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52/154)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조국을 잃게 될 두려움은 그보다 더하도다!" 

그제야 병사들의 눈에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가셨다. 

평생 먼발치에서나마 구경조차 할 수 없었을 황족이. 

저 구름 위를 거니는 존재가 말 등이 아닌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서서 그들과 숨결이 맞닿을 거리에서 눈을 마주치며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 

비록 그들이 일자 무학 가난뱅이일지라도-아니 오히려 그토록 비천한 이들이었기에 더더욱 더 어깨가 곧게 펴질 수밖에 없었다. 

"나를 위하여 싸우라 하지 않겠다." 

합스부르크의 황족이 말했다. 

"명예로이 싸우라고 하지도 않겠다. 두려움 없이 싸우라고 하지도 않겠다!" 

다만. 

"너희를 위하여 싸울지어다!" 

더욱 큰 목소리로. 

"제국을 위하여 싸울지어다!!!" 

와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 

폭발적인 박수갈채와 만세 소리. 

개전사는 그거면 족했다. 

당장이라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했던 축 처진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조국을 위하여, 벗과 가족들을 위하여. 

병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투지를 불살랐다. 

"저, 전하!" 

"이게 도대체 무슨···!" 

하지만, 장교들에게는 사뭇 달랐다. 

그도 그럴 게 이는 모로 봐도 전통적인 개전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신앙을 위하여, 주군을 위하여, 명예를 위하여 싸우라는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없이 조국과 동포를 위하여 싸우라고 권하고 있었으니까. 

이래서야 마치-. 

"우선 이겨봐야 할 것 아닌가." 

카를 대공이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꾸했다. 

그들의 추측이 정확하다고. 

저 폭도들의 방식을 빌려왔노라는 솔직히 시인한 거나 다름없었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전쟁은 거짓말을 하지 않네. 제아무리 마음에 안 들고, 모욕적일지라도 승산이 높은 쪽이 보다 진보한 군대일세." 

그리고. 

"이번 시대의 선택은 이거 같더군." 

참모들은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그야 그들이 직접 보아온바 또한 그와 같았으니까. 

"처음 화약 병기가 전장에 등장했을 때도 다들 질색했다지." 

카를 대공이 뒷짐을 진 채 나폴레옹이 나타났다는 남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약이 전장에서 퇴출당하였는가?" 

"그건-." 

"결국 우리가 바뀌는 수밖에 없네." 

끝내 화약을 거부한 이들처럼 패하여 사라지고 싶지 않다면야. 

그제야 참모들도 남쪽을 돌아봤다. 

변함없이 전황은 최악이고, 승기라고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작정 패할 것 같지도 않았다. 

*** 

빈.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폐하, 라인란트에서 나폴레옹과 아군이 백중지세라고···!" 

"이대는 사각 요새가 무너질 것이고, 요새가 무너지면 포강 방위선 전체가 무너질 것이옵니다! 제발 원군을 보내주소서!" 

"프로이센군이 또다시 전선에 나서길 거부하였사옵니다." 

"요근래 콘스탄티니예의 기류가 심상치 않사옵니다. 어쩌면···." 

단 한시도 그를 쉬게 해주지 않는 악재와 악재의 연속 속에서 프란츠는 생각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뭐 대단한 폭정을 펼치거나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야심을 품은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게 내 죄인가? 

아니면 동맹을 잘못 둔 거? 

'그래, 그건 확실히 내 죄가 맞는 것 같군.'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동맹이라는 놈들이 하나같이 번갈아 가며 속을 썩이지 못해서 안달일 수가 없으니까. 

당장 이탈리아반도에 불질한 영국에서부터 바르바로이 소리까지 듣게 만든 러시아, 이 와중에도 영토 욕심만 내는 프로이센까지. 

너나 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합스부르크를 물을 먹이려는 것 보면 확실히 동맹을 잘못 둔 건 맞는 것 같았다. 

"그만." 

프란츠가 손을 휘저었다. 

"그 이야기는 그쯤 해두게." 

"폐하, 갑자기 그게 무슨-." 

"모른 척해도 소용없네. 다들 내게 대단한 묘안을 원해서 이리 요란법석인 게 아니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으니까." 

차마 입으로 직접 그 소리를 꺼내기엔 너무나 수치스럽고 뒷감당이 두려웠을 뿐.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질질 끌어봐야 희생만 더욱 커질 게 뻔한바. 

어차피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면. 

"결국 항복하자는 소리 아닌가?" 

지난날에 그러했듯이 카이저가 직접 꺼내는 게 맞으리라. 

그리고 그제야 야단법석을 피우던 신료들 또한 저마다 헛기침하며 눈을 피할 뿐 더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야말로 정곡이었던 것이다. 

허. 

"하여간 다들 소심하기는." 

프란츠가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이게 정치바닥에서 얼마나 무거운 이야기인지야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야 두려웠겠지. 

두 번 다시 아침 해를 보지 못할까 봐, 황궁에서 영영 내쫓겨 아무도 찾지 않는 퇴물 신세가 될까 봐 꺼려졌겠지. 

그렇지만 그렇게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면 괜히 피해만 더욱 커질 뿐이다. 

이미 전선 한두 곳에서 영웅적인 승리를 거두어 전황을 뒤집는다고 해봐야 대전략 차원에서의 결정적인 열세가 뒤집힐 단계는 진작에 지나쳤으니까. 

오히려 되지도 않는 희망을 고집하며 영웅을 기다리다가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당할 바에야, 아직 여력이 남아있을 때 협상장에 나서는 게 맞았다. 

"자, 그럼." 

불과 며칠 사이 족히 10년은 늙은 듯한 카이저가 신료들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경들이 나를 설득해보게."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건 군략을 내놓으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적들과의 협상에서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손에 쥔 것을 덜 빼앗길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지. 

저마다 신음을 내뱉으며 마른침을 삼키던 찰나. 

"일단 저 폭도들이-아니지." 

국무장관 메테르니히가 나섰다. 

어차피 사형장에 끌려갈 처지이니 진즉에 각오를 다지고 온 것일까. 

항복을 논하는 자리임에도 그의 언변에선 추호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라인란트에서의 공격은 아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조공일 뿐, 프랑스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이탈리아 반도 뿐일 것입니다." 

"···어떻게 그걸 자신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나폴리와 화친하려 했겠습니까?" 

물론 오스트리아와의 일전을 위하여 모든 전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겠지만. 

만일 저들의 목표가 합스부르크의 절멸이나 신성로마제국의 해체라면 합스부르크 출신 왕비가 실권자로서 활동 중인 나폴리에 관용을 베풀었다는 건 모로 봐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로마라는 화려한 이름에 속아 넘어가기 쉬우나 적들이 당장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이탈리아 반도와 서지중해에서의 확고한 패권입니다." 

메테르니히가 확신을 담아서 덧붙였다. 

"여기서 문제는 파리가 판단하기에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먼저 아국에 궤멸적인 피해를 줘야 하느냐, 그럴 필요가 없느냐겠지요." 

확실히. 

합리적인 추론에 신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신음을 삼켰다. 

결국 그들이 직접 저 폭도들에게 제 무해함을 해명해야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칼로서 권위와 역사를 일으킨 봉건귀족으로서 느끼는 그 굴욕감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참으로 억울하고 수치스러웠으나. 

"···경이 핵심을 짚은 것 같군." 

프란츠가 마지못해서 씹어뱉었다. 

메테르니히는 더는 아무런 부연 설명도 덧붙이지 않은 채 조용히 고개를 조아리며 뒤로 물러났다. 

제가 여기서 괜히 제 사견을 덧붙여봐야 지금 폭도들을 편드는 거냐는 소리밖에 듣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게. 

'항복하는 순간 더는 로마를 자칭할 순 없다.' 

도대체 누가 그 이야기를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겠는가. 

누구나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는 것과 실제로 공적인 자리에서 직접 꺼내는 건 분명히 다른 법인데. 

'어쩐다.' 

프란츠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난 전쟁에서야 저 폭도들이라면 정말로 신성로마제국을 다짜고짜 멸할지도 모른다며 닳고 닳은 카우니츠조차 겁에 질려 한심한 꼴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적들을 파악한 지금은 달랐다. 

저 계몽주의 폭도들은 어디까지나 계몽주의적 이념에 기초한 공화국을 건국하고 다스리려는 정치집단일 뿐 그들이 추호도 이해할 수 없는, 절대로 공존 불가능한 바르바로이나 악마숭배자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적들이 보여준 합리적이고 그간의 외교적 관례에 어느 정도 맞춰주는 행보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들은 신성「로마」를 부정하는 것이지 「제국」까지 부정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마디로 국호에서 로마를 빼라고 요구해올지언정 카이저라는 제관까지 포기하라고 떼를 쓰거나 다짜고짜 멸망시키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다. 

'어차피 북이탈리아는 유지하기 글렀다.' 

봉건 군주로서 롬바르디아-베네토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겠노라. 호언장담해놓고서 한 입으로 두말하자니 수치스럽기야 했지만, 현실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쪽은 더는 유지할 가망이 없었다. 

이대로 기둥뿌리를 뽑아가며 요새선을 억지로 지킨다면 너끈히 5년은 더 버틸 수 있겠지만, 이미 라인란트 방면에서 두 번째 전선이 열린 마당에 북이탈리아에 국력을 탕진해봐야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니 지금 적들에게 항복한다면 롬바르디아-베네토주는 기본에 베네치아의 도제가 거느리던 달마티아 공작령까지도 할양을 각오해야 하겠지. 

곧 문명의 성지 이탈리아 반도로부터의 완전한 축출이오, 로마의 카이저임을 주장할 마지막 파편까지 빼앗기는 격. 

그렇다면. 

'그 모든 걸 잃고 난 다음 내 손아귀에 남는 게 뭐지?' 

그건 절망에 가득 찬 한탄이 아니었다. 

냉혹한 현실 인식이었다. 

아무렴 패배야 이미 기정사실이더라도 패망은 어떻게든 피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는 로마를 자칭할 수 없게 될지라도 제위는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젊은 카이저여, 생각하라. 

로마라는 정통성을 잃고, 이탈리아마저 잃어버린 네게 남는 게 무엇이더냐? 

'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 

불현듯, 프란츠는 제 머릿속으로 그들 제국의 정식 국호를 떠올렸다. 

직역하자면, 「독일 족속의 신성 로마 제국」. 

그게 수 세기 전 합스부르크 왕조가 마침내 제위를 공고히 한 직후 쾰른의 제국의회에서 확정지은 정식 국호였다. 

비록 공문서는커녕 민간에서도 이 기나긴 이름을 불러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여기서 로마를 떼어보자. 

'···독일 민족의 신성 제국.' 

물론 16세기에 민족이라는 관념이 있을 리도 없고, 이 국호가 정해질 때까지만 해도 어디까지나 도이칠란트 지역의 봉건 제후들과 도시들을 일컫는 표현이었으나. 

"흠." 

프란츠는 비로소 어지럽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진정되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전황은 변함없이 최악이고, 적들이 끝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그들 제국을 완전히 해체해버리기로 내정했다면 이제 와 이런 잔꾀 따위는 아무 소용 없겠지만. 

"파리에 화평을 청하고 싶네." 

적어도 길이 보인 듯했다. 

"누가 제국을 위하여 이 무거운 짐을 질 텐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카이저의 시선은 처음부터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있었으니까. 

그리고 메테르니히는 그의 온몸으로 「잠깐, 이렇게 빨리 결단이 나올 리가 없는데」라고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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