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붕괴
[이봐.]
그래, 알고 있으니 염려 마셔.
"미리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왕비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며 한 마디 한 마디 분명하게 전했다.
"전 엘레오노르와 이혼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중혼죄를 저지르는 것도 사양이고.
무엇보다 저 사람은 합스부르크에 저 사람 남편은 부르봉이잖아.
양쪽 모두 봉건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가문들이니 어느 쪽으로 엮이건 난 더는 혁명가로 남을 수 없다.
설령 나 자신이 그렇게 자처하더라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일가친지를 운운하시는지 저로선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흠, 당신이 상대라고 말한 적은 없는데요."
"···제 아들놈은 이제 막 젖을 뗀 갓난아이입니다만."
[오, 주여.]
아직 제 이름도 쓸 줄 모르는 아이의 약혼자를 벌써 정해준다니.
이것이 봉건귀족들의 가족관?!
"만일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라면 죄송스럽지만, 이 자리는 이만-."
"대체 조금 전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왕비가 고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동생분들이 다들 결혼 적령기임에도 아직도 상대가 정해지지 않았다면서요? 마침 제 아이 중 슬슬 정혼자를 골라야 할 아이들이 있으니 양가의 공영을 위하여 선을 보는 것 어떤가. 전 그런 이야기를 꺼냈던 거라고요."
[커흠.]
···그런 게 아니었구나.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진짜로 내가 제멋대로 오해하고 욕보인 거니까 잠자코 고개를 숙여야지.
어느 나라 어떤 정부를 대표해서가 아니라 이건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서 사죄해야 할 부분이니까.
"제3신분으로서 이런 이야기 자체를 처음 들어보는지라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쪼록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처음이라고요?"
이건 또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일세.
"제 프랑스어 별명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부패할 수 없는-아하."
그제야 왕비가 짐작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뒤에 붙는 글자가 뭐였을지 궁금하지 않나, 친구?
[입 닥쳐, 박민혁.]
에이, 왜 그래.
재미있다고 구경할 때는 또 언제고?
"확실히. 정략혼으로 유력가와 엮였다면 불가능했을 별명이네요."
"예. 마찬가지로 로베스피에르 일가의 가장으로서 양가가 선을 보는 것도 저로선 반대하고 싶군요."
본인들이 좋다고 사귄다면 또 모를까.
아마 이 왕비님은 만일을 대비한 안전장치 내지는 내 처소까지 직통으로 이어지는 핫라인 같은 걸 원하는 모양인데.
어느 쪽이고 썩 내키지는 않는다.
혁명가 가문끼리 정략혼을 맺는다고 해도 한 번쯤 집주인 놈이랑 고민해봤을 텐데 여긴 진짜 반동 그 자체잖아.
일단 지금 가진 작위들 다 내려놓으시고 시민 명가로 돌아오실 게 아니라면 포기하시죠.
"그러면 개인과 개인으로서 보는 선이라면?"
···아니 그런데 이 왕비님도 참 집요하시네.
"대체 왜 그러십니까?"
이유라도 들어봅시다.
갑자기 집주인 놈에게 첫눈에 반해서 우리 집안과 연을 맺고 싶다던가, 그런 건 아닐 거 아냐.
[이봐.]
왜?
사람이 양심은 있어야지.
"글로서, 조약으로서 맺어진 화친으로는 부족하십니까?"
"예."
거참 단호하시구먼.
척.
"북해의 겨울보다 변덕스러운 저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왕비가 내 어깨 너머를 검지로 가리켰다.
이 사람이 귀신을 봤을 리는 없고.
원래 내게 삿대질해야 할 걸 잘못 가리킨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민의로군요."
왕비는 대꾸하지 않았다.
괜히 나와 언쟁하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이 주제 자체가 계몽주의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가르는 선이니까.
계몽주의자라면, 루소로부터 이어져 온 이타적이고 이지적인 인간 본성을 믿는 자라면 집단지성을 신뢰할 수 없다는 발상 자체가 신성모독적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민의가 잘못된 판단을 하는 건 계몽이 덜 되어서 그런 것뿐, 충분히 교육받고 계몽된 집단지성은 언제나 궁극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테니까.
보나마나 저 반동 놈이 하라는 대중계몽은 안 하고 또 선민사상이나 내비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겠지만.
"···과연."
난 이해한다.
민중의 요구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무수한 해악들을 알고 있으니까.
설령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로마 공화국을 대표해 서명하고 도장까지 찍더라도 민의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나폴리 왕국을 무력으로라도 점거하여 멸망시킬 것을 요구한다면 이를 거부할 수 있느냐, 라는 왕비의 의심 또한 지극히 합당하다.
내가 아는 민족주의 뇌절이라면 충분히 러시아고 나발이고 걍 전쟁이나 다시 하자고 설치고도 남겠지.
"그래서 정략혼을 통해 일종의 부부 동군연합을 연출하시려는 거군요. 아직 통일되진 않았지만 두 가문이 이어졌으니 머지않아 통일될 거다, 혹은 통일된 거나 다름없다고 설득하려고."
"역시 야만인은 아니시네요."
왕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불여우가 따로 없군.]
뭐, 부정하진 않겠다.
본인은 말하지 않았지만 이건 로베스피에르 일가를 봉건 카르텔에 편입함으로써 혁명이라는 불덩어리에 물을 끼얹으려는 목표도 있을 테니까.
역시나 너도 본인과 가문의 입신양명을 위하여 혁명을 이용했을 뿐이라고 말이지.
그렇지만 양측의 공존을 위한 알기 쉬운 평화의 상징이 필요한 것도 사실인바.
아마 이번 만남에서 먼저 내게 필요성을 깨닫게 한 다음 일이 터지면 그때 내게 보다 강하게 요구하거나 할 계획인 거겠지만.
"그렇지만 역시 정략혼보단 다른 방법을 제안하고 싶군요."
"어머나."
왕비가 나지막이 코웃음을 쳤다.
마치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고 자신하는 듯한 모습.
"다른 방법이라니, 그게 뭐죠?"
"간단합니다."
당신들도 알고 있을 테니까.
쉽게 말해서.
"올림픽입니다."
"···네? 잠깐, 뭐요?"
"올림피아 제전 말입니다. 공동체 정신을 함양하면서도 평화를 상징하기엔 이만한 게 또 없지요."
가만, 이 시대에 축구가 있던가?
없으면 내가 만들면 되는 거지 뭐.
비록 축빠는 아니라지만 초중고에 대학교까지 아마추어로 뛴 짬밥이 있는데 대충 이게 뭐해야 이기는 종목이고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규칙들을 지켜야 한다, 정도는 가르쳐줄 수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 축구 좋아하는 거야 유명하고.
"원래 그리스에서 유래한 행사라지만 로마에서도 장장 반 천년을 이어졌으니 이것도 나름 로마의 전통 아니겠습니까. 장차 로마와 동맹 시들이 재건되면 가장 먼저 올림픽부터 재건해보려 합니다만."
"지금 저랑 장난하자는 건가요?"
왕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 그야 동문서답하는 거로밖에는 안 들리겠지만.
"빵과 서커스."
마리아 카롤리나와 정면으로 눈동자를 마주치며 덧붙였다.
"이제와서 제가 이걸 따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계속하세요."
"마마께서 근심하시는 혁명이란 언제나 도시로부터 시작될 겁니다."
물론 농민 주도의 혁명 가능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게 화친파기와 즉각적인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방향성은 아닐 거다.
차라리 소작세 더 깎아달라, 토지 개혁하자, 농노해방하라, 선하신 국왕과 교황 성하 만세-겠지.
"모든 혁명은 결핍에서 시작됩니다. 먹을 것이 모자라서 일 수도 있고, 일자리가 모자라서일 수도 있고, 발언권이 모자라서일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그 결핍을 언제나 신경 쓰고 있어라?"
"아뇨. 마마께서 말씀하시는 상황이 어떤 결핍에서 시작되는지 되짚어 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애초에 통일이 일반적인 혁명은 아니잖아.
"결국 북쪽에서 뭐라고 하건 남쪽에서 호응해주지 않는다면 마마께서 두려워하시는 상황은 일반적인 전쟁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배가 고파서, 일자리가 모자라서, 내세울 만한 업적이 필요해서 이웃 나라를 정복하려는 거니까요."
"···집안 단속부터 철저히 할 것, 이군요."
"예. 북부를 대상으로 한 무역과 관광을 적극 장려해보십시오. 무역이야 두번 강조했다간 입 아픈 주제니 넘어가고. 올림픽 같은 볼거리가 늘어나면 외지인이 몰려들죠. 그러면 이들에게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치들도 덩달아 늘어나게 되고요."
그리고 일반적인 장사치와는 달리 외지인들을 대상으로 한 장사치들은 결코 전쟁이나 혁명 같은 급변 사태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외지인들의 발길이 끊기면 당장 수익이 큰 폭으로 줄어들면서 본인이 손해를 보게 되니까.
오히려 옆에서 칭얼거리면 입다물라고 뚝배기를 깨려고 들겠지.
이렇게 관광이 장려되어 국경이 조금씩 허물어지면 북쪽에선 전쟁 없이도 이미 한 나라처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니 구태여 극단론을 지지할 이유가 사라지고.
"그리고 도시의 삶이란 시골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겉보기보다 훨씬 지루하고 따분하지요."
아닌 게 아니라 이 시대엔 진짜 오락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전기가 등장한 뒤에나 나올 각종 매체야 논외로 치더라도 스포츠랄 것도 없고, 보드게임이나 카드 게임이랄 것도 몇 없고, 가로세로 퀴즈 같은 거나 유머집조차 드물다.
그나마 있더라도 귀족들의 전유물이고, 이 귀족들은 사교회 열어서 자기들끼리 질펀하게 노느라 바빠서 아랫것들이랑 잘 놀아주질 않지.
그러니 평범한 도시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유희거리란 기껏해야 주기마다 찾아오는 축제와 음주가무, 연애, 물수제비, 멍때리기, 일 터지면 구경나가기.
그리고.
[높으신 양반들 뒷담까기.]
아닌 게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국왕의 정부를 까는 게 국민 스포츠였다.
정치동아리들이 카페에 모여서 나라 꼬락서니 개판이다, 국왕이 뭔 생각하면서 사는 줄도 모르겠다고 까는 거야 일상이었고.
물론 진짜로 나라 꼴이 엉망인 것도 사실이었고, 또 높으신 양반들이 호박씨를 까일만한 짓거리들을 수두룩하게 저지른 것도 사실이기야 한데.
그렇다고 그치들이 객관적으로 보아도 트집잡힐 일 하나 하지 않았더라도 안 까이진 않았을 거다.
이 세상에 하릴없이 시간 보내야 할 때 정치 이야기만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할 수 있는 타임머신도 얼마 없으니까.
"그러니까 우리 제 3신분들도 별 고민 없이 시간 보내며 놀 수 있는 자리를 팍팍 만들어주십시오."
여기에 축구와 야구 이야기 추가요.
당장 겉으로 보이는 대단한 효과는 없겠지만, 그까짓 정략혼보다 이렇게 놀거리를 만들어주는 게 직방일 거다.
아무렴 3S 정책이 괜히 나왔을까.
아저씨들이 축구 이야기랑 야구 이야기를 하는 시간만큼 정치 이야기할 시간이 줄어드니까 그런 건데.
우리 정치동아리들도 그 틈바구니에서 발언권 키우려면 국외보단 국내 사안부터 집중해야 할 걸.
겸사겸사 이웃 도시들끼리 대항전 하면서 공동체 정신도 함양하고 '우리'를 발견하고 고찰할 시간도 늘어날 테니 이 또한 톤톤 좋고 모칠 좋은 일 아니겠는가!
"그리고 혁명이 그리 두려우시다면 우선 도시에 투자부터 늘리십시오."
괜히 잔꾀나 부리지 말고.
"일자리 팍팍 늘리고, 현 체제에 자긍심을 가질만한 선전거리들을 만들고, 누가 뭐라고 불평하면 공감해주고 시정해주는 시늉만 제대로 해도 마마께서 근심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 세상엔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도 배부른 돼지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절대다수니까요."
그래서 하고 많은 반골 선배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골로 가기도 했고.
뭐, 이런다고 혁명 못 하란 법은 없으니까 순순히 가르쳐준 거지만.
이렇게 다들 도시에만 집중하는 동안 우린 포코 이론으로 농촌부터 메워나가면 되는거니까.
도시에 투자가 늘어나면 그만큼 다수여론도 진취적으로 변화할테고.
"그렇다는 건."
한참을 침묵하던 왕비가 입을 열었다.
"물론, 당신도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해주시겠다는 약속이시겠지요?"
"예에, 물론이지요."
암튼 이탈리아에서도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키워봐야 하니까.
[···이봐.]
에이, 내가 뭐 프롤레타리아트 혁명하겠다고 했어?
그냥 관세동맹부터 시작해서 민간 교류를 팍팍 늘려나가겠다는 소리인데.
[흐-음.]
동통연합으로 전후재건 사업에 빨대 꽂은 우리 프랑스 부르주아지에게도 땅 짚고 헤엄치기가 될 거고.
미터법 도입부터 시작해서 장차 산업규격을 모조리 파리 기준으로 갈아엎을 텐데 올림픽과 관광업으로 외지인들이 오가는데에 거부감을 확 줄여놨으니 사업하려면 이만한 낙원이 또 없을거다.
시장이 늘어났으니 그만큼 경쟁과 혁신도 가속될테고.
그 결과 산업화가 가속되면 프롤레타리아트도-.
[어허, 씁.]
"그럼 한 가지만 더 여쭐까요."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정말로 일가친지 되어보실 생각 없나요?"
"없습니다만."
"아닌 것 같은데?"
아니 없다니깐요.
불쾌한 심경을 가득 담아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러나, 이미 왕비의 눈동자에는 집착에 가까운 수집욕만이 가득해 보였다.
***
베네토주.
지도상에 나타난 베네치아 공화국을 볼 때 가장 흔히들 하는 착각이 오스트리아와 접하는 큼직한 내륙영토를 본토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지로 이어져 있지 않은 동쪽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같은 곳이 속주이고 동북 이탈리아에 자리한 베네토주는 본령이라는 착각.
하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은 도시국가인 동시에 섬나라다.
쉽게 말해 이탈리아 전도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로마 멸망 당시 피난민들에 의하여 개척된 바다 위의 도시만 본토다.
지도상으로 보이는 베네토주는 이 섬에 딸린 속령이고.
"야잇, 야!"
빠각-.
흥분한 폭도들이 그들을 막아선 위병을 향해 짱돌을 집어 던졌다.
"지금 내 말 안 들려?! 저 루스 타타르 놈들이 우리 사람들까지 죽였다니까!"
"폭도고 나발이고 우리 공화국법으로 처벌받을 일이지, 몽골이 웬 말이냐!"
"공화국은 당장 루스와 단교하라!"
"반란군이고 자시고 우리 사람들이 죽었는데 도의상 시 정부에서 항의 정도는 해줘야지!"
"어어, 그래. 너희가 이러고도 막 수확한 밀은 꼬박꼬박 또 받아 가고 싶지?!"
그런데도 관청은 묵묵부답이었다.
분명 이들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나 베네치아 시내나 똑같은 베네토어 화자이니 아무런 지장 없이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정상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는 군중의 고함을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도 모른 척하고 있다는 것.
부웅-.
결국 분노한 폭도들이 시 정부의 해명을 듣기 위하여 더욱 과격한 수단을 동원하려던 찰나.
"본인들 입으로 반역자라고 말했으면 끝난 일이지 무슨 해명이 더 필요하단건가?"
마침내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답변이 돌아왔다.
멀대 같은 위병들 뒤에 숨어도 훤히 드러나는 과연 그 듬직한 풍채가 제법 지체 있는 공화 귀족임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루스인들은 다만 우리 동맹군의 활동에 지장이 가는 도적무리를 소탕하였을 뿐이네."
"···잠깐만, 지금 타타르 놈들을 옹호하시는 겁니까?"
"뭐 귀엔 뭐만 들린다더니."
배불뚝이가 불쾌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도적토벌은 끝났으니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걸세. 설령 있더라도 루스가 끼어들진 않을 것이고. 그러니 자네들도 괜히 공화국의 전쟁 수행을 훼방 놓는 반역자 소리 듣고 싶지 않거든 이만 안심하고 물러나게."
공화귀족은 파리를 쫓듯 손을 휘저었다.
마치 그가 이런 일로 이곳까지 행차해야 했다는 것조차 신경에 거슬린다고 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전체 베네치아인 중에서도 한 줌에 지나지 않는 도시인.
개중에서도 10% 남짓에 지나지 않는 베네치아 시민권자, 다시 그중에서도 정점에 군림하는 공화귀족.
본래라면 그들 같은 속령인은 평생 대화는커녕 먼발치에서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몸이 나서서 구두로나마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거라 약속해준 것이니만큼 그 효과를 과신할 법도 했으나.
퍽!
"어엇···?!"
"이 개자식들아!!!"
어째서일까, 폭도들은 전혀 진정한 모습이 아니었다.
"결국 죽은 건 상놈이지 시민권자 아니다, 이거지?!"
"미친놈들아! 우리가 루스 불러왔냐?! 느그가 불러왔잖아!"
"내가 언제 사과하래디? 항의가 뭐 그렇게 어려워!"
"도시 놈들 지키러 와준 몽골을 왜 우리가 뒷바라지해야 하냐!"
"아, 아니 이놈들이 그래도···!"
그제야 뒤늦게 여론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관청에서 보다 진지하게 이들과 대화에 나섰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타타탕!
끝내는 피가 흘렀고,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는 법이듯 소문은 삽시간에 베네토주를 휩쓸었다.
곧, 붕괴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