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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금어초의 꽃말 (7/23)


7. 금어초의 꽃말
2023.06.07.


에나가 한숨 같은 말을 흘렸다. 크리스토프는 느릿하게 눈동자만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파리하게 질린 에나가 참담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감았다.

“마리앤이 본인 의지로 도망간 거라면, 그리고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면, 그 아이는 우리에게 절대 연락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가장 먼저 우리를 찾아올 거란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내 딸, 마리앤은…… 영리한 아이예요.”

“…….”

에나의 말이 옳았다. 마리앤은 누구보다 영특한 아이였다.

그녀가 법대에 입학했을 때, 파비안이 얼마나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던가. 그날 동료들에게 낸 술값만 해도 한 달 치 봉급은 되었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지적받은 크리스토프가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무심하던 표정이 무너지고, 검은 눈동자엔 초조한 기색이 어른거렸다.

그는 몹시 화가 난 와중에도 마리앤을 찾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그의 예상 범위 안에 있었고, 그녀를 되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그녀가 끝내 파비안과 에나에게 연락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면?

파비안은 마른 손으로 다급하게 입매를 문지르는 크리스토프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언제나 확신에 차 있는 검은색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크리스토프는 흡사 시장에서 엄마 손을 놓친 아이처럼 불안해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겁에 질린 아이 같았다.

아아, 마리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니?

파비안이 자신의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방금 전까지 서슬 퍼렇게 날이 서 있던 음성이 아니었다.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목소리였다.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이었다.

“그럼, 어디에서 마리앤을 찾아야, 합니까.”

그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이어졌다. 크리스토프는 비로소 자신이 마리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즐겨 가는 장소가 어디인지, 누구와 어울리는지, 도움을 구할 친구는 있는지.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

크리스토프는 깨진 나무 조각에 의지해 망망대해를 떠도는 조난자처럼 깊게 절망했다. 그러다 이내 간절한 눈으로 파비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의 물음에 답을 주길 바라며.

크게 한숨을 쉰 파비안이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표정이 사라진 크리스토프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집요한 시선이 파비안의 입술을 끈질기게 응시했다.

“슈나이더 경이 모르는 걸 우리가 어찌 알겠소.”

“…….”

파비안은 크리스토프의 하얀 얼굴 위로 비탄의 그림자가 서서히 내려앉는 걸 지켜보며,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내쉬었다.

크리스토프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두 주먹만 하얗게 틀어쥐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비통해 보였던지 그의 발밑이 까마득하게 무너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마리앤,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

파비안은 이미 출근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도 잊은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린 크리스토프가 다급하게 집을 나섰다. 자동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

에나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파비안은 가냘프게 몸을 떠는 아내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조용히 흐느끼던 에나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속삭였다.

“우리 가여운 아이가 어디 있을까요.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도 없을 텐데……. 대체 마리앤은 무슨 생각일까요?”

“글쎄.”

문득, 베로니카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고 항의하던 마리앤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구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마리앤은 결코 수긍하지 않았다.

“어쩌면…….”

파비안은 미처 뒷말을 잇지 못했다. 허공을 올려다보던 그가 침통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문득, 시련은 혼자 오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는 어디에 있는지 모를 자신의 딸을 위해 조용한 기도의 말을 읊조렸다.

***

자동차가 활짝 열린 대문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통과했다. 엔진 소리가 커질수록 저택은 고요한 침묵에 잠겼다. 누구도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마틴은 시체처럼 창백한 크리스토프의 안색을 보며, 클로제 가에서도 마리앤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주름진 눈매에 깊은 한숨이 담겼다.

차에서 내린 크리스토프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마틴이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어디부터 뒤져봐야 할까? 마리앤이 엥겔 부인과 친하게 지냈던가?

문득, 걸음을 멈춘 크리스토프가 눈매를 찌푸렸다. 아니다. 마리앤이라면 사교계의 추문을 감수하면서까지 엥겔 부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리 없었다.

그녀는 책임감이 강했다. 설령 이혼 서류를 던진 뒤라도 슈나이더 가문을 사교계 먹잇감으로 던져주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갔을까.

크리스토프는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마틴이 한발 앞서 방문을 열었다. 다음 순간.

“…….”

우뚝.

크리스토프의 걸음이 멈추었다. 가장 먼저 느낀 이질감은 낯선 향기였다. 방 안을 떠도는 꽃향기.

그러고 나서야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이며 책상 위를 향했다. 더 정확하게는 책상 위에 놓인 보라색 꽃다발을.

“저게 뭐지.”

크리스토프의 목소리는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사람처럼 음산했다. 마틴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꽃과 그를 번갈아 보았다.

“마틴, 자네는 지금 내가 꽃이나 감상할 심경으로 보이나?”

“……알아보겠습니다.”

마틴은 어째서 그곳에 꽃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젯밤, 저택으로 돌아온 크리스토프는 평소와 달리 거실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러니 언제부터 그곳에 꽃이 놓여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의자에 몸을 묻은 크리스토프의 눈동자가 싸늘한 빛을 띠었다. 마틴은 눈치 없는 하인을 찾기 위해 허둥지둥 방을 뛰쳐나갔다.

잠시 후, 다시 집무실로 돌아온 마틴이 조금 전보다 더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는 건 여전했다.

“하녀의 말에 따르면, 슈나이더 부인께서 두신 거라고 합니다.”

“……마리앤이?”

생각지도 못한 말에 크리스토프가 한쪽 눈썹을 스윽 밀어 올렸다. 그리고 보라색 꽃이 마리앤이라도 되는 양 뚫어지게 응시했다.

도망치기 직전, 꽃을 두고 갔다. 왜?

마리앤이 아무 이유 없이 그런 행동을 했을 리는 없었다. 분명 뭔가 의도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쯧.

크리스토프가 답답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러다 이런 막막한 느낌이 아주 오랜만이란 사실을 깨닫곤 또다시 혀를 찼다.

세상이 그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탄탄대로를 걷던 그의 앞에 별안간 커다란 벽이 놓인 기분이었다. 아무리 발돋움을 해도 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명민하게 번득이던 그의 눈동자에 차츰 절망의 빛이 내려앉던 그 순간.

“…….”

보라색 꽃에서 눈을 떼지 않던 크리스토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잇새로 까끌까끌, 메마른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마틴. 이 꽃의 이름이 뭐지.”

“……정원사를 부르겠습니다.”

마틴은 예상하지 못한 물음에 당황했지만, 능숙하게 대처했다. 집무실을 나간 그가 오래지 않아 정원사와 함께 돌아왔다.

페터는 갑작스러운 주인의 부름에 잔뜩 긴장한 눈치였다. 모자를 손에 쥐고 주물럭거리던 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페터, 책상 위에 있는 저 꽃의 이름이 뭔가?”

마틴은 크리스토프의 인내가 바닥나기 전에 서둘러 물음을 던졌다. 페터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쭈뼛쭈뼛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더 살필 것도 없다는 듯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금어초입니다.”

“금어초?”

“예, 추위에 강한 꽃이라 주로 관상용으로 심는데, 보라색뿐 아니라 적색, 백색, 황색…….”

“됐네.”

“예……? 아, 예.”

알고 있는 지식을 줄줄 늘어놓으려던 페터가 멈칫, 입을 다물었다. 선득한 크리스토프의 목소리에 책상 위의 금어초가 얼어 죽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걱정이 들 정도였다.

“나가봐도 좋아.”

마틴의 말에 페터는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또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겨 있던 크리스토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곧장 1층으로 향했다. 서재의 문이 열리고, 책장으로 둘러싸인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에 닿을 듯 높은 책장에는 수천 권의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여기 어디서 분명 그 책을 봤는데.

크리스토프는 초조하게 혀를 차며 책등을 눈으로 훑었다. 그의 짐작이 맞다면 곧 마리앤이 그에게 남긴 메시지를 알게 될 것이다.

성마른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가 찾는 책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혀를 차던 그가 마침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

마른침을 삼킨 크리스토프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윽고 한 권의 책이 그의 손에 딸려 나왔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 않을 책이었다.

꽃말 사전.

귀부인들이 꽃을 선물하며, 그 꽃에 담긴 꽃말로 은밀하게 메시지를 주고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할 일도 없군. 입은 뒀다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 거지? 남의 험담을 하는 데만 사용하나?, 라고 조소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사교계의 중심에 있는 슈나이더 부인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 역시 몇 번이고 의미가 담긴 꽃 선물을 했을 것이다.

경사가 있는 집안엔 축하의 꽃다발을, 조사가 있는 집안엔 위로의 꽃다발을. 때로는 친애의 의미가 담긴 꽃다발을.

마리앤이 자신에게 남긴 메시지. 그것이 무엇일까?

크리스토프가 조급하게 책장을 넘겼다. 팔락팔락, 종이가 쉴 새 없이 넘어갔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장소에 대한 힌트를 남겼을까. 아니면, 자신을 찾아달라는 간절한 부탁일까.

일순, 크리스토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마침내 금어초의 꽃말을 찾았다. 잠시 그대로 굳어 있던 크리스토프는 마른침을 삼킨 뒤에야 떨리는 눈으로 활자를 읽었다.

“……”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마치 허를 찔린 사람처럼.

크리스토프는 무심코 한 손을 들어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연신 턱언저리만 쓸어내렸다.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다시 금어초의 꽃말에 머물렀다.

「오만」

그것이 그녀가 크리스토프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그녀를 찾아달라는 당부도, 그녀가 있는 곳에 대한 힌트도 아니었다. ‘오만’이라는 두 글자였다.

희망에 부풀어 있던 크리스토프의 눈동자가 새카맣게 빛을 잃었다.

***

수레가 창문 바로 아래를 지나갔다. 덜그럭덜그럭, 요란한 소리가 새벽을 깨웠다. 누구보다 긴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은 이른 시각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가 짖자 동네 개들이 죄다 따라 짖기 시작했다. 덩달아 마리앤의 아침도 소란해졌다.

그녀가 살던 저택은 언제나 고요했다. 마을의 요란함이 침범할 수 없는 그곳엔 그녀의 잠을 깨울 만한 어떤 소음도 없었다.

느긋하게 일어나 하녀의 도움을 받아 단장하고, 그날 입을 드레스를 골랐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식사를 한 후 크리스토프를 배웅했다. 그것이 그녀의 아침 일과였다.

“음, 무슨 옷을 입지?”

마리앤은 자신의 옷장을 들여다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저택에 있던 옷방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협소한 옷장엔 딱 다섯 벌의 옷이 걸려 있었다. 슈나이더 후작에게 빌린 돈으로 구입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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