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그쯤 하지, 미하엘 힌덴부르크. (15/23)


15. 그쯤 하지, 미하엘 힌덴부르크.
2023.06.15.


“다녀왔느냐.”

슈나이더 후작이 거실로 들어서는 크리스토프에게 인사를 건넸다. 손자의 얼굴을 살피는 노신사의 눈매가 슬며시 일그러졌다.

크리스토프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갔던 일이 잘 안 풀렸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끌끌. 슈나이더 후작은 그에게 들리지 않도록 낮게 혀를 찼다. 크리스토프가 그를 향해 고개만 끄덕여 보인 후 등을 돌렸다.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남이 보든, 보지 않든, 반듯한 차림새를 유지하는 그가 목을 죈 애스콧타이를 한 손으로 풀며 비척비척 계단을 올라갔다. 툭, 툭, 셔츠의 단추도 하나씩 풀었다.

크리스토프가 아래턱에 힘을 주었다. 목에 핏대가 새파랗게 섰다.

영지에 들를 때마다 사용하는 방은 일전에 왔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애스콧타이를 침대 위로 던지며,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던 때를 떠올렸다.

작년 조부의 생신이었다. 당연하게도 마리앤과 함께였다. 결혼 후 두 번째 맞는 슈나이더 후작의 생일이었음에도 그녀는 첫해와 다름없이 긴장했다.

크리스토프는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깟 고루한 예절 좀 모른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빈정거리는 이들의 입을 닥치게 만들 방법이야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심지어 두 사람의 첫 만남도 그러지 않았던가. 오래전의 기억이 어떤 노력도 없이 불쑥, 떠올랐다.

왕립대학은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여성에게도 그 문을 개방했다. 그리고 마리앤은 왕립대학 내에서도 보수적이기로 소문난 법대에 입학한 세 여성 중 한 명이었다.

크리스토프는 졸업반이었고, 실습을 병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여자가 들어오든, 고양이가 들어오든 그의 관심사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간혹 복도에서 드레스를 입은 여성을 마주치는 광경이 생소하기는 했다. 법대에 입학한 여학생은 세 명이라고 들었는데, 그보다 많은 수의 여학생들이 오가는 게 의아하기도 했다.

그것이 그를 보기 위함이라는 사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크리스토프는 후배뿐 아니라 동기들 사이에서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좋은 혈통과 우수한 두뇌, 뛰어난 능력, 그리고 훌륭한 외모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는, 그야말로 선택받은 인간이었다.

게다가 매년 한 명의 신입 직원만 받는다는 대형 변호사 사무실, ‘바거’의 올해 합격자가 크리스토프라는 소문이 벌써부터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아마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귀족의 자제들은 대체로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늦은 결혼은 괜한 추문만 불러일으킬 따름이니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연애는 결혼 후에 해도 충분했다. 혼인은 가문과 가문의 계약일 뿐이었고, 결혼 후에도 각자 정부나 애인을 두는 게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의 곁에는 여자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약혼식도 하지 않았지만, 저질스러운 소문이 따라붙는 일은 없었다. 그가 여자에게 눈 돌릴 틈도 없이 바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래서 크리스토프가 어느 가문의 영애와 결혼할 것인가, 라는 물음은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 한가운데에 있었다.

어쩌면 아무도 내정되지 않은 그 자리가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기대도.

하지만 그뿐, 크리스토프에게는 더 중요한 일들이 많았다. 그는 수도에서 가장 명성 높은 변호사 사무실인 ‘바거’에서 실습을 시작했고, 사건에 할애할 시간도 모자랐다.

사수와의 약속을 상기하며,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그때.

―사과하세요.

단호한 목소리가 크리스토프의 고막을 비집고 들어왔다. 날카롭거나 새된 음성은 아니었다. 오히려 담담하게 들리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에 깃든 힘이 느껴졌다. 만약 재판장에서 저 목소리를 듣는다면, 저도 모르게 설득당할 것 같은 음성.

천천히 걸음을 늦춘 크리스토프가 소리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십수 명의 학생들이 누군가를 둘러싸듯 둥근 원을 그리고 있었다.

뒷줄에 있던 이들이 “크리스토프야, 크리스토프 슈나이더.”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힐긋힐긋, 곁눈질하는 시선도 느껴졌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큰 크리스토프의 시선이 어렵지 않게 군중을 헤치고 나아갔다. 문득,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미하엘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힌덴부르크 백작 가의 삼남인 그는 크리스토프와 달리 평판이 썩 좋지 않았다. 법대에 입학한 것도 부친의 기부금 때문이 아니겠냐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으니 알 만했다.

그런 미하엘이 싸늘한 눈으로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 한 여인이 있었다. 어깨 위에서 달랑거리는 단발머리가 이채로워 크리스토프의 눈길을 끌었다.

청남색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아득했다. 그 속에서 반짝이는 게 별일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던 크리스토프가 뒤늦게 그녀의 품에서 흐느끼고 있는 한 여성을 알아차렸다.

좋지 않은데.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그들이 좋지 않은 일에 휘말렸다는 직감이 들었다. 미하엘 힌덴부르크가 연관되면 대체로는 그랬다.

아니나 다를까, 미하엘이 조롱 섞인 미소를 던졌다.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지? 여기는 병아리를 키우는 양계장이 아니야. 분수를 알아야지,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 법이야. 감히 여자가 법대에 입학하다니.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것도 정도껏 하라고. 정의의 여신인 디케가 우스운 게 아니라면.

그 말에 작은 여자의 흐느낌이 조금 더 강해졌다. 그제야 어찌 된 영문인지 알 것 같았다. 미하엘이 법대 후배들을 쥐 잡듯이 잡는 모양이었다.

그건 연례행사였다. 매년 신입생 중 만만한 후배를 골라 질릴 때까지 괴롭히는 건 미하엘의 악취미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건 크리스토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니었는데.

크리스토프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최대한 융통할 수 있는 시간은 3분이었다. 그 이상은 위험했다. 그는 결코 약속 시간에 늦는 법이 없었다.

성가시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가 막 한발을 떼는 찰나.

―우습긴 하군요.

크리스토프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가 천천히 눈동자만 돌려 단발머리의 여자를 응시했다. 의외였던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던지 공기가 크게 술렁거렸다.

―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 봐.

미하엘이 사나운 얼굴로 그녀를 위협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쩌면 디케의 현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당당한 모습이었다.

―여성이 법대에 입학한 게 뭐가 문제죠? 힌덴부르크 선배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는 법의 수호신 디케가 여신인 건 잊으셨나요?

―윽.

―그보다 여자가 법대에 입학한 걸 문제 삼을 게 아니라 자격 없는 사람이 법대에 입학한 걸 문제 삼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입학은 힌덴부르크 백작님의 기부금으로 했다 치고, 졸업은 할 수 있나요? 올해 입학한 저보단 먼저 졸업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

경악 어린 침묵이 주변을 새파랗게 물들였다. 크리스토프는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제야 청남색 눈동자가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담담한 게 아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미하엘이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그를 둘러싼 군중들의 시선을 느낀 미하엘이 한층 더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지금……!

―아, 한 가지 충고하자면.

그녀의 한마디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미하엘마저 입을 다물었다. 그 속에서 오직 그녀만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관심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건 여섯 살 난 어린아이도 하지 않을 유치한 행동이에요, 힌덴부르크 선배님.

―그, 그게 무슨 말이야! 관심이 있긴 누가!

미하엘이 그답지 않게 억울한 얼굴을 했다. 구경꾼들이 다시 한번 술렁였다. 크리스토프의 시선은 마치 못이 박힌 듯,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일주일 전부터 우리 뒤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면서 괴롭히고 있잖아요. 관심도 없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어디 있나요? 그래서 소피아와 저, 둘 중 누구예요? 노파심에서 한마디 덧붙이자면, 선배님은 제 취향이 아니에요.

―누가 네까짓 걸!

부르르 몸을 떨던 미하엘이 그녀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분노를 참지 못한 그가 한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곤 두꺼운 팔을 휘둘렀다. 그녀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

탁.

미하엘은 기세 좋게 날아가다 중간에서 멈춘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누구…….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쯤 하지, 미하엘 힌덴부르크.

낮고 묵직한 음성이 주위를 잠식했다. 명령을 내리는 것이 익숙한 목소리.

―윽, 슈나이더.

미하엘이 뒤를 돌아보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크리스토프의 등장에 구경꾼들이 한층 더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굳이 소문을 더할 필요는 없지 않나. 지금 퍼진 추문만으로도 충분해. 그러니 더 이상 힌덴부크르 백작님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게.

―큭.

미하엘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분노와 열등감이 동시에 들끓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자신이 크리스토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걸 아는 탓이었다.

멀어지는 미하엘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그녀가 비로소 어깨를 떨구었다. 살짝 벌어진 잇새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배짱이 두둑해 보이더니, 겁이라도 먹었던 걸까.

크리스토프의 머릿속에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이 떠오르던 그때, 그녀가 더없이 다정한 표정으로 저보다 작은 여자를 응시했다.

―괜찮아, 소피아?

―난 괜찮아. 고마워, 마리앤.

마리앤.

크리스토프는 그녀의 이름을 입 속에서 나직하게 읊조려 보았다. 마치 그의 부름을 들은 것처럼 마리앤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귓불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 싸늘하던 청남색 눈동자가 처음으로 희미한 열기를 품었다. 마치 별이 작열하는 것 같았다.

―괜히 미하엘을 자극해서 좋을 게 없어. 그는 말로만 위협을 하는 사내가 아니야. 정말로 여자를 때릴 수도 있어.

―그랬다면 폭행죄로 고소했을 거예요. 형사법 실습이라 생각하죠, 뭐.

그 말에 크리스토프는 두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말았다. 천하의 크리스토프 슈나이더가 할 말을 잃었다.

가까스로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그가 다시 한번 시계를 확인하곤 낮게 혀를 찼다. 어느새 5분이 지나 있었다. 약속 시간이 촉박했다. 더 이상 걸음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서둘러 두 사람에게서 등을 돌렸다.

“…….”

긴 상념에서 깨어난 크리스토프가 눈앞의 벽을 노려보았다. 작열하는 별처럼 열기 어린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마리앤은 더 이상 없었다.

그녀는 크리스토프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하엘을 바라보던 것처럼 담담한 눈으로.

그래서 심장이 선득하게 식었다.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현실이 마침내 서서히 형체를 갖추고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마리앤.”

크리스토프의 잇새에서 그답지 않게 연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갈피를 잃은 목소리였다.

그는 난생처음 불안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혹은, 공포를 느꼈다.

이혼.

그는 마리앤이 없는 삶을 떠올렸다. 그것은 무척 무미건조한 삶일 게 분명했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니, 그 지루한 삶도 언젠가는 익숙해질 날이 올 것이다. 분명히.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있는 삶보다 없는 삶이 더 길었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없는 마리앤의 삶을 상상해 보았다.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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