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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태양이 너무 밝으면 별은 보이지 않는다는 걸. (13/23)


13. 태양이 너무 밝으면 별은 보이지 않는다는 걸.
2023.06.13.


방심한 사이, 그의 무릎이 마리앤의 이마를 그대로 내리찍었다. 일순, 눈앞에서 별이 튄 것 같았다. 난생처음 겪는 육체적 고통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마리앤이 몸을 웅크리는 것과 동시에.

“…….”

크리스토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니, 표정이 사라진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고, 그 자리에 맹렬한 분노가 자리했다.

그의 눈동자는 전에 없이 선득했고, 그를 둘러싼 공기는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뿜었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손을 벨 것 같았다.

그가 말없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방해하지 말고 꺼지라고!”

남자는 다시 한번 다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가까스로 그의 다리를 붙잡고 있던 마리앤의 손이 툭, 하고 떨어져 나갔다.

남자가 황급히 등을 돌렸다. 그 순간.

“감히.”

크리스토프가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턱이 돌아갔다.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눈을 크게 떴다. 비틀거리던 그가 이윽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평생을 고귀한 귀족으로, 그리고 품위 있는 인텔리로 살아온 크리스토프의 생소한 모습에 마리앤은 아픈 것도 잊은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가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것도 저렇게 능숙하게.

“감히, 이 여자가 누군 줄 알고.”

크리스토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씹듯,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리고 주저앉은 남자를 향해 한 발 더 다가갔다.

크리스토프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리를 휘둘렀다.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뻑. 심상치 않은 소리와 함께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축 늘어졌다.

툭.

쓰러지는 남자의 품에서 벨벳 주머니가 떨어졌다. 헐겁게 끈이 풀린 주머니에서 푸른색 보석 하나가 데구르르 굴러 나와 크리스토프의 발치에서 멈추었다.

“…….”

마리앤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두 눈만 깜빡였고, 얀은 크리스토프와 남자를 번갈아 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저만치에서 경관들이 삑삑, 호루라기를 불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와중에도 크리스토프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마리앤을 응시하고 있었다.

***

“마리앤.”

크리스토프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사람처럼 까끌거리는 목소리였다.

마리앤은 얀과 경관들이 남자를 데려간 후에야 어깨를 늘어뜨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술렁이는 마음을 모른 척 애써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한 장소는 아니네요. 자리를 옮길까요? 근처에 공원이 있어요.”

멀뚱히 서 있는 신사에게 지팡이를 돌려준 그녀가 “고마웠어요.”라는 인사를 남긴 채 먼저 걸음을 내디뎠다.

등 뒤에서 조용히 따라붙는 발소리가 들렸다. 마리앤은 그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 약해지려는 결심을 깨닫곤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서서히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사라진 공원은 인적이 드물었고, 한낮과 다른 고요함을 품고 있었다. 적당한 자리를 물색하던 마리앤이 아무도 없는 벤치에 앉았다.

“잠깐만 기다려, 마리앤.”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크리스토프가 별안간 걸음을 돌렸다. 마리앤은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며 이대로 도망칠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미처 형체를 갖추기도 전에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여기까지 찾아온 그가 하숙집이라고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뒤에는 슈나이더 후작이 있으니.

어떻게 하지……?

마리앤은 난감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잇새에서 소리 없는 한숨이 흩어졌다. 다시 만난 크리스토프는 여전히 그녀의 가슴을 뛰게 했다.

문득, 그에게 처음 반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마치 혼자만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우아하고 기품 넘치던 모습. 그곳의 주인인 양 여유롭고 담대한 모습.

무성한 소문은 그의 아름다움을 채 반도 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앤은 이대로 그의 손을 잡는다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대하고, 실망하다가 끝내 체념하는.

더 이상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절망은 지금까지 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두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마리앤이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는 찰나.

“여기.”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마리앤은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서서히 벌어지는 시야 한가운데 손수건을 내밀고 있는 크리스토프의 모습이 있었다.

“이마에 대고 있어. 벌써 붉어지기 시작했어.”

크리스토프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얼핏 그의 잇새에서 “빌어먹을.”이라는 욕설이 들린 것 같았다. 두 눈을 크게 뜨던 마리앤이 이내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없지.

크리스토프는 슈나이더 후작의 손자였다. 날 때부터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상류층의 전유물인 사립 학교를 다녔다.

그의 언행은 언제나 교양이 넘쳤다. 때로는 상대에게 위압감을 줄 만큼 격이 다르기도 했다. 마리앤은 여태 그가 험한 말을 내뱉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저열한 욕설이 나왔을 리가 없다. 아마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일 테다.

“고마워요.”

그녀는 크리스토프가 내민 손수건을 받았다. 차가운 손수건을 이마에 가져가자, 뒤늦게 통증이 느껴졌다. 이마 전체가 욱신거렸다. 윽, 그녀의 잇새에서 짧은 신음이 터졌다.

“그 개자식. 죽여 버리겠어.”

“!”

마리앤이 또 한 번 두 눈을 크게 떴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다. 혹은, 본인이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어째서?

크리스토프는 지극히 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공감보다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편이 그다웠다.

마리앤이 아는 크리스토프라면 그녀에게 상대방을 고소하라며, 잘 아는 변호사를 소개해 주겠다고 말해야 했다. 그는 하찮은 폭력 사건을 다룰 만큼 한가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그녀의 이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싸늘하게 굳은 눈동자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눌러 참는 것 같았다.

마리앤은 당황한 마음을 무심한 표정 아래로 감추었다. 그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 사이에 언제 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살얼음처럼 얄팍한 침묵이 흘렀다.

“…….”

불현듯, 크리스토프가 턱에 힘을 주었다. 마리앤을 만나면 할 말이 아주 많았다. 묻고 싶은 말도 많았다.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중 어떤 것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어금니를 악다물고 있던 그가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마리앤.”

그의 잇새에서 낮게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가.

하지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마리앤은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파동하는 공기가 물결처럼 그녀에게로 밀려왔다.

“……예.”

“돌아가지. 일탈은 이만하면 충분해.”

일탈.

그 말에 마리앤은 조용히 입꼬리를 당겼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아스라한 미소에 크리스토프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아무리 결정적인 증인을 데려와도, 혹은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이 벌어져도 결코 당황하는 법이 없던 그가 할 말을 잃고 마리앤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마리앤.”

그가 다시 한번 초조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곤 마른 손으로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그의 음성이 평소보다 빠르고 성급했다.

“당신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새어나가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나. 하이에나 같은 이들에게 먹잇감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아직은 당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지. 뒷일은 내가 수습할 테니.”

마리앤은 우주가 담긴 듯한 청남색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말없이.

아주 오랫동안.

크리스토프는 언제나 침묵 대결의 승자였다. 그는 인내심이 강한 사내였고, 그를 둘러싼 적막을 두려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그가 길어지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또다시 입을 열었다. 어째서인지 자꾸만 목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뱃속이 꿈틀거렸다. 불길한 예감이 등허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베로니카 사건을 다시 살펴보고 있어.”

그 말에 마리앤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크리스토프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제야 눈앞에 있는 사람은 마리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리앤.”

그가 또다시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흡사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잠자코 침묵하던 마리앤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돌아가지 않아요, 크리스토프.”

“…….”

만약 마리앤이 비통하게 울부짖었다면 크리스토프는 능숙하게 그녀를 달랬을 것이다. 만약 마리앤이 불같이 화를 냈다면 크리스토프는 익숙하게 그녀를 위로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리앤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단호한 태도로.

그 순간, 크리스토프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목덜미가 서늘하게 식었다.

“베로니카 사건이 도화선이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 일 하나로 이렇게 엄청난 결정을 내리진 않아요.”

난 그렇게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라고 말하듯 마리앤이 차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

크리스토프의 심장이 더럭, 내려앉았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아귀가 목덜미를 움켜쥔 것 같았다. 베로니카 사건 때문이 아니라면, 그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며칠 내내 그를 짓누르던 새카만 무력감이 다시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토프가 무의식중에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러지 않으면 마리앤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크리스토프.”

이번에는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마리앤의 목소리에서 평소와 같은 뜨거운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빌어먹을.

크리스토프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오랜 시간 재판장에서 치열한 법리 다툼을 한 그는 상대방이 언제 결정적인 말을 할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었다.

바이올린 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분위기와 찰나의 파동이 그 사실을 짐작케 했다. 그리고 마리앤은 지금 그에게 결정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중이었다.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들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토프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마…….”

하지만 늦었다. 그보다 먼저 마리앤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은 언제나 나의 태양이었어요.”

이었다.

과거 시제가 크리스토프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 늘 확신에 차 있던 견고한 눈동자가 커다랗게 흔들렸다.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 그리고 나는 당신의 곁을 맴도는 수많은 별 중 하나였죠. 당신의 빛을 받아야만 반짝이는, 작고 하찮은 별. 어째서 당신이 나에게 청혼을 했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비루한 별이었어요. 당연하죠, 나조차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아니야. 마리앤, 당신은…….”

마리앤은 자신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천천히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 크리스토프가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좋았어요. 그래도 행복했어요, 크리스토프. 당신이 뜨겁게 빛나면 빛날수록 나도 반짝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

“태양이 너무 밝으면 별은 보이지 않는다는 걸.”

“마리앤.”

천천히 눈동자를 들어 크리스토프를 마주 본 마리앤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당겼다. 언제나 그를 향하던 상냥한 미소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것이 제 것이 아닌 양 아주 멀게 느껴졌다. 혹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제는 스스로 빛나 보려고요. 당신이 없어도 반짝일 수 있는, 그런 별이 되고 싶어요. 내 멋대로 기대하고 실망하고 절망하는, 그런 삶은 지겨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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