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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닥터 클루크 (16/23)


16. 닥터 클루크
2023.06.16.


“…….”

어쩌면 그녀는 행복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

거기까지 생각하던 크리스토프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의 안광이 짐승의 것처럼 사납게 번들거렸다.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놈이 눈앞에 있다면 당장이라도 목을 꺾을 수 있을 만큼 맹렬하고 거센 분노가 그를 집어삼켰다.

적어도 자신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그 꼴은 볼 수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세상에 그것만큼 변하기 쉬운 감정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증오나 미움이 그보다 더 영속할 것이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던 부모의 말로가 얼마나 추악했던가. 그날의 진실이 얼마나 끔찍했던가.

크리스토프는 불쑥, 떠오른 상념을 떨치려는 듯 아래턱에 힘을 주었다.

그렇다면 마리앤을 향한 이 감정의 이름은 무엇일까. 독점욕? 소유욕? 그것도 아니라면, 집착?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크리스토프 역시 답을 알지 못했다. 그로선 난생처음 경험하는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그를 이토록 혼란에 빠뜨리지 않았다.

그녀를 강제로 끌고 가는 편이 좋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크리스토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마리앤은 대체로 크리스토프의 의견을 따랐지만,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그녀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끌고 간다면, 마리앤은 무슨 수를 쓰든 그의 손에서 탈출할 것이다. 귄터와 카린을 따돌리고 블라우버그로 향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가 찾을 수 없는 곳에 몸을 숨기겠지.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그녀를 영영 놓치게 될 것이다.

그건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두 번 다시 그때와 같은 경험을 하고 싶진 않았다. 마리앤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온몸의 피가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은 한 번으로 족했다.

마침내 결심한 듯 크리스토프가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당신이 다시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겠어, 마리앤.”

그녀의 청남색 눈동자가 희미한 열기를 품고서 그를 바라보도록. 크리스토프는 진심을 다해 그녀를 유혹할 작정이었다.

***

“다녀오겠습니다!”

마리앤은 밝게 인사한 후 현관문을 나섰다.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던 그녀의 얼굴이 금세 딱딱하게 굳었다.

크리스토프가 서 있었다.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얼굴을 하고서.

“!”

설마 밤새 이곳에 서 있었나, 두 눈을 크게 뜨던 마리앤이 이윽고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입고 있는 옷이 바뀌어 있었다. 밤새 집 앞을 지킨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한참 전부터 현관문을 응시하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불쑥, 튀어나온 그녀에게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문득,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단발머리가 그녀의 어깨 위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마리앤.”

크리스토프의 잇새에서 그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마리앤의 출근 시간을 알면서도 그는 일찌감치 그곳에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닫힌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상념에 시달렸다. 어차피 잠이 오지 않았으니, 할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시선이 잘린 머리카락에 머물러 있다는 걸 눈치챈 마리앤이 머쓱한 얼굴을 했다. 어울리지 않는 건가, 생각하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울리지 않으면 어때. 더 이상 크리스토프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

그런데 그 순간, 크리스토프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마리앤의 이마를 보던 그가 나직한 욕설을 뇌까렸다.

“그 개자식, 죽여 버리는 건데 그랬어.”

“아.”

마리앤은 저도 모르게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그제야 시퍼렇게 멍든 이마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리스트 부인은 집을 나서는 마리앤의 손에 억지로 양산을 쥐여주었다.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그놈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와요!

마리앤은 머쓱한 표정으로 노부인이 쓸 듯한 낡은 양산을 만지작거렸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키듯, 천천히 심호흡을 한 크리스토프가 마리앤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불쑥, 그의 입술이 열렸다.

“하지만 어떤 상처도 당신의 아름다움을 가리진 못해.”

“!”

손가락이 저릿할 만큼 낮고 묵직한 음성이었다.

마리앤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염치없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함을 가장했다.

슈나이더 부인으로서 감정을 숨기던 게 이런 때 도움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천만다행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르는군. 그때도 당신은 지금과 같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지. 그래서 유난히 눈에 띄었어.”

마리앤은 그가 그날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다. 혼자만 품고 있는 기억인 줄 알았다. 그녀에게만 소중한 추억인 줄 알았다.

그런데…… 크리스토프가 기억한다고 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마리앤은 자신의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 일부러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미안하군요. 슈나이더 부인답지 않은 행색을 하고 있어서. 하지만 이게 나예요, 마리앤 클로제.”

크리스토프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그답지 않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초조한 얼굴로 한발 다가섰다.

“그게 아니야, 마리앤. 당신은…….”

마리앤은 더 이상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그녀의 마음을 헤집을 게 분명했다.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기어코 그녀를 온전히 집어삼킬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려던 크리스토프가 묵묵히 입을 다물곤 그녀의 뒤를 따랐다. 조용한 발소리가 괜스레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읏!”

별안간 화가 났다. 그렇게 수많은 기회를 줬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그녀를 들쑤시는 크리스토프에게.

휙.

등을 돌린 그녀가 사납게 치뜬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노려보았다. 화난 표정의 마리앤을 마주한 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난처한 얼굴을 했다.

몹시 연약하고 가련한 얼굴.

“…….”

결국 마리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시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녀는 전혀 슈나이더 부인답지 않은 태도로 씩씩, 어깨를 들썩이며 성난 걸음을 옮겼다.

끈질긴 발소리가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왔다.

***

“좋은 아침이에요.”

사무실로 들어서며 밝게 인사하던 마리앤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곤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니콜라스와 막심, 플로리안, 그리고 얀까지. 팀원 모두가 출근했다.

지각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창밖을 힐긋거리던 그녀가 다시 사무실 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공기가 무거웠다.

마리앤은 왠지 모를 압박감에 쉽사리 그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네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막심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고, 플로리안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외면했다. 얀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세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니콜라스는.

“마리앤 하베크.”

“예, 니콜라스 경감님.”

마리앤이 한결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책상에 걸터앉은 니콜라스가 팔짱을 끼더니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청남색 눈동자가 점점 더 의아한 빛을 띠는 찰나.

“도대체 어떻게 알았나?”

“네? 뭘요?”

그녀의 반문에 니콜라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옆에 있던 얀이 작은 목소리로 “어제 잡은 보석상 강도 말이야.” 하고 언질을 주었다.

“그놈 집에서 도둑맞은 보석이 발견됐거든. 반 정도밖에 건지지 못했지만 말이야. 나머지 반은 이미 탕진한 모양이야.”

그제야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 마리앤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뺨을 긁적였다. 슈나이더 부인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경망스러운 행동이었지만, 마리앤에겐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몽타주를 본 뒤라 알아보기가 쉬웠습니다.”

그녀의 담담한 대꾸에 또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가시가 돋친 것 같은 불편한 침묵이었다. 콕콕, 뺨이 따가웠다.

니콜라스는 유치장에 갇혀 있는 보석상 강도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무리 몽타주를 봤다고 해도 한눈에 알아보기 힘든 외모였다.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막심과 플로리안이라 해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눈썰미가 특별하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했다. 어쩌면 그의 예상보다도 더.

―마리앤이 이곳에서 무얼 할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

그녀가 처음 이곳에 왔던 날, 시몬 청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할 수 있는 일이라. 어쩌면.

“젠장.”

참다못한 막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욕설을 내뱉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플로리안은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창밖만 바라보았다.

니콜라스가 한결 눅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외모가 많이 바뀌었던데 용케 눈치챘군. 잘했어.”

잘했어.

그 말에서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마리앤은 당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감사합니다.” 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의 뺨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고개를 끄덕인 니콜라스가 책상에서 엉덩이를 떼며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자, 그럼 오늘도 열심히 일하자고. 플로리안은 현재 수사 진척 상황에 대해 보고하고, 얀은 가서 막심을 데려와. 그리고 마리앤은.”

“…….”

마리앤은 기대가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반짝반짝. 청남색 눈동자가 별처럼 작열했다.

니콜라스가 손을 들어 서류가 쌓여 있는 책상을 가리켰다.

“오늘은 저 서류들을 부탁하지.”

“……예.”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녀가 터벅터벅, 힘 빠진 걸음을 옮겼다. “아, 그 전에.” 니콜라스가 그녀를 불렀다. 마리앤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의사부터 만나고 와.”

“의사요? 아.”

그녀가 자신의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참을 만했다.

“별거 아니에요, 경감님.”

“어차피 거기만 다친 것도 아닐 거 아냐.”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니콜라스의 말에 마리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경감쯤 되면 옷 아래에 숨겨진 상처도 꿰뚫어 볼 수 있나?

“얀이 그러더군. 몸을 날려서 범인을 덮쳤다고 말이야. 굉장한 소리가 났다던데? 뼈는 괜찮나?”

“……예.”

마리앤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고 나니,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일을 오래 하려면 몸을 사리는 법도 알아야 하네. 여기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작은 의원이 있어. 경관들이 많이 찾는 곳이니까 경찰청에서 왔다고 하면 알아서 잘 봐 줄 거네. 의사가 꽤 괜찮은 사람이거든.”

“예.”

마리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멀어지는 니콜라스의 등을 보며, 그가 방금 했던 말을 조용히 되뇌었다.

“이 일을 오래.”

문득,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

“마리앤 하베크 씨, 들어오세요.”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진료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작고 아담한 의원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깔끔한 분위기를 풍겼다. 소독약 냄새 대신 덜 마른 페인트 냄새가 났다.

“마리앤 하베크…… 씨?”

책상 앞에 앉은 의사가 그녀를 향해 호의적인 시선을 던졌다. 마리앤은 의외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웃는 얼굴이 매력적인 다정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를 둘러싼 온화한 분위기가 환자의 긴장감을 누그러뜨렸다. 이제까지 만난 권위적인 의사들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특히, 슈나이더 가의 딱딱한 주치의와는.

“저는 리암 클루크라고 합니다. 닥터 클루크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나요?”

마리앤이 무심코 자신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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