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장군
"혼란 그 자체로군."
쭉 정리해보자면 밀라노와 베네치아는 침묵, 사르데냐는 거부에 그나마 나폴리 정도가 호의적.
솔직히 사르데냐는 말이 좋아서 거부지 사실상 외교적 수사로 된 쌍욕을 적어놓기야 했지만.
까놓고 이들 모두가 쌍욕을 건졌어도 이상할 게 없었던 판에 반응이 엇갈린 것 자체가 저쪽도 지금 상황이 여의찮다는 증거다.
일단 가장 커다란 나폴리를 건졌으니까.
공주님이 평소 친분이 있었다고 했을 때도 반신반의했는데 진짜로 편지찬스가 통하네.
이래서 유럽에선 결혼이나 가족사도 외교의 일부라고 하는 건가.
[그래서, 저들에게 본보기로 관용을 베풀 셈인가?]
그럼.
내가 비록 이탈리아 역사는 몰라도 이탈리아 혁명사는 꿰고 있걸랑.
그리고 내가 공부한 이탈리아 혁명사에는 언제나 가장 첫 장에 불완전한 통일을 꼽고 시작한다.
장장 천년을 데면데면하게 살아오던 개별국가들을 너무도 갑작스럽게 통일하다 보니 남북 이탈리아 간에 이런저런 차이점들로 인해 시행착오가 연일 계속되며 공ㅅ-.
[이봐.]
···급진주의 혁명가들이 성장할 양분이 되었고, 다시 이게 무솔리니라는 괴물을 낳았다 뭐 대충 이런 설명들인데.
이건 한마디로 나폴리부터는 별개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소리다.
로마 뽕이나 포코 이론이 퍼지기에도 시간이 너무 짧았던 만큼 여기서부터는 민중의 호응 따윈 꿈도 꾸지 말고 진짜 소수파 인텔리겐치아의 협력에만 의존하면서 지역유지와 똘똘 뭉친 농민들을 무력으로 하나하나 걷어내야겠지.
그리고 그 순간 혁명은 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야 말 거다.
워낙 낙후된 지역이니만큼 이들의 증오와 반발을 짓밟고 통일 이탈리아를 형성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겠지만, 그렇게 해서 완성된 혁명공화국을 과연 제대로 된 나라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마 아니겠지.]
그건 결국 사르데냐가 제노바로 바뀌었을 뿐 원 역사와 별 다를 바 없는 북이탈리아에 의한 식민체제다.
여기선 차라리 형식적인 연방제 통일로 묶어둔 다음 조금씩 차이를 좁혀가도록 두는 게 맞겠지.
원 역사에선 브나로드 열풍이 불었지만, 여기선 내가 이미 포코 이론을 실증 시켜줬으니까.
이 혁명동아리들도 무작정 농촌에 쳐들어가서 깨어나라! 공부해라! 하면서 마구 설치다가 신고당하거나 매 맞고 내쫓기는 브나로드 대신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면서 인간적인 유대를 형성하고 조금씩 계몽시키고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려고 들겠지?
특히 이탈리아계 혁명가들에겐 마치 본인들의 전매특허처럼 받아들여질 테고, 또 그만큼 자주 써 먹힐 거다.
그러니 나폴리의 완전한 계몽은 그때로 미루고, 지금은 저 왕비 마마의 호의를 받아들이도록 하자.
원래부터 부유했던 북이탈리아면 몰라도 남이탈리아는 일단 도시화는 시켜줘야 제대로 된 혁명 세력이 등장할 테니.
[가끔 보면 자네는 맹목적인 건지, 아니면 냉혹한건지 구별이 안 된단 말이야···.]
어허, 현실적인 거라고 해주시죳.
일단 화친조건으로 제대로 된 민선의회 설치와 차등 없는 유산자 투표권, 그리고 미터법 도입을 비롯한 산업규격 통일 정도만 요구하자고.
그래야 저쪽도 도시의 힘이 조금씩 불어날 테니까.
국민개병제야 억지로 하라고 안 해도 알아서 잘할 테니 따로 간섭할 필요는 없을 테고.
톡톡.
아무튼, 생각을 슬슬 정리했으니 이제 그만 행동에 나서야지.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보좌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서 주의를 끌었다.
"우선 나폴리 왕국에 제 명의로 초청장을 보내주시겠습니까? 꼭 이쪽으로 불러올 필요는 없으니 원하는 장소를 골라달라고 전해주십시오."
"···진심이십니까?"
흠, 집주인도 그렇더니 이 친구도 못 믿는 눈치네.
하기야 보좌관이라고 해봐야 내 신혼여행(?)에 함께 따라온 코르데보다도 날 모르는 친구니 당연한 거지만.
"물론 진심입니다. 아, 모쪼록 저쪽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어조에 신경 써주십시오. 만일 이번 만남이 잘 풀린다면 이대로 평화통일이 이루어질지도 모르니까요."
보좌관은 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지시를 싫어하거나 날 미워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뭐라고 할까.
진짜로 답도 없는 몽상가를 보는 눈치라고 할까.
하필이면 이 자리에서 평화통일이라는 표현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에 질려버린 듯한 모습.
하기야 당연한 일이지.
콰콰쾅!
"음, 예포 한번 요란스럽구만."
지금 우리는 역사적인 바로 그 도시-로마를 마주 보고 진을 치고 있었으니까.
이게 다 이탈리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아펜니노 산맥을 기준으로 토스카나와 로마는 한 울타리인 덕분이었다.
아펜니노 산맥 동쪽은 아직도 산골짜기 산마리노 공화국에 돈좌 되어서 옴짝달싹도 못 하는데 서쪽은 그냥 제노바만 벗어나서 토스카나 구릉을 따라 쭉 남쪽으로 내달리기만 하면 곧장 로마였던 것이다.
제노바에 있는 총독궁도 아니고, 피렌체에 설치한 임시행정청사도 아니고, 심심치 않게 포탄이 날아다니는 로마에서 전선을 시찰하며 하는 소리가 평화통일이라니.
중간 과정은 싹 생략하고 결론만 듣는 입장에선 얼마나 황당할까.
[그냥 미친놈으로밖에는 안 보이겠지!.]
칭찬 감사요.
[칭찬 아니네만.]
에이, 자라나는 혁명 꿈나무에게 몽상가나 괴짜라는 평판은 칭찬이지 뭘.
[···꿈나무?]
"정문에서 백기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때마침 장 란이 나를 찾았다.
얼마 전 나폴리 왕국군 군단 하나를 글자 그대로 아작을 내놔서 그런가.
아직 계급은 군단장 그대로였지만 슬슬 이번 로마 공성전을 지휘할 만큼 위상이 올라간 모습이었다.
뭐, 이건 마세나가 순혈 프랑스군이 로마 공성전을 담당하면 모처럼의 여론전이 무너진다고 로마군에 정식으로 군적을 둔 군단장 장 란에게 영광을 양보한 덕도 있었지만.
"거짓 투항일 가능성은?"
슬쩍 장 란을 돌아보았다.
"군인의 대답을 듣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문명인의 대답을 듣고 싶으십니까?"
"둘 다 듣도록 하지.
"군인으로서라면 무조건입니다."
그러나.
"문명인으로서라면 절대로 아닙니다."
장 란다운 시원시원한 대답이었다.
그거면 족했다.
"그러면 진짜 항복이겠군."
세속 군주이기 이전에 전 세계의 교인들을 돌봐야 하는 교황청이 이대로 로마에서 시가전을 치르면서 숱한 사제들이 죽거나 다치고 문화재들이 파괴되는 걸 바랄 리 없으니까.
말로는 악마 숭배자라고, 이신론자라고 욕해도 이미 성심당을 통해 우리가 교권 그 자체를 파괴하려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뻔히 알고 있을 저들이 교황청의 권위를 훼손할 리가 없다.
그건 고작 한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보편교회의 분열을 각오하는 격이니.
"어떻게 할까요?"
"조건은 그대로인가?"
"예."
시민들의 안전과 자산을 보장할 것.
까놓고 말해서 그냥 시내에 들어올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말라는 조건이나 다름없었지만-.
"좋아, 받아들이세나."
이정도야 당연히 예상한 조건이다.
교황청이 자발적인 로마 대방화를 각오하지 않는다는 조건에는 먼저 우리 점령군들이 로마 대약탈을 벌이지 않을 거라는 전제조건이 붙어야 하는 게 당연하니까.
내 안전을 대가로 큰 전투 없이 로마를 차지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지.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네."
"···예? 대체 어디에?"
뚱딴지같은 반응이구만.
"그거야 뻔하잖은가."
지금 저쪽에선 시민들의 안전과 자산을 보장하라고 했지, 출입 금지라고는 단 한마디도 안했다.
그럼.
"로마의 프린켑스로서 로마 시민들을 만나러 가야지."
장 란은 대꾸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질색하는 상판이었다.
***
로마시.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교황령 국무장관 이그나티우스 부스카 추기경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혹여 이 늙은 몸이 잘못 봤을지도 모르니 그대들이 답해주게. 정녕 그 로베스피에르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건가?"
"예."
"그것도 한 줌의 수행원들만 대동한 채 말이지."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미친놈."
부스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닌 게 아니라 다른 추기경 각료들 또한 차마 짬이 안되어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을 뿐 동감이라는 눈치였다.
당장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총포탄을 주고받던 주제에 뭘 믿고 저리 당당히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말인가?
교황청에서 불명예스럽게 사자를 인질로 잡거나 해치지는 않더라도 만에 하나 환영인파 사이에 암살자가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정말 이대로 제 병사들은 성벽 너머에 진을 친 채 저만 입성할 작정인 건가?
"···정말 이대로 성문을 넘게 둡니까?"
다양한 속뜻이 담긴 질의였다.
이대로 인질로 잡아야 하나.
억지를 부려서라도 만류해야 하나.
그도 아니면, 정말로 들여보내야 하나.
이 상황을 이용할 방법이야 글자 그대로 무궁무진했으나-.
"내버려 두게."
부스카는 추기경으로서 교황의 안전을 우선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미 성하께서는 몸을 피하신 지 오래.
이번 투항 또한 따지고 보면 전쟁 초기부터 성하께서 보다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고안된 책략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야 베네치아가 혁명을 일으켰으면 중간에 아펜니노 산맥이라는 자연 방벽이라도 있지, 제노바는 토스카나나 리구리아 해만 넘으면 그다음은 쭉 무주공산이었으니까.
괜히 불명예스러운 인질극을 벌였다가 적들의 분노를 사서 성하까지 난처하게 만들 바에야 차라리 진중하게 협상에 임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버는 게 합리적이었다.
"대신에 혹여라도 시민들이 저 자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게. 알겠나? 우린 지금 적들의 자비에 기대야 하는 처지일세. 저자의 안전에 로마가 걸려있음을 잊지 말도록."
"명 받들겠나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교황청을 찾아온 귀하신 손님의 호위역을 맡게 된 스위스 용병대장이 진중히 고개를 조아렸다.
덜컹-.
불행인지 다행인지.
성문이 열리고 저 붉은 리슐리외가 시가지로 들어서는 와중 그를 적대하거나 욕보이려는 폭도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그를 열렬히 환영하는 폭도들 또한 보이지 않았다.
다만, 온통 구경꾼들로 가득했다.
이 로마 포위전 자체가 전초전 수준에서 마무리되면서 적들을 향한 적의보다도 호기심이 앞섰던 것이다.
"허, 진짜 혼자서 왔네. 배짱도 좋아라."
"생각보다는 작은데···?"
"그것보다 토가는 어디 갔어? 우린 그거 기대하고 왔는데!"
"에이, 이런 자리에서까지 연극에서나 입는 토가나 입고 나타났으면 그게 희극인이지 무슨 정치인이냐."
"참칭자 프랑크 놈은 물러가라! 보편교회 만세!"
"Ave, Augustus! 우리 시민들을 이끌어 저 훈족들을 무찔러 주십시오!"
뒤섞이는 목소리.
그리고 점차 찬반으로 나뉘어 언성을 드높여가는 군중.
'···실수였나.'
뒤늦게 늙은 추기경은 제 선택을 후회했으나, 그렇다고 이제 와 저 광대를 내쫓을 수야 없었다.
하다못해 한시라도 빨리 협상장으로-성 베드로 성당으로 이동하는 수밖에.
그런다고 저 구경꾼들이 흩어지지야 않겠지만, 최소한 멋모르고 저 붉은 리슐리외에게 해를 끼칠 머저리는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주여, 감사합니다."
다행히도 이동하는 와중 월계관을 건네거나 썩은 달걀을 집어 던지려 한 이는 있어도 해를 끼치려고 달려든 암살자는 없었다는 사실에 부스카 국무장관이 성호를 긋던 찰나.
"제 요구사항은 간단합니다."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붉은 리슐리외가 혀 속의 비수를 꺼내 들었다.
"어디 말씀해보시구려."
"이 로마시는 본디 우리 로마 공화국의 도읍이니 이만 돌려받겠습니다."
당연히 예상한 요구사항이었다.
무엇보다 저들이 스스로 로마 공화국을 자칭한 시점에서 이곳 로마에 도읍하려 들 거라는 것도 예상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대로 성하의 유일무이한 영지를 포기할 순 없는 법.
그러니 어떻게든 다른 미끼로 거래를 시도하거나, 아니면 그들은 최선을 다하여 교섭에 나섰으나 적들이 고집을 부리다 끝내 로마를 무력 점거해 전 기독교 세계의 공분을 사는 구도를 연출하려 했던 거지만-.
"그게 다요?"
"다입니다."
"···음."
교회조직은?
당연히 그것부터 트집 잡으려 들 거로 생각했는데.
친 혁명파 사제들에게 내린 파문 조치를 철회하라거나, 거꾸로 반혁명적인 주교들을 파문하라거나, 계몽주의에 기초한 교회개혁을 강요한다거나.
혹은,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라거나.
"이 한 가지만 받아들여 주신다면 그 밖의 사항에 대해서는 귀측의 제의를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그러나 붉은 리슐리외는 단언했다.
이 땅을 돌려받겠다.
딱 그것 한가지 뿐, 더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뭐지···?'
늙은 추기경에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조건을 받아들이겠다며 고분고분히 따를 수야 없었다.
자고로 요구사항이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뭔가 독소조항이 숨겨져 있는 법이었으니.
"한 가지만 확인하리다."
부스카 국무장관이 붉은 리슐리외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조금 전 그대는 돌려받겠다고 하였소."
"사실이니까요."
"그렇다는 건, 그대들의 괴뢰가 진정 멸망하였던 로마의 국체를 계승하였음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오?"
붉은 리슐리외가 답했다.
"예."
짤막하고, 힘 있는 답변.
"그렇다면."
그제야 무언가 보이는 듯하였다.
국무장관이 되물었다.
"우리가 마주 앉아 있는 이 땅의 이름을 말해보시오."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 도시 로마를 지칭하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넓은 범주의 지역.
라치오주, 혹은 교황령.
"라벤나 총독령."
그러나 붉은 리슐리외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잘못된 지명으로 불렀다.
피핀 왕이 교회에 기증하기 전.
콘스탄티니예의 황제가 아직 이 땅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에 이름으로.
"받아들일 수 없소."
설명은 그거면 족했다.
이 땅을 그 이름으로 불렀다는 건 정말로 로마의 국체를-모든 조약과 협의를 승계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야 이제 와선 논외로 치더라도 장장 천년에 걸쳐 누적된 세속권력을 통째로 부정하거나, 집어삼키겠다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이게 항복조약 장이라고 한들.
"당신네 로마 공화국은 서력 1796년에 건국된, 아직 1년도 버티지 못한 신생국에 불과하오."
"그렇습니까?"
붉은 리슐리외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프랑스 정부를 대표하여 여쭙겠습니다."
"말해보시오."
"이탈리아 통일에 찬성하는 코뮌주의 사제들은 현 교황청의 관점에선 변함없이 이단입니까?"
이제서야 본론이 나오는군.
"그렇소."
"코뮌주의에서 주장하는 이탈리아 통일에는 필연적으로 교황령 철폐가 동반되기 때문이겠지요."
"잘 알고 계시는구려."
그런데, 왜 갑자기 이 소리가 나오는거지.
국무장관이 불안에 떨던 찰나.
"그러면 우리 프랑스가 그 이단들을 모조리 거두어들인다면."
붉은 리슐리외가 손깍지를 끼며 천천히 말했다.
"새롭게 뽑힌 성하와 교섭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서방교회 분열.
그럼 이게 단순한 공갈·협박일 리는 없었다.
혁명 이후 성직자 기본법을 보건, 혁명 이전 프랑스의 화려한 전적을 보건 저들은 그러고도 남을 무뢰배였으니까.
"어디 할 테면 해보시구려."
그러나, 그게 목적이라면 진작에 그렇게 했을 거다.
로마에 입성하는 그 순간까지 대립교황이라는 카드를 아껴뒀다는 건 저들에게 이는 목적이 아닌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그 목적이란 가톨릭 교회를 프랑스의, 혁명의 시녀처럼 부리는 거겠지.
그렇다면 아직 교섭의 여지가 남아있다고 믿는 한 무작정 서방교회 분열을 도모할 리 없다.
"당신네가 이 로마를 점령하고 제멋대로 콘클라베를 열겠다면 우리로선 이를 저지할 힘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 뒤 세상에서 당신네를 뭐라고 생각할지 궁금하구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붉은 리슐리외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대체 왜 우리가 콘클라베를 열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또 무슨."
"다시 로마를 대표하여 말해보지요. 이 땅은 지난날 우리가 빼앗긴 라벤나 총독령이고, 당연히 피핀 왕과의 거래를 시작으로 한 일체의 협약은 무효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현 교황청과의 교섭에 실패하면 새로운 성하께서는 로마 총대주교로 돌아가시는 겁니다."
세속군주를 겸하는 교황이 아니라.
늙은 추기경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 어쩌시겠습니까."
붉은 리슐리외가 항복 조약서를 들이밀었다.
"교섭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새로 추대하게 두시렵니까?"
아무래도 선택의 여지는 없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