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154)

기적

바티칸 회화관. 

또각. 

"아름답군요." 

생전 처음 보는 화려하고, 경건한 회화를 슬며시 훑으며 이 로마시의 주인이자, 회화관을 건설한 노인에게 다가갔다. 

비록 그는 거꾸로 매달린 성 베드로의 그림 앞에 서서 이쪽을 돌아보려 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혹은, 사치스럽다고 해야 할까요?" 

교황은 변함없이 대꾸하지 않았다. 

이 많은 작품을 모으고 이토록 장엄한 건물을 세우는데 얼마나 막대한 돈이 쓰였을까. 

그 돈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그걸 생각하면 혁명가로선 분노하는 게 맞겠지. 

그렇지만-이들이 예술을 후원하지 않았더라면. 

누구도 이 그림들을 보존하고 전시하려 하지 않았다면 인류 문명은 얼마나 삭막해졌을까. 

이토록 관점을 조금만 달리해도 그를 평가하기란 어려워졌다. 

계몽주의자들이 말하기를, 인류 문명의 진보와 민중계몽을 훼방 놓고 미신을 퍼트리는 적그리스도. 

전통주의자들이 말하기를, 부패한 교회조직을 개혁하고 로마 시민들의 민생 개선과 예술을 사랑한 선하신 교황. 

그리고 어느 쪽도 비오 6세다. 

그가 계몽주의에 맞선 수구반동으로서 고집스레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와 대립각을 세운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관점에서 노력한 것도 사실이니까. 

그러니까 되도록 험하게 다루고 싶지 않았지만.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변함없이 거꾸로 매달 법린 그림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노인에게 쏘아붙였다. 

참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이다운 미적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라벤나에서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모양입니다." 

그제야 늙은이가, 비오 6세가 천천히 이쪽을 돌아봤다. 

"잘된 일이로군." 

도발이라니 배짱도 좋으셔라.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게 잘된 일입니까?" 

"그 사람들이 싸워야 할 이유를 만든 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성하께서 조금만 더 일찍 서명해주셨더라도 저들이 죽을 일은 없었을 겁니다." 

"미안하지만 억지를 부린다고 마음 약해질 거라면 이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거네." 

비오 6세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전쟁에 끌려가지 않아도 되었을 무고한 이들까지 전장에 몰아세운 자네 같은 선동꾼들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고." 

"개인이 제 권리를 주장하는 걸 부끄럽게 만들고, 칼 앞에 무릎 꿇고 권위에 무조건 순종하라 가르치며 자유인들을 가축으로 길들인 분들께 듣고 싶지도 않군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결국 몇 번이고 주고받아 봐야 평행선이겠지. 

저들은 우리가 선택받은 일부만의 모형 정원이라고 부르는 구체제를 질서와 안정이라고 부르고, 우리의 신체제를 혼돈과 파괴라고 보니까. 

고로 이 사람과 대화다운 대화를 하고 싶다면. 

"그거 들으셨습니까?" 

비오 6세에게 되물었다. 

"저 멀리 동쪽에서 기적이 일어났다는군요." 

"기적을 믿지도 않을 놈이 지금 누굴 속이려고." 

"아뇨, 기적입니다. 그 누구도 선교사 한 명 보낸 적 없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신앙 공동체가 극적으로 발견되었다는군요." 

정적. 

처음으로 늙은 교황과 눈을 마주쳤다. 

"그걸 어떻게···?!" 

경악, 불신, 혼란. 

그야 이 유럽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흔히 알려진 것도 아니고. 

교황청에 보고가 올라온 지도 5년도 채 지나지 않은, 현장에서 직접 세례를 내려준 예수회나 교황청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알 리 없는 소식이겠으나. 

"글쎄요?" 

내용물이 미래에서 온 조선인이라서 알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잖아. 

[정말이지 용케도 생각해냈군.] 

우리 엄빠가 모태신앙이셨걸랑. 

뭐, 그 아들내미는 이 꼴이긴 한데. 

여하간 어린 시절 엄빠 손에 끌려간 성당에서 누구도 선교사를 보낸 적 없는 한국 땅에서 신앙 공동체가 발견되었다는 게 가톨릭 교회사를 통틀어서도 전무후무한 기적이라고 신부님이 강론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당대 교황님이 프랑스 대혁명 와중 그 소식을 듣고 감격해 눈물을 흘리면서 추기경에게 비상금을 털어주며 조선의 교회공동체를 돕게 하고 나중에 나폴레옹한테 붙들려 유배 생활을 보내면서도 힘들때마다 이 기적을 떠올리셨다고. 

그때는 그냥 그런가보다-했고. 

보다시피 그간 신앙생활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던 터라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만. 

"장차 온 세상에 계몽주의를 퍼트려야할 사명을 띤 제가 지구촌 소식에 어두워서야 되겠습니까." 

"이, 이놈이···!" 

다시 생각해보니까 시기상 소식을 듣고 감격했다는 교황님이 바로 이 사람인 거잖아. 

나폴레옹 전쟁 중 킬 카운트가 수백만을 훌쩍 넘기다 보니 혹시 중간에 교황님까지 가산된 건 아닌가-걱정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고. 

"한가지 여쭙겠습니다." 

비오 6세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되물었다. 

"성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이 기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뜻을 전하고 싶으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내게 주님의 뜻을 가르치려 드는 건가?" 

"아뇨." 

구태여 말하자면. 

"시야를 넓혀드리려는 겁니다." 

"허, 하다 하다 말장난이라니." 

"주교령에 연연하지 마라. 더욱 넓은 곳으로 나아가 참된 복음을 퍼트리고 신앙 공동체를 포용하라." 

비오 6세는 대꾸하지 않았다. 

"-제게는 그런 계시로 보였는데, 성하의 뜻은 다르십니까?" 

하지만 정곡이겠지. 

엄빠에게 끌려가 함께 들었던 강연에선 분명히 이 교황님의 비상금을 건너 건너서 조선의 신앙 공동체에 전달한 추기경이 훗날 다시 교황이 되어서 조선 교구를 만들어줬다고 했으니까. 

시기상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교황청에서 여유가 생기자마자 곧장 교구를 설치한 격이다. 

그러면 그 훗날 교황이 되는 추기경을 중용한 것도, 처음 비상금을 내준 것도 이분이니 훗날의 방향성을 정한 사람이 바로 이 비오 6세라는 소리고. 

이미 진작부터 선교에 뜻이 있었지만 교황령이 프랑스 혁명군에게 약탈 당하고 본인은 나폴레옹에게 납치되어 버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한거라고 해석해야겠지. 

"뭐, 협박이라고 생각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천천히 뒷짐을 지며 덧붙였다. 

"그렇지만 이대로 저희와 기 싸움이나 하면서 저 멀리 극동에서 일어난 기적을 이대로 모르는 체하는 것과 저와 타협하고 주님의 계시를 받들러 가는 것. 

"·········." 

"둘 중 어느 쪽이 참된 목자의 길일까요?" 

"이 못된 놈." 

비오 6세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네가 죽거든 장차 천년은 너끈히 지옥 밑바닥에서 불타게 될 거다. 하다 하다 주님의 기적으로 인질극이라니. 네가 그러고도 성모의 자비를 기대하고 싶더냐?" 

"그랬다면 천상에서도 기적으로서 저를 깨우쳐 주셨겠지요." 

하지만. 

"이번 기적은 저보단 성하를 일깨워주시려는 것 같은데, 아닙니까?" 

물론 헛소리다. 

조선에서 청나라로부터 들여온 서학에 관심을 보이고 다시 신앙 공동체를 만든 것과 나폴레옹에 의하여 프랑스로 끌려간 불운의 교황이 한 시대를 살아간 건 순전히 우연에 불과하다. 

비오 6세가 뒤늦게 조선으로부터 들어온 소식에 감격하며 위로를 얻은 것도, 이때의 인연으로 훗날 교황이 된 추기경이 조선교구를 설치한 것도 당사자들에겐 어떤 전지전능한 존재의 개입이나 운명을 확신케 할지라도 제삼자에겐 그저 우연한 일치일 뿐.

설령 나의 존재가 초자연적인 힘을 증명할지라도 이 우연한 일치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건 나 개인의 의지지, 누군가를 일깨워주기 위한 기적 같은 게 아니다. 

그러나. 

"협력해 드리겠습니다." 

조금 전부터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늙은 목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니 함께 경쟁해봅시다." 

"···경쟁?" 

"저는 장차 전 세계가 계몽주의로 가득 차기를 원하고, 성하께서는 참된 복음으로 가득 차기를 원하시겠지요." 

그러니까. 

"아직 계몽주의도, 참된 복음도 전해 듣지 못한 이 인간 세상의 무지한 이들에게 둘 중 어느 가르침이 더욱 올바르고 마음에 와닿는지? 그들에게 직접 평가받아보자는 말입니다." 

변함없이 비오 6세는 대꾸하지 않았다. 

내가 억지로 시선을 맞추려고 해도 조용히 고개를 돌릴 따름이었다. 

다만, 늙은 목자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라벤나시. 

콰콰쾅! 

"저 미친놈들." 

마세나가 쉴틈없이 공격을 쏟아붓는 동맹군을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뭔 똥마려운 강아지도 아니고 이리 미쳐 날뛰는거야?" 

"···그야 이쪽이 고지대니까요?" 

"염병. 그래, 나같아도 막사 치기 전에 한번쯤 꼴아박고 싶기야 하겠네." 

다만 그렇다고 적들이 무작정 인명을 갈아 넣고 있는 거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당장 오늘 아침에 교외에서 수보로프가 이끄는 동맹군과 접촉했던 마세나 병단이 어느덧 해가 중천인 지금 시가지 방면으로 밀려난 것만 봐도 적장이 이성을 잃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적장은 그 여느 때보다 냉철했고, 또한 매서웠다. 

아군의 희생 따윈 조금도 개의치 않을 뿐. 

설령 아군이 천명, 아니 만 명이 더 쓰러지더라도 그 결과 적을 무너트리고 전쟁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끌어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런 극단적인 운용 사상이 엿보이는 공격적인 움직임이었다. 

"하여간 바르바로이 놈들 아니랄까-." 

쿠르릉! 

"···니미." 

적장을 흉보기가 무섭게 무너져내리는 내벽. 

우라아-! 

그리고 궁지에 몰린 적들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해일처럼 몰려드는 적병의 모습에 마세나는 생각했다. 

정말이지. 

"죽기 딱 좋은 날이구만." 

스르릉-. 

발검. 

사령관으로서의 지시사항이라면 그거면 족했다. 

"총원 착검!" 

"모두 착검하라! 한 치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머지않아 뮈라 장군께서 우릴 구하러 오실 거다! 그때까지만 조금만 더 버텨라!!!" 

두두두-!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전령들. 

그리고 각자 칼을 뽑아 든 장교들. 

전초전은 아군의 명백한 열세로 마무리되었고, 그렇다고 적군이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줄 것 같지도 않다. 

그럼 차라리 이대로 시가지로 물러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면 방법이겠지만-. 

'사람이 양심은 있어야지.' 

상식적으로 라벤나 시민들이 그들 프랑스군이 뭐가 이쁘다고 그걸 받아주겠는가? 

시민을 지키는 혁명군은커녕 퇴역군인 출신 밀수업자로 시작해 이제껏 그까짓 군인으로서의 명예 따위보다도 한탕을 우선시해온 도적이 이제 와 저들의 도움을 받겠다니. 

그보다 멍청한 소리가 또 어디에 있겠냐는 말이다. 

콰콰쾅! 

때마침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포도탄 사격음이 들려왔다. 

정석적인 운용보단 변칙적인 잔재주에 능한 마세나 군단답게 건물 뒤에 숨어 측면에서 직사로 쏴갈 긴 다음 허둥지둥 줄행랑치고 있었다. 

기병은 이미 진즉에 전초전에서 소모될 대로 소모되어 기진맥진하고, 이대로 적들이 포병대를 뒤쫓도록 둘 수도 없다. 

그렇다면. 

"돌격!!!" 

마세나가 있는 힘껏 칼을 내리 휘두르며 외쳤다. 

그러면 그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했다. 

마세나 군단은 명령이 떨어지는 그 즉시 정면의 보병대와 측면의 포병대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적 전열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식한 힘과 힘의 정면충돌이 아닌, 적의 빈틈을 찾아 유연하게 미끄러지는 파상공세였다. 

타타탕! 

그리고 그 틈에 건물 옥상에 진을 친 쏟아져 내리는 경보병대의 정밀저격. 

칙칙하고 우중충한 적 사이에서 금박 장식 덕분에 유달리 화려하고 눈에 띄던 적 장교와 사관들이 하나둘 낙엽처럼 맥없이 널브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 근방에 있던 병사들도 덩달아 맥이 빠져서 우왕좌왕했으나, 반대로 장교나 사관이 무사하다면 적들은 몇 번씩 총검에 찔리면서도 대열을 지키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머리만 무사하다면 손가락 한두 개쯤 잘려 나간다고 생명에 아무런 지장도 없는 것처럼. 

"뭐 저런 무식한 놈들이···." 

마세나가 투덜거렸다. 

용감하다고 칭찬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가 보기에 이건 용감하다기보다는 그냥 맹목적인 기계에 가까웠다. 

명령권자가 주위에 있건 없건 적과 맞서야 용기지, 권위가 없으면 곧장 줄행랑치는 이들이 무슨 용자란 말인가? 

하지만 기진맥진한 아군은 저 맹목적인 대열을 도통 뚫지 못하고 있었으니. 

뿌우우-. 

결국 퇴각이 고지 되었다. 

발 빠른 마세나 군단은 그 즉시 뒷걸음질 치며 조금씩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고. 

콰콰쾅! 

보병대가 시간을 끌어주는 틈을 타 포도탄을 재장전한 포병대가 최후의 한발을 마저 측면에 퍼부어준 다음 적의 대응 사격이 시작되기 전에 물러났다. 

그럼 벌써 측면에서 두 번씩 포도탄 사격에 노출된 적으로서도 더는 보병대를 추격할 수 없었다. 

탕! 

옥상에 숨은 경보병대의 저격음만 이따금 들려오는 와중 적들도 전열을 수습하기 위해 물러나기 시작했다. 

털썩. 

그제야 마세나와 참모들은 맥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제 됐다고 안도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아직 일렀다. 

얼핏 보아도 저 아랫쪽에서 이곳 시가지까지 쭉 이어진 시체의 대열 태반은 아군이었으니까.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해서 방어시설들을 손봤다면. 

"뒤무리에는?" 

애써 아쉬움을 감추며 마세나가 건물 벽에 기댄 채 부사령관을 슬쩍 돌아보았다. 

"2시간 전 북서쪽 석호 방면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접촉했다는 마지막 보고 뒤로는 아직까진 소식이 없습니다." 

"···젠장, 그 영감탱이 도움 받긴 글렀군." 

그렇게 비관적인 전황은 아니겠지만 포병대 위주의 뒤무리에군은 아무래도 다른 이들에 비해 굼떴으니까. 

그때 이후로 소식이 없다는 건 아직도 한창 오스트리아군과 전투 와중이라는 이야기일 테니, 차라리 마세나가 맞이하러 갈 생각을 해야지 괜히 기다려봐야 이미 전투가 끝난 뒤일 터. 

'자, 어쩐다.' 

일단 저기 남서쪽 방면에서 뮈라의 깃발이 보이고 있으니 적들이 틈을 보여주는 즉시 달려들기야 할 거다. 

다른 건 몰라도 언제, 어떻게 돌격해야 할지를 가늠하는 재주만큼은 타고난 뮈라였으니까. 

그리고 적들도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조금 전 돌격에도 기병만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 

그러니 어떻게든 그들이 버티기만 한다면 승기가 보일 테지만. 

"···미치겠군." 

길이 도통 보이질 않았다. 

적들도 바보가 아니니 포도탄 사격 같은 잔재주가 또 먹히진 않을 거다. 

여차하면 뒤무리에와 합류한 다음 포병대를 빌려쓸 작정으로 급히 달려오느라 거느린 포병이 얼마 없기도 했고. 

산길을 타고 달리느라 기진맥진한 병사들로 육박전은 어림도 없다는 게 이미 드러났고, 사격전은 적들도 취약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좀처럼 틈을 내주질 않는다. 

딱 한 번만. 

한 번만 더 바리케이드를 세울 수 있다면-. 

톡톡. 

"대장." 

"응?" 

"잠시 이쪽으로 와보시겠습니까?" 

부관이 시가지 방향을 가리켰다. 

과연, 그곳에는 한 무리의 군중이 몰려나와 있었다. 

"젠장, 이번엔 또 뭔데?" 

다분히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그야 그동안 마세나군과 현지 주민들이 우호적인 관계였던 전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보나마나 또 도시에 피해가 가니 제발 좀 바깥에서 싸워달라던가 그런 요구겠지. 

마세나는 끊임없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군중을 맞이하러 나섰고. 

"저희가 뭔가 도와 드릴 수 있을 만한 일이 있을까요?" 

"···뭐?"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에 다만 멍하니 눈을 껌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 바르바로이에 맞서시려는 거잖습니까?" 

노인이 교외에서 전열을 수습하고 있는 러시아군을 가리켰다. 

"제발 저놈들이 시내로 들어올 수만 없게 막아주십쇼." 

"사람은 사람대로 죽이고 물건은 물건대로 뺏어간다잖아요." 

"엽총이라면 챙겨 왔습니다!" 

"허드렛일이건 치료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제발 저놈들만 좀···!" 

간절한 부탁이었다. 

마세나로선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 이전에 상상해본 적도 없는 전개였다. 

그에게 있어서 민간인들과의 교류란 같은 프랑스인이 아니고서야 그저 서로를 향해 되는대로 고함을 내지르는 것뿐이었으니까. 

그제야 주변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과연." 

청바지를 입고 있는 청년. 

부엌에 가득 쌓인 병조림. 

그리고 어떠한 두려움이나 혐오 없이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 

전장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도시가. 

이것이. 

"인민의 바다로군." 

바닷고기가 나지막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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