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너는 아직 내 가족이다, 마리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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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너는 아직 내 가족이다, 마리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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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너는 아직 내 가족이다, 마리앤.
2023.06.05.
“제가 법대에 진학했을 때, 이미 성역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남성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직업에 여성들의 진출이 시도되고 있다는 걸 후작님께서도 알고 계시잖아요. 이미 경관으로 근무하는 여성들이 다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리 녹록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란다, 마리앤. 다른 어떤 영역보다 여성에 배타적인 곳이 경찰청이다. 왕국을 통틀어 여성 경관은 채 스무 명도 되지 않을 거다. 게다가 블라우버그 경찰청에는 여성이 단 한 명도 없을 게야. 내기를 해도 좋다.”
“그러니까 후작님의 도움이 필요한 겁니다. 후작님께서 저를 추천해 주시면, 경찰청장도 감히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요.”
슈나이더 후작은 그녀가 물러설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리앤은 그에게 어떤 여지도 주지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 강경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던 슈나이더 후작의 눈썹이 다시 한번 꿈틀했다. 그의 잇새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베로니카 때문이냐?”
마리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팽팽하게 당겨진 턱, 살짝 가빠진 호흡, 떨리는 눈동자만으로도 그녀는 대답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슈나이더 후작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빛바랜 턱수염을 매만지며 반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베로니카에게 일어난 사고는 나도 안타깝게 생각한단다. 꺾어지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지.”
그러다 문득, 마리앤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 경찰청에 지원한 거냐. 베로니카는 수도에서 여성 기숙학교를 다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수도는 크리스토프의 손바닥 안이니까요. 그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의지만 있으면 진실은 이곳에서도 밝힐 수 있어요.”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건가. 아무리 크리스토프라도 네가 나를 찾아왔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할 테니. 그래, 그렇군. 변호사가 되는 게 더 편한 길일 텐데, 그러지 않는 것도 크리스토프와 접점이 생길까 봐 그런 것이로구나.”
슈나이더 후작이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이것이 하루 이틀 준비한 계획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게다가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이왕이면 제가 원하는 일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먹고 살……, 흠.”
슈나이더 후작이 당황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슈나이더 부인이 먹고 살 걱정이라, 근래에 들은 농담 중 가장 우스웠다.
가볍게 목청을 가다듬은 마리앤이 우주가 담긴 것 같은 짙푸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슈나이더 후작 역시 그녀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친밀한 침묵 속에서 마리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약속을 지켜주실 건가요?”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내 손도 닿지 않는 곳으로 가 버릴 테냐?”
마리앤은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었다. 그것은 그의 말을 긍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슈나이더 후작은 오늘따라 미처 몰랐던 그녀의 일면을 수차례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마리앤인지도 몰랐다. 슈나이더 부인이 아니라 마리앤 클로제 본연의 모습.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흔쾌했다.
“약속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내가 네게 그 말을 했을 때, 이런 상황을 예측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건 내 실수지.”
가볍게 중얼거린 그가 웃는 눈으로 마리앤을 돌아보았다.
“좋아. 빌헬름 청장에게 너를 추천하마.”
“그리고…….”
마리앤이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듯 잠시 망설였다. 방금 한 말보다 더 어려운 부탁이 무엇일까, 슈나이더 후작이 침묵으로 그녀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돈을 좀 빌려주세요. 급여를 받을 때마다 조금씩 갚겠습니다.”
“…….”
슈나이더 후작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다가 뒤늦게 두 눈을 크게 떴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한 얼굴을 하던 그가 “돈이라고 했느냐?”라며 되물었다. 마리앤의 귓불이 빨갛게 변했다.
명색이 슈나이더 부인이다. 슈나이더 후작의 손자며느리이자, 수도에서 가장 잘나가는 변호사 크리스토프의 아내. 그런 그녀가 돈을 빌려달라고 하다니.
허허, 실없는 웃음을 흘린 그가 붉게 달아오른 마리앤의 얼굴을 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그래, 얼마가 필요하냐. 5만 골드? 10만 골드?”
그 말에 이번에는 마리앤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10만 골드면 평범한 사람이 몇 년은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그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얼른 손을 저었다.
“10골드면 됩니다. 급하게 나오느라 현금을 챙기지 못했거든요. 가진 보석을 내다 팔았다간 크리스토프에게 꼬리를 잡힐지도 몰라서요. 마을에 하숙집을 얻을 생각입니다.”
“하숙집? 이곳에서 나와 함께 지내지 않고?”
슈나이더 후작이 이번에야말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리앤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후작님께서 신의 있는 분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하인들이 너무 많아요. 어디서 말이 새어 나갈지 모른단 얘기죠. 크리스토프가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예요.”
“얘야, 마리.”
슈나이더 후작이 다정하게 그녀를 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하숙집에 머무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탓이다.
“부탁드립니다, 후작님. 제가 후작님의 영지에 머물도록 해주세요.”
그건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갈 거라는 협박.
“흠.”
슈나이더 후작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대답을 미루었다. 귀한 손자며느리를 좁고 더러운 하숙집에서 지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물러서지 않을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는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내게는 자주 얼굴을 보여줘야 한다. 너는 아직 내 가족이다, 마리앤.”
“!”
그 말에 마리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동그란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그녀는, 그러나 눈물을 떨구는 대신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예, 후작님. 그럴게요.”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라는 듯 마리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베일로 꼼꼼히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던 슈나이더 후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크리스토프는 하나밖에 없는 내 손자다. 아들 내외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그들에게 걸어야 할 기대까지 크리스토프에게 걸었지. 나는 그 아이가 조금 더 완벽하길 바랐고, 남들 위에 군림하길 바랐단다.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그 아이가 이뤄주길 바랐지. 제국의 정점에 선 사내가 되는 것 말이다.”
마리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슈나이더 후작은 그녀가 아니라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기에 그리운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그것은 흡사 고해성사와도 같았다. 마리앤은 조용히 침묵하며, 그의 고백에 귀를 기울였다.
“크리스토프는 내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단다. 늘 흡족한 손자였지. 자랑스러운 손자이기도 했고. 하지만 어쩌면…… 그래, 그 무거운 기대 때문에 그렇게 매정한 성격이 되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아니, 실은 알면서도 그 아이를 채찍질한 내 잘못이다.”
씁쓸하게 혼잣말을 잇던 슈나이더 후작이 그제야 마리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잿빛 눈동자가 다정한 빛을 띠었다.
“마리앤.”
“예, 후작님.”
“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무척 아낀단다.”
그 말에 마리앤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뜨거운 무언가를 삼키듯, 느릿하게 목울대를 울리고 난 다음에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랫입술이 살짝 떨렸다.
“알고 있어요, 후작님. 그게 제가 이곳으로 온 이유입니다.”
“그래.”
슈나이더 후작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것은 공치사가 아닐 것이다.
크리스토프에게서 도망친 그녀가 그의 조부를 찾아온 건 단지 허를 찌르려는 이유만은 아닐 터였다. 어쩌면 그는 그녀의 비빌 언덕인지도 모른다.
슈나이더 후작이 반쯤 농담처럼 가볍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나는 크리스토프의 편을 들게 될 거다.”
“……예, 후작님.”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리앤은 실망한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그를 응시했다.
슈나이더 후작은 크리스토프의 아내로 마리앤만큼의 적임자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크리스토프가 그녀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손자가 정략결혼을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비슷한 가문끼리의 혼약은 결혼이라기보단 계약에 가까웠고, 크리스토프는 몽상가라기보단 야심가였다. 그러니 정략결혼이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게다가 크리스토프가 누군가에게 사랑은커녕 호감을 느끼는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그런 그가 빳빳하게 긴장한 마리앤의 손을 잡고 저택의 문턱을 넘었다.
슈나이더 후작은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마리앤이 졸업하면, 결혼하겠습니다.
그건 허락을 구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슈나이더 후작이라도 반박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이자 통보였다.
짧은 상념에서 깨어난 후작이 온화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약속하마. 그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까지는 네 편이란다. 그러니 크리스토프가 어떻게 나올지 보자꾸나.”
그 말에 방금까지 평온하던 마리앤의 표정이 커다랗게 흔들렸다.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사정없이 요동쳤다.
그녀가 시선을 떨어뜨리며 여러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쩌면…… 아무렇지 않을지도 몰라요. 평소와 같이 일에 파묻혀 사느라 제가 없어진 것도 모를걸요. 아니면…… 벌써 이혼 서류를 접수했는지도 몰라요. 저는, 크리스토프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에요, 후작님.”
그에게서 도망친 사람은 자신이었지만 그녀는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아무리 가슴 속에 마른 장작이 쌓였다고는 하나, 더 이상 좋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에 대한 마음이 나무 자르듯 싹둑 잘릴 리 없었다.
하지만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그녀는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슈나이더 후작은 베일 너머에 있는 마리앤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드레스 자락을 강하게 움켜쥔 떨리는 손끝을.
불현듯, 그가 입꼬리를 당겼다.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르지만. 그거야 좀 기다려 보면 알게 될 일이지.”
조용히 숨을 들이켠 마리앤은 슈나이더 후작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곤 응접실을 뒤로했다. 슈나이더 후작이 집사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리앤은 끝도 없이 이어진 복도를 홀로 걸었다. 불현듯, 어쩌면 자신의 인생도 이 같은 길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도 끝에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갈림길이 나왔다. 주변에 하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왼쪽 모퉁이를 꺾어 돌았다.
부디, 그곳에 빛나는 출구가 있기를 바라며.
***
“후작님께서 마차를 내주셔서 다행이야. 아니면 사유지를 나오는 동안 해가 졌을 거야.”
어느새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며, 마리앤이 나직한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맡긴 채 낯선 마을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수도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사뭇 다른 광경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꾀죄죄한 몰골의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고, 말린 생선을 파는 수레가 보였다. 치렁치렁한 낚싯대를 들고 가는 사내가 있는가 하면, 신사 숙녀처럼 말쑥하게 빼입은 귀족들도 있었다. 간간이 이국적인 행색을 한 외국인들이 거리를 가로질렀다.
그러고 보니,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서 짭짤한 소금 냄새가 느껴졌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증기기관차의 울음보다 낮고 묵직한 소리였다.
마리앤은 비로소 크리스토프의 곁을 떠나,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땅에 홀로 서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해가 지기 전에 머물 곳을 찾아야 할 텐데.”
어둑어둑한 거리를 보던 마리앤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릴 때였다. 열심히 달리던 마차가 멈추어 섰다.
마리앤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이 보였다. 여전히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마차의 문이 열리고 마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후작에게 안내했던 집사 보조였다. 마리앤은 얼굴을 가린 베일을 정돈하며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여기서 내리면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