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망한 귀족의 영애쯤 되는 것일까?
(8/23)
8. 망한 귀족의 영애쯤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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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망한 귀족의 영애쯤 되는 것일까?
2023.06.08.
“그래도 출근 첫날이니까 단정한 게 좋겠지? 그래, 너로 정했다.”
이윽고 결심한 듯, 그녀가 가장 수수한 남색 드레스를 꺼냈다. 손가락에 닿는 천이 거칠거칠했다. 그러나 너절한 장식이 없어 움직이기 편한 드레스였다.
“좋아. 나쁘지 않네.”
마리앤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피부에 닿는 거친 옷감이 퍽 불편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제야 자신의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했다.
마리앤의 아버지는 시청의 말단 공무원이었다. 어머니는 쥐꼬리만 한 월급을 쪼개고 쪼개며 알뜰하게 살림을 꾸렸다.
그런 마리앤에게 슈나이더 부인으로서의 삶은 때로 숨이 막힐 만큼 버거웠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격의 옷과 보석은 만족감보단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크리스토프의 곁에 있기 위해서라면 그녀가 감내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슈나이더 부인의 행색이 초라하면 뒷말을 듣는 건 크리스토프일 테니까. 그녀는 그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마리앤은 어수선한 상념을 떨치려는 듯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모든 생각의 귀결은 언제나 크리스토프였다.
크리스토프 슈나이더.
자신의 남편이자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사내.
“이제는 남편이었던, 인가.”
다시 한번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마리앤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항상 곱게 틀어 올렸던 금발은 하나로 땋아 가슴 앞에 늘어뜨렸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집주인인 리스트 부인이 양동이를 들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부인.”
며칠 되지 않았지만, 마리앤은 하숙집이 꽤 만족스러웠다. 마부의 호언장담처럼 리스트 부인의 음식 솜씨가 아주 훌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마음에 드는 건 2층짜리 하숙집에 기거하는 사람이 그녀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첫 출근이군요, 클로…… 아니, 마리앤.”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마리앤을 향해 꼬박꼬박 “클로제 부인.”이라고 부르던 그녀가 어색하게 호칭을 바꾸었다.
“예. 무척 긴장돼요.”
마리앤이 짐짓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엄살을 부렸다. 슈나이더 부인일 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건 평민이나 할 천박한 행동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옷이 사람을 만든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그때는 하지 않았던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걸 보면.
그것은 마리앤 슈나이더가 아니라 마리앤 클로제의 모습이었다. 그녀조차 잠시 잊고 있었던 모습.
마리앤이 다시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우는소리를 했다.
“어젯밤에도 잠을 설쳤지 뭐예요. 잠깐 잠이 들 때마다 악몽을 꿨거든요.”
“저런.”
무슨 일이든 처음은 긴장되는 법이다. 막상 겪고 나면 별거 아니란 사실을 알지만, 그전까지는 자신의 의지로 걱정을 멈출 수 없다.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첫 심부름을 하던 날, 첫 등교를 하던 날, 첫 시험을 치르던 날. 그리고 크리스토프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던 날.
매번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긴장했지만, 그녀는 잘해 냈다. 그러니 이번에도 잘해 낼 것이다. 이제껏 잘해왔는데, 갑자기 못하게 될 리 없지 않은가.
마리앤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몇 번이고 그 말을 중얼거리며 기합을 불어넣었다.
“어디 보자, 양산은 가져가지 않나요?”
그녀의 행색을 훑던 리스트 부인이 손에 든 양동이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마리앤이 고개를 저었다.
“괜한 흠을 잡히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도 눈엣가시일 텐데, 양산을 가져갔다간 분명 ‘팔자 좋게 놀러 온 모양이군’이라는 핀잔을 들을 거예요.”
“그게 아니에요, 마리앤.”
리스트 부인이 모르는 소리 말라는 듯 두 손을 허리에 얹었다. 그녀의 눈매가 약간 치켜 올라갔다.
“양산은 그런 놈들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기 위해 필요한 거라오.”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마리앤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나자, 빳빳하게 긴장했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아하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은 그녀가 다정한 눈으로 리스트 부인을 응시했다.
“고마워요, 부인. 다녀올게요.”
“잘 다녀와요. 오늘 저녁 식사는 솜씨를 발휘할 테니 기대해도 좋아요. 첫 출근을 축하하자고요.”
“와, 어떤 응원보다 힘이 나는걸요?”
그 말을 끝으로 마리앤은 하숙집을 나섰다. 현관문 앞까지 따라 나온 리스트 부인이 그녀를 배웅했다.
마리앤은 양산을 들진 않았지만, 두 손을 앞뒤로 흔들며 씩씩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시비를 거는 놈이 있다면, 양산이 아니라 주먹으로 머리통을 날려 버리리라 생각하며.
***
경찰청은 구시가지의 중심에 있었다. 산과 평지, 바다를 모두 품은 블라우버그는 어딜 가든 짭짤한 냄새가 났다. 공기를 한 움큼 베어 물면 짠맛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숙집에서 경찰청까지는 딱 15분이 걸렸다. 꽤 여유 있게 도착한 마리앤은 오래된 석조 건물을 올려다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여기가 앞으로 내가 일하게 될 곳이란 말이지.”
회색 돌벽으로 이루어진 경찰청은 그곳에서 버틴 세월을 말해주듯 왠지 모를 장엄한 기운을 내뿜었다.
심장이 쿵쿵대며 큰소리로 뛰는 건 긴장감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그녀가 놓았던 꿈, 그것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좋아.”
마리앤은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걸음을 옮겼다. 경찰청 건물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가장 먼저 만난 사람에게 청장실이 어디인지 물었다.
피곤에 찌든 얼굴로 쩍, 하고 하품을 하던 남자가 마리앤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심드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청장실은 왜 찾습니까?”
상황파악을 끝낸 남자가 방어적인 태도로 물었다. 대답이 시원찮으면 당장 쫓아낼 기세였다.
마리앤은 우아한 미소로 그를 응시했다. 슈나이더 부인으로 사는 동안 배운 것이 있다면, 때론 어떤 말보다 미소가 더 큰 위압감을 발휘한다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한풀 수그러든 목소리가 다시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청장님과 약속은 하셨습니까?”
“물론이에요.”
“어이쿠,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죠. 청장실은 위층으로 올라가 오른쪽 복도 끝에 있습니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아가씨.”
마리앤은 그를 등 뒤에 두고 걸음을 옮겼다.
눈썹을 긁적이던 남자는 그녀가 계단을 모두 올라갈 때까지 마리앤을 지켜보았다. 의미심장한 눈매는 그녀를 청장의 정부쯤으로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아마도 앞으로 이런 일들이 숱하게 벌어질 것이다. 경찰청은 여성에게 자유로운 곳이 아니었고, 여성이 근무하기에 적합한 곳은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이제까지 그랬다는 거지. 앞으로도 그렇다는 건 아니야.”
마리앤은 복도 끝방에 서서 자신의 옷차림을 정돈했다. 똑똑, 가볍게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젊은 목소리에 의아한 눈을 하던 마리앤은 이윽고 그 이유를 깨달았다. 비서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친절한 태도로 그녀를 맞았다. 맞은편 벽에는 육중한 방문이 하나 더 있었다.
“마리앤 하베크 양?”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알은체를 했다.
“예.”
마리앤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베크는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이었다. 그녀는 마리앤 클로제라는 이름보다 슈나이더 부인이라는 호칭으로 더욱 유명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청장쯤 되는 인물이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연회에서 경찰청장을 본 기억은 없었으나, 마리앤은 신중을 기했다.
친절한 미소를 띤 비서가 그녀를 또 다른 문 앞으로 안내했다.
비서가 노크했고,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그녀의 예상처럼 노련하고 중후한 목소리였다.
방문을 연 비서가 한 발 옆으로 물러서며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들어가시죠.”
“고마워요.”
마리앤은 예절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미소를 되돌린 후 방 안으로 들어갔다. 크리스토프의 집무실보다 조금 작은 방이었다.
그러나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창가 앞에 놓인 책상과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그리고 손님을 위한 소파와 테이블.
어쩌면 법으로 정해져 있는지도 몰라. 그렇지 않고서야 한결같이 저렇게 고리타분할 순 없지.
마리앤은 엉뚱한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는 듯, 말끔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눈썹을 까닥인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수리가 반쯤 벗겨진 남자는 나이에 비해 체격이 제법 좋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빌헬름 시몬 청장님.”
“니콜라스를 불러주게.”
비서에게 지시한 시몬이 뒤늦게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그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했다. 곤혹스러움과 못마땅함,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이 그녀를 향했다.
“음, 그러니까 마리앤 하베크…… 양?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 우리 경찰청에 여성은 처음이라서 말이오.”
“다른 경관들은 어떻게 부르십니까?”
“그냥 이름을 부르지. 간혹 화가 났을 때는 직책을 부르기도 하고. 서로 오랫동안 봐온 관계라서 말이오.”
“저도 똑같이 불러주시면 됩니다. 어쩌면 저희도 꽤 오랫동안 얼굴을 보게 될 테니까요.”
마리앤은 특별 대우를 바라지 않았다. 그녀가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의외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린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베크.”
“마리앤이라고 불러주세요, 청장님.”
“좋아, 마리앤.”
시몬은 산뜻할 정도로 흔쾌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앤은 한층 더 허리를 꼿꼿이 펴고 그의 시선을 받았다.
그 모습에 시몬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마리앤의 말투와 태도로 보아 그녀가 상류층 여성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디자이너의 이름이 없는 저렴한 드레스와 모자.
그녀의 행색을 다시 한번 눈으로 훑던 시몬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고상한 태도와 조야한 행색 사이의 간극을 가늠하듯.
망한 귀족의 영애쯤 되는 것일까?
마리앤 하베크.
시몬은 지난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그 이름을 조용히 되뇌었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마리앤이라는 이름은 너무 흔했고, 하베크라는 성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슈나이더 후작님께서 자네……를 추천하셨네. 그분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주기 바라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슈나이더 후작님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
시몬이 중요한 질문처럼 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물었다. 그러나 마리앤은 그가 자신의 대답에 귀를 곤두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짐짓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일전에 작은 친절을 베풀었을 뿐인데, 그걸 빚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에요. 제가 경관이 되고 싶어 한다는 걸 아시고, 이렇게 기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감사한 일이죠.”
“……가까운 사이는 아니고?”
“전혀 아닙니다. 그렇게 높은 분을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좋아.”
마리앤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시몬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청장실로 들어온 사람은 짙은 밤색 머리카락에 각진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날카로운 눈빛과 꽉 다문 입매가 왠지 고집스러운 인상을 풍겼다.
“부르셨습니까, 청장님.”
“아, 니콜라스.”
잠깐 마리앤에게 시선을 던진 니콜라스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시몬이 그에게 마리앤을 소개했다.
“이쪽은 마리앤 하베크.”
니콜라스의 시선이 의아한 빛을 띠었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빙긋 웃으며 “마리앤이라고 불러주세요.” 하고 말했다.
니콜라스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살짝 눈인사만 했다.
“앞으로 자네 팀에서 함께 일할 경관이네.”
일순, 니콜라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이 무례한 행동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