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마리앤, 그리고 또 뭐가 보이지?
(19/23)
19. 마리앤, 그리고 또 뭐가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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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마리앤, 그리고 또 뭐가 보이지?
2023.06.19.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 고작 여자 주제에 뭘 안다는 거지? 나는 이곳에서 자그마치 7년을 일했어! 너보단 내가 더 많이 안다고! 너는 얌전히 내가 시키는 일이나 하면 된다고. 알겠어?”
그가 마리앤을 잡아먹을 것처럼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막심은 그녀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이 상황이 몹시 싫었다. 그의 의견에 반기를 드는 것도.
그때까지 외부인인 양 잠자코 있던 크리스토프가 한발 앞으로 나왔다. 그는 어떤 의미로든 존재감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그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주위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재판정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크리스토프는 언제 입을 열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마리앤과 막심, 그리고 중년 여성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꽂혔다.
묵묵히 침묵하던 그는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입술을 달싹였다.
“저 작자는 뭐야?”
크리스토프가 턱짓으로 막심을 가리켰다. 그 오만한 태도에 막심이 눈살을 찌푸리는 찰나.
“저 작자는 당신이 왕립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모르나?”
마리앤은 조마조마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막심이 싸늘한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노려보았다.
“학교에서 배우는 이론과 현장이 같은 줄 아나 본데, 천만에. 사건 현장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게다가 당신은 누군데 사건 현장에 있는 거지? 외부인은 현장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기본 상식조차 모르는 초짜인가?”
픽.
‘초짜’라는 단어에 크리스토프의 잇새에서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미소였다.
그가 여유로운 태도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움찔한 막심이 크리스토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크리스토프 슈나이더라고 하오.”
“슈나이더?”
일순, 막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블라우버그에서 ‘슈나이더’란 성은 상상 이상의 영향력을 가진다. 이 땅이 모두 슈나이더 가문의 소유인 바에야 그게 퍽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크리스토프 슈나이더라는 이름은 다른 의미로도 유명했다. 슈나이더 후작의 손자가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라는 얘기는 블라우버그 사람들의 가장 흔한 안줏거리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가 담당하는 재판 결과는 실시간으로 블라우버그에 전해지곤 했다. 사람들은 그의 승소에 열광했고, 그의 승리를 자랑스러워했다.
“마, 막심 프랑케라고 합니다.”
막심이 귀신에 홀린 듯 그의 손을 잡았다. 가볍게 악수를 한 크리스토프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손을 닦았다.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맙소사.
마리앤이 한숨을 내쉬었고, 무안을 당한 막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정작 크리스토프는 태연자약했다.
“오늘부터 블라우버그 경찰청의 자문을 맡게 되었는데, 아직 얘기를 듣지 못한 모양이군. 인사 발령이 하달되길 기다리는 중이었으니, 아마 경찰청으로 돌아가면 내 이야기를 듣게 될 거요.”
“!”
그 말에 마리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그녀를 돌아본 크리스토프가 대수로울 것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당신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지.”
슈나이더 후작.
마리앤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를 누구보다 아끼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도래하면 크리스토프의 편을 들겠다던 후작의 말이 떠올랐다.
이건 너무 크리스토프만 편애하시는 것 같은데요, 후작님.
“그런데 크리스토프 슈나이더 경께서 이곳엔 왜…….”
막심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크리스토프와 마리앤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막심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정면에 있는 계단을 응시했다.
크리스토프는 대답 대신 시체에 눈길을 던졌다. 그는 참혹한 시신을 눈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눈동자를 들어 막심을 보았다.
막심은 왠지 모르게 뒷골이 당기는 느낌이었다. 싸늘한 긴장감에 그의 신경이 곤두섰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폈다.
그러나 그에게도 입장이라는 게 있었다. 아무리 슈나이더 후작의 후계자라 해도 이대로 쉽게 물러설 순 없었다.
이곳은 그의 영역이었다. 7년 동안 하나씩 쌓아 올린 막심 프랑케의 성.
그가 막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할 때, 크리스토프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마리앤.”
“…….”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모두 말해 봐. 정신 나간 개처럼 짖는 저 작자는 신경 쓰지 말고.”
크리스토프가 반듯한 자세로 서서 팔짱을 꼈다. 막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힐긋, 그의 눈치를 살피던 마리앤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넘어지면서 계단에 뒤통수를 부딪쳤다고 했는데, 계단 어디에도 핏자국이 없어요. 게다가 계단 모서리에 부딪혔다고 하기에는 상처 부위가 둔기에 얻어맞은 것처럼 넓고 뭉툭해요.”
“윽.”
막심이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황급히 시체를 살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막심의 얼굴에 짙은 낭패감이 어렸다.
그 사이, 마리앤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고요한 공기를 흔들었다.
“피해자 손톱에 적은 양의 혈흔이 묻어 있는데, 피해자의 피 같지는 않아요. 상처 부위를 만지다가 묻었다면 저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피가 묻었어야 하니까요. 손톱뿐 아니라 손 전체에.”
“좋아.”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토프가 보란 듯이 막심에게 시선을 던졌다. 마치 똑똑한 자식을 자랑하듯 우쭐하는 그의 표정에 막심이 얼굴을 구겼다.
“그, 그 정도는 나도 진작 확인했다고! 하지만 그게 사고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지는 못해!”
크리스토프는 멍청한 사람을 싫어했다. 고집 센 사람도 싫어했다. 하지만 가장 싫어하는 건 멍청한데 고집만 센 사람이었다. 막심이 딱 그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가 마리앤에게 시선을 주었다. 일그러뜨렸던 눈썹을 펴며.
“마리앤, 그리고 또 뭐가 보이지?”
“상처 부위가 큰 데 비해 카펫에 묻은 피는 생각보다 적어요. 그렇다는 말은…….”
생각을 정리하듯 잠시 침묵한 그녀가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는 뜻일까요? 왜?”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가장 놀란 사람은 크리스토프였다. 그녀의 추론은 논리적이었고, 합리적이었다. 또한, 타당하기도 했다.
“글쎄.”
이미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듯 중년 여성을 일별한 크리스토프가 담담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다음 순간, 그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리고 카펫을 들추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바닥이 드러났다.
“카펫 아래에 먼지가 쌓여 있군. 카펫은 원래 이 자리에 있던 게 아니었어. 당신 말이 옳아, 마리앤. 시체는 카펫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졌어.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편 그가 주방 앞에 서 있는 부인을 향해 묵직한 시선을 던졌다.
“피해자의 손톱에 묻은 피가 피해자의 것이 아니라면, 답은 하나겠지.”
“가해자?”
무심코 대답한 그녀가 크리스토프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러다 그 끝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곤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가벼운 웃음을 흘린 크리스토프가 나지막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때론 선량한 사람이 얼마나 잔혹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마리앤 당신은 몰라.”
앞으로도 모르길 바라고.
마리앤은 흔들리는 눈으로 중년 여성을 바라보았다. 피해자의 어머니라는 여인을.
“쳇.”
낮게 혀를 찬 막심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동의도 구하지 않고, 우악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두 팔을 걷었다. 바르작거리며 반항하던 여인의 소매가 강제로 밀려 올라갔다.
“…….”
그녀의 두 팔은 깨끗했다.
“하.”
막심이 비웃듯 크리스토프를 돌아보았다. 크리스토프의 눈썹이 꿈틀했다. 막심의 입꼬리에 비릿한 미소가 스치는 순간, 주방 쪽에서 사내아이가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일순, 막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의 시선을 쫓아가던 중년 여성이 다급하게 막심의 팔을 붙들었다.
“제가 했어요, 제가……! 제가 실수로 메리를 때렸어요. 메리는 제가 죽였어요!”
날카로운 목소리는 마치 절박한 비명 같았다. 그녀의 외침 뒤에 찾아온 적막은 처음보다 훨씬 더 고요하고 싸늘했다.
막심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공으로 형사 생활을 했던 건 아니다. 7년간 쌓은 촉이 그의 뒷골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이런 경우, 백이면 백 그의 촉이 옳았다.
막심은 자신의 팔을 움켜쥔 여인을 뿌리치고 사내아이를 향해 걸어갔다. 소년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막심의 덩치에 겁을 먹은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가 아무 말 없이 소년의 두 팔을 붙잡았다.
“아악!”
소년이 경기를 일으키듯 비명을 질렀다. 마리앤이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다가갔다.
“막심! 아이가……!”
그러나 막심이 좀 더 빨랐다. 그가 단숨에 소년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
문득, 그녀의 걸음이 멈추었다. 왜소한 팔뚝에 붉은 줄이 두 개 나 있었다. 피가 스멀스멀 배어나는, 선명하게 할퀸 자국이.
털썩.
중년 여성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막심이 소년의 몸을 우악스레 구속했고, 사내아이가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경찰서에서 들읍시다.”
막심이 고압적인 자세로 통보했다. 중년 여성은 슬픔에 젖은 표정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마리앤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소년을 바라보았다.
“으어어! 엄마! 엄마!”
겁에 질려 울부짖는 어린 소년을.
“엄마! 무서워! 안 갈래! 엄마! 으아아아!”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씁쓸함과는 달랐다. 당혹스러움과도 달랐다. 연민은 더욱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씁쓸함과 당혹, 연민이 혼재된 감정이었다.
“마리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크리스토프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크리스토프는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마리앤의 어깨를 끌어안고 싶었다. 자신의 품에 안고서 그녀의 등을 다독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순간,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통감했다.
그는 더 이상 마리앤이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에겐 그녀를 끌어안을 자격이 없었다.
빌어먹을.
크리스토프의 잇새에서 소리 없는 욕설이 흩어졌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다른 놈에게 내어줄 마음은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서늘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며 빈 주먹을 말아쥐었다.
반드시 되찾아와야 했다. 떠나 버린 그녀의 마음을.
***
“저 작자, 당신을 좋아하는 거 아냐?”
그 말에 마리앤의 눈동자가 크리스토프의 시선을 좇아갔다. 그 끝에는 막심이 있었다. 어딘가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막심 프랑케가.
마리앤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잇새에서 언짢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죠? 막심이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거, 당신 눈에는 안 보였나요, 크리스토프?”
마리앤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하는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크리스토프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을 음미하느라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몽상가가 아니었지만, 그것은 꽤 낭만적인 순간이었다. 그녀가 부르는 이름만이 그를 크리스토프로 만들었다.
슈나이더 후작의 후계자가 아닌, 잘나가는 변호사가 아닌, 그냥 크리스토프 슈나이더. 이 감정의 이름이 도대체 무엇일까. 소유욕이라기엔 지나치게 비굴했고, 집착이라기엔 지나치게 달콤했다.