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제가 따라갈까요?
(17/23)
17. 제가 따라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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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제가 따라갈까요?
2023.06.17.
의사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시퍼렇게 멍든 이마를 살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마리앤이 겸연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니콜라스 경감님이 가보라고 성화를 부리셔서.”
그 말에 의사의 얼굴에서 잠깐 표정이 사라졌다. 생각에 잠긴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이윽고 천천히 눈매를 접었다. 커다란 눈이 사라지고, 동그란 눈웃음만이 남았다.
마리앤은 저도 모르게 그를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혹시 경찰청에 새로 들어왔다는 형사님이신가요?”
“저를 아세요?”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리암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인상이 한결 유순하게 변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선량한 얼굴이었다.
“이곳에는 경관들이 자주 오거든요. 그리고 진료를 받으며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죠.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얼마나 수다스러운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걸요. 당신은 며칠 전부터 뜨거운 감자였답니다.”
“제가 그렇게 유명했군요.”
마리앤이 우울하게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자신을 둘러싼 소문이 썩 좋은 이야기일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리암이라고 부르세요.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까.”
“자주 보게 되나요?”
“우리 의원을 먹여 살리는 단골손님이 막심과 얀이라는 것만 말해두죠.”
“그렇다면 자주 봐요, 닥터 리암.”
마리앤이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리암이 기어코 허리를 젖히며 박장대소를 했다. 보는 사람까지 시원해지는 웃음이었다. 결국 마리앤도 그를 따라 웃고 말았다.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니콜라스 경감의 팀이 강력 사건을 주로 담당하거든요. 충고하는데, 그 일을 오래 하고 싶으면 몸을 사리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말은 니콜라스 경감님께도 들었어요.”
“이런. 내가 그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 한 말이었는데, 선수를 빼앗겼군요.”
리암이 한발 늦었다는 듯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마리앤은 그가 퍽 마음에 들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도, 아주 오래 알던 친구처럼 편안했다. 아마 그를 둘러싼 온화한 분위기 덕분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블라우버그에는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이곳뿐만이 아니다. 수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속 얘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베로니카.
어떤 예고도 없이 불쑥, 여동생의 얼굴이 떠올렸다. 부모님에게도 말할 수 없던 비밀을 공유하던 사랑스러운 아이.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가여운 아이.
“하베크 양?”
그녀의 표정을 들여다보던 리암이 조심스럽게 마리앤의 이름을 불렀다. 짧은 슬픔에 빠져 있던 그녀가 습관적으로 입꼬리를 당겼다.
그건 마리앤의 것이라기보단 슈나이더 부인의 것이었다. 감정을 능숙하게 숨기는 미소.
“……마리앤이라고 불러주세요.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까요.”
“나야 마리앤 양을 자주 보면 좋지만, 나를 자주 만난다는 건 당신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런 일은 없기를 바라야죠. 하지만.”
“?”
“보석상 강도를 잡으려고 몸을 날릴 정도니, 제 충고엔 귀를 기울이지 않겠죠?”
그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 마리앤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어깨를 으쓱였다. 반쯤 체념한 기색이었다.
“도대체 그 소문은 어디까지 난 건가요?”
리암이 둥글게 굽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상대의 마음을 위로하는 따스한 눈길이었다.
“언제든 찾아와도 좋습니다, 마리앤.”
마리앤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별안간 짙은 피로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어쩐지 자신의 인생이 몹시 고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베로니카의 죽음, 이혼,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삶.
“앞으로 힘든 일이 많을 겁니다. 몸보다는 마음이 말이죠.”
“알고 있어요.”
마리앤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 틈바구니에 섞여 자신의 몫을 해내는 게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닐 것이다.
마을 의사까지 그녀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을 정도니, 뒷이야기가 어디까지 퍼졌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한동안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무능할 때는 조롱을 담아, 유능할 때는 시샘을 담아.
익숙한 일이었다. 슈나이더 부인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평민이었던 마리앤의 신분이 수직상승 하는 순간, 온갖 질시 어린 소문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서툴 때는 조롱을 담아, 능숙할 때는 시샘을 담아.
아마 다른 귀족과 결혼했다면 이 정도로 모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탐내는 크리스토프의 아내라는 자리. 거기에 앉은 사람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마리앤 클로제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녀는 표정을 숨기는 법부터 연습해야 했다. 그들의 조롱에 상처 입은 얼굴을 할 때마다 슈나이더 부인의 자질 운운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으니까.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몸이 아프지 않아도 종종 찾아오세요. 이래 봬도 정신과 전문의 과정도 수료했거든요.”
“이번에는 정신과 환자를 유치하려는 건가요?”
하하하, 리암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은 상대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힘이 있었다.
정신과 의사이기 때문일까?
마리앤의 입술 사이에도 유쾌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이것이 얼마나 오랜만의 웃음인지 깨닫곤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리암의 온화한 갈색 눈동자가 그녀의 쓴웃음을 덧그렸다.
폭력과 도둑, 강도, 살인 등 범죄의 종류는 다양했다. 때로는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잔혹한 범죄도 있었고, 때로는 동정심이 일 만큼 안타까운 범죄도 있었다.
하지만 마리앤은 귀부인들과의 고상한 다과회보다 범죄 보고서를 정리하는 지금이 훨씬 더 즐거웠다. 관심도 없는 가십과 유행에 대해 떠드는 시간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어머, 슈나이더 부인 좀 봐요. 누가 평민 출신 아니랄까 봐 컵조차 제대로 잡지를 못하네요.
―가정교육을 엄격하게 받지 못했을 테니 그럴 만도 하죠.
―차를 마실 때 소리 내는 걸 들었나요? 맙소사, 우리 집 하녀도 그렇게 경박하진 않답니다.
―우리가 이해해야지 별수 있나요. 저래 봬도 슈나이더 가문의 여인이잖아요.
마리앤은 차 한 잔을 마시는 데도 그렇게 많은 예의범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차를 저을 때 정해진 방향이 있다는 것, 차를 젓기 전과 후에 티스푼을 놓는 위치가 다르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슈나이더 부인에게 마리앤 클로제의 상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갓난아이와 똑같았다. 처음부터 모든 걸 새로 배워야만 했다.
그들의 조롱에 익숙해지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더 이상 흠 잡힐 게 없을 때쯤, 그리하여 누구도 그녀를 우습게 보지 못할 때쯤, 마리앤은 비로소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뒤에도 마음이 편했던 건 아니었다. 그들과 특별히 친해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가지가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하나씩 잘려나갔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가지가 다 잘려나간 나무는 처음과 같은 나무일까, 하는 생각.
마리앤은 여전히 마리앤일까.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고상한 대화를 나누는 그녀가 여전히 마리앤 클로제일까. 아니라면, 과연 나는 누구일까?
“손이 멈췄잖아. 벌써부터 농땡이를 피우시는 건가, 우리 신입께서는? 왕립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다 그런가 보지?”
그때,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방해했다. 마리앤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막심이 불쾌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똑같이 되받아쳤을 것이다. 그러나 귀부인들의 보이지 않는 악의에 단련된 마리앤이었다.
그녀들에 비하면 막심의 시비는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적어도 그는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부류의 인간이었으니까.
막심은 그녀를 자신의 영역에 침입한 침략자 정도로 여겼다. 자신이 이제껏 쌓아온 것들이 그녀로 인해 와르르 무너질까 봐 경계했다.
아마도 그는 마리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로 대했을 것이다. 왕립대학을 졸업한 낙하산이라면, 그게 누구든 똑같이 텃세를 부리고 못살게 굴 터였다.
마리앤이 그를 향해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막 정리를 마친 참입니다.”
“!”
막심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빠른 일 처리 때문인지, 두둑한 배짱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그에게 마리앤을 칭찬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었다.
막심이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사무실 앞을 힐긋거렸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야?”
그의 물음에 마리앤의 입꼬리가 어색한 빛을 띠었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크리스토프 슈나이더.
1층 전체가 뻥 뚫린 사무실은 형사와 제복 경관, 그리고 업무를 처리하러 온 시민들로 북적거렸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사무실 입구 의자에 앉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위압적인 자세로 한 시도 마리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업무와 관계없는 사람이라면 쫓겨나야 옳았지만, 그가 뿜어대는 존재감에 누구도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칼같이 다린 비즈니스 슈트와 애스콧타이, 번쩍번쩍 광이 나는 구두. 포마드로 빗어 넘긴 검은 머리카락.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외모였다. 그런 크리스토프에게 정체를 캐물을 만큼 눈치 없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때깔부터 다른 슈트의 가격이 그의 지위를 짐작케 했음이 틀림없었다.
“프랑케 경…… 헉, 헉.”
그때였다. 헐레벌떡 달려온 제복 경관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막심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했다. 서서히 미간을 일그러뜨리던 막심이 거칠게 소리쳤다.
“사망 사건이다. 얀…….”
거기서 잠깐 말을 멈춘 그가 텅 빈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얀은 플로리안과 함께 좀도둑이 든 상점가에 나간 참이었다. 니콜라스는 청장과 독대 중이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을 보던 그가 난감하게 혀를 찼다. 현장 업무는 2인 1조가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경감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사망 사건은 현장이 훼손되기 전에 출동해야 하는데.”
성마른 혼잣말에 슬그머니 눈치를 살핀 마리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따라갈까요? 마침 서류 정리도 끝냈는데. 경감님은 얘기가 길어지실 모양이에요.”
“필요 없…….”
말을 하다말고 입을 다문 막심이 다음 순간, 꿍꿍이 가득한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마리앤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좋아. 따라와.”
막심이 생색을 내듯 가슴을 내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리앤은 황급히 모자를 쓰고, 그의 뒤를 쫓아갔다.
***
“그러니까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구야?”
막심이 뒤를 힐긋거리며, 조금 전과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마리앤은 이번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입꼬리만 당길 뿐이었다.
대여섯 걸음 뒤에서 크리스토프가 두 사람을 따라오고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는 자세로, 아주 여유롭게.
도대체 왜?
마리앤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3분 주지, 짧고 간결하게 용건만.”이 입버릇인 크리스토프는 수도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시간은 금이었고, 그의 변론 한 번에 천문학적인 금액이 오갔다.
그런 크리스토프가 블라우버그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데, 하는 일 없이 그녀의 뒤를 쫓아다닌다는 건 더 놀라운 일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그의 보좌관인 올리버는 상황을 수습하느라 난리가 났을 것이다. 울상을 지으며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있을 게 분명했다.
심심한 위로를 표해요, 올리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