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143/154)

근왕

마드리드시. 

"자, 잠깐!" 

총리 고도이가 다급히 손바닥을 펼치며 미겔 이달고 신부를 제지했다. 

"이 사람아, 입 조심하게! 아무리 그래도 국왕 폐하의 신민이라는 사람이 입을 함부로 놀리면 쓰나!" 

"왜 우리가 국왕 폐하의 신민입니까?" 

이달고 신부가 코웃음을 쳤다. 

"노예지요. 권리라고는 무엇 하나 누리지 못하고 본국의 자비에 기대며 책임만 짊어져 왔는데 이게 어떻게 신민이라는 말입니까? 자고로 바깥세상에 나가 세상 공부를 할 수 없는 노예의 교육은 주인의 몫이니, 만일 제가 주제넘었다면 이 또한 올바르게 계도하지 못한 주인의 죄가 아닐는지요." 

"아니, 이놈이 그래도···!" 

쿵쿵. 

차마 내쫓을 수도, 입을 다물게 할 수도, 그렇다고 수긍할 수도 없는 과격한 언사에 고도이가 있는 힘껏 가슴을 두드렸다. 

그야말로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나마 이번 식민지 사태 덕분에 국왕과 왕비의 총애에 의지하지 않고 저만을 바라봐줄 제 사람들이 생겼다고 좋아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 멋모르는 식민지 놈이 주제넘게 왕권을 모독하고 있으니 원. 

"왜 아무런 의무도, 책임도 다하지 않는 국왕이 무제한의 권력을 누린다는 말입니까?" 

신부가 되물었다. 

"이봐." 

"제 말 틀렸습니까? 제가 뭐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선왕 카를로스 3세께서는 누구보다 근면하고 책임감으로 똘똘 뭉치신 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도 그분의 신성한 치세를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분이 절대권력을 누리는 것 또한 당연시되었습니다." 

하지만. 

"현 국왕 폐하께서는 어떻습니까?" 

고도이는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아무렴 이제와서 나태왕의 악명이야 두말할 필요가 있으랴. 

그 덕택을 톡톡히 본 입장에서 배은망덕하게 굴 수 없었을 뿐. 

현 카를로스 4세의 치세는 비단 공화주의자의 관점이 아니라 군주주의자의 관점에서 봐도 기형적이고, 흠결로 가득했다. 

"당장 식민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는데도 저분은 대책이나 수습은 온통 군부와 내각에 떠넘기고 사냥에만 열중하셨지요. 거기에 런던이 배후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도 그냥 근심하는 시늉만 하셨습니다." 

"이봐, 그러니까 적당히-." 

"이탈리아는 또 어떻습니까? 동생 폐하께서 다스리시는 나폴리 왕국과 교황 성하께서 계시는 교황령이 전화에 휩쓸렸다며 다들 근심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와중에도 사냥 하느라 코빼기도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이달고 신부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자가 양 떼를 위로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 공포가 가시겠습니까? 대책을 내놓으시지도, 사태를 수습하시지도, 그렇다고 신민을 위로하지도 않으시는데 이를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인이라고 부른다면 그거야말로 신성모독이 아닐는지요." 

그리고 넌 왕권모독 중이지. 

식은땀이 비 오는 듯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이를 도대체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까. 

가장 좋은 건 모든 죄일랑 미달고 신부에게 떠넘기고 앞장서서 기소해버린 다음 저는 모르는 체하는 것이다. 

실제로 고도이는 다만 그의 메스티소 군단들이 활약할 수 있도록 목표의식을 심어주고 자원입대를 독려한 미달고의 공을 높이 사서 이 대서양 너머 마드리드까지 초청한 것뿐, 딱히 국왕에게 날 선 비판을 가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 경우 그의 유색인종 군단들까지 덤터기를 뒤집어쓸 확률이 지대하다는 게 문제였다. 

아무렴 그들에게 있어서 인종 평등과 노예해방을 부르짖는 미달고 신부는 그야말로 정신적 지주이자 이 땅에 재림한 구세주나 다름없었으니. 

고도이가 직접 지휘하거나 만난 적은 없더라도 그가 처음 만들자고 주도하고 다들 그의 사병조직이라 생각하는 유색인종 군단이 옥에 갇힌 미달고 신부를 위하여 궐기한다면? 

그럼 제아무리 부정해봐야 세간에서는 고도이가 배후에 있는 것 아니냐는 합리적인 의심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일랜드 도발에 눈이 까뒤집힌 영국이 라틴 아메리카 반란에 전면 개입을 단행하면서 금방 끝날 줄만 알았던 식민지 전쟁은 갈수록 늘어지고 이들 유색인종 군단 또한 점차 거대해져 가고 있으니까. 

이 유색인종 군단과 라틴 아메리카의 가톨릭 교단, 그리고 계몽주의자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고도이가 국왕을 배신하려는 것 아니냐는 음모론도 멋모르는 이들에겐 제법 그럴듯해 보일 수 있었다. 

'내가 왜?!' 

물론 이 소인배 상간남은 그럴 생각도, 능력도 없었지만 말이다. 

애당초 한 줌에 지나지 않는 계몽주의자와 본국 발가락 때에도 못 미치는 대서양 건너의 식민지 따위로 정가를 장악하겠다는 것 자체가 멋모르는 이들이나 할 미친 소리기도 했고. 

후우-. 

"좋아, 우리 이야기 좀 하지." 

고도이가 손깍지를 끼며 사뭇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물론 겉보기에만 그럴 뿐, 실제로는 대화보단 궤변과 변명을 위한 밑 준비였지만 말이다. 

"자네 말이 적어도 틀리진 않았네. 그렇지만 이런 다들 듣기 싫어할 비판이나 늘어놓으려고 나와 독대할 귀중한 기회를 날릴 작정은 아닐 것 아닌가.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게 뭔가?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는 말이야." 

프랑스처럼 코뮌 민주주의 타령을 원하는 거라면 마드리드의 민의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면 될 거다. 

식민지들이 독립국이나 다름없는 자치를 누리길 원하는 거라면 빈약하기 그지없는 스페인보다도 더욱 빈약한 식민지들의 현실을 지적하면 될 테고. 

결국 현 체제가 최선은 못되어도 차악이다. 

너희가 자립해 나가봐야 저 미국 놈들처럼 자체적으로 공장을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플랜테이션 원툴이니 지금보다 상황이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나아지지는 않을 거다. 

그래, 딱 그 정도면 족하다. 

어차피 마드리드 사정이라고는 1도 모르는 식민지 촌놈이 대책 없이 입바른 소리나 지껄여봐야-. 

"왕권이 책임을 지도록 해주십시오." 

···응? 

"잠깐,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과연 그리스도께서 지금처럼 무책임한 치세를 긍정하실까요? 왕권이 진정 천상의 신께서 내리신 거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힘보다 견제받고 또한 검증받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신이 위임하신 왕권에 의하여 벌어지는 실정과 폭정은 곧 신성모독이 되니까. 

절대권력은 절대적이기에 더더욱 절대적인 견제와 책임을 전제한 상태에서 집행되어야만 한다. 

그래, 마치 지난날 예수회 선교사들이 소식을 전해준 머나먼 대륙 반대편 극동의 전제군주들처럼. 

"그 정책이나 법이 부도덕하지는 않았는지, 혹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소외된 어린양이 있는 건 아닌지, 세수가 부당하거나 과도하여 하느님의 백성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는지, 그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주님의 목자로서 책임을 다했는지." 

이달고 신부가 손가락을 차례차례 펼치며 한가지씩 짚어나갔다. 

"이토록 엄격한 기준에서 집행되어야지만 비로소 땅에 떨어진 왕실의 명예가 바로 설 것이며 국왕 폐하께 통치를 위임하신 그리스도의 이름 또한 더는 더럽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게 뭔 개소리야. 

고도이로서는 그리 대꾸하고 싶었으나, 마땅한 논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야 이달고가 저 혁명 타령하는 폭도들의 논리를 끌어온 건 아니었다. 

국가의 주권은 국왕에게 있음을 분명히 밝혔고, 이 왕권은 신이 위임하신 것임을 전재했으나, 다만 그에 걸맞는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왕권이 그토록 신성하고 지엄한 건 그가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인이기 때문이니 누구보다 도덕적이고 자기희생적이어야 하다는 논리. 

아무렴 지금 나태왕 카를로스 4세를 보라. 

그 누구의 비판도, 견제도 받지 않게 된 결과 책임을 방기하고 저는 쾌락만 누리면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잖은가. 

당연히 공공선과 계몽을 위함이라는 절대 군주정은 시골 촌부조차 비웃는 우스갯거리가 되어버렸고, 이 절대권력을 자격 없는 나태왕에게 위임했다는 그리스도까지 꼴이 우스워졌다. 

다시말해 누군가는 절대왕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에게 선정을 베풀도록 충언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소리였고-. 

'···어, 이거 좀 솔깃한데.' 

그제야 고도이의 눈에도 이 이달고 신부가 이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논리를 전개하기에 따라선 국왕의 명령이 기준에 미달하거나 부당하다면 신하가 이를 올바르게 정정할 것을 당당히 권할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 

지금 같은 나태왕의 치세에선 왕권신수설을 긍정하면서도 총리인 고도이가 입헌정이나 다름없이 나라를 굴릴 수 있었다. 

아무렴 이미 50년여를 저렇게 살아온 나태왕이 이제 와 옆에서 충언을 아끼지 않는다고 새사람이 될 리가 있는가? 

무엇보다 이달고 신부의 논리가 그간 고도이와 원수졌던 귀족들에게도 기껍게 들릴 거라는 게 중요했다. 

꼭 제 봉건적 특권을 자꾸만 침해하는 게 눈에 거슬려서가 아니라도 제발 저 왕권으로 조금만 더 나라를 위해주기를, 국왕이라면 국왕답게 스페인의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봉사해주기를 기대하는 애국자들도 얼마든지 있었으니. 

요즈음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배경에는 마드리드의 책임 또한 없지 않음을 시인하고 절대군주정의 개혁을 핑계삼아 이들을 회유한다면? 

권력 그 자체는 제한적인 상황에서 더욱 절대적으로 발휘되지만 이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엄격한 기준과 책임을 정한다면. 

프랑스의 꼭두각시라는 비판을 피하면서도 그간 국왕과 왕비의 총애에 전적으로 기대야만 했던 고도이 정권의 기반을 보완하고, 근왕주의자들의 불만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을 터. 

"좀 더 자세히 말해볼 수 있겠나?" 

고도이가 천천히 자세를 고치기 시작했다. 

이 소인배 상간남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 전제권력을 위한 기준을 정하고 견제 장치를 마련한다는 게 얼마나 막대한 행정력을 요구로 하는지. 

스페인처럼 광활한 식민제국에서 무한한 책임을 짊어진 전제군주 본인의 초인적인 인내심과 성실함이 없이 이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본국에 행정력을 집중하기 위하여 멀리 떨어진 변경에선 그만큼 지역의 자율성을 존중해주게 된다는 걸. 

"좋습니다, 얼마든지요." 

아직은 이 인자하게 미소 짓고 있는 신부 한 사람만이 짐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 

라치오주 라티나시. 

"반갑소. 그-." 

나폴리 왕국의 사절단 대표가 곁에 선 여인의 눈치를 잠깐 살피더니 조심스레 소개를 마무리 지었다. 

"···존 액튼이라고 하오. 일단, 총리였소." 

시녀-라기엔 베일을 뒤집어쓰고 있는 게 꽤 귀한 몸인가 본데. 

그러면 정부인가? 

흠, 이 친구가 영국인답지 않게 풍류를 아는구만. 

[유교 드래곤 어디갔어?!] 

긍까 걘 죽었대도. 

"그렇다는 건 이제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거야 오늘 회담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서 다르겠지." 

하아-. 

영국인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었다. 

"모쪼록, 관용을 베풀어주시기를 기대할 따름이오." 

"그거야 제게 달린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그쪽에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일단 총리가 우리군 점령지까지 직접 나온 것 보면 나름 진지하게 항복하려는 것 같기는 한데. 

결국 모를 일이지. 

더더군다나 이 양반은 외국인이고 나폴리 국내에서도 영 인기가 없는 총리로 유명하니 그냥 버리는 패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 아직 교황청에서도 묵묵부답이고 말이지.] 

정확하게는 국무장관 할아버지나 로마의 도시귀족들은 내 제안에 호의적-인 수준을 넘어서 후자는 아예 날치기 통과하려고 들었다-인 것 같기는 한데. 

어디에 숨으셨는지 도통 보이질 않는 교황 성하께서 고집을 부리시는 모양이다. 

바티칸 시국이고 나발이고 로마시를 통째로 빼앗기면 그게 위성국이지 어떻게 자주독립국이라고 할 수 있냐고 반박하시던데-. 

[하여간 전 유럽에서 알아주는 수구꼴통 아니랄까 봐 사제라는 놈이 잿밥에만 집착하기는.] 

어허, 함부로 그런 말을 하면 못써. 

천벌 받으면 어쩌려고. 

그냥 우리의 신뢰도가 아직 여기까지인가 보다하면 되는 거지. 

솔직히 교회 입장에서야 솔깃할지 몰라도 교황님 개인에겐 좌우지간 본인의 영지를 뺏어가겠다는 우리가 예뻐 보일 리도 없고. 

여차하면 바르바로이로부터 시민들을 지킨 공으로 교황이 된 로마 총대주교가 훈족을 불러들여 시민들을 위기에 빠트렸는데 대체 무슨 자격으로 아직도 교황을 자칭하냐?고 여론몰이에 나서면 그만이다. 

그걸로 항복하면 끝, 아니면 그 영감님이 끝인걸로. 

[···잠깐, 말 잘못하면 천벌 받는다면서?] 

고작 이 정도로 천벌 받았으면 느그가 성직자 기본법 했을 때 파리는 진작에 소금기둥이 되었겠지 아마? 

"자, 그러면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여하튼 화친하러 온 귀하신 손님들은 바깥에 세워두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잡담은 이쯤으로 하자. 

그러고 보니 영국인이니까 이 양반도 홍차를 타 줘야 하나? 아니면 그냥 커피면 되려나.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부터 시작해서 한창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러면 마마." 

드르륵. 

보는 눈들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존 액튼이 그가 데려온 여인에게 의자를 양보했다. 

···마마? 

"소신은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꾸벅. 

여인이 우아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누구일까를 짐작하는 데에는 그 대화 하나면 족했다. 

"설마하니 왕비께서 직접 나오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만." 

"제가 사람들을 설득했으니 당연히 제가 책임을 져야지요." 

그리고.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 아이가 그리 감싸주는지도 궁금했고요."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가 내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쳤다. 

감싸줬다-라는 건 처음부터 그리 고운 소리가 나온 건 아니라는 거겠지. 

이론이 중간중간 숱하게 오갔고, 그런데도 설득되어서 이 자리를 받아들이기를 결심했다는 이야기일 터. 

그 자체야 놀라운 것도 없지만. 

"어디까지 생각하시고 나오셨습니까?" 

달리 말하면, 어디까지 잃어버릴 각오로 나오셨느냐. 

"글쎄요." 

왕비가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과연 자매라는 듯 언젠가 보았던 마리 앙투아네트와 쏙 빼닮은 웃는 낯이었다. 

우리 공주님도 똑같았던 것 보면 진짜 유전자 한번 막강하구만. 

"일단 왕국은 지킨 것 같네요." 

"너무 성급한 판단이라고는 생각하진 않으십니까?" 

"이야기는 들었어요." 

마리아 카롤리나가 덧붙였다. 

"로마시를 파괴하지 않기 위하여 당신의 개선식마저 포기했다고." 

"···음, 대체 왜 다들 저희 혁명군을 반달리즘을 못 해서 안달이 난 야만족이라고 생각하시는 건지 저로서는 도통 모르겠군요." 

"그래서 지금 노트르담 대성당이?" 

넵, 폐허죠. 

원래도 혁명 이후로 이래저래 약탈당하고 파괴된 마당에 저번에 내가 종탑까지 무너트렸으니 뭐. 

그나마 성심당에서 재건해보겠다며 성금을 모으고 있기야 한데, 바뵈프의 평등파는 물론이고 급진당에서도 그냥 저대로 마구간으로 쓰자는 의견이 대세다. 

문화재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때 내가 잠깐 맛뵈기로 당했던 것도 그렇고 워낙에 성당에서 쌓은 업보가 쎄서리. 

"어머나, 수치심이라." 

왕비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아이 말대로 최소한 당신은 야만인은 아닌 것 같네요." 

"자꾸 제 동지와 조국을 야만인으로 매도하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그렇지만 당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지난날 로마시에 입성했다면 달랐겠지요?" 

[커흠.] 

···젠장, 부정이 안 되네. 

마라나 바뵈프였으면 진짜 불과 채찍으로서 정화하려 들었을 것이고, 당통은 보나마나 돈이 되는 거라면 모조리 약탈하고 봤을 것이고, 나폴레옹은 본인이 주도하진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병사들이 즐거움을 누리는 걸 적극적으로 단속할 인물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약탈하거나, 단죄하거나 했겠지. 

프로방스 백작이야 뭐, 즉석에서 콘클라베 열고 새 교황 선출한 다음 왕이나 황제가 되어서 걸어 나갔을 양반이고. 

그러니까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좀 불쾌하군요." 

감히 내 앞에서 비겁하게 팩트로 승부하다니. 

정정당당하게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자! 

"이게 정말로 우리와 화친하기 위하여 찾아온 손님의 언행입니까?" 

"그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꾸벅. 

마리아 카롤리나가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고, 다시 천천히 들면서 말하기를. 

"다만, 머지않아 일가친지가 될지도 모르니 미리 인품이라도 봐두고 싶어서요." 

···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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