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어디 있습니까.
(6/23)
6.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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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어디 있습니까.
2023.06.06.
“예, 클로제 부인.”
크게 고개를 끄덕인 집사 보조가 눈앞에 있는 2층짜리 붉은 벽돌집을 가리켰다. 담쟁이덩굴이 벽면 하나를 완전히 덮고 있는, 아늑한 분위기의 집이었다.
“볼렌 집사장님께 부인이 하숙집을 구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블라우버그에서 이곳보다 더 만족스러운 집은 없을 겁니다.”
겸연쩍은 얼굴로 씩 하고 웃던 그가 슬그머니 덧붙였다.
“저희 어머니께서 하시는 하숙집이거든요.”
“그런가요?”
마리앤의 애매한 대꾸에 그가 침을 튀겨가며 호들갑을 떨었다.
“부모님과 저희 삼 형제가 함께 살던 집인데,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삼 형제는 모두 결혼해서 분가를 했습니다. 지금은 어머니 혼자 계시죠. 그게 적적하셨는지 몇 해 전부터 하숙집을 시작하셨습니다. 집값도 저렴하고 음식도 맛있어서 아주 인기가 좋았습니다.”
거기까지 말하던 집사 보조가 마리앤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목소리를 낮추었다.
“요즘엔 더 크고 세련된 하숙집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손님을 다 빼앗겨 버렸지만 말입니다. 오래된 집이긴 하지만, 지내시기에 썩 나쁘진 않으실 거예요. 저희 어머니도 남편을 일찍 잃으셨으니, 클로제 부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겁니다.”
마리앤은 마차에 앉은 채 붉은 벽돌집을 올려다보았다. 슈나이더 후작의 입김이 작용한 것 같아 꺼림칙하긴 했지만, 나쁜 선택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해가 완전히 저물어 푸른 어둠이 대지를 담요처럼 덮고 있었다. 이 시각에 다른 하숙집을 찾는 편이 더 고되고 어려울 것이다.
이번은 후작님의 친절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좋아요.”
마리앤이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담쟁이덩굴이 우거진 붉은 벽돌집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의 눈동자가 이르게 모습을 드러낸 금성처럼 반짝, 하고 선명한 빛을 발했다.
***
푸르스름한 여명이 창을 타고 들어왔다. 어두컴컴하던 거실에도 푸른 새벽이 깃들었고, 어슴푸레하게나마 사물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틴은 거실 한가운데 앉아 있는 크리스토프를 곤혹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지난밤, 그는 거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의 아내, 마리앤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정이 되기 전의 크리스토프는 지금보다 훨씬 여유로웠다. 그는 마리앤이 금세 꼬리를 말고 들어올 거라 생각했고, 적어도 외박은 하지 않을 거라 여겼다.
이혼 서류를 던지고 집을 나간 것도 서운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잠시의 일탈, 혹은 반항이라고 생각했다. 일이 커지기 전에 그녀 스스로 수습을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마리앤에게 적잖이 화가 난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그녀가 용서를 빌면, 한 번쯤은 넘어갈 용의가 있어 보였다.
반대로 마리앤을 달랠 의사도 있어 보였다. 자신이 확인한 사건보고서는 아무런 의문점이 없었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다시 한번 살펴보겠다는 말을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중 어떤 것도 실현되지 못했다. 까맣게 저문 하늘에 푸른 빛이 깃들도록 현관문은 고요하게 닫혀 있을 뿐이었다.
크리스토프가 거실에서 꼬박 밤을 새운다는 건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후에도 늘 집무실에 틀어박혀 업무를 처리하는 게 그의 일과인 것을 감안하면 말이다.
크리스토프는 타인이 그의 일상을 흐트러뜨리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그건 마리앤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거실에 앉아 있는 모습은 마틴에겐 꽤 낯선 광경이었다.
댕, 댕, 댕.
괘종시계가 자정을 가리키고 나서야, 크리스토프는 서늘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동자가 차게 식었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마틴은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마리앤, 나를 화나게 해서 어쩌자는 거지?
크리스토프는 퍼렇게 날이 선 눈으로 허공을 쏘아보며 조용히 분노를 터뜨렸다. 맹세코 마틴은 그가 이토록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냉철한 이성의 대명사였고, 아무리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통제할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의 크리스토프는 시커먼 분노에 잠식된 것 같았다. 그가 마침내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손등의 뼈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기분 탓인지 나무가 뒤틀리는 소리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마틴.”
크리스토프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듯, 낮고 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마틴은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서며 “예, 주인님.” 하고 대답했다. 긴장한 탓인지 평소보다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를 준비해. 지금 당장 클로제 가로 가야겠다.”
“예, 주인님.”
마틴은 즉시 거실을 나가 귄터를 불렀다. 새파란 면도날처럼 예리한 크리스토프의 모습을 떠올리던 그는 복잡한 심경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크리스토프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마리앤이 그녀의 친정인 클로제 가에 있기를 바라지만, 곤욕을 치를 슈나이더 부인을 떠올리자 한편으론 그녀가 그곳에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얗게 밝아오는 창밖을 내다보며 마틴은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그는 아주 오랜만에 신을 찾았다.
슈나이더 부인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길.
***
클로제 가의 아침은 평소보다 고요했다.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말을 보살피고,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집 안에는 왠지 모를 적막함이 감돌았다.
클로제 부부는 아직 베로니카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사랑스러운 둘째 딸의 부재는 두 사람에게 깊은 상실감을 가져왔고,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헤집지 않으려 그 이름을 금기시했다.
“오늘은 몇 시에 돌아와요?”
에나의 건조한 물음에 파비안은 삶은 달걀을 입으로 가져가며 “평소와 같을 거야.” 하고 대답했다.
그 역시 아침마다 반복하는 대화였지만, 두 사람은 평소와 달리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시청의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는 파비안 클로제는 명망 있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성실하고 신실한 사내였다. 그리고 그의 아내 에나 클로제는 다정하고 알뜰한 여인이었다.
첫째 딸이 크리스토프 슈나이더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행복의 절정을 맛보았던 두 사람은 둘째 딸의 죽음으로 불행의 절정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햇빛을 보지 못한 식물처럼 조금씩 시들어갔다.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지만, 모든 것이 빈껍데기처럼 무미건조했다.
그때였다. 얼핏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먼저 눈치를 챈 사람은 에나였다. 그녀가 창밖을 힐긋거리다 파비안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침부터 누굴까요, 파비안? 올 사람이 있나요?”
“글쎄.”
그제야 불청객의 존재를 눈치챈 파비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곧장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에나가 그의 뒤를 따라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파비안이 현관문을 연 순간.
“!”
그는 문 앞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에 놀라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경계 어린 눈으로 불청객을 쳐다보던 파비안은 한 박자 늦게 불청객의 정체가 자신의 사위인 크리스토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눈에 알아보지 못한 것은 어딘가 모르게 평소와 다른 분위기 때문이었다. 늘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한 크리스토프는 그답지 않게 조금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즈니스 슈트에는 구김이 몇 줄 보였고, 애스콧타이도 느슨했다. 어디 그뿐인가, 눈 밑에는 짙은 그늘까지 져 있었다. 흡사 밤을 새운 사람처럼.
반면, 검은 눈동자에서는 새파란 예기가 흘렀다. 손가락을 벨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무슨 일이오, 크리스토프.”
파비안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등 뒤의 에나가 더럭, 심장이 떨어진 얼굴로 “혹시 우리 마리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하고 물었다.
그 말에 파비안의 표정 역시 심각한 빛을 띠었다. 둘째 딸을 비명에 보냈는데, 첫째 딸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파비안이 다급하게 한 발을 내딛는 순간, 크리스토프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잇새로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스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디 있습니까.”
“…….”
파비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 모르는 탓이었다. 아니, 그보다 선득한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다.
“이곳에 있습니까.”
“…….”
파비안은 이번에도 입을 열지 못했다. 손가락이 움칫거렸다. 그는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크리스토프가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크리스토프는 두 사람 사이의 신분 차에도 불구하고, 그를 함부로 대한 적이 없었다. 늘 최선의 예를 갖추었고, 파비안은 그 사실에 감사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는 그가 아는 크리스토프가 아니었다.
파비안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크리스토프가 그를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 역시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크리스토프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주인의 허락이 없었음에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그의 행동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적국의 땅을 점령한 장수처럼 우악스럽게 거실을 둘러보던 그가 곧장 침실로 향했다.
벌컥.
그가 방문을 열었다. 파비안과 에나의 침실이었다.
“맙소사.”
에나가 황망한 목소리로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정작 부부의 은밀한 장소를 엿본 크리스토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본 그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파비안과 에나가 그의 뒤를 쫓아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크리스토프? 이게 대관절…….”
“마리앤으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까?”
“마리앤?”
파비안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에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마리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하고 물었다.
크리스토프는 형형한 안광으로 그들을 주시했다. 아무리 사소한 거짓말이라도 찾아낼 것처럼 집요하고 날카롭게.
그가 한마디 한마디를 씹어 삼키듯 서늘하게 뇌까렸다.
“마리앤이 이혼 서류를 던지고 집을 나갔습니다.”
“뭐?”
“세상에!”
청천벽력 같은 말에 파비안은 두 눈을 부릅떴고, 에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한 팔로 끌어안은 파비안이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에 무슨 말이오? 갑자기 이혼이라니? 두 사람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문제라도 있었소?”
그 말에 크리스토프가 두 눈을 좁혀 떴다. 두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허공을 노려보던 그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속삭였다.
“저야말로 알고 싶군요, 그 문제라는 게 뭔지.”
그래, 그랬다. 마리앤이 난데없이 이혼 서류를 던진 이유를 가장 알고 싶은 사람은 바로 크리스토프였다.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린 그가 새카만 눈동자로 파비안을 응시했다. 비로소 이성이 돌아온 듯 크리스토프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례하게 행동한 점, 사과드립니다. 혹 마리앤에게 연락이 오거든 가장 먼저 제게 알려주십시오.”
“알겠소.”
파비안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부터 날벼락을 맞은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마리앤이 결혼할 사람이라며 크리스토프를 데려왔을 때, 에나는 한쪽이 너무 기운다며 혼인을 반대했다. 그로 인해 마리앤이 더 힘들어하지 않을까, 진심으로 걱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파비안은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크리스토프가 자신의 사위가 된다는 소문에 그를 보는 직장 동료들의 시선이 바뀌었다.
그러니 슈나이더 부인이 될 마리앤은 어떻겠는가. 그녀의 삶은 극적으로 변할 터였다. 파비안은 마리앤이 행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리앤은 행복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 역시 에나처럼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어야 했나.
파비안의 상심이 깊어졌다. 이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하나 남은 딸마저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버린 것 같았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시오. 멀리 나가지 않겠소.”
크리스토프가 등 뒤에 두 사람을 두고 막 걸음을 옮기던 그때.
“마리앤은 우리에게 연락하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