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화 (154/154)

절대정신

나폴리시. 

"잠깐." 

마리아 카롤리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혹시 그 보고서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으음, 글쎄요. 문제점이라고 할까, 의문점이라고 할까." 

톡톡. 

"지금 제가 읽기에 이 보고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오히려 보편선거권이 절대왕권을 지키는 데에 이롭다는 내용인 것 같은데, 제가 바로 알아들은 게 맞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차등선거권 같은 규제를 두는 게 더 유리해야 정상일 것 같은데. 

상식적으로 감히 정사에 관여할 무엄한 상것들의 목소리가 그만큼 커지는데 왜 왕권 강화에 보탬이 된다는 말인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으나. 

"마마." 

존 액튼이 고개를 조아리며 덧붙였다. 

"그 투표권자들이야말로 교회를 사랑하고 왕실에 충성하는 우리 왕국의 선량한 신민들이옵니다." 

"아···." 

과연. 

그제야 마리아 카롤리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그동안 자유도시 내에서 치러지는 과두선거나 선제후들에 의한 황제선거만 봐오다 보니 착각했지만, 절대다수의 농노들에게 있어서 선거란 권리나 권력이라기보다는 귀찮기만 한 의무에 불과하다. 

자고로 투표권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권력이나 무게감 또한 극대화되는 법. 

그렇기에 선제후가 그토록 존귀한 것이고 그들 합스부르크조차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특권계층이 된 것이지만-반대로 생각해보자. 

저 농민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한다고 그들이 선제후와 같은 존중을 누릴 수 있게 될까? 

'아니.' 

결국 농민이라는 '계층'이나 '이해집단'이라면 몰라도 개개인은 이전과 별 다를 바 없는 농노 일 수밖에 없다. 

투표권자가 7명밖에 안 되니까 그 한 명씩을 공들여서 설득하게 되는 거지, 투표권자가 수백만 명이면 개개인을 설득하기보단 집단에 집중하는 게 효율적이니까. 

다시 말해서 농노 개인보단 그 농노가 소속감을 느끼는 정치집단을 회유하는 게 중요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왕국의 농노들이 소속감을 느낄 집단이라면-.' 

교회, 영주, 왕국.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교회가 아닌 영주와 왕국이다. 

구시대적인 봉건제하에선 영주란 한 사람 한 사람이 소국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문에 봉건 계약에 따라서 각국이 상호 간의 의무와 권리를 정해둔 것이고, 이를 쳐부수기 위하여 등장한 절대 군주정은 천상의 신격을 빌려와 폭력으로서 이 소국들을 무릎 꿇리고 그들의 봉건적 권리를 부정하여 하나의 통일된 국체를 만들고자 노력해왔다.

결국 신격에 의하여 정당화된 폭력이냐, 혁명에 의하여 정당화된 폭력이냐만 갈렸을 뿐.

폭력으로서 봉건적 특권을 누리던 집단들을 파괴하여 행정적 단일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혁명 공화국과 절대왕정은 계몽주의라는 아버지를 공유하는 배다른 형제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혹시 마마께서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읽어 보셨습니까?" 

존 액튼이 왕비를 돌아보았다. 

"음, 조금은요." 

"이해합니다. 고귀하신 분들께서 썩 좋아할 내용은 아니긴 하지요." 

교회는 교권의 역할을 부정했다고 싫어하고, 왕실은 왕권을 모욕했다고 싫어하고, 공화주의자들은 절대왕권을 옹호했다고 싫어하고. 

그동안에는 누구 한 사람 찾는 자 없는 천덕꾸러기나 다름없었으나.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탐독하실 것을 권하고 싶군요." 

앞으로의 새로운 절대 군주정은 사실상 전적으로 리바이어던의 논리에 기대야 할 테니까. 

"뭇 농민들의 보호자가 되시옵소서, 마마." 

"···저 프랑스의 성심당처럼 말이로군요." 

"예. 프로방스 백작은 끝내 왕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왕국의 섭정이었고, 지금도 선하신 소년 왕을 예찬할 뿐 스스로 왕위를 주장하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농민들은 그를 왕이나 다름없이 섬기고 따른다지요. 하면 보위에 오른 진정한 절대군주께서 그와 같이 처신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야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인으로밖에는 보이지 않겠지. 

어쩌면 왕권신수설 같은 미신에 의존하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강력한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간의 절대왕정이 왕권신수설 그 자체의 무리한 신학적 확대해석과 부실한 근거로 인해 가톨릭 교회와 크고 작은 충돌을 빚어온 데에 반하여 이 농본주의 절대왕정은 앞서 성심당에서 보여줬듯이 교권과의 유착이 필수적이니까. 

여기에 민중의 지지에 따라 선출된 민선 의회, 그리고 그 민선 의회를 가득 채운 농본주의 왕당파 정당의 지지가 더해진다면? 

'농노로서 지주를 견제하고, 당파로서 의회를 길들이며, 농가로서 도시를 압도한다···.' 

충분히 가능하다. 

당장 태양왕 루이 14세가 민중의 열광적인 지지에 기초한 절대왕정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권력 집중과 파격을 가능케 하는지 보여주지 않았는가? 

물론 그 전에 저 나태한 남편부터 달달 볶아서 엉망진창이 된 평판부터 수습해놔야겠지만, 어차피 요는 그동안의 절대왕정과 다르지 않다. 

대중계몽을 위하여, 기득권층의 반발을 억누르고 체계적인 부국강병을 단행하기 위하여 절대 군주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신이 내린 절대권력이 아닌, 다수결의 원칙에 기초한 절대권력이 되었다는 것. 

그럼 당연히 이전보다 신경 써야 할 것들도 많아질 것이고, 이래저래 제약도 늘어나겠지만-. 

"나쁘지 않네요." 

마리아 카롤리나는 그 또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그들은 패배자고, 저 폭도들이 강요한 새로운 대륙 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하여 발버둥 쳐야 하는 처지다. 

고로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든 이 절대왕권을 유지할 방도를 찾아냈다는 것. 

드디어 저들 세상이 왔다며 희희낙락하고 있을 도시의 공화주의 폭도들에 맞서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이념적, 방법론적 근간을 발견해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래서야 왕권이라기보다는 황권 아닐까요?" 

"···음." 

존 액튼이 말을 삼갔다. 

그야 왕이 황제가 되었다고 하면 멋모르는 농노들이야 군주로서의 격이 올랐으니 대단하다고 여길지 몰라도, 이 경우엔 오히려 비천해진 것에 가까웠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황제란 로마의 후예라는 의미 이외에도 민중에 의하여 추대된 세속 군주라는 의미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 로마라는 권위를 이미 로마 민족에게 빼앗긴 이상 이 경우엔 명백한 후자였다. 

봉건 계약과 교회로부터 위임받은 신성한 권위에 기초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천것들에게 아양 떨고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며 그들이 원하는 바를 국정에 철저히 반영해야 하는 포풀라레스의 광대가 되고야 말았다. 

이는 그런 뼈 아픈 비꼼이자 자괴감에 서린 자조였다. 

"양시칠리아 제국의 황비라···." 

마리아 카롤리나가 쓰게 웃었다. 

"썩 입에 달라붙지는 않네요." 

"그렇게 무리해서 고치려고 하시지 않아도 괜찮을 겁니다." 

"아뇨, 바뀌어야지요. 우리가 저들에게 맞추어야지 그 반대가 아닌걸요. 말씀하신 대로 무리할 필요는 없겠지만, 바꾸어야만 한다면 당연히 바꾸어야지요." 

로마의 후예로서가 아닌 민중의 제국이라니 참으로 치욕적이었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처음 화약이 등장하고 농노들에게 기사의 영역을 침범받았을 조상들 또한 이와 같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이 유럽에서 기사가, 귀족이 사라지진 않았다. 

이전보다 쇠락하고, 신분 간의 격차도 좁혀지긴 했으나 좌우지간 신분제라는 구분 자체가 소멸한 건 아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와 같을 터. 

중요한 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여 우리의 역사를 이어 나가는 거니까." 

우리란 누구인지. 

누구의 역사인지. 

어째서일까, 왕비는 귀여운 조카님이 들먹인 민족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렸다. 

*** 

프랑크푸르트 자유시. 

"됐어···!" 

가난뱅이 가정교사,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이 조간신문을 읽다 말고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가 가르쳐야 할 귀족 도련님이 또다시 몸이 으실거린다며 땡땡이를 쳐버린 것도, 한창 일해야 할 시간에 혼자 주인댁에서 가져다 놓은 신문이나 읽던 걸 들키면 호된 꼴을 당하게 될 거라는 것도.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도 그럴게. 

"드디어! 드디어! 맹신이라는 거목이 쓰러졌다!!!" 

헤겔이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가 아직 대학에 다니던 시절, 당국의 단속이 벗들을 뿔뿔이 흩어놓기 전 혁명을 기념하며 자유의 나무를 세우고 교우들과 함께 불렀던 프랑스의 혁명가(歌)였다. 

곧, 이 새로운 시대의 성가였다. 

"···커흠! 커험! 칵!!!" 

뒤늦게 주인집이 떠올라 급히 웃음소리를 줄이긴 했으나, 헤겔로선 도저히 입가에 핀 미소를 지우려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국민투표란다. 

저 구체제의 상징과도 같던 합스부르크가. 

이 신성하지도, 로마도 아닌 제국의 카이저께서 구질구질한 권리서나 로마 교황청이 아니라 신민들에게 뜻을 묻겠단다. 

누구의 통치를 받고 싶은지. 

어떤 나라의 국민이 되고 싶은지. 

한낱 봉건귀족들의 보호 아래에 길들여진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을 농노들에게, 제 입으로 직접. 

"으히힛···! "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웃음이 도저히 멈추질 않았다. 

너무 크게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자꾸만 어깨춤이 새어 나오려는 가슴이, 몸뚱이가 도통 말을 들어주지를 않았다. 

전쟁이 일어났다는 글귀를 읽었을 때보다도, 프랑스에서 혁명이 시작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보다도. 

지금 이 순간 헤겔은 그 여느 때보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칠게 맥동하기 시작하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맹신의 우상이 쓰러졌다.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던, 그저 신께서 그리 정해주셨으니 너희는 무조건 권위에 복종하라고 말하던 구체제가. 

「왜」, 「어째서 」, 「어떻게」하는 탐구가 아닌 현실정치의 필요성에 의하여 정제되어 나온 결과물을 억지로 정당화해야만 했던 어용학자들의 상아탑이. 

이 제의 한번에 카드로 세운 성처럼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보라!" 

역시나 너희도 알고 있었지 않으냐? 

우리도 너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단지 교양을 쌓을 기회를 영구히 박탈당하였을 뿐 똑같이 교양을 쌓고, 수양할 기회를 부여받는다면 얼마든지 제 손으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고 그 책임을 질 수 있는 대등한 인격체라는 걸. 

그걸 칼로서 노예로 삼은 건 누구인가? 

저 자유인들에게서 교양을 쌓을 권리를 영영 박탈해간 건 누구인가? 

개인이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지 못하도록 무지와 예속의 사슬로서 옭아매고 이 사슬의 무게를 무조건 예찬하게 했던 건-. 

"카를. 카를! 나 참, 얘가 또 어디로 갔지?" 

흠칫.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주인집 마님의 목소리에 헤겔은 신속하게 조간신문을 꼬깃꼬깃 접어서 원래대로 돌려놓고 탁상에 의지하여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가정교사네 뭐니 해봐야 존경받는 스승이라기보단 하인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던 그였으니 여기서 그녀와 마주쳐봐야 하등 좋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흐." 

이미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감출 수야 없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 숨 막히는 저택에서 빠져나가 거리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싶었다.

이 프랑크푸르트의 시민들은 어떻게 반응하고들 있을까? 

그처럼 쾌재를 부르고 있을까? 

아니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신성동맹의 패전에 함께 슬퍼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비판하고 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저 허물어져 가는 맹신의 우상을 부정하건. 

아니면 아직 뜬구름 잡기에 불과해 보이는 신체제를 부정하건 간에. 

이 서로 다른 이들의 비판적인 사고는 궁극적으로 역사의 진보를, 곧 더욱 많은 자유를 잉태하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 미래가 이미 두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기에. 

헤겔은 매일 같이 그를 괴롭히던 고질적인 우울증세로부터 말끔히 해방된 채 다만 웃고, 또 웃을 수 있었다. 

'이것도 그의 안배인가?' 

불현듯, 가난뱅이 가정교사는 그들 계몽주의자의 우상을 떠올렸다. 

제 나라도 아닌 이웃 나라의 혁명을 위하여 아무런 미혹 없이 달려가 또다시 제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얼치기 혁명가들을 위한 새로운 방법론들을 몸소 고안해낸 붉은 리슐리외를. 

확실히, 그가 지금까지 보여온 행보를 돌이켜 보면 이 또한 그의 안배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으나-. 

'반대로 이 조간신문에 실린 대로 합스부르크에서 쥐어짜낸 궁여지책이라도 이상할 건 없다.' 

아무튼 저 로베스피에르라면 차라리 긍정하면 했지 부정하지는 않았을 때니까. 

이로써 왕권신수설은 패망했다. 

물론 여전히 유럽 어딘가에는 이 맹신으로 얼룩진 미신을 신봉하는 광신도들이 거듭하여 그들의 거짓된 권위를 강요하고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려 들겠지만, 인제 와서 이 흐름을 뒤집어엎을 수야 없을 것이다. 

이미 역사의 수레바퀴는 의심할 여지 없이 미래를 향하여, 더욱 많은 자유를 위하여 힘차게 전진해가기 시작했다. 

아마 다음 단계는 홉스의 사회계약론이겠지. 

저 국민투표가 국민주권론을 간접적으로 시인해버린 이상 국왕의 절대권력을 지켜내려면 그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이제 저 봉건 군주들은 저마다 자국의 무지렁이 농민들을 어르고 달래며 근왕 세력으로서 길들이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농민들은 선정을 베푸는 어진 국왕을 예찬하며 절대왕권을 위협하는 간신모리배들을 힐난하고 무비판적으로 왕권을 싸고돌겠지만-. 

'그걸 천년만년 유지할 수 있는 왕가가 전 유럽에 몇이나 될까.' 

아마 열 손가락은커녕 다섯 손가락도 안될 것이다. 

당장 부르봉 왕조의 소위 절대 군주 중 몇이나 제대로 나라를 다스렸는지만 봐도 쉬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몇몇 예외 사례를 제하자면 결국 다들 놀기 바빠서 통치를 방기하거나, 아니면 아예 제 나라 국민에게 미움을 사 내쫓기거나 했잖은가. 

하물며 그 절대권력을 신이 아닌 자유인들로부터 위임받게 된다면 과연 몇이나 민선 의회의 폭주를 능숙하게 어르고 달랠 수 있을까? 

그러면 그 지경에 몰린 유럽의 절대군주들에게 남은 길은 그 절대권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패망하느냐, 아니면 절대권력을 포기하고 민선 의회와의 협치를 받아들이냐 뿐. 

그리고 어느 쪽도 역사의 진보다. 

붉은 리슐리외는, 뭇 계몽주의자들의 우상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누구보다 멀리 내다보며 아직도 한참 느리다는 듯이 이 수레바퀴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더욱 빠르게, 더욱 높게, 더욱 세차게! 

한 사람의 인간이 하나의 시대정신을 잉태하려 하고 있었다. 

와아아-! 

때마침 저 너머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젊고, 여리며, 활기찬 목소리. 

그렇다면 저 환호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왜 환호하고 있는지. 

이제와서 새삼스레 고민해보는 것조차 바보스러울 따름이었다. 

그 순간 헤겔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영감에 몸을 덜덜 떨면서도 저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위원장 동지 만-!" 

···아니지. 

이건 아니다. 

주인집의 등살이야 둘째치고 매번 동어를 반복하며 열광하기만 해서야 그냥 개인숭배다. 

그래서야 그 또한 자기비판을 도외시한 채 맹신에만 매달리는 저 수동적인 노예들과 다를 바가 없잖은가. 

무릇 계몽주의자라면, 역사의 진보와 더욱 많은 자유를 꿈꾸는 이라면 달라야만 했다. 

비판적인 사고로, 보다 냉철하고 합리적인 관점으로 저 붉은 리슐리외를 재평가하자면. 

"보라!" 

펄럭. 

무아지경에 빠져든 헤겔이 도로 조간신문을 움켜쥐고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여기 절대정신이 살아계신다!!!" 

그날 밤, 가난뱅이 실직자는 정성들여 옛 친구에게 교수 임용을 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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