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크리스토프.
(12/23)
12. ……크리스토프.
(12/23)
12. ……크리스토프.
2023.06.12.
후작은 여유로운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어느새 바깥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광활한 들판 대신 짙푸른 바다가 넘실거렸다. 기차가 그의 영지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고생깨나 하겠구나.
마리앤의 단호한 모습을 되뇌던 후작이 한숨 같은 혼잣말을 흘리며 조용히 눈매를 구부렸다.
좌절 또한 슈나이더 후계자가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중요한 순간에 무너지느니 미리 부서지는 게 나았다.
“하지만.”
너무 오래 힘들게 하지는 말렴, 마리앤. 그래도 나는 무심한 내 손자가 가엾구나.
슈나이더 후작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두 눈을 감았다. 이제는 그도 정말로 나이를 먹은 모양이었다.
***
마리앤은 뻑뻑한 눈을 문질렀다. 온종일 서류 더미를 들여다봤더니 목도 뻐근하고 어깨도 아팠다. 경관이 아니라 사무보조로 취직한 기분이었다.
“첫날이라 그래. 곧 익숙해질 거야. 집에 돌아가면 푹 쉬어. 이 일은 체력이 중요하거든.”
붉은 노을이 마리앤과 얀의 뺨을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퇴근 시간이었지만, 정시에 경찰청을 나서는 사람은 마리앤과 얀, 둘뿐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입지를 말해 주는 것 같아 그녀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제법 큰 괴리가 있었다. 일단 경찰청에 들어오기만 하면,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눈이 휘둥그레질 실력으로 투덜대는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 거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수사는커녕 온종일 서류만 정리했다. 그녀의 존재는 책상 위에 쌓인 서류처럼 거추장스러울 따름이었다.
“제가 산더미 같은 서류를 정리하는 동안 순찰은 잘했나요, 얀 선배님?”
“보석상을 턴 강도는 이미 다른 도시로 도망간 게 틀림없어. 세상에 어떤 바보가 도둑질을 한 도시에 남아 있겠어, 안 그래?”
으스대는 목소리가 썩 밉지 않았다. 마치 잘난 체하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아 우습기도 했다.
“그럴까요? 여태 경찰에 잡히지 않았다면 자신감이 대단할 텐데요. 어쩌면 아직도 이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경관을 비웃으면서 말이지요.”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마리앤. 이래서 애송이는 어쩔 수 없다니까.”
애송이.
어쩐지 그 말을 아주 최근에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어디서 들었더라, 곰곰이 생각하던 마리앤이 저도 모르게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막심이 얀을 “애송이”라고 부르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마 앞으로는 그녀가 애송이의 계보를 잇게 될 모양이었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얀이 거드름을 피우듯 말했다.
“범인을 잡는 게 그렇게 뜻대로만 된다면 난 이미 경감이 되었을 거라고.”
“역시 그렇겠…… 어?”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마리앤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부지런히 옮기던 걸음도 멈추었다. 경관의 고초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으려던 얀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애송이?”
마리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를 뚫어지게 응시했을 뿐이다.
살집이 두둑한 남자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옷을 입은 그가 늘씬한 여자와 팔짱을 낀 채 막 식당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아는 사람이야, 애송이?”
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말에 마리앤은 ‘내가 저 사람을 알던가?’ 하고 자문해보았다. 분명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만난 듯,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요.”
“뭐해, 빨리 가자고. 제시간에 퇴근할 수 있는 날이 그렇게 흔한 줄 알아? 선배로서 조언하자면, 이런 날일수록 최선을 다해 쉬어야 한다고. 알겠어, 애송이?”
저놈의 애송이 소리.
흰 눈을 뜨고 얀을 노려보던 마리앤이 다음 순간, 얌전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사방이 적인데, 굳이 적을 늘릴 필요는 없었다.
“예, 얀 선배님.”
“……얀 선배님.”
또다시 몽롱한 눈으로 그 단어의 울림을 음미하던 얀이 걸음을 내디뎠다. 마리앤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그의 뒤를 따르던 순간.
“앗!”
그녀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마리앤의 시야에 반으로 접힌 남자의 귀가 들어왔다. 왼쪽 눈썹 아래에 사마귀도 보였다.
그와 동시에 범인의 몽타주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허공에 떠 있던 몽타주와 눈앞의 남자가 서서히 합쳐지더니 이윽고 하나의 그림이 되었다.
완벽하게 일치하는 하나의 그림이.
“!”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마리앤? 말똥이라도 밟았어? 그러게 나처럼 길 안쪽으로 걸어야지. 이래서 애송인 어쩔 수 없다니까.”
“그게 아니라……!”
마리앤이 손가락으로 남자를 가리켰다. 그러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얀을 돌아보았다. 얀은 영문 모를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뻐끔뻐끔.
어째서 모르는 걸까. 답답한 마음에 성급하게 달싹이던 입술이 벌어지고, 마침내 고여 있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보석상 강도예요!”
“뭐? 어디? 어디?”
얀이 긴장한 눈으로 재빨리 주위를 훑었다. 마리앤은 마차 승강장으로 향하는 남자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저기요,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식당에서 나오는 남자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디…… 에이.”
의욕에 차 있던 얀이 이내 김빠진 표정으로 어깨를 떨구었다. 그의 잇새로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몽타주를 봤다면 알겠지만, 보석상 강도는 광대뼈가 보일 정도로 비쩍 말랐다고. 그 좁은 환풍기를 통해 보석상에 침입했단 말이지. 그런데 저 남자는 통통하잖아.”
마리앤은 스스로 눈썰미가 있다고 자부했다. 게다가 한 번 본 것은 머릿속에 또렷이 새겨져 필요할 때 언제든 꺼내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한마디로 기억력이 꽤 좋다는 말이다.
그 능력은 슈나이더 부인으로서 아주 유용했다. 귀부인들은 화장술에 따라 인상이 심하게 변한다. 심지어 가발을 쓰고 오는 이들도 있었다.
때로는 남들 몰래 밀회를 즐기느라 변장을 하기도 했고, 혹은 완연한 병색을 숨기느라 짙은 분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리앤은 그들의 본모습을 한눈에 꿰뚫어 봤다. 덕분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 속에서도 괜한 말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마귀와 반으로 접힌 귀뿐만이 아니었다. 눈매와 눈썹 모양도 비슷했다. 살은 쉽게 찌우고 뺄 수 있지만, 신체적 특징은 그리 쉽게 바꿀 수 없다.
마리앤은 비로소 무명 화가의 몽타주가 몹시 정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거기 서!”
그녀가 마차에 오르는 남자를 향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으악! 애송이!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야 인마, 너 거기 안 서!”
얀이 당황했는지 대뜸 험한 말을 내뱉으며 그녀를 쫓아왔다. 그러나 마리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데없는 고함에 고개를 돌린 남자가 그녀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뒤쫓아오는 얀의 얼굴을 보고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얀을 아는 눈치였다. 어쩌면 얀이 경관이라는 사실도 아는지 모른다.
그 순간, 마리앤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남자는 옆에 서 있던 여자를 마리앤 쪽으로 떠밀고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꺄아악!”
“괜찮아요, 아가씨? ……거봐요, 제가 범인이라고 했잖아요, 얀 선배! 찔리는 게 없으면 왜 도망가겠어요?”
“아직 모르는 일이야! 네 얼굴이 무서워서 도망가는지도 모르잖아! 아니면 화장실이 급하거나!”
마리앤은 드레스를 무릎까지 걷고 남자를 뒤쫓았다. 사람들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머, 망측해라!”
두 손으로 눈을 가린 귀부인의 나직한 탄식을 터뜨렸다.
남자는 힐긋힐긋 뒤를 돌아보며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난데없는 추격전에 휘말린 사람들이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며 비명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아하하.”
이상했다. 숨이 턱까지 찰 만큼 힘든데 히죽히죽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어쩌면 그녀는 이 같은 순간을 오랫동안 바라왔던 모양이다.
크리스토프의 옆에 아름다운 꽃처럼 서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두 발로 땅을 디디며 달리는 이 순간을.
“네가 미친 사람처럼 웃으면서 쫓아가는데, 누군들 안 도망가고 배기겠어? 나라도 도망갈걸? 애송이, 너 지금 굉장히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단 말이야!”
“일단 이야기는 저놈을 잡고 나서 해요, 얀 선배!”
“‘님’ 자는 어딜 간 거야! 얀 선배님이라고 해야지!”
얀의 시무룩한 투정을 흘려들으며, 마리앤은 리스트 부인의 조언을 따랐어야 했다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양산만 있었다면, 진작 저놈의 머리통을 후려갈겼을 텐데.
“으앗, 젠장!”
그때, 남자의 앞에 짐을 실은 수레가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장애물에 막힌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황급히 방향을 틀었다.
찰나의 순간, 마리앤과 그의 거리가 조금 좁혀졌다. 그녀는 옆에 서 있던 신사의 지팡이를 낚아채며 “잠시 빌릴게요!” 하고 소리쳤다.
“이게 무슨……!”
당황한 신사가 두 눈을 크게 뜨는 사이, 마리앤이 남자를 향해 다짜고짜 지팡이부터 휘둘렀다. 둥근 손잡이에 정강이가 걸린 남자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으와악!”
그와 동시에 마리앤이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거기 서!”
“와우!”
등 뒤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감탄사가 터졌다. 마리앤의 몸이 허공을 부웅, 하고 날았다.
그것은 은유나 비유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한 마리의 새처럼 날아오른 마리앤이 두 손을 뻗어 남자의 목덜미를 덥석, 낚아챘다.
“큭!”
콰당.
두 사람은 한 데 뒤엉켜 바닥을 굴렀다.
“윽.”
마리앤의 입에서도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팠다.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둔중한 통증이 전신을 달렸다. 모르긴 몰라도 내일이면 온몸에 시퍼런 멍이 들 것이다.
“이거 놔!”
벌떡 몸을 일으킨 남자가 마리앤의 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그는 연신 얀을 힐긋거리며 거칠게 몸부림쳤다.
그러나 마리앤은 악착같이 그의 다리를 붙들었다.
“도망가게 놔둘 줄 알고? 얀 선배, 빨리 와서 이놈 좀 잡아요!”
그녀가 다급하게 소리치던 그 순간.
“마리앤?”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뒤통수를 때렸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만큼 낮고 진중한 음성이었다. 일순, 마리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
믿을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마리앤의 시야에 번쩍번쩍 광이 나는 가죽 구두가 들어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느릿느릿 위로 이동했다.
칼 주름이 진 검은색 바지와 같은 색상의 재킷, 은색 조끼와 진회색의 애스콧타이를 거쳐 마침내.
“……크리스토프.”
마리앤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비어져 나왔다. 한숨처럼 망연하게.
크리스토프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늘 단정한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졌고, 눈 밑에는 플로리안처럼 시커먼 그늘이 졌다. 뺨은 조금 홀쭉해진 듯, 이전보다 광대뼈의 음영이 짙었다.
크리스토프는 섣불리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가슴이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마치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키듯이.
“마리앤.”
그가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기분 탓인지, 그 목소리가 몹시 갈급하고 초조하게 들렸다. 검은 눈동자는 단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그녀만 바라보았다.
마리앤은 꽤 당황스러웠다. 어쩌면 그가 자신을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크리스토프에겐 그녀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그녀의 예상보다도 훨씬 이른 등장이었다.
후작님.
마리앤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왕이면 마음속의 미련을 모두 떨친 후에 그가 나타나길 바랐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도 심장이 내려앉지 않고, 그의 얼굴을 보아도 숨이 가빠지지 않는 그때.
“…….”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순간, 마리앤에게 붙잡혔던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다리를 휘둘렀다.
퍽.
“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