없이 투척 거리를 확보한 뒤.
치익-.
당장 눈앞에서 총알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숨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적의 빛나는 총검이 이쪽을 겨누고 있음에도 아랑곳없이.
적들과 당당히 눈을 마주치며 침착하게 부싯돌로 심지에 불을 붙이고 구령에 맞추어 적 전열을 향해 수류탄을 집어 던졌다.
콰콰쾅!
졸지에 작렬탄을 지근거리에서 두들겨 맞은 적 부대가 어떻게 되었는지야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갈기갈기 찢긴 살가죽이 튕겨 나가며, 팔다리가 저 높이까지 날아올랐다가 다시 공이 튀기듯이 지면과 부딪히며 질척한 소리를 냈다.
그야말로 지옥도.
그리고 척탄병이란 바로 이 인세의 지옥을 만들기 위하여 전장에 나선 사나이 중의 사나이를 의미했으니.
와아아-!
척탄병 부대는 놀란 기색조차 없이 수류탄 투척, 일제사격이 끝나는 즉시 예정된 대로 총검돌격에 나섰다.
아무렴 이 사람 가죽을 뒤집어쓴 지옥 마귀들에게 적의 비명보다 즐거운 게 어디 있으랴.
적들이 총검을 들고 이에 맞서려 들건, 뒤돌아서서 도망치려 들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고 그 나름대로 즐거울 테니까.
펑!
순간 미처 제때 기폭하지 못하고 뒤늦게 오발탄이 폭발했다.
하지만 이미 총검 돌격에 나선 척탄병들은 개의치 않았다.
자칫 저 오발탄이 제 발치에서 터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쯤이야 그들에게는 새삼스러울 따름이었다.
자고로 척탄병이란 언제나 제가 던진 수류탄에 폭사할 각오로 살아가는 미치광이들이었으니.
몇몇 운 나쁜 전우들이 오발탄에 휩쓸려 사지가 갈가리 찢기는 와중에도 아랑곳없이 적병들의 가슴팍을 총검으로 쑤셔대는 지옥 마귀들 앞에서 적병은 다만 겁에 질려 도망치거나 목숨을 구걸할 따름이었다.
"훌륭해."
짝짝짝.
그제야 멀리에서 망원경으로 이들의 활약을 지켜보던 장 란이 경건히 박수갈채를 보냈다.
저 맹수를 연상케 하는 공격성.
자칫 제가 던진 수류탄에 휩쓸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조차 아랑곳하지 않는 용맹.
그리고 무엇보다도, 광신적인 애국심과 혁명정신.
"척탄병이 된 것을 환영하네, 동무들."
장 란이 훈훈한 미소를 건넸다.
곧 척탄병 선임으로서 후임들이 진정한 척탄병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세례식이었다.
물론 이런 들리지도 않는 좀스러운 축하로 끝낼 생각은 없고, 우선 적의 술과 먹을 것을 약탈하여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만찬을 즐기면서 다시 한번 전우애를 굳게 다져야겠지만.
"적 예비대가 우익 방면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거야 전투가 끝난 뒤에 고민해야 할 일이지 장 란은 당장 전투 와중에 저들을 독려할 만큼 미련하지 않았다.
조금 전 척탄병 대대가 만들어낸 공백지에 적 예비대가 몰려들고 있다는 소식에 군단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쪽도 예정대로 대응하게."
"옛!"
지시는 그거면 족했다.
이미 모든 수류탄을 소진한 척탄병 대대는 예정대로 적 연대가 패퇴하였음을 확인한 즉시 좌우로 널찍하게 간격을 벌린 채 조금씩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럼 다시 그사이를 겹치지 않게 좌우로 산개한 전열 보병 연대가 앞서가고, 적 예비대가 전장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도로 간격을 좁히면서 전열을 굳힌 지 오래.
뒤늦게 적 기병대가 이 보병 방진을 뚫어보려고 기병총을 쏘아대며 멀찍이 우회할 즈음이면.
콰콰쾅!
정면으로부터의 효력사.
당황한 적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에 구릉 위로 전진 배치된 포병대의 포도탄 사격이 퍼부어졌다.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퍼부어진 산탄은 평소보다 더욱 멀리 날아가 적이 최후에 최후까지 아껴둔 기병대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그럼 이제 적 기병대장이 사령부의 후퇴 명령조차 받지 않고 전선을 벗어나려 들건 말건 상관없었다.
두두두-!
장 란의 사령부에서 출격한 기병대가 그들을 측면에서부터 찢어발겨 놓을 테니까.
아무렴 최후에 최후까지 예비대를 아껴놓은 게 저들만 그렇겠는가?
더는 사각 방진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진 보병들이 좌우로 넓게 포위망을 펼치며 퇴로를 가로막자 앞뒤로 포위된 적 기병대는 눈사람처럼 삽시간에 녹아내리고 말았다.
한데 뒤늦게 전선에 도착한 적 보병대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나마 나름 경험 많은 장교인지 도망치는 대신에 황급히 일제사와 함께 방진을 형성하면서 본부로부터의 지원을 기다려보려 했지만, 기병의 원호 없는 보병 따윈 그저 표적에 불과했으니.
콰콰쾅!
도로 탄종을 포환으로 교체한 포병대의 일제사가 외로운 방진 위로 내리꽂혔다.
"끝났군."
장 란의 짤막한 촌평대로, 포격이 내리꽂히는 즉시 방진을 수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대열 한복판으로 뛰어든 검기병대가 무참히 양 떼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기병에 맞서기 위해 무너진 진형을 고치면 측면으로 우회한 보병대의 사격에 노출되고, 그렇다고 후방으로 물러나자니 기병을 따돌릴 수 없고.
결국 척탄병에게 산산이 조각난 우익을 구원하기 위하여 달려온 적 최후의 예비대는 불과 1시간여만에 시체와 포로 집단으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적 사령부에 항복을 권하게."
굳건히 버티고 있는 좌익, 그리고 우익에서의 완승으로 본격적인 전과확대에 나선 중군으로부터의 보고를 차례로 살피며 장 란이 덧붙였다.
"투항한다면 병사들은 풀어주고, 장교들은 예의를 갖추어 후방으로 이송하도록."
"···병사들을 풀어주자고요?"
"그래."
부관이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고 포로학살을 주장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그들의 상식에서는 보통 이런 포로들을 붙잡으면 몸값을 받아내건 아니면 노역에 동원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니까.
하물며 저들을 풀어주면 결국 또다시 무장하여 전선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일진대.
"우린 인민의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일세."
장 란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물고기가 바다를 척 져서야 뭐하겠나."
"아···."
그제야 부관이 입을 크게 벌렸다.
확실히.
그들은 지금 흔해빠진 전쟁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는 이탈리아의, 로마의 통일을 위한 혁명전쟁.
혁명군이 자비로울수록 이들의 대의에 동조하는 이들 또한 많아질 것이고, 어쩌면 저 포로들까지 언젠가 아군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한데 벌써 저들에게 모질게 굴어서 무슨 득이 있겠는가.
"그럼 장교들에게도 최대한 포로들을 정중하게 대하라고 전해두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게."
척.
군인답다기엔 아직 부족한 경례.
하지만 문제없었다.
군단장의 시선은 조금 전부터 부관이 아니라 백기를 들어 올린 적 사령부에 고정되어있었으니까.
어차피 승패가 갈린 이상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병사를 살리기로 한 걸까, 아니면 그냥 겁에 질린 걸까.
어느 쪽이건 생각보다는 재빠른 항복이었다.
"이겼군."
희미한 미소.
고작 한 번의 회전으로 라벤나를 지키던 적 군단을 통째로 무력화 시킨 직후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우직하고, 무뚝뚝한 마무리였다.
***
패밀리의 복수를 위하여 뜻하지 않게 선하신 나리에게 송곳니를 드러낸 마르코와 그 일가에겐 더는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하다 하다 폭도라니···."
"말세로구나, 말세야. 어휴, 죽어서 도대체 어떻게 조상들을 뵐지."
"이제 다 어쩔 텐가? 이게 다 저 도시 놈을 받아들여서 이렇게 된 거 아닌가!"
"에헤이, 다 지난 일을 가지고···. 자네도 그때는 괜찮다고 했으면서 뭘!"
"그리고, 그럼 복수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인가? 어떤 이유에서건 가족이 맞고 돌아왔으면 복수는 해줘야 하는 거지!"
하지만 그것이 이들이 진심으로 혁명에 찬동하게 되었다거나, 혹은 혁명정부에 충성을 맹세하였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지도에 해방구로 기록된 뒤에도 마르코의 마을은 어디까지나 나리나 그 친지들의 보복을 피하고자 혁명군의 보호에 의지하게 되었을 뿐.
마르코를 포함하여 마을 사람들 대다수는 혁명이라는 두 글자를 듣게 될 때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칠색 팔색을 하고 있었다.
물론 저 자칭 로마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을 때도 매한가지였다.
아무렴 로마라면 저기 북쪽의 신성로마제국이나 교황 성하께서 계시는 도시 로마가 진짜 로마지.
음흉한 제노바 놈들이 프랑스를 끌어들여 사칭한 로마가 어찌 고대의 영광을 이어받은 로마일 수 있다는 말인가?
설령 그들이 지난날 저질렀던 일을 혁명이라고 부를지라도 이는 어떠한 외세의 도움도 받지 않은(?) 오직 그들 마을만의 혁명이요, 관계없는 외부인이 함부로 왈가왈부할 일도 아닐진대.
"그냥 따르는 시늉만 하고, 이상한 요구를 하면 이런저런 핑계로 내치시죠."
"하기야, 저놈들이야 어차피 조만간 떠날 몸인데···."
"그런데 금방 안 떠나면 어떡하지?"
"어쩌긴. 저 메뚜기 같은 놈들이 마을을 결딴내기 전에 얼른 우리 손으로 쫓아내야지."
고로 마르코댁 사위 마치니가 쓰러져 있는 동안 정해진 마을의 방침은 기본적으로 대등한 협력관계.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마을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거래라는 입장이었다.
아무렴 나리들께도 목숨 걸고 충정을 바친 적이 없는데 무엇 하러 저들에게 충성한다는 말인가.
뒤늦게 깨어난 마치니 또한 이를 트집 잡지는 않았으니.
마르코와 마을 사람들은 이번에는 또 저것들이 어떤 핑계로 전시징발이라는 이름의 약탈을 벌이려 들까 분노 반 걱정 반으로 혁명군과 마주했고-.
"그럼 이 맛없-아니. 맛있는 병조림과 교환하시는 것 어떻습니까? 아니면 청바지도 있고요. 혹 필요하신 게 있다면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응? 잠깐 뭐?"
"아니면 비누로 하시렵니까? 어느 쪽이건 말씀만 해주십시오. 필요한 만큼 교환해 드릴 테니까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거래제의에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물론 이런 사례 자체가 전에 없던 건 아니었다.
가령 징발이 아닌 거래라는 핑계로 어음을 주던가, 아니면 진짜 현금으로 거래를 시도하는 경우라면 흔히 있었다.
하지만 이 어음이 진짜로 효력을 가지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거니와, 현금 또한 대개는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금화나 은화가 아닌 지폐라서 멀리 도시까지 나가야 쓸 수 있는 경우가 보편적.
그나마도 거래가 성립했다'치고' 강제로 물자를 징발해가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니.
지금처럼 군정청에서 물물교환을 제안하는 경우는 그들은 물론이고 마을 역사를 통틀어서도 난생처음이었다.
"···어, 어쩌죠?"
"그, 글쎄. 그래도 받아오는 게 낫지 않겠나?"
"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증서보다야···."
"안 그래도 빨랫비누가 떨어졌는데 잘됐네. 나 잠깐 뭐 좀 바꾸러 갔다 올게요."
그렇지만, 사양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품질은 예상했던 대로 썩 상등품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쓰지 못할 하등품도 아니었으니.
멀리 도시에 나가서 사 오던 것은 군정청에서 바꿔온다고 생각하면 나쁠 게 없었다.
"앗, 가는 김에 병조림도요! 그거 일단 유리병이잖아요? 도시에 내다 팔면 그게 얼마야!"
무엇보다 이 물물교환이라는 게 중요했다.
저들에게는 선심 쓰듯이 교환해줄 수 있을 만큼 흔한 물건인지야 몰라도 그들에게는 아닌 물건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장사에 밝던 이탈리아 반도에 이 기회에 부자가 되어보자며 군정청과 작정하고 거래를 트려는 전쟁 상인들이야 흔하디흔했고, 꼭 전쟁상인이 아니라도 소소하게 가계에 보탬 하려는 이들이야 하나하나 헤아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어차피 군인들에게 필요한 자재라고 해봐야 뻔히 정해져 있었고, 정 급하면 몸으로 때워도 그만이었으니까.
척척척-.
"···그런데 쟤네 전쟁 안 하나?"
"그러게. 되게 느긋하게 행군하네."
"우리 나폴레오네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다던데. 흠, 순혈 개구리들이라서 그런가?"
"에이, 그럼 제노바 놈들도 개구리게?"
그리고 혁명군은 제자리에서 그 모든 거래를 다 받아주고만 있었다.
담당 장교의 해명에 따르자면 마르코의 마을처럼 자발적으로 해방구를 형성하지 못한 마을들로 하나하나 찾아가 혁명을 전파하면서 이동하다 보니 행군이 느려진 것뿐이라지만-.
결국 마르코 같은 농민들에게는 여유를 부리고 있는 거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애당초 그는 저리 보급기지 건설에 목을 매는 군대를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용병들도 그렇고, 영주군도 그렇고.
보통은 현지 보급(※약탈)에 의존하거나 전쟁 상인들과의 거래에 의존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니까.
이따금 마을 사람들을 불러서 병조림을 나눠주며 노역을 권할 때 보면 언제나 보급기지인 경우는 그들 마을 역사를 통틀어서도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거참 희한한 놈들일세···?"
다른 건 몰라도 저 비싼 유리를 이렇게 막 나눠줘도 되는 건가?
아닌 게 아니라 어지간한 순도의 금화보다 이 유리병 하나가 더 비쌀 텐데.
오죽하면 이건 노역이 아니라 부업이라고, 혁명군만 졸졸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잡일이나 필요한 물자를 대주고 병조림만 받아 가는 이들이 수두룩하게 나왔을까.
뭐, 그렇지만.
"덕분에 편하긴 하군."
그래서 도대체 전쟁할 생각이 있기는 한 건지 의문스럽긴 했지만.
뭘 어쩌겠는가.
본인들이 이게 혁명전쟁에서 승리하는 필승법이라고 했으니 그런가보다, 해야지.
저 북쪽에서 루스인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게 될 때까지도, 그냥 그런 줄 만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