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페
로마 가톨릭과 다른 기독교 교파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단연 교황이라는 지위 그 자체다.
그 어떤 교파도 가톨릭처럼 최고지도자가 곧 독립영주로서 개별 교구의 운영에 개입할 권리를 가지진 않는다.
심지어 21세기와는 달리 이 시대의 교황청은 유럽 곳곳에 주교령을 거느리며 세속정부보다 정확하게 호적을 파악하고 세수를 거두거나 구휼을 베푸는 등 유교 드래곤의 관점에선 이쪽이 진짜 조정 아닌가? 싶은 행정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비단 기독교 교파만이 아니라 같은 아브라함 계통 종교나 아예 다른 종교들과 비교해도 대단히 이질적인 모습이다.
보통은 세속세계의 최고지도자-가령 황제가 종교 지도자를 신하로 두거나, 종교 지도자가 황제까지 겸하며 제국을 직접 다스리는 게 일반적이니까.
황제의 신하도 아니고, 본인만의 제국을 거느린 황제도 아니면서 타국의 호구를 조사하고 세수를 거두거나 심지어는 사제를 직접 임명하고 파견하는 교황의 지위는 세속지도자로서도 너무나 이질적이다.
명나라 천자가 조선 영내에 본인 소유의 영지를 가지고 그곳에서 세수를 거두며 서울보다 정확하게 인구를 파악하고 조선 국왕 대신 그 땅을 다스릴 사또를 파견하는 격이나 다름없으니까.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야 가톨릭 교단은 원시 교단에 라벤나 총독부가 결합하며 탄생했으니까.]
그나마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삼국지의 한나라다.
가령, 한나라 황제가 자국의 봉신인 위나라 영내에 본인 소유의 영지를 가지고 한나라 백성이 몇명인지 조사하거나 관료를 파견한다.
이 경우 위나라가 한실의 직할지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결과적으로 내정간섭처럼 보이게 된 거지, 한실은 본래 제 영토에 정당한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게르만 봉건영주들이 제멋대로 서로마령을 점거한 것 뿐, 서로마 행정부는 본디 그들의 영토였던 곳에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것에 불과하다.
한데, 북방에서 웬 글자도 모르는 오랑캐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한실이 패망했다.
이 오랑캐들이 저들 멋대로 국경을 찍찍 그으면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내 땅이다-하고 서로 다투기 시작하자 세상에 황제가 될 자격을 갖춘 그릇도 없고,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풀겠다는 성군도 없으며, 선비들에게 글공부시켜주겠다는 명사조차 사라졌다.
그러나, 본래 한실을 위하여 일하던 관료들만은 남았다.
하여 한실에서 국교 지위를 누리던 유교의 우두머리 포성후가 공자의 적손으로서 조정을 수습하고 그나마 말이 통하던 오랑캐에게 적당한 감투를 씌워줘서 그의 보호를 받으면서 오랑캐들을 교화하고 백성에게 구휼을 베풀기 위한 낙양 조정을 재건했으니.
오랑캐들과 도적으로부터 낙양 백성을 지키고 천하를 평안케 한 공을 인정받아 그가 곧 낙양 조정의 우두머리이자 낙양 일대를 대대로 다스리는 영주가 되었다.
이것이 종교 이야기와 동로마를 최대한 배제한 교황령의 개략적인 건국 배경이다.
[···음,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그거야 유럽사 보는 유교드래곤도 마찬가지니까 대충 넘어가고.
하여튼 로마 가톨릭이 계몽주의자들과 툭하면 사생결단을 벌여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계몽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로마는 이미 천년도 전에 패망하여 사라진 나라다.
당연히 이 땅의 주인은 그들이 나고 자란 조국이며,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문화와 혈연에 기초한 민족이다.
아무렴 처음에는 그들이 침략자였건 어쨌건 건국 과정에서 그 흔한 정복 전쟁 한번 안 치른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그들 민족이 이 땅에 뿌리 내린 지도 어느덧 장장 천년이 지났고, 오랑캐로서 이 땅에 등장했어도 이제는 어엿한 문명인으로서 자국만의 관료제를 거느리고, 백성들을 교화할 역량을 갖추었으니 가톨릭 교회는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이다.
결국 가톨릭에서 말하는 교화가 종교교육인 이상 필연적으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보단 맹신을 우선하게 만드니까.
하지만 로마 가톨릭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오랑캐들이 억지를 부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야 서로마 제국이야 천 년도 전에 패망했을지라도 라벤나 총독부로부터 이어진 서로마 행정부는 천년 넘게 로마 가톨릭이라는 형태로 존재해왔으니까.
여긴 본래 그들의 영토였고, 또 그들이 다스려왔으며, 멋대로 기어들어온 오랑캐들 글공부시켜주고 구휼미 먹여가며 기껏 문명인으로 고쳐주었더니 이제 단물 다 빨았으니까 짐보따리 싸 들고 꺼지라는 소리다.
고로 내가 계몽주의자를 대표하여 교황직을 완전히 폐하고 이를 로마 총대주교로 대체하겠다는 건 가톨릭 교회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라벤나 총독부와 교회조직을 하나로 합쳐야 비로소 로마 가톨릭이지, 교회조직만 달랑 남은 로마 총대주교는 그냥 로마 국교회의 우두머리에 불과하니까.
세속세계에서야 사라졌어도 영적 세계에서는 가톨릭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유지되어온 서로마 제국이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해체되는 것이다.
새로이 태어나려는 국민국가냐, 흔적만 남은 보편제국이냐.
이들 중 누가 옳고 그르냐를 인제 와서 따질 생각은 없다.
이것도 구태여 분류하자면 정명제와 반명제니까.
그리고 내 합명제는 이거다.
"보편연합(Union Universelle)?"
"그렇습니다."
혼란스러워하는 국무장관을 향해 귀띔했다.
"국가와 민족의 구분 없이 보편윤리 실천과 회원국 간의 항구적인 평화와 공영을 도모하는 범세계적 상설외교기구."
그제야 장관의 눈이 조금이나마 커졌다.
"···라고 말하면 어떤 어감이 드십니까?"
"허무맹랑하시군."
"그렇게도 보이겠지요."
이 시대 사람들은 국제연맹이나 UN을 모르니까.
그렇지만.
"종교 이야기만 빼면 이 허무맹랑한 직함이 본디 우리 서방세계에서 당신들 교황청이 차지하고 있던 정확한 지위입니다. 아닙니까?"
장관은 답하지 않았다.
애써 평정심을 지키려 노력하는 눈치였다.
그야 정답이니까.
저 보편윤리라는 건 유럽에선 결국 기독교 윤리의 다른 표현이고, 이 시대의 세계는 아무리 넓혀봐야 대서양이나 중동까지다.
그렇다고 오스만 튀르크가 장악한 중동이나 러시아가 프랑스 주도의 국제회의기구에 관심을 보일 리도 없으니 중세 이래로 유럽인들이 관습적으로 기독교 세계라 부르던 영역-다른 말로 서방세계밖에 남지 않는다.
무엇보다 회원국 간 항구적 평화를 도모하는 외교 기구라는 건 이 무대에선 봉건영주들에게 두들겨 맞을 걱정 없이 아가리로만 싸우면 된다는 소리.
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다른 이름이 바로 보편교회이니, 보편연합이라는 이름은 상설외교협의기구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교권을 존중하겠다는 소리다.
다시 말해서.
"도대체 언제까지 이 기독교 세계가 쪼개지고 나누어져 가는 걸 보고만 있으실 겁니까?"
로마 가톨릭의 권위 아래 국민국가들의 상설회의기구로서 서로마 제국을 재건하겠다.
포성후의 낙양 조정에 한실을 돌려주겠다.
"민족주의라는 건 문명의 역병입니다. 전날까지만 해도 서로 사랑하고, 격식 없이 어깨를 나란히 하던 친구를, 가족을 어느 날 갑자기 남으로 재단하고 구분 짓게 만드는 끔찍한 괴물이지요."
"설마 계몽주의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대체 왜 제가 천년도 전에 망한 로마를 꺼내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 세상 사람들이 국제주의를 알지 못하니까.
내가 백날 왜 저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지 설교해봐야 이해하지 못하고 끝내 서로 증오하고 다투게 될 테니까.
아가페 같은 종교적 관념을 빌리지 않고서는 인류애를, 지구촌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저는 이 민족이라는 허구가 기독교 세계를 갈가리 찢고, 나눠놓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해야 할 형제자매들이 우리와 너희를 구분 짓고 저만 피해자고 너흰 가해자라며 손가락질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저들을 끌어올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우선 100년도 채 남지 않았을 제한 시간이 문제고, 한정된 물자도 문제며, 전 세계를 아우를 수 있을 만큼 무한하지 않은 내 권력과 권위도 문제다.
고로.
"이 세상엔 아직 당신들이 필요합니다."
내가 기대치를 낮추면 된다.
종교적 관념을 빌려오지 않고서야 인류애를 설명할 수 없다면 저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종교를 끌어오면 된다.
아직 만들어진 적도, 구체적인 개념이 제시된 적도 없는 세계 단일체제를 제시하기엔 이르다면 천 년 전 엄연히 이 땅에 실재했던 대륙 단일체제를 끌어오면 된다.
민족주의라는 극독 없이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낼 수 없다면, 민족을 정의하는 정체성 속에 보편성을 내포하도록 하면 된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성은 법을 어기지 말라고만 할 뿐, 타인을 제 가족처럼 어여삐 여기고 자선을 베푸는 건 감성의 영역이니까요."
"우리가 무엇을 해주길 원하시오?"
늙은 추기경이 깍지를 끼며 되물었다.
"그리 거창하게 말씀하시는 것 보니 이미 역할 배분까지 준비해오신 것 같은데."
"오, 그야 물론이지요."
톡톡.
회의장.
성 베드로 대성당을 가볍게 검지로 두드렸다.
"로마시를 돌려받는 대신에 교회조직은, 바티칸 시국의 독립성은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보증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보편연합의 의장국으로서 우리 세속국가들이 듣기 싫어할 입바른 소리를 해주십쇼. 인권침해다, 전쟁 좀 벌이지 마라, 이웃끼리 차별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제발 수전노처럼 굴지말고 자선 좀 늘려라처럼. 원래부터 여기서 잘하시던 일들 있잖습니까."
"꼭 남의 일처럼 말하는군."
국무장관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러면 이 자리를 빌려 십계명부터 읊어드리지. 간음하지 마시오."
"흠,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까? 프랑스어 성경을 구경해본 적이 없어서 미처 몰랐네요."
이 시대의 모든 가톨릭 성경은 라틴어로 적혀있으니.
"그렇지만 시정할 바에야 그냥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겠습니다. 다행히도 이미 우리 프랑스인 형제자매들로 가득 차 있을 테니 외롭지는 않겠네요."
"하여간 프랑크 바르바로이 놈 아니랄까 봐."
허.
실없는 웃음소리.
"농담은 이쯤하고, 한 가지만 더 확인하리다."
늙은 추기경이 정색하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만일 신성로마제국에서 참여하려 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소."
"기독교 세계를 하나로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겠지요."
그렇지만.
"참여할 수 있을까요?"
지금 신성로마제국 선제후의 절반이 신교도인데 걔네들이 교황청이 명목상 의장국인 보편연합에 참가한다고?
뭐, 이 세상에 불가능할 건 없겠지만 솔직히 본인들에게 그럴 열의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가톨릭 영주들만으로 반쪽짜리 참가라면 더는 신성하지도 로마도 아닌 제국임을 자백하는 격이고, 그렇다고 개신교 영주들까지 참여시키려면 30년 전쟁 한 번 더 치러야 할 테니까.
[아마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도 정식으로 건국해야 참여할 수 있지 싶은데.]
"좌우지간 다른 사람들이면 몰라도 저는 반대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습니다. 비단 합스부르크만이 아니라 영국이나 러시아에서 가입한다고 해도 반대하진 않을 겁니다."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복음 13장 34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늙은 추기경이 성호를 그으며 화답했다.
"요한복음 13장 35절 말씀이지요."
"계몽주의자란 놈이 아가페 타령이라니. 다들 사기치지 말라고 하겠군."
"저는 신의 실재를 믿습니다."
박민혁이 존재함으로써 영혼의 존재 또한 실증되었으니까.
그게 아브라함계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일지는 몰라도 좌우지간 신이라고 불려 마땅한 초월적인 섭리나 초자연적 존재도 실재하겠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늙은 추기경과 눈을 마주쳤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추기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정교분리로 해석할 수도, 정교 불가침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중의적인 경구였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둘 다일 테고.
"알겠소. 그럼, 성하께 그리 전해두리다."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고 있지요."
"글쎄,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게 좋으실 텐데."
늙은 추기경이 껄껄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까지의 끝 모를 경계심과 적의는 다소나마 가신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당장은 그걸로 족했다.
***
베르사유궁.
"아쉽게 되었군."
쯧.
프로방스 백작이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이참에 한 번쯤 더 갈아치워 주는 게 나았을 텐데."
"···농담이시죠?"
"아니, 진담일세. 이 기회에 이 유럽 대륙의 주인이 누구인지, 누가 진짜 로마의 적통인지, 우리 프랑스가 얼마나 강성한지 보여줬어야 했는데. 저 친구가 너무 쉽게 쉽게 가려 하는구먼."
더할 나위없이 국수주의적인 발언.
"아아, 확실히 그렇네요. 이참에 이제부턴 누구도 우리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걸 단호히 보여줬어야 했는데. 쩝, 아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성모독적인 발언에 경악하던 농민대표는 프로방스 백작의 설명에 한치의 미혹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곧 성심당이 그가 원하는 대로 우익 포퓰리즘에 가까운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음을 한눈에 보여주는 사례였다.
물론 신앙 같은 전통적인 요소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만에 하나라도 교황 성하께서 이들의 눈앞에 나타난다면 누구나 모자를 벗으며 경의를 표하고, 눈물을 쏟으며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그 기적에 감사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보다도 위에 '우리'가 있다.
먼저 코뮌이 있고, 성심당이 있으며, 프랑스가 있으며, 그다음에 교황청이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그걸 확인했으면 족했다.
프로방스 백작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아쉽게 되었지."
그랬으면 그가 심혈을 기울여 골라둔 대립교황 후보를 내세워 보다 본격적이고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련만.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비오 6세야 이미 여든을 바라보는 몸이니 몇 해 버티지 못할 테고, 그때 그가 골라둔 후보를 올려두면 그만이기야 하겠지만.
'그게 대립교황과 같을 리가 있나.'
자고로 대립교황이란 교회조직 그 자체를 난도질하고 해체하는 데에 이의가 있는 건데.
이참의 서방교회에 균열을 일으켜서 기독교 코뮌주의 운동의 시조이자 유일무이한 지도자로서 지위를 굳히려 했던 프로방스 백작으로서는 내심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저 부패할 수 없는 상간남이 거기까지 헤아린 걸까?
문득 그런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이건 과대망상인 듯했다.
그보다는 그냥 직접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니 말로 해서 해결될 것 같으니 적당히 넘어가 준거겠지.
지난날 그를 살려줬던 것처럼 말이다.
"···참, 희한한 놈이란 말이야."
"예?"
"아니, 혼잣말일세."
프로방스 백작이 비처럼 흐르는 그의 육수를 닦으며 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만일 그였다면 구태여 정적을 살려두진 않았을 것이다.
설령 치열한 교섭 끝에 죽이지야 않았더라도 이렇게 자유로이 풀어주지는 않았겠지.
그렇지만 저놈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교황청까지 살려두려고 하고 있지.
'그러면 합스부르크는?'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해답은 금세 나왔다.
경우에 따라 다르다.
대화해보고, 말이 통할 것 같으면 살려주겠지.
그렇다면.
"슬슬 우리 예수회 친구들을 움직여보게."
딱.
프로방스 백작이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우리 친애하는 보르본 형제들이 버르장머리 없는 지주 놈들에게 고역을 겪고 있는 듯하니, 친지로서 어찌 모른척할 수 있겠는가? 저 피부색 따위로 사람을 재단하는 못된 놈들에게 조물주께서는 피조물을 차별 없이 사랑함을 알려주세나."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전하."
척. 척.
농민-사제 대표들이 일제히 선하신 섭정을 위하여 제자리에 무릎 꿇었다.
이제 머지않아 여기에 인디오-메스티소들까지 추가될 테지.
성심당은 무엇 하나 욕심내지도, 신도들끼리 구분 짓거나 차별하지도 않으셨던 교부 시절의 기독교 공동체 정신을 결코 잊지 아니하였으니.
지난날 무수한 파간 신앙들이 그러했듯이 성심당의 적은 누구보다 낮은 곳에 임하여 가진 것을 서로 나누고, 서로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는 목자들을 당해낼 수야 없으리라.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은 어린양의 해방을 위함일지니."
곧, 해방신학인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