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런던시.
"안돼···!"
귀족원에서 짠 듯이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오스트리아를 말려야 하오!"
"말리다니, 도대체 무슨 수로? 뭐 저들을 위해 우리가 나폴레옹이라도 격파해주자는 소리요?!"
"저들은 이미 늦었습니다. 차라리 네덜란드와 덴마크를 동맹으로 끌어들여서-."
"퍽이나! 착각하지 좀 마십시오. 지금 저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 우리입니다! 이제와서 우리랑 손잡자고 해봐야 저들이 묵은 원한을 청산해줄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그, 그렇지! 차라리 이집트를 움직입시다! 그들이라면 술탄의 헛된 야망을 꺾어둘 수 있을 겁니다!"
"아하, 그러니까 아직 참전 의사도 분명히 밝히지 않은 튀르크를 우리 손으로 직접 적국으로 돌리자? 하! 그것참 참신한 고견이구려!"
아수라장이었다.
저마다 언성을 드높이며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고 있었지만 결국 반박에 반박만 거듭되며 헛바퀴만 돌 뿐 건설적인 의견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런던이 직면한 난관은 대전략적인, 그러니까 그들의 특기이기도 한 협잡질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보다 원시적이고 근본적인 힘.
그러니까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래서 지금 영국군에게 저 이탈리아 전선의 16만 대군을 잠시나마 멈춰 세울 방법이 있느냐?」였으니까.
그리고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해양 대국 영국에 이 절망적인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대육군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그동안 여유 인력이 있거든 한 사람이라도 더 해군으로 보내든가 아니면 공장으로 보내왔으니까.
그렇게 해서 쌓아 올린 견실한 대양함대와 경제력이 오늘날 영국이 열강으로서 군림하는 원동력이기도 한 만큼, 런던 정가로선 도저히 오스트리아를 돕기 위해 대육군을 육성하거나 파병한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 없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의 항복선언을 막거나 훼방 넣을 수도 없었다.
결국 어떤 논리로 저들을 설득하건 '그럼 너희가 도울 것도 아니면서 지금 우리보고 다 죽으라는 거냐?'는 소리밖에 듣지 않을 테니까.
"스페인은···."
상석에서 골머리를 싸매고 있던 윌리엄 피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도이 정권은 아직도 아무런 소식도 없소?"
그들의 본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아주 풍비박산이 나서 프랑스까지 지옥도로 끌려갔어야 했는데.
이탈리아 전쟁이 시작되고 늦어도 반년 안에는 내분에 내분을 거듭하다가 내란으로 번졌어야 했는데.
험.
해군 장관도, 외무장관도 다만 헛기침만 반복할 뿐 도저히 총리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대답은 그거면 족했다.
'···빌어먹을.'
차마 그 한마디를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하고 피트는 치밀어오르는 울화를 억지로 씹어 삼켰다.
꼬였다.
뭐가 특별히 더 꼬였다고 말할 것도 없이 모든 계획이 뒤틀리고 꼬였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이탈리아 반도는 프랑스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게릴라들과 그 부역자들의 난전으로 프랑스를 붙잡는 덫이 되었어야만 했다.
스페인 또한 지금처럼 어수선한 수준이 아니라 자격 미달의 고도이 정권이 거듭된 실정으로 자결하고 친불 정권 실각에 분노한 프랑스군의 전면 침공으로 인해 인세의 지옥이 되었어야만 했다.
물론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아일랜드에서의 소요 사태 같은 건 처음부터 계산서에 없었다.
이러면 중간에서 간이나 보고 있던 프로이센도 슬그머니 반불동맹에 끼어들어서 라인란트를 할양해달라고 하건, 폴란드령을 조금 더 갉아먹건 하면서 동맹에 이바지해줄 테니까.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
이탈리아는 거꾸로 신성동맹을 붙잡는 덫이 되었고, 스페인은 조급해진 런던이 갈수록 개입을 늘리면서 가면이 벗겨지는 바람에 외려 외적에 맞서 똘똘 뭉쳐버렸다.
아일랜드는 거듭되는 단속과 진압에도 불구하고 쉼 없이 북대서양을 오가는 무기 밀수 선박들 탓에 지하 저항운동이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질 않으며, 프로이센은 외려 신성동맹을 얕잡아보고 이참에 마인강 이북 북독일을 통일하려 들고 있다.
'대체 왜 이렇게 되었지?'
몇 번이고 제 내면에 질문을 던져보아도 해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날 회기는 「내각에서 책임지고 국왕 폐하를 설득하자」라는 무책임한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
말하자면 어차피 하노버는 더는 지킬 가망이 없으니 베를린과 교섭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퍽이나.'
그거야 결국 그들이 이 영국 귀족원이니까 할 수 있는 소리지, 하노버 왕조의 하노버 국왕인 조지 3세가 좋다고 할 리가 있는가.
왕실은 딱 잘라 거부할 거고, 프로이센과 영국의 외교관계는 당분간 단절될 것이다.
그리고 피트는 총리로서 그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겠지.
덜컥.
"아, 각하-."
터덜터덜 총리 관저로 돌아오자 비서관이 그를 살갑게 반겼다.
하지만 피트는 귀찮다는 듯이 벽을 흘끗 돌아보더니.
"저 지도도 이만 치워버리게."
"예?"
척.
오른손 검지로 벽에 걸린 거대한 지도를 가리켰다.
어떻게 해야 조금이나마 더 적들을 곤경에 빠트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동맹국을 단 한 곳이라도 더 늘리고 적국을 분열시킬 수 있을까.
그의 오랜 고뇌만큼이나 어지러운 붉은 선과 글자로 수놓아진 대륙지도를.
"내 후임이 누굴지는 몰라도 그 친구가 지도를 찾아볼 필요는 없을 거야."
그냥 유럽대륙은 프랑스와 그 동맹국들의 차지고 영국은 대서양의 외로운 섬이다.
그것만 숙지하고 있다면 외교 전략을 짜는데 아무런 차질이 없을 테니까.
***
베로나시.
소설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라고 하지만 그거야 섬나라 촌놈들이나 관심 있을 이야기고.
오늘날 대륙인들에게 이 북이탈리아의 자그마한 도시가 유명한 이유는 현 신성로마제국의 궁정악장이자 위대한 음악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고향이라는 점과 기원후 50년 경에 지어진 콜로세움이 훌륭히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시절처럼 검투사들의 목숨을 건 혈투나 마차 경주가 벌어지는 건 아니고, 르네상스 시대 이래로 줄곧 장엄하고 화려한 오페라 공연을 위하여 사용되고 있었으나.
뻥-!
이날만큼은 본래의 목적대로 경기장으로써 활용되고 있었다.
그 경기라는 게 양측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양손은 쓰지 않고 머리와 발만을 이용해 벌이는 공놀이라서 그렇지.
"음-."
나름 프랑스의 위대한 영도자 로베스피에르가 직접 고안해낸 경기고, 또 신나게 땀 흘리며 한창 경기에 몰두하고 있는 군인들과 구경꾼들을 보니 확실히 재미는 있는 것 같지만.
이렇게 황제나 원로원 의원들이 앉았을 상석에서 저 공놀이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뭐라고 할까.
'···꼭 죄를 짓는 기분이군.'
이런 유서 깊은 사적지에서 한다는 게 고작 코흘리개나 천것들이나 좋아할 야만스러운 공놀이라니.
메테르니히는 마음속 깊이 그와 같은 심경을 공유하고 있을 베로나 출신의 궁정악장에게 애도를 표했다.
물론 이 위대한 사적지를 공들여 만들었을 고대인들에게도-.
'···아니 잠깐.'
다시 생각해보니 피와 살이 튀기는 검투 경기가 더 야만적이긴 했다.
마차 경주도 그 시절에는 사람과 말이 툭하면 죽어 나가는 야만 그 자체였고.
그럼 벌써 몸싸움하다가 두 명쯤 게거품 물면서 실려 나가긴 했지만 공놀이가 그나마 눈곱만큼이라도 낫나?
메테르니히가 혼란해하던 찰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아있던 로베스피에르가 입을 열었다.
공놀이에서 조금도 눈을 떼지 않은 채.
"「로마 민족」의 재통일을 승인하시겠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꼴깍.
마른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이곳이야말로 그들 제국의 승부처.
이대로 갈가리 찢기거나 패하여 사라지느냐, 그들에게 남은 강역이라도 온전히 지켜내느냐의 고비였으니까.
"지난날 제노바 공화국에서는 이 「민족」을 근거로 그들이 이탈리아 반도를 관습적으로 지배해온 로마의 후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말씀하시는 민족(ethnie)과 저희가 생각하는 민족이 같다면 적어도 티롤과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공국부터는 제노바와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로베스피에르는 대꾸하지 않았다.
'···웃고 있는 건가?'
"사실대로 말하자면, 베네치아 또한 제노바와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로군요."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선 어떻게든 선을 그어야만 했으니까.
"만일 사용하는 언어를 근거로 베네치아가 제노바에 귀속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시는 거라면, 오히려 옥시타니아와 카탈루냐야말로 이 제노바인들과 같은 민족이라고 규정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중해 전역의 언어들과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받은 베네치아가 아니라요."
"흐음. 그러니까 귀국에서는 현 로마 공화국이 고대 로마로부터 국체를 계승한 게 아닌,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 민족에 의하여 재건된 민족국가라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메테르니히가 잠시 숨을 골랐다.
"동로마 제국 마지막 황조 팔레올로고스조의 남계혈통은 단절되었으나, 현 카이저 프란츠 2세 폐하의 증조모 되시는 클로드 프랑수아즈 영애로부터 이어지는 여계 혈통은 아직 우리 합스부르크 왕조의 혈맥에 계승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흠."
"만일 귀국에서 끝까지 고대 로마의 국제법상 지위를 계승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 합스부르크조 또한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여계혈통을 이은 후예로서 로마의 적법한 제위를 주장하겠습니다."
그러니 억지 좀 그만 부려라.
너희는 유럽대륙을 제패했던 그 로마가 아니라 프랑스의 위성국이고 더 후하게 쳐줘봤자 이제 막 태어나려는 신생국일 뿐이니까.
기실 이쪽도 살리카법전을 개무시한 억지기는 매한가지고, 저쪽에서 옹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메테르니히로서도 그러면 어디 끝까지 가보자며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리는 수밖에 없었겠으나.
"좋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로베스피에르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계속해보십시오."
"·········."
뭐지.
'이럴 리가 없는데.'
물론 저쪽에서 이 부분에 대해 양보해줄 가능성 자체를 고려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당장 앞서서 교황청과도 교섭에 성공했던 것만 봐도 본인들도 이 주장이 제 선전에 불과하다는 걸 숙지하고 있었다는 소리니까.
앞으로도 정통성 확보를 위해 내부 선전시에만 고대 로마를 계승했음을 주장하고, 국제사회에서는 얌전히 프랑스의 위성국이자 신생 국가로서 합류할 거다-라고 짐작하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먼저 어느 정도 공방을 주고받고 난 다음의 이야기지,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여서야.
'···이 민족국가라는 주장으로 본인들이 손해 볼 게 없다는 계산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그간 구체제의 상징과도 같았던 합스부르크가 제국령을 한 뼘이라도 더 온존하기 위해 혁명가들이 주장하던 민족이라는 관념을 끌어들인 것 자체가 진일보라고 받아들였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휴전합시다."
비로소 희망이 보인 듯했다.
"먼저 양군이 롬바르디아-베네토 지역에서 완전히 철군한 다음, 투표를 통하여 현 분쟁지역들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합시다."
"투표라."
"예. 신분과 관계없이 모두가 참여하는 국민투표 말입니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거.
"선거관리위원회는 양측에서 제각기 선발한 위원들로 정확히 절반씩을 나눠 가지도록 합시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오던 양측은 이에 승복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정해진 새로운 국경선을 새로운 로마와 우리 제국의 경계로 정합시다."
어떻습니까?
메테르니히가 자신만만하게 되물었다.
물론 반쯤은 허세였지만, 반쯤은 진짜 자신감이었다.
그도 그럴게.
'내가 봐온 저 폭도들이라면 거부할 리가 없다.'
아무튼 이로써 국민주권, 민족국가, 그리고 만민평등이라는 저들의 주장을 세 가지씩이나 긍정해준 거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패전으로 인한 실지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하여 핑계로 끌어 쓴 것에 불과하다지만 국제조약에서 선례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제3신분이라고 모를 리가 있나.
그리고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대로 혁명 타령이고 뭐고 다 핑계고 그냥 전쟁으로 영토 확장하려는 게 저놈들의 진짜 목적이라고 선전할 수 있을 테고.
결국 투표에서 패한들 떼법 탓에 밀려난거지 봉건계약을 어긴 건 아니라고 둘러댈 수 있다.
어느 쪽이건 나쁠 일은-.
"좋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또다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메테르니히도 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도대체 왜 생각이 읽히지를 않지···?'
처음에는 그냥 만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정보가 부족한 줄 알았다.
그다음에는 워낙에 제 생각이나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선수라서 그런 줄 알았고, 그게 아니라면 일부러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서로 다른 교향곡들이 동시에 연주되면서 예술이 아닌 소음이 되어버린 느낌.
생각이라는 게 하나의 문장이나 문단이 아닌 단어나 마디별로 맥이 끊겨서 새어 나오는 듯했다.
"다만, 한가지 합스부르크 측에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말씀해주십시오."
"우리 로마 공화국을 로마 민족의 민족국가라고 부르셨다면, 더는 로마 민족이나 도시를 가지지 못한 귀측을 로마라고 자칭하실 생각은 없는 거겠지요."
그거야 뭐.
"그렇겠지요."
이미 카이저부터가 그럴 각오로 독일 민족의 민족국가를 생각하고 있는 판인데 이제 와 뭘 새삼스레.
골-!
"그렇다면."
이번에는 로베스피에르가 숨을 골랐다.
변함없이 시선은 서로 끌어안거나 공중제비를 도는 등 온갖 골 세레모니를 펼치고 있는 선수들에게 고정된 채였다.
"귀국은 독일 민족의 민족국가입니까?"
"음, 글쎄요. 그렇다고도-."
"헝가리와 남슬라브인들 또한 그들만의 민족국가를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렵니까?"
이건 또 뭔 개소리지.
순간 논리 전개를 이해하지 못하여 눈살을 찌푸린 메테르니히였으나.
"아···!"
뒤늦게 요점을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랬다.
이탈리아 반도를 로마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잘라낸다면 로마라는 이름에서 오는 권위나 이를 잃어버림으로 인한 타격은 최소화할 수 있겠지만, 이는 동시에 민족이라는 게 새로운 나라를 세울 근거가 될 수 있음을 시인하는 격.
그동안이야 한 사람의 봉건 군주 아래 하나로 묶여 지내는 게 당연시되어왔지만, 이 민족이라는 게 전쟁과 건국의 명분이 된 사례가 남게 된다면?
"그럴 수는 없습니다."
메테르니히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귀국 프랑스라고 프랑스 민족만의 민족국가는 아니잖습니까?"
가령 라인란트와 알자스-로렌의 독일계 민족들.
남부의 지중해계 민족들이나 브르타뉴 반도의 브리튼 민족까지.
"만일 귀국에서 그들 모두에게 동일한 기회를 제공한다면 생각해보지요."
"글쎄요, 기회라고 하기에는 다소 모자라지만."
로베스피에르가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다.
"창구라면 마련해줬잖습니까?"
"···창구?"
"자치 코뮌과 민선 의회 말입니다, 물론."
아.
'안돼.'
지금 이놈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
"그러면 귀국에서도 먼저 똑같이 창구를 마련해주셔야 공평하지 않을까요? 로마 민족의 향방을 논하려면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부터 어떤 논리가 나올지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도저히 그 입을 틀어막을 수 없었다.
애초에 민족이라는 명분을 꺼내든 이상 이렇게 되는 것 또한 필연이었을 테니.
'어쩐다.'
이제라도 민족이라는 핑계를 집어치울까?
하지만 그랬다간 적들의 영토할양 요구를 거부할 핑계가 없어진다.
아닌 말로 저쪽에서 먼저 민족이라는 핑계를 꺼내 들었으니까 다시 이쪽도 민족이라는 핑계로 할양을 피할 수도 있는 거지, 그냥 힘의 논리로 가면 오스트리아의 완패일 테니까.
그렇지만 이대로 빈에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자고 했다간-.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만."
메테르니히가 씹어뱉듯이 되물었다.
"그 말씀은, 우리 제국 또한 보통 선거권에 기초한 완전한 자유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뇨, 방법론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렇다는 건 차등 선거권, 유산자 참정권 등의 안전장치를 설치하는 정도는 인정해주겠다는 것.
"···이 주제는 저 혼자서 답을 드리기에는 지나치게 중대한 사안인 것 같군요."
그거면 족했다.
이 정도면 좌우지간 무작정 적의 요구를 수용한 게 아니라 최대한의 양보를 끌어냈다는 인상 정도는 줄 수 있을 테니까.
"우선 카이저의 고견을 여쭌 후 다시 면담을 신청하겠습니다."
"편하실 대로 하시길."
골-!
때마침 경기장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경기 끝.
경기 결과는 5 대 0으로 프랑스 측의 압승.
막사로 돌아가는 길, 병사들은 이건 처음부터 경기를 알던 프랑스 놈들에게 유리한 부정 경기였다며 메테르니히에게 투덜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