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가치
빈.
"불경한 농노들이로군요."
전황 지도를 살피던 러시아군 원정 사령관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이 온통 곰보처럼 구석구석 자리 잡은 붉은색 해방구에 고정되어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하잘 것 없는 포교에 속아 주와 주인을 등지다니."
"그렇게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오."
간단하게 접근해서도 안 되고.
카이저 프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선 이 해방구는 이쪽에서 교회와 협력해 최대한 군사작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처할 터이니 너무 심려치 않아도 좋소."
그러니까 너흰 제발 여기 낄 생각 좀 하지 마라, 는 우회적인 경고였다.
아무렴 저 야만스러운 루스인들이 농노들을 곱게 다뤄줄 리가 있는가.
현지 보급을 위한 약탈까지야 그럭저럭 정상참작 범위라도 육욕을 채우기 위해 아녀자를 욕보이거나 반란주동자에게 본보기를 보이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루스의 차리나가 거기까지 멍청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현 황태자는 지난 7년 전쟁 당시 다 이긴 전쟁에서 한 뼘의 영토도 요구하지 않고, 심지어는 직전까지 적군이었던 자국 병사들까지 빌려주며 패망을 앞둔 프로이센을 구한 전설적인 아버지.
통칭, 프로이센 차르 표트르 3세와 쏙 빼닮았다는 풍문이었으니.
러시아의 전면 참전 소식에 기꺼워하던 프란츠로서는 또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는 없었다.
만일 또다시 그 부계 혈통이 안 좋은 식으로 발현되거든 이번에는 프랑스 차르가 전 유럽에 당당히 명성을 떨치게 될 테니까.
어쩜 이렇게 합스부르크의 동맹국이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이리 근심만 안겨다 주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모쪼록, 이 이탈리아 땅의 봉건영주로서의 배타적인 권리를 존중해달라는 말이오. 아시겠소?"
"오, 물론이지요."
수보로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으레 있을 법한 선제공격을 당했을 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아니면 정말로 아무 영향이 없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건가 하는 질의가 없었다는 건-.
'···전혀 이해하지 못했군.'
그때 가서 협의 사항에 없었다고 둘러댈 작정일 터.
물론 그렇다고 누구보다 봉건적인 저들이 영주의 사유재산에 함부로 손을 대려하지는 않겠으나, 반대로 봉건적이기에 더욱 분노할 지도 모르는 일.
"잠깐 그걸 가져오게."
짝짝.
프란츠가 가볍게 손뼉을 쳐 시종에게 노획물자를 가져오도록 명했다.
팔뚝보다 조금 작은 동그란 원기둥 모양의 유리병이었다.
"깨끗한 유리병이로군요."
그제야 늙은 원수의 흐릿한 동공이 흥미를 띄기 시작했다.
"아무런 장식도 새겨져 있지 않을 걸 보면 장인이 만든 것처럼 보이진 않습니다만. 이걸 제게 지금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괜찮을는지요?"
"이건 적들이 군량을 실어 나르기 위하여 사용하는 보존용기요."
침묵.
수보로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걸 발견한 프란츠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들은 병조림이라고 부르더군. 이 안에 먹을 것을 가득 채워놓은 다음 밀봉하여 실어 나르는 식이오."
프랑스군에서 저 비싼 유리를 보존용기로 쓰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얼마나 기가 막히고 황당하던지.
물론 그들 오스트리아도 따라 하려면 얼마든지 따라 할 수야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숫자를 맞출 수 있다는 소리지 가성비까지 맞출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까놓고 저 병조림을 병사들에게 보급하기 시작하는 순간 합스부르크는 꼼짝없이 파산하거나 가혹한 전쟁세를 감당하지 못한 신민들의 총궐기로 패망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테니까.
지금이 유리를 보석처럼 다루던 시대는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해도 유리는 변함없이 사치품이지, 장교면 모를까 일반병들에게까지 보급해줄 수 있을 만한 양산품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 유리병을 보존식품을 담는 데 쓰고 있다는 말입니까?"
하물며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 있다고 멸시되는 러시아야 두말해 뭐하겠는가.
저들에게 유리 제조는 몇 세기 전 유럽대륙과 별 다를 바 없이 보석공예의 영역일 텐데.
보석병을 공장에서 마구 찍어내고 있다는 소리로 들리겠지.
"사실이오."
전선에서 노획했다는 병조림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이모저모를 살피는 수보로프를 내심 얕잡아보며 프란츠가 덧붙였다.
"믿을 수 있는 정보원이 말하기를, 적의 점령지에서는 이 병조림 통을 화폐 대용으로 쓰고 있다고 했소."
"고액화폐로···."
그제야 수보로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이해가 간 모양이었다.
"과연, 그렇다면 농노들이 제 일가의 명운을 걸고 주인을 배신하려 드는 것도 설명이 되는군요."
···지금 저 작자가 생각한 유리의 가치와 그들이 생각하는 유리의 가치 사이에 까마득한 간극이 있는 듯하지만.
"그렇소."
프란츠는 구태여 착각을 고쳐주지 않았다.
어차피 부외자에게 라틴인들의 복수문화가 어쩌고저쩌고 설교해봐야 잘 이해하지도 못할 테고 경우에 따라선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면 모조리 씨 몰살하는 수밖에 없다고 왜곡해서 받아들일 가능성도 농후하니까.
차라리 저 병조림 용기처럼 이런저런 기물들에 흘려서 농노들이 매수 당했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두는 게 나으리라.
그럼 적군을 몰아내서 공급이 끊어지는 순간 농노들 또한 더는 매수되지 않을테니 적군을 먼저 무찔러야한다-라는 합리적인 등식이 만들어질 터.
"그러니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저 반란군들은 신경 쓰지 마시오. 경이 작전을 펼치는 데에는 하등 불편함이 없도록 조처할 터이니. 눈앞의 적 군단만 상대하라는 말이오. 아시겠소?"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늙은 원수가 가슴팍에 손을 얹은 채 허리를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그거면 족했다.
이 이상 경고하거든 봉건영주의 권리를 주장하는 게 아닌 러시아군을 야만인으로 취급하는 거라고 받아들여질 테니까.
물론 그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드러낼 필요는 없겠지.'
아무렴 앞으로도 두고두고 얼굴 볼 사이에 벌써 감정이 상해서야 되겠는가.
그 뒤로도 합스부르크 일가는 마음속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멀리에서 온 동맹군을 환영하고 큰탈 없이 인수인계 절차를 마무리 지었다.
러시아인들의 시선이 온통 유리병에 꽂혀 있는 건 그저 문명의 변경에서 온 탓에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
제노바 시 총독궁.
"절 총재로 추대하겠다···?"
전 분명 일개 의원으로 후보 등록했을 텐디요.
당사자 의견도 묻지 않고 막 이래도 되나?
이것들이 진짜 총재 간선제라고 막 나가네.
아니면 잠깐, 파리 시민들이 추대한 건가?
일단 동통연합한 다음에 대강 명분 쌓이면 곧장 안슐루스하려고?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게 슬픈 일이군.]
뭐, 슬픈 일인 것까지야.
자연국경선 뇌절도 다 받아줬는데 이 정도로 뭘.
"알겠습니다. 우선 동의하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어차피 여기서 보낸 서신이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선거고 뭐고 다 끝나고 취임식을 준비해야 할 텐데 무슨 소용이야.
까놓고 내가 로마 원수로 추대된 이상 저쪽에서도 전권대사보다 더 나은 감투를 씌워줬어야 했던 것도 사실이고, 시민들이 주도했건 원내에서 주도했건 다른 한쪽도 반대는커녕 전면 찬성했을 거라는 것도 사실이다.
파리 시민들은 안슐루스 각 잡혀서 좋고, 원내는 권한대행 체제 핑계로 모든 책임은 내게 떠넘기고 권리만 누릴 수 있으니 좋고.
그냥 파리 전체가 한통속이었다고 봐야겠지.
"대신 취임식에는 불참할 수도 있다고 전해주십시오. 아시겠지만, 지금 제가 함부로 이탈리아를 떠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닌지라."
"···그, 괜찮으시겠습니까? 시민들이 싫어할 텐데요."
불안에 떠는 눈초리.
지금 이 양반은 날 걱정해주느라 이러는 걸까, 아니면 돌아가서 개같이 까일까 봐 이러는 걸까.
아마 높은 확률로 후자겠지만.
"괜찮습니다."
아닌 말로 내가 총재 선거에 출마했던 것도 아니고 갑자기 바뀐 건데 뭘 어쩌라고.
여기선 혁명전쟁에서 승리를 선포한 다음에 당당히 돌아가 개선하는 게 올바른 순서다.
솔직히 이탈리아 반도 귀퉁이나 차지한 프랑스 괴뢰정권 수괴보다야 이탈리아 재정복하고 돌아온 프린켑스가 훨씬 뽕 차잖아.
명색이 공화국 원수인데 전쟁 중간에 지휘고 뭐고 때려치우고 이웃 나라 가서 취임식 하는 것도 꼴이 좀 이상하고.
그러니 권한대행 체제로 책임 없는 권리 누릴 놈들이 분노한 시민들에게 변명 정도는 알아서 해주겠지.
아니면 뭇 계몽주의 혁명가들의 우상으로서 공화국의 원쑤 놈들에게 천마데스빔 한번 갈겨주면 되고.
"파리에는 승전으로 보답하겠다고만 전해주십시오. 저쪽도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만 말해주면 이해해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평안하시길."
꾸벅.
연락관이 땅에 닿을 듯이 허리를 조아리며 떠나갔다.
저 양반도 나름 어디 가서 꿀리지 않을 고관대작일 텐데 비굴하시구먼.
아니면, 내가 너무 급수가 높아진 건가?
[천마데스빔 쏘겠다는 놈이 한가한 소리 하고 있군.]
오우, 프랑스말 너무 어려워효.
뭐 아무튼 간에.
"오래간만입니다, 장군님."
슬슬 또 다른 손님을 맞상대해줘야겠지.
연락관과 수다 떠는 내내 꿈쩍도 안 하고 이쪽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던 뒤무리에와 오랜만에 눈을 마주쳤다.
"이게 도대체 몇년 만이었지요? 후작도, 나보도 다들 각자 눈싸움 하느라 바쁘다는 소식에 내심 근심하고 있었는데. 장군님께서 이렇게 러시아군에 맞설 지원군을 데려오셨다니 참으로 든든하군요."
"고맙소."
···아니 그런데 이 양반은 또 언제 봤다고 하오체야.
하다못해 라파예트는 본인이 혁명 초기부터 함께한 혁명가이기라도 했지 댁은 그것도 아니잖아.
하여간 카이사르 꿈나무 아니랄까 봐.
옛날 왕국군 출신 인사들 다 빨아가더니 이제 슬슬 본인도 자리를 잡았다, 이거지?
[하, 단두대 마렵다.]
그러게.
그냥 그때 오를레앙 공 옆에 눕혀서 같이 썰어버릴걸.
"···커흠."
내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걸까.
뒤무리에가 잠깐 헛기침하더니.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어투를 고쳤다.
참, 권위 앞에선 솔직한 양반이란 말이야.
"그래서 규모는?"
"약 1개 군단에서 2개 군단 정도. 다만, 따로 보급대를 가져오지는 않은 듯하니 실제 전선에 나설 수 있는 부대는 그보다 적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보자, 1개 군단이 보통 2만에서 플러스 마이너스였으니까-.
대충 한 3만에서 4만 사이라고 보면 되겠군.
아마 4만까진 안나올거 같긴 한데, 하필이면 상대가 러시아라 잘 모르겠다.
뭔가 말도 안되게 미련하고 부조리한 대륙의 기상을 보여줄 것 같은 인상이 좀 있어서.
그런데.
"잠깐만, 따로 보급대를 데려오지 않았다고?"
"그렇습니다."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해서 다시 물어봤지만, 뒤무리에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 파리에서 날 속이려고 거짓 정보를 풀었다는 것도 좀 이상하고.
그럼 푸셰가 이상한 정보를 물어온 건가?
[글쎄···? 내가 보기엔 아마 정확한 정보 같은데. 물론 정말로 보급대 하나 없이 온 건 아니겠지만.]
···지금 사방이 해방구인데 그래도 되나?
[괜히 하얀 스키타이겠나. 그리고 어지간한 물자는 지원병을 불러온 합스부르크에서 어련히 책임져줄걸세. 동맹군의 보급이야 그걸 불러들인 가문에서 책임져주는 게 관례였으니까.]
역시 어느 시대건 보급에 대한 경시는 러시아군의 전통인가.
뭐, 쌩 육로로 대륙 반대편까지 보급선을 유지하려면 확실히 빡세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저게 과연 현명한 판단인지는 잘 모르겠다.
저 현지 보급에 시달렸을 폴란드가 안쓰러울 따름이군.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망국이니 이렇게라도 러시아와 인연을 청산한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보통은 그게 맞을텐데, 보복학살까지 당했다니 뭐···.
쯧쯧.
"좋아, 그럼 포강 방위선은 맡기겠네."
아무튼 방면군 사령관 할 인재가 부족했는데 마침 잘됐다.
마세나야 로마냐 담당이고, 장 란은 군단장 할 짬이지 아직 사령관 하기엔 부족하고, 뮈라는···.
[사령관 할 그릇은 못되지.]
어허, 그냥 여포라고 부르면 될 걸 뭘 그리 늘어지게 설명하나.
그나마 마세나가 추천해준 술트라는 친구가 활약해주고 있긴 했는데, 이 친구도 짬이 모자라서 사령관은 뭐 이름도 모르는 용병대장 출신이 맡고 있었지만 뒤무리에가 왔으면 그럴 필요가 없지.
현 프랑스군에 실력 있는 지휘관이야 열 손가락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지만 짬과 계급까지 겸비한 놈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으니까.
"그래, 데려온 병력이 얼마나 된다고 했지?"
"1개 군단입니다."
딱 적당하군.
"그렇다면 임명장을 써줄 테니 지금부터 곧장 전선에 향하여 도착하는 대로 지휘권을 인수하게. 그다음 어찌할지야 자네의 판단에 전적으로 맡기겠네."
권력과 권위에 민감한 놈이니까 내가 공격해라, 공격하지 말라고 하면 응당 그렇게 하겠지만, 그러면 또 너무 내 명령에만 정직하게 따를 거 같단 말이지.
[자네가 이 친구를 충견으로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나중에 가서 전 명령에 따랐을 뿐이에요! 이럴 것 같다고.
[아하.]
"그러니 앞으로는 경과만 제때 알려주고, 도움이 필요할 때나 긴급서신을 보내게. 그럼 여유가 나는 대로 물자건 사람이건 보내줄 테니까."
"···절 이리도 신임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봐봐.
알아서 하라니까 오히려 이놈 얼굴이 썩어들어가잖아.
뿌슝뿌슝.
세상에 자율권을 존중해주니까 질색하는 전선사령관이 있다?
"자네가 아니라 우리 병사들의 애국심을 신임하는걸세."
그리고 말은 제발 똑바로 좀 합시다.
쿠데타 전적에 카이사르 꿈나무를 뭘 믿고 신뢰해.
내가 미쳤냐.
"물론, 이제 와서 병사들에게 헛짓거리를 권한만큼 어리석지는 않을 거라는 의미에서라면 자네를 신뢰하고 있기는 하지."
뒤무리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 나랑 기 싸움하려 들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인수인계하는 내내 뒤무리에는 줄곧 저자세에 눈을 내리깔고 고분고분히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하여간 권력과 권위 앞에서는 순한 양 아니랄까 봐.]
뭐, 덕분에 알기 쉬워서 좋긴 하지만 말이야.
똑똑.
"동지."
그렇게 뒤무리에와 머리를 맞대고 얼마나 떠들고 있었을까.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제노바군, 아니 로마군 전령이 급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잠시 와주셔야겠습니다."
"전쟁 이야기인가? 아니면 민정 이야기인가."
"전쟁입니다."
그래, 후자라면 비서관이 왔겠지.
"그렇다면 여기서 하지."
마침 뒤무리에도 와있겠다, 차기 방면군 사령관이 있는데 나 혼자 듣고 나중에 전달해주는 귀찮은 짓을 할 바에야 한꺼번에 들으면 되잖아.
"걱정하지 말게. 여기 이 친구도 들을 자격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어이쿠, 못미덥다는 눈치일세.
보다 못한 뒤무리에가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매끄러운 남부 방언.
그제야 마음의 벽이 다소 허물어졌는지 전령이 얼굴을 고치더니.
"적 카자크 기병대가 잇달아 해방구들을 습격하고 있습니다."
"습격?"
토벌이 아니라?
"···해방구들을 조금이라도 걷어낼 작정인가? 아니면 단순한 본보기? 어느 쪽이건 아군의 유격전을 견제하기엔 너무 소심한 움직임인데."
뒤무리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저놈들이 작정하고 학살을 벌이고 있다면 그렇게 말했을 거다.
하지만 전령은 우리에게 습격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주는 어감은 전면적인 토벌이나 학살이라기보다는 약탈.
물론 이로 인해 주민들의 삶이 고달파지고 그만큼 민사작전이 어려워지며 적들의 산발적인 습격을 경계하느라 신경이 곤두서는 효과야 있겠지만-.
[벌써 보급이 떨어졌나?]
그러기엔 너무 이른데.
"잘 모르겠습니다."
전령 또한 짐작 가는 곳이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만.
"이 병조림 용기를 아군과 내통한 죄의 증거라 부르며 이를 가지고 있던 이들을 본보기로 삼고 일대의 유리용기를 남김없이 압수해가고 있다고···."
"뭐?"
아니, 무슨 공병장수도 아니고 그걸 왜 주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