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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괜찮나, 마리앤. (18/23)


18. 괜찮나, 마리앤.
2023.06.18.


“돈 떼어먹은 거 있어? 아무리 사정이 안 좋아도 남의 돈을 떼어먹고 그러면 안 되지. 그러다 칼부림 난 사건을 하루 이틀 본 줄 알아?”

막심이 조롱 섞인 투로 핀잔을 날렸다. 마리앤은 차라리 돈을 떼어먹은 거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끈질긴 시선에 뒤통수가 당겼다.

“기분 탓인가. 저 사람이 나를 노려보는 것 같은데.”

“…….”

마리앤은 막심의 푸념을 못 들은 척 앞만 바라보고 걸었다.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녀가 출동하는 첫 사건이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긴장되었다. 생각만큼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마리앤은 자신의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 입술에 힘을 주었다.

“막심 경위님, 안녕하십니까.”

집 앞을 지키던 제복 경관이 막심을 보곤 알은체를 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앞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리스트 부인의 하숙집과 비슷한 외관의 가정집이었다. 세 개의 돌계단 위에 갈색 현관문이 있는 2층짜리 벽돌집.

막심이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그 앞을 지나쳤다.

“수고가 많군.”

마리앤도 그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제복 경관들이 이내 그녀의 정체를 눈치채곤 “소문의 그 여자 경관인가 봐.” 하고 속삭였다.

“보석상 강도를 잡으려고 몸을 날렸다는?”

“여자 경관이라니, 말세야, 말세.”

그들의 비아냥을 못 들은 척 집 안으로 들어서던 마리앤이 다음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흡!”

그녀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계단 아래에 시체가 있었다. 뒤통수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시체가.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마리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처음 맞닥뜨린 시체는 막연한 상상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생명이 빠져나간 인간은 마치 나무토막 같았다. 혹은, 잘 만든 인형 같기도 했다. 그 묘한 간극에 심장이 선득하게 식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물과 피가 범벅된 냄새였다. 마리앤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틀어쥐었다. 뱃속이 뒤집혔다.

막심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리앤이 이대로 쓰러지길 바라는지도 몰랐다.

그의 뜻대로 해줄 마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생리적인 현상은 그녀의 의지로 눌러지는 게 아니었다.

“웁!”

결국 그녀는 그대로 등을 돌려 집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등 뒤에서 막심이 킬킬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고, 제복 경관들이 동정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이 보였다.

마리앤은 곧장 집 뒤편으로 달려갔다. 울타리 앞에 관목이 심겨 있었다. 단숨에 허리를 숙이고 구토를 했다.

“윽.”

그러고 나자, 깊은 자괴감이 밀려왔다. 고작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한 자신에게.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크나큰 괴리가 있었다. 상상 속의 그녀는 사건을 척척 해결했지만, 현실 속의 그녀는 시체에 놀라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경관 일을 가볍게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자신은 경관에 어울리지 않는지도 몰랐다.

―여자 경관이라니, 말세야, 말세.

방금 전, 제복 경관이 했던 말이 귓속에서 맴돌았다.

“…….”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것이 구역질 때문인지, 자괴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자신의 모습이 한심해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신 차려, 마리앤 클로제.

그녀가 주먹을 콱 움켜쥐는 순간.

“!”

툭툭.

등을 두드리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리앤은 한층 더 하얗게 질렸다. 바람을 타고 익숙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마치 바다처럼 깊숙하고 청량한 향기가.

그녀는 그 향기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크리스토프.

그는 결벽증이라고 생각될 만큼 청결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집 안에 먼지가 있는 꼴은 보지 못했고, 옷에 아주 작은 이물질이 묻어도 즉시 갈아입어야 했다.

사업상의 이유로 타인과 악수를 해야 할 때면 무심한 표정 아래로 싫은 기색을 감추었다. 그러고 남들의 눈을 피해 슥슥, 손을 닦았다.

그런 그가 토악질을 하는 마리앤의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눈썹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어 마리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괜찮나, 마리앤.”

그제야 마리앤은 그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단 사실을 깨달았다. 큰소리를 탕탕 쳐놓고, 다음 날부터 이런 꼴이라니.

윽.

마리앤은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애써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손길은 크리스토프답지 않게 다정했다. 그래서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크게 심호흡을 해.”

크리스토프의 손길이 조금 더 느려졌다. 등을 두드리던 손은 어느새 쓸어내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흡사 명백한 의도를 가진 것처럼.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손가락이 척추를 하나씩 짚었다. 뼈의 개수를 세듯, 집요하고 꼼꼼하게.

은밀하고 노골적인 손놀림에 마리앤의 어깨가 흠칫, 긴장했다. 크리스토프의 눈동자 색이 조금씩 짙어졌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허리를 지나는 찰나.

“흡!”

마리앤이 퍼뜩 등을 세웠다. 그의 손길이 닿은 곳마다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이제, 괜찮아요.”

그녀의 완곡한 거절에 크리스토프의 손이 느릿하게 떨어져 나갔다. 마리앤은 두근거리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화가 난 사람처럼 입술을 앙다물었다.

크리스토프의 딱딱한 목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 중에서 피로 현상이 가장 높은 게 후각이야. 아무리 고약한 냄새라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익숙해지는 때가 온다는 뜻이지.”

그 말에 마리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 것일까? 이전에 시체를 본 적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녀의 의문을 눈치챈 크리스토프가 천천히 무릎을 펴며 대꾸했다. 마리앤의 시선이 그를 따라 이동했다.

“잊었나, 내가 형사 사건 변호도 맡은 적이 있다는 거.”

“아.”

마리앤은 그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가 자신에 대해 아는 것보다는. 그런데 지금,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

그 말을 끝으로 크리스토프가 등을 돌렸다. 마리앤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때, 삐걱하는 문소리가 들렸다.

“?”

고개를 돌리자, 살짝 열린 뒷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사내아이가 보였다.

열두어 살쯤 되었을까.

마리앤을 빤히 쳐다보던 소년은 엄지손가락을 쪽쪽 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이에 비해 행동이 어눌하고 어린 듯했다.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가 약간의 호기심과 약간의 경계를 담고 그녀를 관찰했다. 그러다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는 후다닥, 집 안으로 몸을 감추었다. 주방과 통하는 뒷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제복 경관은 무람없이 집을 들락거리는 크리스토프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그의 위세에 눌려 차마 누구냐고 묻지 못하는 눈치였다.

크리스토프 역시 경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셔.”

그가 마리앤에게 물 잔을 내밀었다.

“…….”

그녀는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그것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을 삼킨 그녀가 한참 만에야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천천히,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심했다. 비참하기도 했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자책할 필요 없어, 마리앤. 처음 시체를 보면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야. 남자 경관이라고 다를 것 없어. 나는 울면서 도망가는 경관도 봤어.”

“…….”

그 말에 마리앤이 가만히 눈동자를 들었다.

위로일까?

확신할 수 없었던 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크리스토프 슈나이더였기 때문이다. 냉철한 논리와 이성의 대명사.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기보단 사정없는 변론으로 상대를 난도질하는 변호사.

크리스토프는 평소와 다름없는 무감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그래서 한층 더 마음이 편해졌다. 잔에서 입을 뗀 마리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며 망설이던 마리앤이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천만에. 혹시 이대로 사직서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나는 언제라도 환영이야.”

마리앤이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덕분에 좀 진정이 됐어요. 이제 정말로 괜찮아요.”

오기로 똘똘 뭉친 그녀의 모습을 보며, 크리스토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눈썹을 들썩였다.

“이거.”

그가 민트 잎을 내밀었다. 알싸하고 서늘한 향기가 주변을 물들였다.

“민트를 씹으면 조금 나을 거야. 가끔 내가 사용하는 방법이지. ……물론, 민트조차 소용이 없는 현장도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고마워요.”

마리앤은 그의 말대로 민트를 입 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시원한 향에 후각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자, 마음이 좀 더 진정되었다.

심호흡을 하고 어깨를 편 그녀가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시체 옆에 서 있던 막심이 심술궂은 표정으로 빈정거렸다.

“벌써 돌아왔나? 오늘 안으론 못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흠, 그 얼굴을 보니 엉엉 운 건 아닌 모양이군.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게 됐어.”

그의 의도는 명백했다. 마리앤이 이대로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것.

원하는 대로 해줄 순 없지.

마리앤은 그를 마주 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귀부인들을 상대할 때처럼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우아한 미소를.

막심이 수상쩍은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가 걱정을 했다는 거지?”

마리앤은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시체를 향해 걸어갔다. 생기 없는 싸늘한 시신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질끈, 두 눈을 감았다가 뜬 그녀가 두 눈에 잔뜩 힘을 주곤 시체를 살폈다. 젊은 여자였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

어쩌면 열대여섯 살쯤.

그녀가 바닥을 보며 카펫 위에 엎드려 있었다. 뒤통수에 엉겨 붙은 피는 이미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상처에 비해 카펫은 깨끗한 편이었다.

마리앤은 이대로 뛰쳐나가고 싶은 것을 참으며, 꼼꼼한 눈으로 시체를 살폈다. 막심이 으스대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열심히 볼 것 없어. 어차피 사고니까. 좁고 가파른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게 분명해. 뭐, 애송이는 그런 거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 말에 마리앤이 묻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시체만 보고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는 듯. 막심이 한 손으로 옆에 서 있는 여인을 가리켰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하얗게 질린 중년 여성이 주방 벽에 기댄 채 떨고 있었다. 그녀는 울컥울컥, 치솟는 슬픔을 참으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피해자의 모친이야. 그녀가 봤다는군. 피해자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모습을 말이야.”

마리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차마 시신을 쳐다보지 못하고 자신의 두 손을 꼭 맞잡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바라보던 마리앤의 눈동자가 다시 시체를 향했다.

그녀의 잇새로 의구심 가득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앞으로 엎드린 채 죽어 있는데요. 계단에 뒤통수를 부딪쳤다면 천장을 보고 넘어져야 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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