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일까.
(14/23)
14.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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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일까.
2023.06.14.
아.
크리스토프는 저도 모르게 깊은 탄식을 터뜨렸다. 지겹다, 는 말이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을 예리하게 후벼 팠다.
늘 그가 담겨 있던 마리앤의 청남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제는 그를 담지 않고서.
“……원하는 게, 뭐야.”
마른 논처럼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원하는 게 있다면, 이루어주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자신의 곁에서 이룰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허무한 웃음이 터지는 걸 보고서야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돌아서는 마리앤을 잡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여태 그녀를 잡는 건 그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리앤은 그녀의 의지로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것이 언제든 거두어질 수 있는 의지라는 걸.
금어초.
오만.
보라색 꽃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턱언저리를 문지르던 크리스토프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원하는 걸 해. 내 곁에서. 변호사가 되고 싶다면 그럴 수 있도록 힘을 써주겠어. 경찰청에서 일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수도의 경찰청장을 소개해 주지. 이곳보다 훨씬 환경이 좋을 거야, 당신도 알겠지만.”
“말했잖아요, 크리스토프. 나는 나 혼자 빛나는 별이 되고 싶다고.”
울컥, 뜨거운 뭔가가 속에서 치밀었다. 불에 달군 쇠붙이가 뱃속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홧홧하고 예리한 통증이 소용돌이쳤다.
크리스토프가 턱을 악다물며, 강렬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일순, 사나운 감정이 솟구쳤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마리앤. 설마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라도 할 셈인가.”
그 물음에 마리앤은 또다시 웃음이 비어져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그를 응시했다. 그는 이 순간조차 오만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불행하게도, 그의 오만함이 옳았다. 그녀는 여전히 크리스토프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는 그를 기다리기만 하는 삶은 싫었다. 그 삭막한 시간은 그녀를 마리앤 클로제가 아니게 만들었다.
마리앤은 그와 눈을 맞춘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크리스토프.”
“!”
크리스토프가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어쩌면 절망스러운 표정을.
그의 눈썹이 이마 위로 올라가고, 검은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입술도 살짝 벌어졌다.
믿을 수 없었다. 마리앤이 크리스토프를 사랑하지 않는다니. 그건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다 서서히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몸속을 돌아다니는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시나브로 분노가 내려앉았다.
“마리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어느새 서늘하게 굳어 있었다. 문득, 크리스토프의 시선이 아래로 이동했다.
마리앤은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짐작했다. 결혼반지가 사라진 손가락. 이제는 그 흔적만이 남은 텅 빈 손가락.
시간이 흐르면, 하얗게 남아 있는 흔적조차 사라질 것이다. 마리앤은 자신의 마음 역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시간이 흐르면.
“아니.”
크리스토프가 싸늘하게 뇌까렸다. 분노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통해하는 것 같기도 하며, 인내하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가 마리앤의 발치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다.
그리고 마침내 차갑고 집요한 뱀처럼 그녀를 옭아맸다.
“당신은 그럴 수 없어, 마리앤.”
고집스러우리만치 오만한 목소리에 마리앤은 말없이 자신의 발치만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잇새에서 나직한 혼잣말이 흩어졌다.
“아니요, 그럴 수 있어요.”
스스로에게 들려주기 위한 다짐 같은 그 말은, 그러나 바로 앞에 있는 크리스토프의 귀에까지 가 닿았다. 그의 안광이 형형한 빛을 띠었다.
따스한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황량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
하늘은 마리앤의 눈동자 색으로 물들었고, 거리는 조금 전보다 더 한산해졌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어느 집에선가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긴 꼬리를 드리운 웃음소리가 그녀의 발소리를 으깼다.
타박타박.
몇 걸음 걷다 보니, 이번에는 사나운 호통 소리가 저녁 공기를 흔들었다. 호되게 꾸중을 들은 것인지, 곧이어 아이의 서러운 울음소리도 흘러나왔다.
우뚝.
마리앤이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 전부터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조용한 발소리가 덩달아 흩어졌다.
그녀가 소리 없는 한숨을 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까지 따라올 건가요,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는 대여섯 걸음 뒤에 서서 마리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마치 낯선 것을 보듯, 생소한 시선으로.
한참 만에야 그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한결 풀이 죽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해가 졌어.”
“…….”
마리앤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이 흡사 그녀를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아니, 그럴 리 없어.
마리앤은 또다시 피어나려는 기대의 싹을 짓밟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동요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도록 입술에 힘을 주었다.
예전보단 평등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후작이란 작위는 감히 우러러볼 수 없을 만큼 높은 자리였다.
그래서 슈나이더 후작의 후계자인 크리스토프가 평민 여성을 아내로 맞이한다고 했을 때, 그녀의 이름은 일간지를 도배하다시피 했다.
「신분을 초월한 러브스토리!」
「최초의 평민 출신 후작 부인의 탄생?」
「신분의 벽을 뛰어넘은 이례적인 결혼! 사교계에 새바람을 몰고 올 것인가?」
마리앤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의 언행이 크리스토프의 평판으로 이어진다는 것쯤은.
그녀는 슈나이더 가문의 오점이 되지 않도록 상류층의 예절과 사교계의 에티켓을 배워야만 했다. 결코 녹록한 시간은 아니었다.
특히, 자유분방한 성격의 마리앤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 시간이 마치 가지치기와 같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 마구 뻗어 나간 자신의 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자르는 시간.
그 결과,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우아하고 고상한 슈나이더 부인이었다. 밝고, 명랑하며, 호기심 넘치는 마리앤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마뜩잖게 여기는 이들이 있었다. 대체로 오랜 시간 귀족의 명맥을 이어온 유력한 가문의 여인들이었다.
그 속에서 마리앤은 홀로 적진에 뛰어든 장수처럼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그들과 갖는 티타임은 마치 전쟁과 같았고, 웃음 뒤에 숨겨진 신경전은 잘 벼려진 검을 주고받는 싸움과 같았다.
크리스토프가 그런 그녀의 고생을 알아주길 바란 건 아니었다. 걱정해주길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 번쯤은, 지나가는 말이라도 어떠냐고 물어봐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참석해야 하는 티타임과 연회에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녀가 얼마나 힘겨운 싸움을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당신이 그렇게 걱정 많은 성격인 줄 미처 몰랐네요.”
마리앤의 잇새로 무심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크리스토프는 그런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일순, 그의 눈동자가 상처를 받은 듯 잘게 떨렸다.
자신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차가웠다는 사실을 눈치챈 마리앤이 당혹스러움을 감추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러곤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한 박자 늦게 뒤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앞만 보며 걸음을 옮겼다. 나란히 서는 일도, 서로를 마주 보는 일도 없었다. 묵직한 침묵이 발자국 위로 점점이 내려앉았다.
일찌감치 술에 취한 사내와 쓰레기통을 기웃거리는 고양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
하숙집의 푸른색 현관문 앞에 선 마리앤이 그제야 걸음을 멈추었다. 등 뒤의 발소리도 덩달아 멈추어 섰다.
살짝 숨을 들이켠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곧장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한마디 인사 없이 하숙집 안으로 들어갔다. 크리스토프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다녀왔어요, 리스트 부인.”
마리앤이 짐짓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주방에 있던 리스트 부인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늦어서 걱정하던 참이었어요. 별일 없었나요, 마리앤?”
“네. 부인의 조언대로 양산을 들고 가야 했다는 것 말고는요.”
“거봐요, 내 뭐라고 했소? 머리통을 때려줄 놈들이 꼭 하나씩 있다니까.”
짐짓 거드름을 피운 리스트 부인이 “얼른 저녁이나 먹읍시다.” 하고 말했다. 마리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옷만 갈아입고 내려올게요.”
“그래요, 그래.”
리스트 부인이 음식을 데우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마리앤은 2층으로 올라가며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휴우.
참았던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벽걸이에 모자를 걸어둔 후, 옷장 문을 열던 그녀가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좀 더 어두워진 하늘 아래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
마치 땅에 뿌리가 박힌 나무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기다란 그림자가.
마리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금 전까지 담담함을 가장했던 그녀의 입술 사이로, 젖은 숨이 흩어졌다.
크리스토프.
그 순간, 그림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치 그녀의 부름을 들은 것처럼.
“!”
그녀는 후다닥, 벽 너머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그녀는 망막에 맺힌 잔상을 쫓아내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일까.
원망스러운 마음이 비죽, 고개를 내밀었다. 이대로 미련 없이 보내주면 좋을 텐데.
크리스토프는 문이 닫히기 직전에야 다급하게 손을 끼워 넣은 사람 같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둘 중 하나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그가 서둘러 손을 빼든지, 혹은 보다 못한 마리앤이 다시 문을 열어주든지.
마리앤은 부디 그가 손을 거두길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라도 그에게 문을 열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프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 될 터였다. 그녀는 벌겋게 입을 벌린 자신의 상처보다 그의 손가락에 난 거스러미 하나가 더 신경 쓰이는 사람이었으니까.
천천히 눈을 뜬 그녀가 참았던 숨을 뱉으며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 너머에 미련이 뚝뚝 흐르는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설마 크리스토프와 대화를 나눌 때도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그랬다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을 텐데.
마리앤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거울 속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서랍을 열어 가위를 꺼냈다. 새파랗게 날이 선 쇠붙이가 그녀의 목을 향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서걱서걱.
서늘한 소리와 함께 긴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마리앤은 그녀의 질긴 미련도 이처럼 싹둑 잘려나가기를 기도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리앤! 아직 멀었나요?”
“내려가요, 부인.”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래서 그녀는 검은 그림자가 아직도 집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맛있는 냄새가 나네요.”
집 안에서 새어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