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제발 호칭 통일은 합시다. 좀!"
비단 이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거리를 둘러봐도 온통 원색적인 선전지들이 나부끼고 있었고, 비록 마르코는 신문을 읽지 못했으나 그걸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분노하고 또 루스의 만행을 향한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카페에는 온통 바르바로이를 이 땅에 불러온 무책임한 교황과 황제를 향한 힐난으로 가득했고, 조국의 앞날을 근심하는 애국지사들과 이게 다 전 유럽이 우릴 얕잡아보기 때문이라는 울분에 찬 고함으로 가득했다.
어쩌면, 이 도시인들은 글을 읽을 수 있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글이 분노를 퍼트리고,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들이나 아는 사람이 당한 것도 아닌데도.
'우리'가 무시당하고 또 수난당했다는 소식에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분노하며 '우리'의 앞날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토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 한 사람 그 사실을 의아해하지 않았다.
"아하."
그제야 마르코의 의구심 또한 사라졌다.
여전히 이 '우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 그의 마을이 해를 당하거든 지금처럼 이토록 많은 사람이 함께 분노해줄 거라는 사실에.
마을에서 크고 작은 일들이 있을 때마다 으레 그러했듯이 '우리'를 위하여 다 함께 소매를 걷어붙일 거라는 사실에.
늙은 촌장은 '우리'가 되었다는 사실에 난생처음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다.
무자비와 관용
러시아 원정군영.
"이뭔···."
자랑스레 유리용기 몇 수레를 한가득 챙겨온 습격대의 면면을 살피던 수보로프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내가 겨울궁전에 둘러댈 전공을 조작할 겸 유리병도 챙겨오라고 했지 도대체 언제 유리병만 챙겨오라고 했나? 이래서야 도대체 대륙에서 우리 러시아군을 뭐로 보겠느냐는 말이야!"
"하지만 대장."
카자크 기병대장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칭찬해줬는데요."
그래, 칭찬해줬지.
상식적으로 이 머저리들이 유리병만 챙기고 다녔다고는 생각지도 못할 테니까.
그것도 이만한 물량의 약탈품을, 러시아에서는 보석병이나 다름없는 용기들을 있는 대로 실어 날랐으니 다들 이만한 약탈품을 여유롭게 챙길 수 있을 만큼 연전연승하고 있다고밖에는 짐작하지 못했을 거다.
물론 그냥 이번 기회에 한몫 단단히 잡아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 준 머저리들도 없지는 않겠지만.
하지만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
정교회 신앙과 차르를 향한 충정보다도 돈 되는 장사에 관심이 더 많은 카자크 놈들답게 이들은 지금 수보로프의 명령조차 무시하고 유리병만 잽싸게 챙기고 토벌대가 달려오기 전에 빠지고 있었다.
적들을 모질게 괴롭히던 용사들은 매번 미리 진을 치고 대기하던 적 토벌대에게 뒤쫓고 피해를 입고 물러나고, 하라는 습격은 안 하고 유리병이나 줍고 다니던 놈들만 토벌대를 피해 계속 살아남아 전역 후 남부럽지 않게 살 밑천을 잡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아닌 말로 점령지에서의 '즐거움'은 고향까지 저 보석병을 한 보따리 채 들고 가기만 하면 어딜 가나 그보다 더 나은 접대와 대우를 받으며 원 없이 즐길 수 있을 테니.
처음에는 얌전히 명령에 따르던 농노들조차 뒤늦게 카자크 놈들이 챙겨온 저 보석병에 눈이 까뒤집혀서 공병 장사에 뛰어들려는 판에 무슨 군 기강이 유지되겠는가.
"대장도 슬슬 정치 신경 쓰셔야죠."
수보로프의 고민을 동요라 잘못 짚은 걸까.
카자크 기병대장이 한 발짝 내디디며 목소리를 낮췄다.
"솔직히 저 여편네가 차리나 된 것도 억지라는 소리가 수두룩했는데, 설마 이번에도 황태자가 서열에서 밀리겠어요?"
"···그래서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아니 뭐, 그냥 슬슬 황태자께 잘 보여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 말입죠. 좌우지간 엄마가 하는 일이라고는 무조건 싫다고 떼쓰는 철부지 놈이 좀 시끄럽겠습니까?"
과연 카자크 놈다운 무엄하고, 거칠기 그지없는 조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수보로프의 고민을 날카롭게 꿰뚫는 지적이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여제의 바람과는 달리 이제 갓 스물이 될까 말까 하는 알렉산드르가 황태손이 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이미 여제는 사실 죽었는데 계속 발표를 미루고 있는 거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오는 판이고, 그럼 차기 차르는 당연히 황태자 파벨이 될 터.
"벌써 몇 년째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이 정도는 눈감아주셔야죠."
카자크 기병대장이 은근히 덧붙였다.
"지금 위협하는 건가?"
"에이, 그럴 리가 있을깝쇼. 그냥 도리가 그렇다는 거지."
헤실헤실.
실없는 웃음.
'아차.'
그리고 그제야 수보로프는 병사들의 피로감을 떠올렸다.
그처럼 타고나기를 강골에 천생 군인으로서 나고 자란 이라면 몰라도 대다수의 병사들은 억지로 전장에 끌려온 농노.
나아가 카자크 기병대는 사실상 국가 공인 용병대에 가까운 지위의 병사들이다.
한데 폴란드와의 사생결단이 끝난 지 몇 달이나 지났다고 잠시 숨돌릴 여유나 시간도 없이 곧장 대륙 반대편 이탈리아로 달려왔으니 그 피로와 불만이 어떻겠는가?
만일 지금 저들에게서 일확천금의 꿈마저 빼앗는다면-.
"···잘 알겠으니까 저 유리병은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지 않게 하게."
결국 수보로프가 마지못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라리 농노라면 채찍질이라도 할 수 있지, 억세고 거친 카자크라면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습격을 할 거면 토벌대를 피해 다닐 게 아니라 인솔부대를 붙여줄 테니 한꺼번에 뭉쳐 다니라고 전하게. 우리가 무슨 유리 무역이나 하러 온 것도 아니잖은가?"
"예이, 예이. 알겠습니다요-."
퉁명스러운 대꾸였다.
꼭 어투가 아니라도 미간에 잡힌 주름이나 시선 처리가 저 카자크인이 불만에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야 그들 같은 정주민이면 몰라도 카자크에게 싸움을 회피한다는 건 조금도 불명예라고 할 수 없었으니까.
오히려 그들 나름대로 영리하고 교활하게 싸우고 있는데 괜한 간섭질로 약탈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생각할 터.
'하지만 이럼 최소한 우리 러시아군이 우스갯거리가 되지는 않을 거다.'
일단 집단이 늘어나면 그만큼 크고 작은 일탈도 늘어나기 마련이니까.
유리병만 챙기고 다닐 때야 적 추격대가 오기 전에 잽싸게 움직여야 하니 따로따로 움직이는 게 훨씬 유리했고 또 적들도 그걸 권장했겠지만, 이렇게 덩어리째 움직이면 유리병만 챙기고 끝날 리가 없다.
그야말로 피와 살이 불에 그슬려 눌어붙은 지옥도가 펼쳐지겠지.
그리고 그것이 곧 수보로프가 바라는 바였다.
설령 이로 인해 동맹군들이 그를 질타하게 되더라도 겨울궁전은 원정군의 판단을 전적으로 옹호해주리라.
전쟁터에서 유리병이나 챙기고 다니는 가난뱅이들이라며 얕잡아 보일 바에야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는게 나을테니까.
그러니까.
"저 더러운 부역자들에게 공포를 아로새겨주게."
짤막한 지시.
하지만 이 공포라는 단어 하나에 들어간 무수한 지시사항은 눈앞의 카자크인을 헤벌쭉 미소 짓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곧, 러시아 원정군은 혁명이라는 역병을 근절하기 위한 전면적인 토벌전에 착수했다.
***
나폴리시.
"···진짜 바르바로이들인가?"
존 액튼경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자네 말은, 루스 놈들이 적의 선전을 사실로 고쳐주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문명의 요람 이탈리아를 쑥대밭으로 만들러 온 훈족 말이네."
"예, 뭐···."
"저놈들이 지금 제정신이야?!"
저들에겐 정치라는 관념 자체가 없다는 말인가?
안 그래도 여론이 들끓고 있던 와중에 적의 과장된 선전을 사실로 고쳐주면 어떤 파장이 일어날지 정말로 몰라서 저러는 거냐는 말이다.
존 액튼으로서는 도저히 루스인들의 머릿속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저 해방구들이 눈에 거슬릴 테고, 우리가 알아서 해결하겠다며 둘러대기만 할 뿐 언제까지 수습할 거라는 기약조차 없는 신성동맹이 못 미덥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보다못해 본인들도 거들겠다, 뭐 그런 판단 자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한동안 자중하면서 이번 논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나서는 섬세함을 보여줄 순 정녕 없었던 건가?
"그래도 명색이 전쟁을 도우러 왔다는 놈들이 말이야. 공병 장수 노릇을 한 것도 간신히 수습해줬더니···!"
'···아니 잠깐, 설마 이 공병 장수 때문인가?'
그래서 일부러 악명을 쌓고 있는 건가?
그들이 한 행동으로 비웃음을 살 바에야 경멸을 사는 게 낫다는 이유로?
순간 제법 그럴싸한 추론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존 액튼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심심하면 루스 타타르 소리나 듣는 놈들이라지만 설마 그렇겠는가.
차라리 공병 장수라는 모욕이 너무도 치욕적이라서 보복성 학살과 약탈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일 터.
이건 그것대로 추하긴 했지만, 최소한 문명인의 사고방식이긴 했다.
"우선 시민들이 모르게 하게."
귀족들부터야 어떤 바가지가 어디에서 샐지 모르니 하나하나 제어할 수 없다.
어딜 외국 놈이 우릴 제어 하려 드냐고 대들 가능성도 농후하고.
하지만 귀족 의회와 협력하여 시민들을 통제하는 건?
그거야 그가 나서지 않아도 저쪽에서 먼저 협력을 제의할 테니 어려울 게 없었다.
"그냥 뭐, 흔한 이야기 있잖은가. 저 제노바 놈들이 거짓말을 한 거다, 약탈이라면 저놈들이 더하다, 좌우지간 러시아는 우리 동맹국이다. 뭐 그런 거 말일세. 일단 뭐든 좋으니까 둘러대게."
"···그게 과연 통할까요?"
"그러면 이대로 손 놓고 있으란 건가? 그냥 하라면 해! 뭐가 되었건 억지를 부려서라도-."
벌컥.
"가, 각하!"
또 다른 보좌관이 숨을 헐떡이며 관저로 뛰어 들어왔다.
제대로 된 노크조차 없었다.
"또 뭔가?!"
그럼에도 제 책임과 의무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던 존 액튼이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고는 그저 신경질적인 절규를 내지르는 것뿐이었으니.
또 다른 보좌관이 헐레벌떡 숨을 가다듬고는 답했다.
"구, 국왕 폐하께서 지금 당장 징병령 선포를 검토하라고···!"
"···뭐?"
"어, 어쩌죠?"
하필이면 지금?
차마 그 한마디를 내뱉지도 못한 채 존 액튼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니, 뭐, 필요성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당장 얼마 전 장 란인가 하는 프랑스 놈이 이끄는 제노바군에게 나폴리 왕국에서 심혈을 기울여 완편했던 원정군단이 회전 한 번에 박살 난 이래로 한동안 난리도 아니었으니까.
나폴리 왕국군도 프랑스군처럼 개혁해야 한다는 둥, 이제라도 스페인에 무릎 꿇고 평화협정을 중재하여달라고 빌자는 둥, 지금 당장 항복사절단을 보내서 하다못해 시칠리아라 섬이라도 건질 수 있게 해달라고 빌자는 둥.
교황이고 카이저고 우리부터 살자며 비명을 지르던 놈들이 좀 많았나.
당연히 저 페르디난도 또한 그 무수한 소인배 중 하나였고, 그때 존 액튼은 반쯤 공포에 미쳐버리기 직전인 나폴리 왕국의 신료들을 애써서 달래서 영국의 도움을 받아 만일을 대비해 시칠리아 천도를 준비하자는 결론으로 간신히 유도하는 데 성공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뭐?
저 루스 놈들이 여론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와중에 이제와서 징병령을 재검토하라고?
"···염병하고 있군 진짜."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폐하께는 알겠다고만 전해주고."
그냥 알겠다고 해두고 이런저런 핑계나 대면서 시간을 끌면 되는 것 아니겠나.
어차피 저 섭정 시절에 제왕학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국왕이라는 놈이 그 뒤에라도 제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내각은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실무적인 문제로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뭐 그런 식으로 둘러대면 국왕은 짜증이야 낼지언정 결국에는 잠자코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리라.
"지금 당장 왕비 마마를 만나야겠네."
고로 그 순간 존 액튼의 머릿속에 자리한 건 하등 도움이라고는 안 되는 국왕 따위가 아니었다.
이 나라의 실권자이자 그를 총리로 임명한 여왕-아니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
그녀를 한시라도 빨리 알현해야만 했다.
그래야 비로소 제대로 된 대책이라는 게 나올 테니까.
"왕비 마마께서 어디 계시는지 알고 있는가?"
"일정대로라면 아마 지금쯤 피의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계실 겁니다."
"좋아, 고맙군. 다들 뭣들하고 있나? 어서 마차를 준비하게!"
하필이면 피의 성당이라.
존 액튼은 그곳에 안치된 성 야누아리오의 피가 올해에 고체였는지, 액체였는지가 궁금했다.
혹자는 미신에 불과하다지만, 전설에 따르자면 이 성 야누아리오의 피가 액체로 변하지 않고 딱딱히 굳어있으면 나폴리에 재앙이 닥친다고 하였으니.
어쩌면 왕비 마마께서도 왕국의 앞날을 점쳐보기 위하여 피의 성당으로 향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훈족은 물러가라!"
"우리도 프랑스를 본받자! 역시 시민군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건 같은 시민군뿐이다!"
"전쟁 반대! 우리가 왜 봉건영주들만의 전쟁에 휘말려 죽어야 하냐!"
“또 느그들이 전쟁 터트려놓고 무책임하게 시칠리아로 도망치려는 거 우리가 모를 줄 알아?!"
"민주공화국 만세! 국가의 주인은 우리 국민이다!"
와아아-!
거리에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폭도들로 가득했다.
모두 그 장 란이라는 놈에게 나폴리 왕국군이 무참히 패한 뒤 어디선가 불쑥불쑥 나타나기 시작한 비겁한 겁쟁이들이었다.
그동안에는 서슬 퍼런 검열과 단속에 짓눌려 숨도 못 쉬던 놈들이 이제와서 뒤늦게 왕국군을 우습게 보고 왕정을 헐뜯기기 시작한 것이다.
"···하아."
그리고 치안대는 감히 공화국을 논하는 폭도들이 함부로 바리케이드를 넘지 못하게 버티고만 있을 뿐 토벌 따윈 엄두도 못 내고 있으니.
이래서야 저들이 왕국을 얕잡아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존 액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저 멍청한 국왕이 이제와서 뒤늦게 징병령을 찾았는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는 듯했다.
뭐.
"그럴 거면 진작에 허락을 내주던가."
이미 저 루스 놈들이 명분이고 뭐고 엉망진창을 만들어놓은 마당에 대체 누가 징병령에 고분고분히 따르겠는가.
안 그래도 지난 100년간 나폴리의 우방이었던 프랑스 대신에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와 손잡은 것에 불평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마당에 이제는 하다 하다 훈족이라니.
왕국의 앞날이 참으로 어둡다고 내심 자조하며 존 액튼은 나폴리 대성당-별칭 피의 성당에 들어섰고.
"읽어보세요."
마치 그를 기다리듯 입구에 서 있던 왕비에게서 곱게 접힌 편지 한 장을 건네받았다.
"이건···?"
"제 조카딸이 보낸 편지랍니다."
"그걸 대체 왜 제게-."
···잠깐.
"마마, 혹시 이건."
존 액튼이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출신.
그녀의 친모는 그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이며, 현 카이저 프란츠 2세는 그녀의 조카뻘이다.
그리고 물론.
"네, 생각하신 그대로일 거예요."
프랑스의 전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의 친자매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조카딸이라면-.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존 액튼에게 왕비가 덧붙였다.
"이대로 나폴리까지 불타게 둘 수야 없습니다."
"마마, 폭도들을 신용해서는 안 되옵니다."
"그 아이는 그렇지 않다고 하던걸요."
마리아 카롤리나가 쓰게 웃었다.
"스페인처럼 왕정이면서 저들과 공존하고 있는 사례도 있고요."
"하오나 마마."
그게 속국과 다를 게 무엇입니까.
그렇게 반박하려던 존 액튼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반대로 맞선다면?
조금 전 이제와서 징병령을 내려봐야 명분이 없다고 말한 게 누구였더라?
이전부터 이 낙후된 남이탈리아까지 계몽 군주로서 크고 작은 개혁을 시도해온 왕비를 미워하던 귀족들이 고분고분히 따라줄 가능성은?
결국 이대로 가면 왕비의 말대로 나폴리 전역이 불바다가 되는 건 상수였고, 이미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이간질하는 등 모략에 능함을 보여준 적이 국왕과 왕비, 귀족과 농노, 교회와 시민 등으로 파편화된 왕국을 정직하게 힘으로 상대해줄 거라는 건 행복회로에 불과했다.
보나마나 나폴리 땅에 발을 디디는 즉시 서로 불신하도록 갈라치면서 저들은 해방자이자 보호자인 양 포장하려 들겠지.
그럴 바에야.
"시민들이 우리를 등지기 전에 저들을 등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왕비가 존 액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닌가요?"
총리는 대꾸할 수 없었다.
그녀가 변덕을 부리는 게 아닌, 제법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고민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녀의 결단을 존중하면 조국을 등지게 될 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말로 그녀를 만류해야만 할까, 고민하던 중.
똑똑.
"각하."
비서관이 그의 오른손에 또 다른 편지를 쥐여주었다.
"제노바로부터 온 서신입니다."
"뭐, 제노바?"
설마 항복을 요구하고 있는 건가?
정녕 왕비가 적들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놀란 마음에 총리는 황급히 편지를 펼쳐보았고.
"···응?"
그들 로마 공화국을 중심으로 모든 동맹 도시가 힘을 합쳐서 공공의 적-바르바로이를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내자는 동맹제의를 읽게 된 순간.
존 액튼은 지금이 몇 세기인지 달력을 재확인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