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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마리앤을 만나셨습니까? (11/23)


11. 마리앤을 만나셨습니까?
2023.06.11.


입술을 달싹인 크리스토프가 마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그는 명백히 당황하고 있었다. 혹은, 초조해하고 있었다.

“나는 마리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주인님.”

“나는.”

기어코 크리스토프가 자신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마틴은 행여 그가 우는 것은 아닐까,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서고 말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손바닥 사이로 더없이 황폐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도가 아니라면, 마리앤은 어디에 있을까.”

그 중얼거림이 얼마나 애달프게 들렸던지, 마틴은 다 자란 그의 주인을 어린애 보듯 굽어보았다. 두 눈을 꼭 감았다 뜬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수를 쓰든 찾아내겠습니다.”

“어떻게.”

마리앤이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갔다. 그 사실은 크리스토프를 깊은 절망으로 이끌었다. 손 쓸 수 없는 무력감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크리스토프는 습관처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어쩌면 이대로 포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가겠어, 기차역으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매 순간 심장이 바짝바짝 조여들었다. 머릿속에선 최악의 상황들이 펼쳐졌다.

그는 숨을 쉬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난생처음 깨달았다. 이럴 바엔 차라리 자신이 직접 그녀를 찾아다니는 게 나을 듯싶었다. 그러면 적어도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귄터였다.

“무슨 일인가.”

마틴의 물음에 귄터가 정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슈나이더 후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조부께서?”

크리스토프는 갑작스러운 후작의 방문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 이내 성가신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은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마리앤은 그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을 터였다.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야 했다. 비록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해도 마리앤을 찾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수다나 떨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중에 내가 따로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려.”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내딛던 크리스토프가 다시 한번 그 자리에 멈추었다. 귄터의 뒤로 슈나이더 후작이 모습을 드러낸 탓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느릿하게 걸어온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서며 인사를 던졌다.

“오랜만이구나, 크리스. 잘 지내……진 못한 모양이군.”

슈나이더 후작은 수척한 크리스토프의 얼굴과 시커멓게 죽은 안색을 보며 끌끌, 혀를 찼다. 시계를 확인한 크리스토프가 조급함을 억누르고 물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네놈이 다 죽어간단 이야기가 들려서 말이다. 얼마나 정신 나간 꼴을 하고 있는지 보려고 들렀다. 웬만해선 볼 수 없는 귀한 광경이 아니더냐.”

크리스토프는 후작의 속내를 간파하려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하지만 노련한 후작은 애송이를 보듯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마리앤이 도망가고 나서야 똥줄이 타서는. 꼴 좋구나.”

일순, 크리스토프의 두 눈이 번득였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마틴을 쏘아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식었다.

“마리앤이 사라진 일에 대해선 함구하라고 말했을 텐데.”

그녀가 도망쳤다는 소문이 난다면 단순한 일탈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돌아온 뒤에도 추문은 끈질기게 마리앤을 따라다닐 터였다.

그건 크리스토프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마리앤의 명예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가 돌아올 수 있도록 마리앤의 자리를 지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블라우버그에 있는 후작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정도면, 수도에선 이미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봐야 했다.

눈이 마주친 마틴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희미하게 미간을 접었다. 미심쩍은 시선이 크리스토프를 향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함구령은 철저히 지켰습니다. 주인님의 명령을 어길 만큼 간 큰 하인은 이 저택에 없습니다.”

“!”

그 순간, 크리스토프의 고개가 후작을 향해 돌아갔다. 함구령을 지켰는데, 그가 어떻게 마리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문득, 그의 눈동자가 기대로 번들거렸다. 논리와 이성은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크리스토프는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행여 자신의 설레발일까 봐. 또 한 번 기대가 실망으로 바뀔까 봐. 바투 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예리한 시선은 후작의 입술에 못 박혀 있었다.

후작이 두 손을 지팡이에 얹으며 몸을 기댔다.

“네가 마리앤은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일에 파묻혀 산다면 끝까지 모른 체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크리스토프는 저도 모르게 후작을 향해 한발 다가섰다. 그의 언성이 높아졌다. 성마른 물음이 후작을 향해 날아갔다.

“마리앤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마리앤을 만나셨습니까?”

불현듯, 기차역에 그녀를 내려줬다는 마부의 말이 떠올랐다.

블라우버그!

그의 잇새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다.

크리스토프는 그녀가 블라우버그로 갔을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제국의 모든 지명을 떠올리는 와중에도 블라우버그는 그의 안중에 없었다.

크리스토프에게서 도망친 마리앤이 그의 조부의 땅으로 간다니.

그녀는 그의 허를 찔렀다. 역시 마리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의 재기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리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슈나이더 후작은 자신의 손자가 이처럼 흥분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이토록 감정적인 모습도 처음이었다.

이번엔 네가 틀렸구나, 마리앤. 네가 이 녀석을 이렇게 만들었단다.

“어차피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니까. 나는 가여운 마리앤보다 내 손자가 더 눈에 밟히는군.”

“할아버님!”

후작이 자꾸만 뜸을 들이자, 크리스토프가 기어코 고함을 질렀다. 슈나이더 후작이 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할아버님이라는 호칭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크리스토프는 아주 어릴 때가 아니곤 언제나 예의를 갖추어 조부님, 혹은 후작님이라고 그를 불렀다.

할아버님이라.

슈나이더 후작이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이 정도면 수도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크리스토프에게 할아버지란 소리를 들어보겠는가.

피도 눈물도 없는 바다의 제왕, 상어 후작이라고 불리던 그도 이제는 나이가 든 모양이었다. 고작 이 정도에 감회가 새롭다니.

“따라나서거라.”

슈나이더 후작이 대수롭지 않게 등을 돌렸다.

아……!

비로소 크리스토프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어쩌면 환희. 어쩌면 희열. 또 어쩌면 안식.

우두커니 서서 두 주먹을 움켜쥔 그가 느릿하게 목울대를 울렸다. 목젖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앤.”

그녀의 이름을 나직하게 읊조린 크리스토프가 그대로 방을 나섰다. 마틴이 뒤늦게 그의 재킷을 챙겨 들고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주인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간간이 보이던 집들마저 모두 사라지고,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측백나무 한 그루가 순식간에 뒤로 밀려갔다.

크리스토프의 시선은 푸른 대지를 향해 있었지만, 고즈넉한 풍경을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린 채 자신의 머릿속을 괴롭히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경찰청이라고 하셨습니까?”

끝내 그 물음을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었다는 듯.

슈나이더 후작이 두 손을 지팡이 위에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말했다.”

문득, 크리스토프의 시선이 서늘하게 변했다. 그는 시종일관 예리하게 날이 선 칼과 같았다. 조금만 방심해도 손을 베고 마는 위태로운 칼날. 시퍼런 쇠붙이는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슈나이더 후작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손자의 서슬에 놀랄 만큼 녹록하지 않았다. 겉으론 인자하게 보여도, 그 역시 한때는 상어 후작으로 악명을 떨쳤던 사내였다.

그가 편안한 태도로 웃으며 말했다.

“마리앤의 부탁을 들어줬다고 나를 원망하지는 말거라. 나는 그 아이를 꽤 아낀단다. 어쩌면 크리스토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새카만 눈으로 후작을 보던 크리스토프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후작을 추궁하는 대신 나직한 물음을 던졌다.

“마리앤 하베크라고요.”

“그래, 그게 지금 그 아이가 사용하는 이름이지.”

슈나이더 후작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보다 턱선이 날렵해진 자신의 손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디 보자, 오늘 첫 출근을 했겠구나. 우리가 블라우버그에 도착할 때쯤이면 퇴근할 시간이겠군.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리앤은 31번 가의 하숙집에 묵고 있단다. 집사 보조인 루이스의 모친이 운영하는 하숙집이지. 도착하면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게다. 루이스를 따라가거라.”

크리스토프의 안색이 별안간 어두워졌다. 새카만 눈동자가 바닥을 모르고 깊게 가라앉았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키려는 듯, 아래턱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마리앤 슈나이더가 아니라 마리앤 하베크라고 했다. 그녀는 슈나이더의 이름을 버리고 싶은 것일까? 그와의 연결 고리를 끊고 싶은 것일까? 왜?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이 또다시 그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그 순간, 한 사람의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베로니카 클로제.

“마리앤이 신분을 속이면서까지 경찰청에 들어간 건 베로니카 때문이냐?”

“…….”

슈나이더 후작이 그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대번에 정곡을 찔렀다. 크리스토프는 느릿하게 눈을 들었다.

그와 후작의 시선이 마주쳤다. 조부의 청회색 눈동자가 마치 그의 무심함을 나무라는 듯했다.

“베로니카 사건은 제가 직접 검토했습니다. 담당 형사가 작성한 사건 보고서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건, 안타깝지만, 자살이었습니다.”

크리스토프의 잇새에서 구차한 변명이 흘러나왔다. 마치 슈나이더 후작이 마리앤이라도 되는 양.

후작은 자신의 손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완연한 사내의 얼굴을 하고 있는 크리스토프 슈나이더를.

오래전 어느 날, 아들 내외의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간 곳에서 그는 우두커니 서 있는 크리스토프를 발견했다.

고작 네 살짜리 사내아이는 새카만 눈으로 찌그러진 차체를 보고 있었다. 울지도 않았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찢어진 이마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하지만 아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구겨진 차를 묵묵히 쳐다보기만 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끔찍한 사고 속에서 슈나이더 가문을 이을 후계자가 하나라도 살아남았으니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후작은 아들에게 걸어야 하는 기대까지 크리스토프에게 걸었다. 다행히 그는 우수한 사내였고, 모든 면에서 후작을 만족시켰다. 아들을 잃은 상실감을 상쇄할 만큼.

하지만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후작은 뒤늦게 자신의 과오를 깨달았다. 모든 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그는 이제라도 크리스토프가 행복하길 바랐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손으로 슈나이더 가문을 다시 일으켰으니, 크리스토프는 편안하게 그것을 누리길 바랐다.

쯧.

창밖을 보던 크리스토프가 낮게 혀를 찼다. 마치 기차가 더 빨리 가지 않는 게 불만이라는 듯.

문득, 후작의 입매가 느슨해졌다. 그는 조금 전 집무실에서 보았던 크리스토프의 모습을 떠올리며 부드러운 한숨을 흘렸다.

슈나이더 후작은 자신의 손자가 그토록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토록 조급하고, 초조해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인생에서 단 한 번의 실패도 겪지 않은 남자가 처음으로 좌절을 마주하는 순간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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